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정순임 지음 / 파람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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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는 ‘남자’가 중요하던 시절, 그 시절 종가집에서 태어난 둘째 딸 정순임. 이 책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이지기 시작했다」의 저자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녀차별, 남아선호사상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자란 그녀다. 지금은 이미 쉰이 넘은 그녀다. 내 엄마와 동시대를 산 사람이다.








난 저자의 딸과 같은 세대를 살았다. 아니 살고 있다. 세대가 다르기에, 저자와 내가 자라온 환경도 분명 다르다. 내가 자란 시대는 그 때보다는 더욱 발전되고, 더욱 살기 편한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 내가 태어나던 그 시대 출산된 남/여 아기 성비가 극악으로 치달았을 정도로, 남자아이를 많이 낳았던 시대다. 분명 저자가 자란 시대와 내가 자란 시대는 분명 ‘세대 차이’가 확연하게 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은 무섭도록 그대로였던 시대다.



내가 어렸을 때 만해도, 당시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족구성원 형태는 ‘엄마, 아빠, 누나, 남동생’ 또는 ‘엄마, 아빠, 오빠, 여동생’ 이런 구성의 4인 가족이었다. 나는 이토록 평범한 4인 가족 구성원 중 ‘누나’, 즉 남동생을 둔 장녀다. 내가 원해서 된 ‘누나’가 아니었다. 남동생이라고는 해도 고작 1살 차이밖에 아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누나’란 나이가 어리든 많든 엄마가 자리를 비웠을 땐 ‘엄마를 대신해야하는 존재’였으며, ‘누나’는 남동생이 뭐라고 하든 양보해야했고, ‘누나’가 잘못이 없어도 ‘누나’라는 이유로 크게 혼이 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누나’는 나이가 어릴지라도, 언제나 어른이어야만 했다. 만약 지금시대에 이렇게 남매를 키운다면? 오은영 박사님이 아주 팔짝 뛸 이야기다. 




나는 자라오면서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을 증오했다. 그만큼 내가 입은 피해가 심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당연한 일이었고, 받아들여야만 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남동생이 어렸을 때 크게 아팠었기에, 더욱 그랬다. 언제나 참는 것은 나여야 했고, 양보하는 것도 나여야 했다. 남매끼리 싸우면 누나라는 이유로 혼났다. 언제나 싸움의 원인은 남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뿐이랴? 남동생은 쉽게 받는 용돈을, 나는 엄마의 일을 도와주어야만 받을 수 있었다(초딩때부터 중딩때까지 엄마와 우유배달을 했으니 말 다했지 뭐). 시골에서는 특히 더했다. 명절이 되면 아주 당연하게 엄마와 큰엄마들 사이에서 나도 음식을 도와야했다. 내 남동생은 삼촌(또는 큰아빠)와 나가서 과자를 먹곤했다. 뿐만인가? 밥상은 남자상 따로 여자상 따로. 



물론 부모님께선 차별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자라오며 일어난 사건들은 내가 받은 차별을 여실히 뒷받침해준다. 그 사건들은 찌들어있는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로 인한 스트레스 받을 대로 받은, 참다가 참다가 결국 폭발해서 일어난 사건들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일으켰던 그 사건들은, 피를 보는 제법 큰 사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나에게 크게 뭐라하지 않았다. 본인들도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내가 왜 그랬는지 잘 알고 계셨으니까. 만약 그 때 마저도 나에게 큰소리를 내셨다면, 아마도 난 생각보다 더 빠른 나이에 그 집을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엄마아빠에게 약한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아이였던 나에게 어른처럼 크길 원했던 분들이었기에. 그래서 그냥 조용히,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하며, 부모님에게는 언제나 대견한 아이로 지내왔다. 오죽하면 우리 부모님이 내 그런 ‘장한 면’을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고, 그게 다시 내 귀에 들렸을까. 실상 이건 부모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자기 자식을 애 어른으로 키운 부모의 아픔이 될 이야기인데 말이다. 물론 각박한 세상에서 두 아이를 먹여살려야 했던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장녀 이자, 남동생의 ‘누나’이기 전에 아이였다는 것을 알아주었음 했을 뿐이다.




그렇게 애어른으로 큰 난, 진정한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 내 스스로도 어딘가 결핍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렇기에, 나를 위해서 결혼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부모님 집을 나왔다. 뭐, 따지고 보면 이십대 중반이 그렇게 이른 나이가 아니기도 하지만, 요즘은 30대에 결혼하는게 기본이니까. 뭐, 여튼! 그렇게 온전하게 내 가족을 꾸렸고, 나름대로 안정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적어도 결혼한 후의 내 삶은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나의 결핍을 알아주는 신랑 덕분에, 이제는 약한소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불행하지는 않았으나, 행복하지도 않았던 어린 날과는 너무나 대비되고 정신적으로도 안정적인 삶이랄까.



무엇보다 나에게는 곧 돌이 될 딸이 있다. 내 딸을 보며 결심한 건, 둘째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둘째가 생긴다면, 귀한 내 딸이 행여나 나처럼 행복하지 않은 ‘누나(또는 언니)’로써의 삶을 살까봐(그렇다고 불행했다는 건 아님), 내 딸이 나처럼 아이가 아이답게 크지 못할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오지라퍼들이 외동이면 아이가 외롭지 않겠느냐? 라고 이야기한다면, 난 이렇게 말하련다.



“저에게도 엄마아들이 하나 있으나, 그저 피만 이어져있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도 오지라퍼들이 몇 마디를 더 얹는다면?



“엄마아들로 인해 제 유년 시절은 그닥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련다.





태어난 이후 ‘아무개 집 딸’이라는 사실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 집에는 한 해하고 5일을 먼저 태어난 오빠가 있었고, 둘째인 것만으로도 당연했던 시절인데 종손인 오빠를 두고 태어난 가시나에게 차별이란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밖에선 귀댁의 영애, 안에선 차별받은 가시나, 이것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전 생애를 관통하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 실체는 그것이었다. p 014



한약 땜에 피부가 검어졌을 리 만무하고 당신 아들 피부가 검어서 아들 닮아 그렇게 태어난 손녀를 유전자 탓을 했어야지 왜 여자 탓을 하셨는지, 지금도 오빠랑 나는 아주 똑 닮았는데 아들인 오빠는 시커멋게 태어나도 이쁘기만 하셨으면서 왜 나한테 그러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 것인지. “니가 시커멓게 태어나서….” 내게 상처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겉으론 그러려니 했으면서 그 말 속 작은 분위기를 예민하게 끌어안은 건 나 자신이었을테니까. 그러나 난 다 자랄때까지 그 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p 031



할아버지가 대구  집에 오실 때 학용품 살 돈을 받곤 했는데. 어느 날 산수 노트를 다 썼다고 보여 드렸는데 “돈 없다” 하시면서 오빠를 보고 씨익 웃으신다. 내가 보는 앞에서 오빠에게 빵하고 우유 사 먹으라고 돈을 주시는 거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오빠가 대문을 나서 나한테 그 돈을 주면서 공책 사라고 했던 기억을 가지고 괜찮다 하며 살았다. 그 일은 할아버지가 너무하신 일로 늘 가족들 속에서 회자되었고, 모두가 웃으면서 하는 옛날 이야기는 내게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다. p 055



부산에서 작은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를 낳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전화를 한 아이들 할머니는 “아들 하나 더 낳아야 되겠다” 한마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 둘째도 딸이라 섭섭했던 우리 엄마도 큰아이 때와는 달리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작은 아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애정 등급제의 최하위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p 085


반독재 투쟁에 함께 했던 그들은 그 한가지 일에 동의한 사람일 뿐 성평등이나 환경문제, 빈부격차, 노동문제 등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것들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게 현실이란 걸 인정해야 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 심심할 새도 없이 터져 나오던 남학생들의 음담패설, 그 정도는 같이 해줘야 안 밀리고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여학생들의 동조. 여자들이 말하는 ‘노(NO)’는 노가 아니라고 낄낄대는 군상들. 청춘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혼돈을 감안하더라도 총체적 문제를 가진 우리 사회의 민낯은 변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징글징글하게 존재 했다. p 077



우리 사회에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반독재 투쟁을 했던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고, 제반 사회 문제를 다양하게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공정과 불공평을 입으로는 말하면서 태생적으로 여성들보다 50보, 100보 앞선 출발점에서 태어나 자신들이 받아온 사회적 이익에는 ‘세상이 원래 그런데 뭐 그런것까지 따지고 드냐’고 슬그머니 편승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차고 넘친다. p 077



어떤 형태든 사회생활을 해본 여성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일어나는 비일비재한 일들을. 술은 할매라도 여자가 따라야 맛이지, 분위기 띄위게 노래 한 곡 해봐라. 직장 생활하는 데 이 정도도 못 맞추면 집에 가서 애나 봐야지. 관습이란 괴물들이 도처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는 것을, 문제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것이 창창한 남자 앞길 망치려고 작정한 미친년이란 타이늘이고, 명백하게 잘못이 드러나도 사내가 그럴 수도 있지, 수없는 숨구멍이 그들에게 산소를 공급한다는 것을. p 102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를 하늘에 여자를 땅에 비유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일단 그럴 수 있다 쳐본다. 하늘은 높이 있고 비를 내리고 태양을 비추고, 땅은 아래에 있고 만물을 품고 길러내고, 모든 생명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근데 그게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었을까. (…) 여성이 위대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순간이 있다. 골몰하고 고통받고 차별받아도 묵묵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여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모성이라고 그것만이 여성이가진 유일한 본능이라고 강조될 때가 바로 그때다. 그런 엄마를 가진 아들들은 세상 거칠것이 없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살았는데 너는 왜 못하냐고 너무도 당연하게 칼날을 꺼내든다. 한량이었던 아버지는, 엄마를 고생만 시키고 자식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당신도 괴로운 것이 있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란 관대함으로 묻힌다. 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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