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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귀신이 되다
전혜진 지음 / 현암사 / 2021년 5월
평점 :
이번에 읽은 「여성, 귀신이 되다」 라는 책, 정말 흥미롭다. 분류를 역사책으로 묶어야 할지, 고전소설로 묶어야할지 약간 애매하긴한데. 일단 성리학적 사상이 바탕이 된 조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러 고전이나 설화, 필기, 야담집을 인용하긴 했으나 결국 조선이라는 역사적인 배경 아래서 기록된 이야기들이니. 역사책으로 분류를 해볼까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으레 알듯 성리학적 사상, 흔히 말하는 유교사상을 토대로 세워진 나라다. 무엇보다 그놈의 유교는 ‘사농공상’을 이야기하며, 학문을 하는 선비를 중요시 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할 부분이있으니, 사농공상의 주체는 바로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우리 모두가 알듯,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가 달리 권리가 없으며 가부장제도 안에서 보호되어야 할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보호’다. 생각보다 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가부장제도 안에서 ‘보호’받지 못했고, 성리학적 사상에 짓밟혀야만 했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권리는 없었고 의무만 있었다는 사실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만 봐도 여성의 존재가 어떤 모습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빗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매체에서 그려진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가부장적 제도안에서 큰 사고 없이 사는 극히 일부의 조선 여성들의 모습만 그려졌으니까. 물론 그 안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남녀차별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그런 매체에서는 그리지 않았던, 조선에서 바라는 ‘정상적인’ 여성상을 살지 못하고 죽은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당대 사대부들이 썼던 필기, 야담집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기서 함정은 필기, 야담집을 쓰고 읽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성리학을 공부하던 선비들, 즉 사대부 남성들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귀신이야기에서, 죽은 사람이 조상이 되는지 원귀가 되는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그 사람이 이승에서 각종 통과의례를 별 탈 없이 거치고 살아왔는지, 얼마나 정상적으로 죽었는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p 015
성리학적 문화권, 유교 문화권에서는 조상, 성현에게 지내는 제사가 참 중요하다. 어느집이든 4대조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고, 조상이 업적을 드높이면 조정에서는 그 조상을 불천지위 대상으로 지정하여,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제사를 받는 대상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사망한 ‘남성’이다. 물론 사망한 여성도 제사를 받기는 한다. 제사를 받는 남성의 배우자이면서, 대를 이을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문제없이 대를 이을경우에 한하여. 즉 조선에서 말하는 각종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친 여성만이 사망후에 제삿밥을 먹을 수 있었단 이야기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상적인 통과의례는 한 가정에 태어난 후, 정상적인 집안에 본처로 시집을 간 뒤, 그 집에서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정상적으로 대를 이었을 경우를 말한다.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귀신들※
어려서 죽은 이들은 부모 가슴에 못 박고 죽은 불효자식이라고, 제사는 고사하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젊은 사람이 결혼하지 못하고 죽으면 강한 원한을 품어 세상에 해코지를 하는 처녀귀신이나 손각시, 몽달귀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들 역시 제대로 묘를 쓰지 못했다. 함부로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뭇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길 한복판에 묻기도 했다. 혼인을 했어도 자식 없이 죽은 사람, 혹은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식 없이 죽은 사람은 누군가의 조상이 될 수 없으니 제사를 받지 못하고, 제사를 받지 못하니 원귀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있다고 해서 모두 조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식은 있으되 아들이 없어도 원귀가 되었고, 집에서 죽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죽은 사람은 객사한 원귀, 소위 객귀가 되어 떠돈다고 믿었다. p 016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귀신들을 위한 의례※
그래서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별도의 의례들을 마련했다. 죽은 사람에게 굳이 양자를 들여 제사를 잇게 하고,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 사후 혼사굿을 했다. 객사한 이들이나 재해로 죽은 이들을 조상으로 안주시키기 위한 굿도 있었다.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결코 조상이 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무속과 불교의 의례를 동원했다. p 016
물론 조선의 남성들도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제삿상을 받지 못했다. 예컨데 단명, 비명횡사, 자손없음 등 말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했더라도, 사망한 그 남성이 좋은 가문 사람이었다거나 종친이었다면 양자를 들여서 제사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죽은 뒤 제삿상 받기가 이렇게나 힘들다.
뭐, 여기까지는 대충 기본 배경이고... 이 책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범죄에 희생되고, 성리학에 또 다시 희생된 우리네 조상, 여성들의 이야기다.
사또, 억울하옵니다.
‘처녀귀신’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야기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아랑설화」와 「장화홍련전」이랄까? 특히 이 두 이야기는 TV드라마나 영화로도 각색될 정도로 유명한 조선시대 처녀귀신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은 방영하지 않지만 꽤 오랫동안 여름마다 안방을 찾았던 TV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도 수많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나왔다. 헌데 그 모든 처녀귀신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분명 서로 다른 처녀귀신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구조가 비슷하달까?
비참하게 죽은 여성이, 죽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원님 앞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원님이 억울함을 풀여주면, 처녀귀신이 말끔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하직인사를 올리며 사라지는 것. 대부분의 처녀귀신 이야기가 이런 플롯을 가지고 있다. 대체 왜그럴까?
「아랑설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전형적인 처녀 귀신 이야기다. 흰 소복에 머리는 길게 풀어헤친 귀신이 바람과 함께, 때로는 찢어지는 듯한 귀곡성과 함께 원님 앞에 나타난다. (…) 아랑 이야기는 이렇게 원님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야기의 전형이 되었다.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잘못된 소문으로 고통받는 것은 가해자의 잘못이지, 피해를 입은 여성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여성들은 이런 억울한 일을 겪고 어디다 호소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과거에만 그랬을까. 현대에도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 사람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돌아다녀서, 외진 곳에 혼자 있어서,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아서 등 범죄의 원인을 손쉽게 여성에게 돌려버린다. p 029
이야기 속에서 여성 원귀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상은 남성 사대부이다. 그 남성 사대부는 대부분 고을의 원님이나 어사나 무변과 같은 사법권을 쥔 관리였다. 피해자는 젊은 여성, 특히 어머니가 없는 젊은 처녀나 기생, 비구니, 여종처럼 약자의 입장에 놓인 이들, 억울함을 직접 말하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특히 아랑처럼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피해 사실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단서만을 주기도 한다. 이런 경우 여성의 이야기는 범행 내용 외에는 흐릿해진다. 이야기는 여성의 억울한 죽음이 아닌, 사대부들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p 032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들은 정말 놀랍게도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대부 남성들이 기록하고 향유했던 이야깃거리였다. 애초에 처녀귀신 이야기들이 실려있는 조선시대 수많은 기록들인 『ㅇㅇ필기』, 『ㅇㅇ야담』 등은 기록하는 주체가 남성 사대부였고, 읽는 사람 역시도 남성 사대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 플롯은 언제나 현명한 원님이 나타나고, 현명한 원님이 처녀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가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들을 더듬어 본다. 대부분의 처녀귀신 이야기에는 희생된 여성들의 억울한 사연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 여성이 범죄에 희생되는 동안, 여성을 보호했어야 할 가부장제도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예컨에 희생된 여성의 아버지의 보호와 책임등을 말이다.
적어도 현존하는 필기, 야담집에 수록된 처녀귀신들의 이야기 속의 그녀들은 가부장제도 안에서 정상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대표적인게 바로 「아랑설화」다. 아랑의 부친은 사대부, 그것도 귄위있는 사대부 밀양부사였다. 하지만 아랑의 부친은 아랑이 사라지자 딸을 잘못 가르쳤다며, 사라진 딸을 찾을 생각도 하지않고, 혹시나 범죄에 희생된 건 아닐까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밀양을 떠나버렸다. 「장화홍련전」은 또 어떠한가. 장화, 홍련의 부친인 배 좌수는 계모의 부추김에 손쉽게 넘어가서 자신의 딸들을 의심하고 죽음에 이르게 방조했다. 처녀귀신 이야기는 아니지만, 「콩쥐팥쥐전」의 콩쥐 부친은 아예 언급도 없다(원전에서는 콩쥐가 일단 자신의 몸을 잃기도 했으니). 어머니를 여읜 여성들에게 유일한 보호막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들은 딸을 보호하지 않았다.
처녀귀신 이야기를 향유하는 사대부 입장에서 이러한 가부장제도의 허점은, 가부장제도를 뒤흔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희생된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택한 것이다. 대신 처녀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현명한 원님에 초점을 맞추어, 사대부라는 존재가 얼마나 학식이 높고, 약자를 못 본체 하지 않으며, 용기가 있고, 완벽하고 유능한 존재라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러니 사실 여성 원귀들의 이야기는, 귀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님의 이야기다. 원님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들을 정상성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을 평화롭게 내쫓은 뒤 현실을 복원하고 가부장적 세계의 평화를 되찾는다. 현실에서 약자들이 받는 억압은 바뀐게 없고, 아버지는 처벌받지 않으며, 권력자인 원님은 명관이 된다. 이 얼마나 체제 수호적이면서도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을까. p 045
어쩌면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왜 희생된 여성들은 귀신의 모습으로 가해자가 아닌 원님을 찾아간걸까?
놀랍게도 이 역시 이런 기록을 남긴게 남성 사대부이기 때문이다. 희생된 여성들 입장에서 가해자는 1차 피해를 입힌 남성 가해자와 자신의 피해를 방관한 남성인 아버지다. 만약 처녀귀신이 가해자들을 찾아간다면, 남성이 우월하고 가부장제도가 당연시되었던 조선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 수 있으며, 동시에 사대부를 드높이는 기록이 남겨질 수 없으므로 당연히 처녀귀신은 원님을 찾아갈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처녀귀신들은 이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존재다. 따라서 성리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녀들은 당연히 아버지 보다 더 위에 있는 아버지. 조선의 만 백성이 섬기는 ‘큰’ 아버지를 찾아갈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만 백성이 섬겨야 할 아버지는 당연히 임금이다. 하지만 한낱 여성이, 그것도 원귀가 된 여성이 지엄한 임금을 찾아갈 순 없으니 임금 대신 마을에 파견된 행정관인 원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성리학적 사상과 사대부를 드높일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원귀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해준 사대부에게 반하지 않는다. 억울함을 밝히고 깨끗하게 다시 매장되고 나면 대부분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들은 간혹 원님이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원님의 목숨을 구해준 처녀」처럼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고, 「이원지와 재상의 딸」처럼 자신의 가족들을 찾아가 현실적인 보답을 받게 하기도 한다. 감사를 표한 뒤에는 더는 미련도 원한도 없다는 듯이 정말로 사라진다. 영명함은 과시하고 싶지만 귀신과 오래 얽히고 싶지는 않았을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편리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p 034
사대부들은 기본적으로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 (…) 하지만 공자가 괴력난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은 죽음과 영혼의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성리학자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문제를 이기론을 이용해 해명하려 했다. 이들은 필기, 야담과 같은 문집에서 자신들의 흥미와 관심 분야를 드러내며 귀신 이야기를 다루었다. 자신들의 흥미를 느끼는 대목들만을 골라서. 필기, 야담의 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대부들은 이상정인 모습에 가깝다. p037
그래서 처녀귀신 이야기의 결말은 언제나 깔끔하다. 가해자들의 처벌에 대한 내용도 없고, 이런 범죄 피해에 대한 재발방지에 대한 내용도 없다. 그저 처녀귀신의 시신을 찾아 곱게 묻어주고, 처녀귀신은 원님께 감사인사를 하고 떠난다.
우리는 이런 처녀귀신 이야기를 단지 조선시대 억압받던 여성들의 이야기로 한정 지을 수 있을까?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21세기인 지금도, 자신의 범죄 피해와 억울함을 밝히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피해를 꼭꼭 숨긴채 오래도록 마음의 병을 키우기도 한다. 그들에게 범죄피해를 밝히는건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왜? 범죄피해를 밝히고 가해자들을 신고한다 한들, 가해자들이 받는 처벌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현대판 나랏님들은 재발방지를 위한 법안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유명무실하기 그지없다.
처녀귀신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선 성종 대 어우동과 그녀와 만났던 수 많은 남자들의 처벌을 돌이켜보자. 어우동이 우리가 아는 어우동이 되기 이전에, 그녀는 남편이 있는 부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가 좋다며 어우동을 버렸다. 조선 초기까지는 고려의 영향으로 여성의 자율성이 어느정도 있었기에, 어우동은 이혼을 원하였지만, 당시 왕이었던 성종은 그녀의 이혼을 금지시켰다. 왜? 성종은 그의 모친 인수대비와 함께 조선에 남녀가 유별하다는 성리학을 완벽하게 뿌리내리고자 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아는 어우동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어우동, 어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처벌수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우동은 사형된 반면, 그녀와 간통한 수 많은 남자들은 한마디로 무죄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들. 피해자들 보호는 여전히 잘 되지 않고, 가해자들의 처벌 수위는 여전히 낮다.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우리는 정말 처녀귀신 이야기를 조선시대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안채도, 규방도 안식처는 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조선의 일처다부제 속에서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 명의 부인을 맞았다. 납채, 문명, 납길, 납폐, 청기, 친영의 여섯 절차인 육례를 치르고 어엿하게 맞이한 부인의 소생의 가무의 대를 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첩을 들였다. 부인은 맞는다면, 첩은 들이는 것이었다. 예물 대신 예전 명목으로 첩의 친정에 돈을 보내기는 했으나, 부인을 맞을 때처럼 정성스레 육례를 갖추지는 않았다. 자신이 정실이고, 자신의 자식이 가문의 대를 이을 것이라 하나, 남편의 사랑을 다른 여성에게 빼앗긴 부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첩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을 낳아봤자 서자에 불과하고, 평생 부인의 위세에 눌려 있어야 하는데다, 대게는 친정도 부인의 친정보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하니 난편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그들이 서로 갈등하고 때로는 미워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사대부는 제 정욕 때문에, 혹은 본가를 떠나 한성에서 지낼 때 제 수발을 들 사람이 필요해서 첩을 들이지만, 그 뒤에 벌어지는 가정에서의 갈등은 책임지지 않았다. 고통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p 150
조선의 사대부는 공식적으로 1명의 부인과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말이다. 사대부들이 여러 여자를 취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사대부들은 자기들의 욕정, 또는 필요로 인해 첩을 두었으나 그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문제들에는 눈을 돌렸다. 대신 그 문제들을 일명 ‘처첩갈등’, 그저 ‘여자’들의 문제라 타자화하며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득옥 이야기는 『성호사설』을 비롯해, 『해동기화』, 『이순록』, 『국당배어』, 『기문총화』, 『풍암집화』 등 여러 필기, 야담집에 실려있다. 경신환국이라는 사건과 대군 가문의 몰락을 배경으로, 사대부 가문에서 벌어지는 축첩 문제와 처첩간의 갈등, 여성들의 질투와 증오라는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틀은 간단하다. 인평대군이 득옥이라는 기녀 출신의 첩을 들였고, 인평대군 부인이 투기해 득옥을 죽였는데, 득옥의 원귀가 집안을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p 153
사대부들은 외려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고 향유하면서, ‘여성’ 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왜곡된 시선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뿌리깊게 조선 오백년간 뿌리깊게 내려진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기백년이 흐른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다(예컨데 성범죄범이나, 가정폭력범이라던가?).
「강생의 전처와 후처」 이야기를 읽으면 필기, 야담이 어디까지나 남성 사대부가 기록한 글이라는 한계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젊고 건강한 후처의 몸에 성품이 어질고 부지런한 전처의 영혼을 집어넣는다는 발상부터가 지독하게 남성 중심적이다. 그런데다 후처가 왜 사나울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살림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비겁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다. 후처는 첩이 아니다. 전처가 죽은 다음 다시 정식으로 혼인한 부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후처를 전처보다 낮잡아 보았고, 첩으로 오해하는 일도 잦았다. p 159
「귀신이 지은 시를 알아본 김정국」 이야기는 첩이 시가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불안정한 신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글공부가 부족하고 풍류를 좇던 송생이 재주 많은 여성을 만나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들, 그 공은 송생의 공일 뿐이다. 여성은 함부로 재주를 내비치니 겸손하지 못하고 요망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현실이었다. 송생의 첩은 귀신이었던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재주 많은 여성을 핍박해 끝내 죽음으로 몰아 낙수의 물귀신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p 165
「일월당 황씨부인 유래」에서는 가난한 집안에 시집 와 아홉 번이나 출산을 한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모질게 시집살이를 시키고 괴롭힌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특히 젖먹이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날 만큼 심한 학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황씨 부인의 서글픈 인생은 시집살이로 고통받던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황씨부인당에는 따로 제사를 지내는 날이 없다. 대신 여성들이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 재수가 없을 때 찾아와 촛불을 켜고 쌀과 과일을 두고 치성을 드리곤 한다. 구박받던 황씨 부인은 그렇게 이 지역 여성들의 수호신이요, 토지신으로 좌정했다. 그 모든 서러움과 슬픔을 담은채로. p 171
시집을 간 여성들에게 처첩갈등만 있을까? 본처와 후처에 대한 이야기, 시집살이 문제도 고스란히 그녀들의 몫이었다. 후처 자리에 들어간 여성은 이미 죽은 본처와 비교를 당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본처의 자식들이 대를 잇는다면, 후처의 입지는 더더욱 작아질 수 밖에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선의 악명높은 시집살이도 문제였다. 조선 초기까지만해도 고려의 영향을 받아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를 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성종대 이후부터 강력한 ‘유교사상’ 확산으로 여자가 남자집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렇게 여성들의 고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시집간 여성들이 이 모든 일을 겪는동안 많은 사대부 남성들은 무엇을 했을까? 자신의 배우자가 겪는 어려움을 그저 강 건너 물 보듯 했다.
위의 「귀신이 지은 시를 알아본 김정국」의 일화는 그저 첩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으니, 바로 초당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이다. 초당 허엽만 봐도 알 수 있듯 허난설헌은 유력 명문가의 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다른 형제들처럼 시/서화에 재능이 있었다. 심지어 부친인 허엽도 그녀의 재능을 아꼈다. 하지만 그녀가 시집을 간 뒤, 그 재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독이 되고 말았다. 허난설헌의 남편은 그녀의 재능을 시기했으며, 같은 이유로 시댁 어른들 역시 그녀를 어여삐 보지 않았다. 거기다 자녀들도 일찍 죽어버리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허난설헌은 결국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만다. 당시 유력한 명문가의 딸이었던 허난설헌의 일생도 이러했는데, 한미한 집안의 재능있는 여성들은 삶은 어땠을까? 신사임당의 가족같은, 유니콘 같은 친정/시댁을 만나지 않고서야, 재능있는 여성이 조선에서 행복하게 살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처/첩 이를 것 없이 재능있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의 핍박을 받는게 바로 조선의 여성들이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신사임당은 친정/시댁이 모두 유니콘(?) 같았기에 그녀의 재능이 꽃피웠고, 지금도 신사임당의 그림들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명한 아들(율곡 이이)을 둔 덕이 크다. 한마디로 신사임당은 재능있는 여성으로써 이름이 알려진게 아니라, 천재적인 아들 율곡 이이을 키워낸 현모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결국 재능있는 여성이 좋은 가족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자식을 잘 둬야 그나마 후세에 작품 및 당호라도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비극적이게 삶을 마감한 허난설헌의 경우, 동생인 허균 덕택에 작품과 당호 및 이름 ‘허초희’가 알려질 수 있었던것이고.
왜 조선은 이토록 여성을 억압할 수 밖에 없었을까? 유교/성리학을 창조한 공자, 맹자는 진실로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을까? 현자로 일컬어지는 공자, 맹자가 여성을 억압하라고 말하진 않았을텐데.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의 여성을 옭아매던 ‘칠거지악’은 공자의 제자들이 집필한 『공자가어』에 실려있다. 물론 당시 칠거지악이란, 적어도 공맹과 그들의 제자들은 정상적인 며느리와 정상적인 시댁을 떠올리며 남긴 공맹의 자산이었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그 성질이 비틀어지고, 조선의 여성들을 그토록 옭아메는 악법이 되었을뿐.
칠거지악 그리고 삼불거, 내훈
그렇게 조선에서는 ‘칠거지악’과 더불어, 인수대비가 집필한 ‘내훈’을 들이밀며 조선의 여성들을 옭아메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들에게 방패가 되는 ‘삼불거’라는 규범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남성 사대부들은 이 삼불거조차도 교묘하게 비틀어버렸기에, 실제로 삼불거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조선의 보조 법전인 『대명률』에 기록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 ‘칠거지악’.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음행을 저지르거나
남편이 사랑하는 다른 여자를 질투하고
치료가 되지 않거나 자손에 유전되는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할 경우
여기서 (7)도둑질은 범죄이고 지금도 이혼 사유가 되기에 이해가 되는 사유이다. 하지만 그 외의 사유들은 여성들에겐 너무나 불공평한 사유가 된다. 특히나 (5) 음행의 경우 역시나 지금도 이혼 사유이나, 당대 조선에서는 남성은 첩을 두고 기생방을 가기도 했다. 즉 남성은 합법이나, 여성은 불법이라는 이중잣대란 이야기. (4)투기도 (5)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남성의 일처다부제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1)과 (6)의 정상적인 해석은 시부모에게 잘하라는 이야기인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 시부모가 시집살이를 시켜도 복종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시집살이를 할 때는 눈 감고 삼 년, 귀 막고 삼 년, 입을 막고 삼 년 지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볼 수 있다. (2) 아들을 낳지 못하고는 요즘 시대에서는 당연히 씨를 잘못 준 남성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여자탓을 하는 시부모가 있으니 뭐. (5)도 (2)의 아들을 낳는 것에 대한 연장선이다. 건강한 아들을 낳기 위하여 있는 조항이다. 남성에게 유전병이 있는건 침묵하되, 여성에게 유전병이 있는건 있을 수 없는 조선이었다.
한마디로 조선 사대부들이 생각한 칠거지악은 조악한(!) 시부모를 만나더라도 침묵하고 효성을 다해야하며, 남편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침묵하고 남편을 사랑해야하며, 남편에게 유전병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건강한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게 해야한다는, 시가의 화목과 안정/평화를 위해야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이 칠거지악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조선의 여성들은 이혼을 당했다.
물론 여성에게도 원치않는 이혼을 막을 수 있는 방패, ‘삼불거’ 라는 규범이 있었다.
아내가 의지할 곳이 없거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뤘거나
혼인할 때는 가난했다가 나중에 부자가 된 경우
언뜻 보기에는 불합리하게 규정된 칠거지악에 대항하는 규범이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삼불거 조차도 혼인한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은 ‘불량한’ 부인까지 삼불거 규범을 허용하면, 사회적으로 불미한 결과를 남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인이 아무리 삼불거를 들이밀어도, 사대부가 부인을 ‘불량한 처’라고 매도하면 여성은 이혼을 막을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 왕실에서더 ‘내훈’이라는 규범을 집필하여, 조선의 여성들을 옭아매는 데 박차를 가했다.
<내훈>
-제1장 언행에서는 부녀자가 말과 행실에서 주의할 점 및 준수사항을 서술하였다. 현모양처의 교육적 인간상을 그리면서 부덕(婦德)·부언(婦言)·부용(婦容)·부공(婦功)의 여유사행(女有四行)이 있음을 밝혔다.
-제2장 효친은 어버이에 대한 올바른 효도방법이 무엇인가를 밝혔다. 친가의 부모뿐 아니라 시가 부모를 모시는 법, 부모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의 효도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제3장 혼례는 혼인의 예절을 밝힌 부분으로, 혼례의 뜻과 혼수감에 대한 기본자세, 혼인 뒤의 마음가짐 등을 설명하였다.
-제4장 부부는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부분으로, 부부의 도를 음양의 이치로써 설명하고, 남편에 대한 예의와 마음가짐 등을 정의한 뒤 역사적인 사실을 특별히 많이 인용하여 아내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제5장 모의는 어머니로서의 예의범절을 밝힌 부분이다. 유모의 선택에서부터 자식의 연령에 따른 교육방법, 시어머니로서의 마음가짐과 며느리에 대한 교육 등을 설명하였다.
-제6장 돈목은 정애(情愛)와 화목에 대한 것으로서 동서 또는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을 밝혔다.
-제7장 염검은 청렴과 검소의 정신으로 어떻게 생활하고 손님을 대접하며, 관직에 있는 남편을 어떻게 보필할 것인가 등을 밝히고 있다.
옛날엔 남존여비가 당연했어,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어. 현재의 가치관으로 파악하지 마.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이전, 고려는 달랐다. 물론 고려에서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그 위치가 높기는 했으나, 적어도 고려의 여성들은 조선의 여성에 비하면 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 이전 시대로 올라가면 더 자유로웠고. 그래도 남존여비가 당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점은 지금이 21세기라는 점이다. 아주 뚜렷하게 남녀차별이 사라지고 있다. 완벽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큰’ 불편함은 없을 정도로 사라졌다. 부디 내 딸이 장성해서, 스스로 삶을 영유하는 시대에는 작은 불편함 조차도 사라진 세상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