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을 했을 때 그 속에 아줌마들도 있었다. 사실 아줌마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외모에 운동을 많이 해서 배에 11자 복근이 있을 정도다. 게다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나보다 훨씬 동생들이다. 그래서 "나 결혼하고 아이가 둘 있는 아줌마예요"라고 하지 않는 이상 아줌마라고는 전혀 알 수 없는 회원들이 있었다. 독서모임의 주최자는 나니까 나도 뭔가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보통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을 열거해서 이야기를 한다. 주로 시인 백석 이야기나 윤동주의 이야기나 저 먼 나라의 보들레르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주절주절 했다.


백석은 자야를 만났을 때 가장 찬란한 시들이 탄생했다. 나타샤부터 흰 바람벽이 있어 같은 시는 온통 자야에 대한 이야기다. 백석이 가장 좋아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역시 12살 많은 루 살로메를 사랑했을 때 가장 찬란한 시가 나왔다. 릴케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이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목숨을 걸었다. 일명 루(미 비포 유의 루가 아니다)에게 목을 매는 남자들이 많았다. 니체와 프로이트도 루의 남자들이었다. 루는 자신의 처녀성을 바친 사람은 아버지뻘의 교회 목사였다. 그 사람이 루의 재능을 눈치챈 사람이었다.


루 살로메라는 영화로도 있다. 당대의 지성인 남자들과의 염문도 볼 수 있다. 단테 역시 베아트리체를 사랑할 때 최고의 글들이 나왔고, 보들레르도 흑백 혼혈 잔 뒤발을 사랑했을 때 최고의 시가 나왔다.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은 당시에 프랑스 정부에서 금지시켰다. 판매를 하지 못하게 했다. 죄악, 탐욕, 어리석음의 인간 군상을 표현했는데 사람들이 열광하다시피 했다. 아무튼 보들레르의 시는 지금도 문학도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이기도 하다.


어떻든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독서모임에서 하면 사람들은 재미있어했다. 아줌마 회원이(라고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고) 글을 잘 쓰려면, 문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하지만 나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을뿐더러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인문계 고교를 나왔지만 거기서 사진부 활동만 하다가 졸업을 했다. 그리고 건축을 전공했다. 어떤 식으로 보면 나는 자연계 쪽이지만 건축에 대해서는 기둥도 모른다. 그런데 또 소설을 좋아해서 한때는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끼인 존재 같은 인간이다. 그러니 내가 글을 잘 쓴다던가, 문학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알 수는 없다. 이런 걸 알려면 작가들의 강연을 듣거나 그들의 서적을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쩌다가 소설에 빠져서 소설을 읽고 또 읽다 보니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이 너무 없고 유명 작가들에게 빠져 있지 않는 이상 쉽게 그들의 콘텐츠를 소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독서모임을 조촐하게 하며 우리끼리 어떤 응어리 같은 것을 풀었다. 문학이라는 게 사실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마도 문학이라는 건 계란찜처럼 별거 아니게 너무나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이지 싶다.


계란찜, 계란찜이라는, 이거 먹고 싶으면 언제나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다. 그저 물만 넣고 휘휘 저어서 폴폴 삶아 시간만 되면 맛있는 계란찜을 맛볼 수 있다. 계란찜이라는 건 묘해서 특별히 맛있는 계란찜은 있지만 딱히 맛이 없는 계란찜은 없다. 식어도 맛있는 것 같다. 문학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특별하게 좋은 문학은 있지만 딱히 안 좋은 문학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좋지 않다고 느낀 문학이라는 건 문학을 읽은 후니까 그것대로 아 이런 건 좋지 못하구나, 라며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문학은 접하지 말아야지 하는 경험이 생긴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모르지만 글이라는 건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글이라는 형태는 일단 우리가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글이라는 건 어딘가에 쓰여야 하고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일단 공책이든, 노트북이든 쓰면 된다. 무슨 글?라고 묻는다면 나의 글, 자신의 글을 쓰면 된다. 여기서 자신의 글이라 해서 나 자신의 글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글도 자신의 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글이 쓰고 싶을 때 내 아이의 얼굴을 글로 써보면 재미있다. 웃을 때 이런 모습이 되는구나, 여기에 점이 있었네, 잠을 잘 때 내 아이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같은 모습이 떠오르며 다 적고 나면 몹시 재미있다. 아무래도 글은 재미있게 적으면 좋겠지. 내 아이의 모습을 글로 적다 보면 글이 순식간에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다 쓰고 난 글을 보면 또 미소가 지어진다.


그럼 이제는 내 엄마의 얼굴을 한 번 써본다. 하지만 내 아이의 모습을 적을 때처럼 수월하게 적히지는 않을 것이다. 도대체 주름이 몇 개가 있는지, 짐꾸러미처럼 잠을 든 모습에서, 갈라진 발 뒤꿈치에서 나는 어떤 무엇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내 엄마의 모습을 내가 곧 답습하게 된다. 내가 내 엄마 품에서 벗어나 내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듯이 내 아이도 나를 벗어나 자신의 울타리 속으로 갈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별거 없다. 별거 아이야. 계란찜과 같은 것이다. 늘 곁에 있지만 관심 가지지 않으면 잘 모르는, 늘 접하지만 손을 뻗지 않으면 촉감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재미있게 본 오징어 게임이나 듄 같은 영화의 기초는 시나리오다. 문학이다. 거기서 시작한다. 매일매일 듣는 노래는 가사에 음을 붙은 것이다. 가사는 바로 시다. 역시 문학이다.


문학, 즉 예술이라는 게 우리가 밥을 먹고사는 생활에 불필요할지 모른다. 없어도 무관하다. 하지만 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를 서로에게 이어준다. 문학과 예술이 발전한 나라는 대체로 몹시 선진국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계란찜은 참 별거 아니어서 별거다. 계란찜과 문학 그거 뭐 별거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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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1-03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교관 2021-11-04 12: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좋은 하루 되셔요!
 

내가 학창 시절에 다운타운에는 음악감상실에 두 곳이 있었다. 한 곳은 규모가 꽤 되고, 지방의 라디오 디제이들이 돌아가면서 음악을 틀어주는 곳으로 주로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조지 마이클 같은 세계적인 팝 가수들의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틀어주었다. 비교적으로 맨트와 음악적 소개가 전문적이었고 떠들썩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곳에 가면 뮤직비디오를 영화관처럼 큰 대형 화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에어로 스미스의 ‘겟 어 그립‘ 앨범의 곡들 뮤직비디오를 볼 때면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쌍벽을 이루었던 건스 앤 로지스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우리끼리는 누구의 뮤직비디오가 더 좋은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에어로 스미스의 '겟 어 그립'의 앨범 뮤직비디오는 모든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이어진다. 그래서 영화와 비슷했다. 아니 영화였다. 뮤직비디오 속에는 주인공 알라시아 실버스톤이 나온다. 당시 최고의 하이틴 인기 배우였다. 그리고 리브 타일러도 나온다. 근래에는 리브 타일러는 꾸준하게 활동을 하지만 알라시아 실버스톤은 인스타그램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리브 타일러는 에어로 스미스의 스티브 타일러의 딸인데, 리브 타일러가 훌쩍 큰 다음 티브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세계 최고의 록스타가 자신과 너무 닮아서 찾아가서 따져 묻고 이런저런 우당탕탕 해보니 스티브 타일러의 딸이 맞더라, 그래서 그 후로 스티브 타일러는 리브 타일러의 길을 열어 주었다? 같은 이야기를 음악 감상실의 디제이 입을 통해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디제이들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왔다.

 

미국 록 스타들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머틀리 크루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더 디트’를 보면 당시 미국 록그룹 들은 미국 투어만으로 1년에 100회 이상 공연을 한다. 세계를 돌면 엄청난 공연을 하는데 그들의 공연하는 스타일이 밤 10시에 공연해서 새벽 2시까지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고 3시부터 광란의 술 파티다. 그 속에는 여자 팬들도 있고 난장판이다. 누가 누구와 자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눈 뜨면 오후 5시 정도. 그리고 밥 좀 먹고 밤 10시가 되면 또 미친 듯이 공연을 하고 새벽에 광란의 약과 술 파티를 한다. 그들의 피지컬은 한창 20대 초반이며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체격과 체력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너의 자식이 저기 어디, 막 브라질 같은 곳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근래에는 록 스타뿐 아니라 호날두 녀석의 아들도 그렇게 얻었다.


그리고 또 한 군데가 중앙시장에 있는 한 군데 음악 감상실이다. 이곳은 경남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디제이도 전문적인 디제이들이 하지 않고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좀 좋아하는 녀석들이 돌아가면서 했다. 그러다 보니 더 재미있었다. 엉망진창이지만 시끌벅적했고 난장판 같았지만 우리는 그곳을 거의 집처럼 들락거렸다.


그곳은 보통의 음악이나 록에서 벗어난 음악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데쓰 메틀이라든가, 요컨대 바쏘리의 음악이나 판테라, 알파타우루스 같은 깊이가 꽤 되고 기기묘묘한 록들을 들을 수 있었다. 거기서 알게 된 뮤지션이 히데였다. 묘하지만 히데의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게 되는데 얼굴도 모르고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히데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어떤 연대가 느껴졌다.


히데는 나방 같았다.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들어 오늘 타버리고 나면 더 이상 미련도 없을 것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에 어딘가 폭발해버릴 것 같은 마음을 대변해주기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히데는 액스재팬의 기타였고 더불어 액스재팬의 음악도 그곳이 아니면 들을 수 없었다. 히데의 노래를 들으면 뭔가 마음 저 밑에서 두구두구두구 하며 드럼을 치며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듣게 된 히데의 음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히데의 음악, 히데의 스타일, 히데의 개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아직 히데는 여기 현실에 어떤 끈을 남겨두어 우리가 그 끈을 잡을 수 있게 한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일본에서는 히데의 유전자를 이어받으려는 노력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의 음악이나 그의 개성 같은 것들. 음악적으로는 일본의 어떤 그룹이나 가수가 히데의 유전자를 이어가는지 모르겠지만 히데의 얼굴은 일본의 배우 나리야마 히로키가 닮았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흡사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히데와 얼굴이 가장 닮은 사람은 슈주의 김희철이다. 김희철은 아직까지도 소년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메이크업을 한다면 히데의 얼굴과 거의 같아진다. 또 스타일과 목소리(긁어서 내는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이런 목소리는 20대까지 밖에 하지 못한다)는 지드래곤이 아주 닮았다. 지드래곤의 탁월한 스타일을 보면 자연스럽게 히데가 떠오른다. 지드래곤은 이대로 60까지 나이가 들면 아마도 데이빗 보위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음악적으로 닮은 유전자는 서태지다. 액스재팬의 베이스였던 타이지의 기타가 현재 서태지에게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진실인지는 모른다. 그만큼 서태지가 정현철이었던 시절 액스재팬의 스타일을 동경했을 것이다. 시나위 4집 활동 당시 김종서와 함께 베이스로 서태지가 있었는데 흡사 액스재팬의 이미지가 있다.

 

가수라는 건 노래를 잘 불러야 하지만 노래만 잘 불러서는 슈퍼스타는 될 수 없다. 가창력? 기타 연주? 물론 중요하지만 자기만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 히데의 여러 노래 중에 다우트라는 노래가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알겠지만 이게 20년이 넘은 스타일이라고? 그렇게나 된 노래라고?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 강력한 해비 메틀은 서태지의 탱크를 들어보면 이 강력함이 서태지의 버전으로 또 나타나는 것 같다. 뭐 이건 물론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밑으로는 내가 그려본 히데의 그림과 다우트 뮤직비디오를 올려본다.


https://youtu.be/2fv812v6TQ4

이렇게 목을 긁어서 내는 소리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30대를 넘어가면 이런 목소리가 대부분 사라진다. 본 조비도 이런 목소리였다가 이제 나이가 들면서 이런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록그룹이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아직도 매력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서태지와 지드래곤이다. 하지만 한계가 온다. 사람이니까. 그때까지는 실컷 듣자라는 주의다.


히데의 큐포스켓


두근거리는 거야. 굉장히 두근거렸지. 보들레르에 취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어. 다른 노래도 그렇지만 말이야 다우트를 부를 때 히데는 뭐랄까 카타스트로프적인 섹시함을 지니고 있어. 마치 양의 하얀 뇌로 만든 카레를 떠먹는 기분이 드는 거지


류가 그랬어. 양의 뇌로 만든 카레는 입과 혀와 목을 자극하면서 매끄럽게 내려가서 내장 전체를 뜨겁게 달군다고 말이야. 그리고 위장에 가서야 서늘하게 느껴지지. 아주 사치스런 불쾌함 말이야. 히데의 다우트는 마치 그래. 그런 느낌이라구. 두근거리게 만들어


아주 두근거렸어. 히데의 다우트를 듣는다는 건 말이야. 첫 시작부터 데커던스적이지. 히데는 섹시해 섹시해.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섹시해. 그런 속살이 아니야. 날에 베이면 벌어지는 살갗의 속살에 빠져드는 거야.  벌어진 살 속에 농염하게 숨어있는 붉은 형질의 표피와 세포 말이야. 농축된 섹시함을 히데는 다우트를 부르며 물처럼 흘려버려


히데스라는 토플리스 바에 가면 바의 상단에서 히데의 다우트가 퇴폐적으로 나왔어. 그곳에 오는 손님 중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는 여자도 있고 혀에 피어스를 24개 한 게이도 있어. 그리고 혈액과 골수 소스 위에 놓은 터키를 좋아하는 50살의 남자도 있어. 채찍으로 너무 맞아서 옷이 맞지 않아 항상 큰 사이즈의 옷을 입고 오는 외국인도 있어. 모두가 히데의 다우트를 들으며 데쳐진 시금치처럼 몸을 흔들어


자기혐오의 젤리 피시와 머릿속에서 소리치는 쌍둥이와 산산조각 나버린 카오스를 목에 쑤셔 넣으라고 히데는 노래를 불러. 다우트 다우트. 두근거릴 수밖에 없어.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서태지의 테이크 시리즈와 탱크에서 다우트의 오마주를 느꼈더랬지


97년까지 퇴폐적 섹시함으로 무장을 하고 다우트를 불렀어. 5월에 카오스로 가버리다니. 살이 부러지고 뼈가 줄어드는 기분이야. 너무 크게 틀었나 봐. 옆에서 욕을 하네. 히데는 어딘가를 향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다우트라고 크게 소리를 질러  


- 히데의 다우트를 듣고 든 기분을 적었다. 히데에게는 퇴폐미라는 것이 있다.


이제부터는 허리 고 라운드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히데의 다큐영화다. 일본의 20대 청년의 배우가 히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히데를 추억한다. 그러면서 히데가 죽기 직전까지 히데와 관계한 사람들이 등장해서 히데와의 일화를 회상한다.


히데의 다큐는 거의 다 봐서 이거 뭐 별거 있을까 싶지만 팬심으로 보다 보면 또, 늘 그렇듯이 마지막에 가면 영화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과 비슷한 감정에 휩싸인다.


이 영화는 히데가 죽은 지 20년이 되던 해, 2018년에 제작이 되었고 일본의 청년 배우 야모토 유마라는 녀석이 히데의 자취를 따라 과거로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허리 고 라운드는 히데의 마지막 노래이며 가사가 묘비에 새겨져 있다. 야모토는 히데가 활동할 당시 욕 들어가며 일을 배우던 히데의 로드 매니저인 히데의 동생(현 히데 소속사 대표)을 찾아가 히데가 엘에이에 머물며 음악 작업을 했던 곳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서 히데가 다녔던 거리를 현재의 야모토가 걸어간다. 그런 장면에 교차 편집되어서 나온다.


핑크 스파이더를 촬영했던 골목을 찾아가서 회상을 하다가 그 골목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히데가 다니며 남긴 끈을 찾아서 추억여행을 한다.


히데의 이전 다큐들을 보면 히데가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엘에이에서 음악 작업을 하며 술을 마시고 지내는 모습이 가득하지만 이 다큐는 교차편집으로 과거와 현재를 히데의 끈으로 이어준다.


히데가 좋아하던 바 ‘랠리’에 다시 모여 히데가 죽기 전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은 정말 옆에서 히데에 대해서 조근조근 말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마지막에 가면 야모토에게 한 통의 메일이 오고 거기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히데의 허리 고 라운드의 오리지널과 다른 버전이 들어있다. 20년 동안 누구도 듣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노래, 히데의 목소리로 부르는 다른 버전의 허리 고 라운드를 팬들에게 들려주라며 끝이 난다, 그리고 그 노래가 나온다.


히데를 좋아한다면 볼만한 다큐영화 ‘허리 고 라운드’였다. 가사의 말미에는 봄에 다시 만나요, 봄에 만나요, 봄에 만나요.라는 후렴구가 있는데 봄이 되면, 5월이 되면 히데를 다시 만나게 된다.https://youtu.be/mwriPOK3Tw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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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에 겨울이불을 빨아서 널어놓고 이불의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어항 속의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계속 보게 된다. 이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마당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모습이 꽤 재미있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두꺼운 솜이불은 흠뻑 젖어서 무거웠고, 그 몸을 지탱하는 빨랫줄은 아슬아슬하지만 용케도 이불을 받치고 있었다. 빨랫줄은 그런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얇지만 튼튼한 빨랫줄을 신뢰했고 빨랫줄은 긴 시간 온갖 빨래의 무게를 잘 견뎠다. 나는 마당에 앉아 물이 뚝뚝 떨어져 마당 위에 떨어진 물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마도 꿈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았기에 그토록 심도 있게 이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속의 나는 이불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방울과 함께 마당으로 슬쩍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표백제로 깨끗하게 닦아버려 물이 다 빠진 마당의 차가운 온도에 나는 물방울과 함께 떨어져 말라 없어지는 꿈을 꾸었다. 이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에서 융해되는 내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다.


마당의 한쪽에는 화단이 있었다. 화단에는 무화과나무도 있고 내가 심어 놓은 포도나무가 올곧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자라서 거짓말처럼 철이면 몇 송이 열렸다. 생긴 건 포도라는 것을 알겠지만 맛에서는 멀어진 포도였다. 약을 뿌리거나 하지 않았기에 포도는 맛이라는 것이 빠져나가버린 포도였다. 어쩌면 포도는 원래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화단의 여러 나무들 틈바구니 속에서 적은 양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이지만 신기하게도 포도가 열렸다. 그런 포도나무도 겨울을 나고 있었다.


마당에 강아지가 있었다. 개를 자본주의보다 더 싫어했던 아버지는 개가 새끼를 낳으니 직접 수프를 끓여서 일일이 먹이곤 했다. 새끼들이 수프를 잘 먹을 수 있게 무엇을 만드는 일은 온통 아버지가 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일찍 귀가했기에 왜 그러나하고 보니 강아지들에게 먹일 고기를 준비하느라 그랬다. 덕분에 무럭무럭 자란 강아지들은 마당에 앉아 있으면 내 옆에 자석처럼 와서 붙었다. 꼬물꼬물 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한없이 귀엽게 보였다.


1월의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날이면 나는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하 인간을 읽었다. 처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서 행방불명이 된 아버지를 찾는 스탠리 브로더스트와 친아버지를 찾아 나선 여대생 수전. 이들과 함께 산장으로 간 아들 로니를 찾아달라는 진의 의뢰를 받은 사립탐정 루 아처. 루 아처의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 ‘지하 인간’이다.


지하 인간을 읽으며 이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가끔씩 쳐다봤다. 우리 집 개, 깜순이가 옆으로 와서 엎드리면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면 깜순이는 나의 손길이 마냥 좋은 듯, 그 검고 윤기 나는 털을 햇빛과 나의 손에 내어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졸음에 겨워한다. 깜순이의 새끼들은 배가 불러 서로 앙증맞게 굴러다니고 있다.


이불빨래를 너는 따뜻한 겨울의 일요일이면 마당에 앉아서 고민 없이 한두 시간씩 책을 읽었다. 불안도 없고 생각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공포와 두려움도 크지 않았다. 지금은 아버지도, 깜순이도, 마당도 전부 소멸해 버렸다. 그때의 그 마당은 오로지 차가운 공기의 냄새와 입자, 그걸 덮어줄 따뜻한 햇살의 기운이 가득했던 마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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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빵과 맹신


나는 빵돌이라 빵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는 단팥빵을 많이 좋아하는데 어린이 때에도 단팥빵을 좋아했다. 단팥빵이 맛있는 빵집은 대체로 모든 빵이 맛있는 거 같고, 단팥빵은 그 모양이나 형태가 변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빵을 맹신하다 보면 몸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적당하게 먹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란 좋아하는 걸 모두 다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살면서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릴 때는 엄마와 아빠가 그 대부분의 대상이며, 이성에 눈을 뜨면 그와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직장에서는 당연하지만 나의 사수, 나의 직속 선배가 회사 내에서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를 이끌어주는 것만으로도 이 험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이 아닌 것에도 믿음이라는 묘한 풍족한 감성으로 대하며 기대게 된다. 요컨대 나 같은 경우는 ‘시’에 많이 기대는 편이다. 소설이나 시에 힘들 때에는 기대게 된다. 시에 뭐가 있기에 왜 기대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시는 꽤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치가 그렇다. 정치는 특정한 형태가 없으니 정치인이 정치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고 주로 정치인을 맹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치라는 건 아주 기기묘묘해서 내가 믿는 정치인이 어떤 저속한 잘못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면 비슷한 정치이념을 가진 다른 정치인을 믿으면 되는데 인간은 그게 안 된다. 그만 정치와 정치인을 동일시해서 내가 믿는 정치인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거나 내가 믿는 정치인은 그럴 리 없다며 경주마처럼 그저 앞으로 돌격만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에 우리는 집착을 한다. ‘신’을 믿게 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만 시간이 흐르면 믿는 종교에 폭 빠져서 맹신하게 되고 그에 따른 이해관계에 얽히다 보면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하기도 한다. 요컨대 95년 일본의 옴진리교의 사린가스 사건을 보더라도 그렇다. 사린 가스는 걸프전 이후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제조를 금지했다.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린 가스를 종교라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제조하고 뿌린 신도들은 일본에서 상위층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학창 시절에 늘 1등을 차지하며 어른들, 친구들이 모두 우러러보던 엘리트들이 사회로 나가서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것 같았는데, 이 세계라는 것이 내 생각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 같은 일류 엘리트가 하나의 점 같은 존재하는 것에 환멸을 느낀 마음을 뚫고 옴진리교가 파고든다. 네가 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 네가 이 세계를 뒤집어야 한다, 너처럼 엘리트가 존경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이 의식을 파고들어 이들은 결국 종교에 맹신하며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맹신을 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중간 매개에 '종교'를 집어넣어서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낸다. 돈이 뜯기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저 후원을 한다고 생각을 한다. 돈을 뜯는 사람이 돈을 뜯어내려는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자기 합리화를 한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너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 상관 마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무너질지 모른다. 또 믿었던 사람이 무너지는 모습에 허망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믿음을 가지되 맹신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믿음에 약간의 틈을 두고 그 안에 의심을 놓아둔다. 믿음에 의심을 가지지 마라, 같은 말은 무시하고 내가 믿는 것에 의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부터도 좋은 왕은, 현명한 왕은 자신 옆에 자신을 의심하는 신하를 두는 왕이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이니기에 늘 올바른 판단을 할 수는 없다. 어딘가에 치우치고 망가지는 게 인간이니 그걸 지적해 줄 수 있는 신하를 둔다는 건 정말 현명한 왕이다. 그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고, 조직에서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귀의 배를 가르면 그 안에 작은 물고기가 가득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아귀는 뱃속에 소화가 안된 작은 물고기가 가득 있어도 계속 먹이를 잡아먹는다. 사자도 그러지 않는다. 배가 부르면 사자 앞에 토끼가 있어도 잡아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귀는 배가 차도 계속 채운다. 탐욕 때문이다. 식탐이 강하다 못해 너무 강하면 탐욕도 강하다. 탐욕이 깊어지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배가 너무 부르면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기분이 상하면서도 탐욕 때문에 숟가락을 놓을 수 없다.


단팥빵은 물론 내 기준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다. 여러 맛있는 빵들이 있지만 가격도 저렴하다. 그래서 단팥빵이 가득 있다면 아주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맹신을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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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레이 베이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레이 '으로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도쿄 기담집' 실린 단편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하나레이 베이를    봤다그림은 사치가 타카시의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들었을  감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장면을 마우스로 그려본 것이다글은  감정을 사치의 마음으로  나름대로  봤다.

내 마음에 뚫린 공백은 나도 알 수 없다.

길을 잃어버려 뱅뱅 맴도는 느낌일 뿐이다.

이 공허하고 손에 닿을 것 같은데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할까.

나는 10년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나는 지금 누구이며, 지금 이전에는 누군가의 엄마였고 어떤 남자의 아내였다.

병신 같은 남편이 듣던 헤드 셋이 아들을 건너 내가 결국 듣고 있다.

앞이 보였던 내 인생을 깡그리 망가트리고 깨버린 내 삶에 들어온 남자들을 증오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그 남자들은 나에게 먼지만큼도 행복을 주지 않았다.

타카시를 가진 것을 알고도 마약에 빠져 있던 남편도, 남편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타카시도 어쩌면 내가 원하는 바대로 신이 있다면 신이 데리고 가버렸다.

낡은 티브이처럼 죽은 후에도 하얀빛이 화면 위로 깜빡깜빡 헤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어지는 경우처럼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성실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성실한 먼지가 안개처럼 가득 껴서 주변을 떠돈다.

남편과 타카시를 떠올리면 그렇다.

불성실한 공기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이미 들어와 버린 내 인생의 낙인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그 남자들이 듣던 헤드 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들이 내게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

그리고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나는, 나는 바보라서... 다리 한쪽이 잘린 일본인 서퍼를 본 순간 나는 내 마음속의 공백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내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되어 바짝 말라버린 거대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서 나는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버렸지만 타카시가 듣던 음악을 듣는 동안 나는 다리 한쪽이 없는 서퍼가 타카시라는 확신이 들었다.

타카시는, 내 아들은 10년 동안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의 소중한 아들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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