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부예지는 수증기가 손으로 만져질 것 같아서 팔을 휘휘 저어 보기도.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문 하나로 인해 단절되고 문 그 안쪽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는 따뜻하고, 뜨겁고, 비현실적인 소리와 공기가 눈을 홉뜬 세계였다. 모두가 신생아처럼 돌아다니고 신처럼 물을 몸에 뿌렸다.


어린 시절의 목욕탕은 그런 이미지였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목욕탕, 대중목욕탕이었다. 목욕탕에 안 간 지 9, 10년은 되었으니 대중목욕탕의 기억은 대체로 어린 시절로 거슬로 올라간다. 목욕탕에는 아이 혼자서 가지는 않는다. 법으로 정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법으로 못을 박은 것처럼 아이 혼자서는 대중목욕탕에 가지는 않는다. 혼자서는 재미도 없고.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뜨겁고 차가운, 기이한 기분이 드는 곳이 아이에게는 위험천만한 곳이라니. 목욕탕 안에서는 절대 뛰어다니면 안 된다. 그러다가는 혼난다. 얼른 어른이 되어야지. 그래야 목욕탕에 오고 싶을 때 혼자 씩씩하게 와서 저기 저 한증막에 들어가 봐야지. 아버지와 함께 토요일 저녁에 오는 목욕탕은 나의 놀이터였다. 넓은 탕 안을 마치 늪지대를 유영하는 군인이 되기도 하고 들어가지 말라는 한증막 근처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겨울의 냉탕은 너무나 차가워서 발가락 하나만 담그기도 했다. 어른들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 차가운 냉탕에 몸을 담갔다. 그때는 몰랐지만 겨울에 목욕탕에 갔다 오면 늘 기침을 하고 감기가 걸렸는데 감기가 나으려고 그러는 것이라 어른들은 말했다. 그게 실은 반대였다. 목욕탕에 주렁주렁 널려 있는 바이러스를 잔뜩 달고 왔으니.


목욕탕 안에서 유리로 보이는 로비의 모습이 있다. 난로가 있고 그 위에 냄비가 폴폴 끓고 있다. 그 안에 맛있는 오뎅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저씨들은 목욕을 하고 난 다음 수건을 목에 걸고 발가벗은 채 난로를 빙 둘러싸고 오뎅을 하나씩 먹었다. 그 모습이 이 세계가 아닌 곳에서 치르는 의식처럼 보였다. 기묘한 건, 목욕을 하러 들어오기 전에 오뎅을 먹어도 될 텐데 모두가 목욕을 하고 나와서 오뎅을 먹었다. 목욕 후에 먹는 오뎅이 맛있다는 게 통속이자 국룰인 것이다. 내가 먼저 목욕을 끝내고 아버지가 목욕을 다 끝내면 우리도 곧 나가서 오뎅을 하나씩 먹겠구나, 유리창에 붙어 침을 꼴깍 삼켰다.


고교 친구 중에 목욕탕집 아들내미가 있었다. 여러 부러운 친구들 중에 목욕탕집 아들내미가 거기에 꼭 끼었다. 집이 목욕탕이라니, 모두가 놀랐다. 왜냐하면 집이 목욕탕이니까. 내 친구 중에 과일장수, 신발장사, 식육점 아들내미보다 목욕탕집 아들내미가 있어,라고 하는 게 더 있어 보였다.


나는 중학교 때에는 먼지 같아서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존재였다. 그런 내 옆을 지켜준 게 주로 음악 같은 것들이었다. 형태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에 나는 기대고 있었다. 주로 라디오를 듣고 있었고 용돈을 모아 앨범을 사러 레코드샵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음악감상실이 집 다음으로 자주 가는 곳이 되었다. 음악감상실에 갈 때면 가난했던 집에서 받은 용돈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한 번 들어가면 뽕을 뽑을 정도로 오래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그러면 디제이들이 하는 멘트라든가, 팝가수들의 가십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콸콸콸 귀 안으로 들어온다. 그때 들은 이야기를 지금도 하고 있으니, 대단도 하다.


목욕탕집 아들내미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 목욕탕집 아들내미는 같은 학교를 나왔지만 같은 반은 한 번도 된 적이 없었다- 카세트테이프로 매일 듣던 음악이 마이클 잭슨의 데인져러스 앨범이었다. 두 장짜리로 한 장짜리보다 훨씬 비쌌다. 그 앨범을 손에 넣었을 때 정말 기뻤다. 목욕탕집 아들내미 이름은 수찬이었다. 수찬이다, 가 아니라 수찬이었다. 수찬이는 매일 음악을 듣고 있는 내게 와서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자신의 집에. 마치 여고생이 좋아하는 여고생에게 고백하듯이. 나는 슬금슬금 피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수찬이네 집에 가서야 그 집이 목욕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너네 집이?

응, 우리 집 목욕탕이야, 씻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와서 씻어.


이렇게 쿨하게 말할 수 있다니 정말 멋진 놈이었다. 수찬이 방에 올라가니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고급 장비가 있었다. JBM엠프라든가 우퍼 같은 것들. 대단했다. 수찬이는 재즈의 팬이었다. 재즈 앨범이 많았다. 이렇게 좋은 장비로 매일 밤, 고등학생 주제에 마일즈 데이비스나 쳇 베이커 같은 멋진 곡들을 듣고 있었다.


수순처럼 수찬이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우리 집과는 멀어서 주말을 이용해야 했는데 가끔 주중에 가게 되면 수찬이네 집에서 잤다. 밤새도록 그 멋진 스피커로 나오는 음악을 한 없이 들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로 행복하다고 느꼈던 때였다. 별을 보며 아름답구나,라고 생각하는 시기가 인생에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딱 그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그걸 느끼지 못하고 넘어가면 아마도 영원히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수찬이가 나를 자주 부르게 된 계기는 순전히 마이클 잭슨 때문이었다. 수찬이의 눈을 완전 뿅 가게 만들었다.


나에게는 93년도 미국 슈퍼볼 경기 하프 타임을 장식한 MJ의 뮤직비디오가 있었다. 그 비디오테이프를 아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걸 수찬이에게 보여주었다. 엄청난 인파가 몰린 경기장에서 MJ가 전광판 꼭대기에서 춤을 추는가 싶더니 금세 운동장 무대 위로 불꽃과 함께 튀어 오르는 것이다. 그건 정말 굉장한 영상이었다. 그리고 그 멋진 자태. 수많은 사람들이 무대 앞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데인져러스 앨범의 ‘잼’을 부른다. 잼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당시 핫 했던 크리스 크로스와 마이클 조던도 같이 나온다. 마이클 조던과 함께 농구를 하는 MJ의 모습은 천상 아이 같았다. 잼에 맞춰 무대 밑의 전 세계 아이들이 춤을 춘다. 무대 위에서는 MJ가 친구들과 칼군무를 춘다. 수찬에게는 엄청난 영상인 것이다.

https://youtu.be/nBkNQZ-6QHg


그리고 이어지는 빌리진. 빌리진의 탄생을 이야기해줬다. 빌리진은 MJ가 잭슨 파이브로 활동할 때, 모타운에 활동할 때 83년 3월에 모타운 25주년 기념 공연을 했다. 아일 비 데어를 부른 다음 잭슨 파이브가 무대 밖으로 나가는데 MJ만 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그때 형인 티토 잭슨이 뭐야 저 녀석 왜 안 들어와?라고 생각했다.

https://youtu.be/BUcUS2cIieA


혼자서 무대에 남아서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모타운의 수장 베리 고디는 MJ의 빌리진을 이 무대에서 세계에 선보일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실 그때는 모타운의 곡이 아니면 부를 수 없었는데 베리 고디는 모타운의 곡이 아닌 빌리진을 MJ가 부를 수 있게 해 주었다. 거기서 수줍게 마이클을 붙잡고 수줍은 모습으로 특별한 무대, 뉴 송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무대의 조명이 꺼지는가 싶더니 이내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빌리 진의 그 강렬한 음악에 맞춰 신들려 몸을 흔들었고 노래를 불렀다.


그 손짓과 강렬한 눈빛. 사람들은 전부 일어나서 환호를 질렀고 박수를 보냈다. 83년 3월 이후 고요하던 팝계는 MJ의 파도 속에 출렁거렸다. 그 첫 빌리진의 모습은 얼마 전에 방탄이들의 제이 홉이 완벽하게 재현을 해서 세계적으로 환호를 받았다. 그 영상들을 보면 현재의 10대들도 호비(제이홉)의 모습에서 MJ? 라며 모두가 마이클 잭슨을 안다. MJ는 현재의 10대에도 그때의 10대에게도 왕창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수찬이의 방은 목욕탕 꼭대기에 있었다. 3층이라서 부모님은 수찬이의 방에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우리는 코냑을 홀짝이며 음악을 듣고 또 음악을 들었다. 정말 좋은 시기였다. 허세 가득한 말 – 정부가 허락한 마약인 음악에 취하고 코냑에 취해서 수찬이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푸르른 하늘에 발가벗은 호랑이 여자가 나타났다. 그때 복권을 사뒀으면. 호랑이의 보들거리는 털이 몸에 닿으니 방뇨의 기운이 몰려올 때쯤 수찬이가 나를 깨웠다. 6신데 벌써 깨웠다. 그리고 우리는 목욕탕에 내려가서 목욕을 했다. 아무도 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아주 깨끗한 목욕탕에 몸을 첫 담그고 목욕을 했다.


우리는 목욕을 하고 나와서 학교를 가서 시시하게 있다가 방과 후에는 또 열심히 음악을 들었다. 마이클 잭슨의 말처럼 잇츠 뷰티풀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수찬이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 나를 따라서 주말에는 음악감상실에서 MJ의 곡을 신청해서 뮤직비디오를 잔뜩 봤다. 그의 음악에는 뭐랄까 혼이 살아 있었다. 소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목소리에 강한 록 사운드에 기계의 움직임 같은 칼군무와 화려한 의상,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었다. 멋있었다. 또 멋있고 계속 멋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길거리 오뎅을 사 먹었다. 썩 맛있지 않았다. 일탈이 길어지면 일상이 된다. 일탈이 일상이 되는 순간 시시해진다. 에르메스도 구입하고 난 뒤 일 년이 지나면 일상이 되어있다. 시시해지는 것이다.


졸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보를 들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방에 가득 있던 재즈 앨범들은 어떻게 될까. 였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 가끔 날이 추워지면 오뎅탕을 끓여 먹는다. 오뎅탕은 대체로 맛있다. 치약을 넣어서 정말 맛없게 끓이지 않는 이상 더 맛있거나 좀 더 맛있거나 할 뿐이다. 후루룩 먹기에도 좋고, 나처럼 안 좋은 위를 가진 인간에게도 나쁘지 않다.


링크 속의 예전 동네 목욕탕은 사라졌다. 추억의 한 곳이 또 완벽하게 소거되었다. 이렇게 추억은 기억으로 남았다가 하나씩 소거된다. 그러므로 해서 오뎅탕의 맛도 추억만큼의 맛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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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그날의 아침에 투명한 햇살이 몹시 안온하게 느껴졌다.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오전의 햇살이었다. 하지만 속은 위장, 십이지장, 간, 쓸게 같은 것들의 위치가 뒤죽박죽 흩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겨우 눈을 뜬 것은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이 되면 오는 신호 때문이었다.


예전에 친구와 땅끝 마을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하루를 꼬박 일하고 하루를 꼬박 쉬는 일을 했는데 한 달에 3일은 휴가를 꼭 내야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무슨 전파에 관련된 일로 아마 정부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좋은 직장인 것 같은데 폐쇄적이었다. 이상하고 묘한 회사였다. 친구가 일을 하고 오전에 퇴근을 하고 오는 날 납치를 해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친구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친구의 눈이 똑바로 떠 있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친구는 여행을 가면서 회사에 연락을 해서 3일 휴가를 냈다. 멋진 회사에 멋진 녀석이었다. 이상한 회사에 이상한 녀석이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생활을 하며 보내는 친구가 부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니면 말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뭐. 양희은의 말처럼 그러라 그래, 그럴 수 있어. 가 우리 주위를 감싸고 맴돌고 있었다.


남아도는 자산 같은 시간 때문에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국도를 타고 가다가 배가 고프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그러다가 만약 술을 마시게 된다면 그곳에서 그냥 일박을 했다. 그게 보통 우리가 여행을 가면 돌아가는 패턴이었다. 그때는 딱히 목적지가 땅끝마을은 아니었는데 친구를 납치할 때 어디를 가냐고 묻기에 땅끝마을,라고 해서 가는 것이었다. 흔히 알고 있는 땅끝마을이 해남 땅끝마을이 아니라 두륜산이 있는 땅끝마을이었다. 흔히 아는 땅끝마을이 그곳인가? 같은 곳이 아닌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면 말고다.


가는 도중 벌교를 지나 보성에서 밥을 먹었다. 묘한 식당이었는데 그저 뻘이 보이는 식당의 뷰가 좋아서 들어갔다. 함바집 같은 테이블이 없었다면 여기가 식당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홍합탕 정식이었는데 그렇게 맛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딸려 나오는 반찬을 모두 먹어 치우니 주인장이 주방에서 쓱 나와서 쓱 훑어보더니 다시 반찬들을 왕창 깔아 주었다. 허기진 배를 맛없는 음식들로 채웠는데 또다시 그 음식들로 채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땅끝마을에 뭐가 있는데?라고 물어서 두륜산.라고 대답을 했다. 두륜산에 가려는 이유도 딱히 있는 건 아니었다. 땅끝마을에 가려는 이유를 친구가 밥을 먹다 물어서 그냥 대답을 한 것인데 친구가 밥을 떠 무심하게 입에 넣으면서 거기에 케이블카가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면서 무심하게 신나겠는데.라고 했다. 영혼 없이 밥을 먹으며 영혼 없이 말했다.


친구는 덩치가 좋은 것에 비해 밥을 썩 많이 먹지 않는다. 신기한 건 술을 마시러 가면 안주를 테이블에 가득 주문을 한다. 그러나 술을 한두 잔 마시게 되면 안주는 잘 먹지 않았다. 그런데도 덩치가 좋고 그렇다. 고등학교 때 라면을 먹을 때에도 대들지 않는 대담한 놈이었다. 라면에 젓가락으로 철사장을 하지 않은 녀석이 그놈이 아마 처음일 게다. 친구는 전혀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여자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 게 귀찮다고 했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며 월급은 꼬박꼬박 쌓이고 딱히 여자를 만나지도 않았지만 직원들과 왕왕가는 룸이 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아가씨가 있었다. 어느 날은 오전에 밥을 먹자고 연락이 왔다. 아주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가니 그 아가씨가 있었다. 아가씨는 매일 마시는 술 때문에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술을 매일 너무 마셔서 국물만 조금 마셨다. 손에서 생기라는 건 다 빠져나갔고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보였다. 룸의 드레스를 벗고 청바지를 입고 화장을 지우고 티셔츠를 입고 친구 맞은편에 앉아서 갈비탕의 국물만 조금씩 떠먹었다. 친구는 그런 아가씨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가씨는 친구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잠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쉬는 날은 하루 종일 잠을 자고 쉬지 않는 날에는 잠을 자고 일어나서 몸단장을 하고 출근하여 밤새 술을 마시고 2차를 갔다. 밥은 거의 먹지 않았다. 친구가 억지로 데리고 와서 아침을 먹이는 거였다. 한두 번은 아닌 듯 친구가 쳐다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힘든 숟가락 질을 했다. 어때 괜찮지?라고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친구는 여자는 사귀지는 않았는데 만나서 처음 데이트 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결혼하자마자 아들을 낳았다. 친구의 부모님이 좋아했다. 친구는 종손에 장손이었다. 친구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인상이 더러웠다. 인상 쓴 일본 배우 '무라카미 준' 같았다. 그래서 입학하자마자 오해를 많이 받았다. 늘 뒤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고 1년 꿀어서 우리보다 한 살 형이었다. 그런데 그 인상 때문에 1학년 때 뒤에서 노는 아이들과 싸우게 되었다. 4명과 싸우다가 머리가 깨졌다. 뒤돌아서 있는데 4명 중 한 놈이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머리가 와그작 깨져버린 것이다. 뇌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6개월이나 붕대를 감고 입원을 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한 해 더 이월하자고 했는데 부모님이 절대 반대였다.


지금 생각하면 한 해 더 이월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게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그때는 고등학생이었다. 병원에 나는 거의 매일 놀러 갔고 병원 옥상에서 같이 놀았다. 시답잖은 말이나 해가면서 우리는 친해졌다. 병원에서 나오고 나서 친구와 술도 엄청 마시고 다녔다. 교복을 입고 투다리 같은 단골 술집을 정해놓고 다녔는데 조마조마했다.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술을 마셨는데 그게 스릴 넘쳤다. 공업탑 근처 투다리 이모님은 경찰이 떴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우리들을 주방 냉장고 옆에 숨겨 주었다. 하지만 자유롭지만은 않아서 어느 날은 술을 사서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골목에서 술을 마시다가 양쪽 어머니가 와서 끌려가기도 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홍콩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기가 걷히니 양쪽 끝에서 어머니들이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처럼 팔짱을 끼고 우리를 노려봤다. 그때 끌려가면서 둘 다 투덜거렸는데 닭을 한 마리 튀겨서 놓고 소주와 함께 먹으려는데 아낀다고 닭다리는 뜯지도 않았는데 잡혀왔다. 씹으면 기름이 죽 나오는 뜨거운 시장표 통닭이었는데. 기름이 죽 나온다고. 기름이. 그만의 맛이 있는데.


땅끝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낙안읍성에 들렀다. 그렇게 볼 것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우리 조상들의 뭐 그런 분위기. 내가 있는 곳에서 양동마을이 낙안읍성보다 가까워서 양동마을에는 왕왕 갔었는데 양동마을에 마음이 더 갔다. 양동마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더 신비로웠다. 겨울에 가서 양동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녁에 해가 지는데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저 산등성이로 해가 꺼지면서 붉게 타오른다. 그 풍경이 엽서에서나 볼법해서 놀라곤 했다. 낙안읍성에서는 그런 멋은 없었다. 낙안읍성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배가 고팠다. 걸어 다녀도 될 텐데 어린이들처럼 하하하 거리며 뛰어다녔던 게 허기의 요인이었다. 2월이라서 5시부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땅끝마을로 갔다. 가는 동안 여기저기 참새방앗간처럼 들렸다가 도착을 하니 저녁 8시가 되었다. 일단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으려는데 식당의 문이 대체로 닫혀 있었다. 심지어는 롯데리아가 보여서 들어가려는데 9시도 안 되었지만 셔터가 드르르르륵 내려오고 있었다. 맙소사. 땅끝 마을의 대부분의 식당과 가게가 문을 닫고 불이 꺼졌다. 세상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멎은 것처럼 건물의 불이 탁탁 소멸했다. 우리는 땅끝 마을에 가면 짱뚱어탕을 먹을 요량이었는데, 짱뚱어고 뭐고 간에 불이 켜진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평소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부분에 대해서 막히면 현타가 온다. 군대에서는 밖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부분에 너무 신경을 써야 한다. 신발을 가지런하게 벗어 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고, 창틀에 먼지가 있으면 큰일이 난다. 속옷이 더러우면 큰일이 난다. 딱 그 짝이었다. 우리는 큰일이 난 것이다. 마을에 고립될 것 같았다. 굶은  채로. 으악. 일단 숙소, 숙소를 잡자. 차를 붕붕 몰아 돌아 돌아 모텔을 찾았다. 모텔에 들어갔는데 모텔이라고 불이 켜져서 모텔인 거지 여인숙을 개조한 듯한 방, 그 방의 벽에 달력이 달려 있었다. 한복을 입은 여인이 작은 항아리 같은 것을 들고 우리를 보고 웃고 있었다. 지금은 2월이야,라고 했다. 일단 짐을 풀어놓고 모텔의 주인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어디 어디를 돌아서 거기로 거거라!라고 해주었다. 우리는 후다닥 거기로 갔다.


어디 어디를 돌아서 거기로 가니 정말 마법의 집처럼 아직 불이 켜진 식당이 하나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발이 쳐 있는, 작고 좁고 아담한 식당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시간이 9시쯤이었다. 식사됩니까,라고 하니 된다고 했다. 속으로 호야. 오리불고기 집이었는데 간판에 짱뚱어탕도 있었다. 우리는 주인장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오리불고기 한 마리와 소주를 주문했다. 주인장은 한 마리는 너무 많으니 반마리로 하라고 했다. 한 마리라고 해봐야 불고기가 양이 그렇게 많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소주는 잎새주였다. 우리는 짱뚱어탕도 하나 시켰다. 주인장은 오리 불고기만으로도 배가 부를 텐데,라고 했지만 우리는 짱뚱어탕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해서 먹고 싶다고 말했다. 주인장은 7초 정도 생각하더니 알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당에 틀어 놓은 티브이에서 ‘그대 그리고 나’ 재방송이 하고 있었다. 최진실이 최불암에게 혼나고 있고 군복 입은 차인표가 삐뚤빼뚤하게 앉아있고 김혜자가 부내 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최진실이 살아 있었다. 최진실이 예쁜 옷을 입고 예쁜 립스틱을 바르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최불암에게 혼나고 있었다. 최진실은 무엇보다 얼굴이 예뻤다. 그때는 최진실의 앞일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해서 테이블에 올려주며 식당은 9시 30분까지라고 했다. 맙소사. 오리고기를 굽다 보면 30분이 훌쩍 지나갈 것 같았다. 농담이겠거니 했지만 주인장의 표정을 보니 진심이었다. 아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도대체 30분 동안 오리불고기를 다 구워 먹고 뜨거운 짱뚱어탕과 잎새주 한 병을 다 마시라니. 주인장은 80년대 호러영화 포스터를 장식하는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손에 칼과 포크만 쥐어주면 그 호러 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였을 것이다. 덜덜덜.


우리는 대역죄인 같은 몰골로 주인장에게 매달려서 우리의 입장을 말했다. 저 멀리서 왔으며, 오늘 여기, 이곳을 들리기 위해 나불나불. 주인장은 허허허 웃었다. 그러면서 11시까지는 문을 열어 놓겠다고 했다. 이 동네는 겨울에 보통 8시가 되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일찍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때가 15년 정도 전이었는데 마을은 그랬다. (식당 안에서 찍은 사진을 찾고 있는데 찾지를 못하고 있다) 우리는 주인장에게도 잎새주 한 잔을 권했다. 주인장은 그걸 바라는 눈치였다. 식당의 물컵도 예전 팔각형의 사기로 된 컵이었다. 겉면에  새가 그려져 있는, 오래된 중국집에서나 볼법한(아직도 사진을 찾고 있는데 찾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는 기분 좋게 취하며 오리 불고기를 먹었다. 주인장은 한 번 그렇게 친해지니 얼굴이 호러에서 드라마로 급선회를 했다. 일단 구수한 전라도의 말이 듣기 좋았고 주인장은 우리의 경상도 사투리를 좋아했다. 주인장은 잎새주 한 잔을 더 마시고 짱뚱어탕을 내왔다. 돌솥에 나온 짱뚱어탕이었다. 친구와 나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 추어탕을 생각했다.


술도 취했겠다, 오리도 먹었겠다, 호기롭게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와암. 이야, 추어탕은 전혀 아니었다. 짜도 짜도 너무 짰다. 드라마로 바뀐 주인장이 또 코믹으로 선회를 해서 짱뚱어탕을 끓여낸 모양이었다. 코믹으로 바뀐 주인장과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웃으며 마셔서 나무랄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짱뚱어탕에 대한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짱뚱어탕의 맛이 원래 이러진 않았을 터인데. 일단 너무 짰고 그다음으로도 짰고 마지막으로도 정말 짰다. 쿠키영상 속에서마저 짰다. 너무.


아이러니하지만 그 뒤로 지금까지 짱뚱어탕은 더 이상 먹어보지 못했다. 한 번 먹지 않게 되는 음식은 계속 먹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히 이어진다. 그런 음식들이 존재한다. 그건 맛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맛이 있더라도 주위에서 쉽게 먹을 수 없으면 멀어지고 그러다 보면 영원히 안 먹게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홍어를 한 번도 먹어보지 않고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평생 고래고기를 한 번만 먹어보고 죽기도 한다. 아직까지 짜파구리를 해 먹어 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짜파구리의 맛을 모르고 나중에 죽을 것 같다. 중간에 사고가 난다면 병원이나 어딘가에서 짜파구리를 해 먹어야겠다.


10시 30분이 되어서 우리는 나왔다. 주인장은 오전에 들러서 아침을 먹고 가라고 했다. 참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코믹으로 바뀌어서 더 친근했다. 65세는 넘었다. 아내와 둘이 식당을 하는데 나이가 들어 늦게까지 하는 게 힘들다고 했다. 아내는 먼저 들어가고 우리를 손님으로 받았는데 덕분에 마시고 싶은 소주를 마셔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아내가 술을 못 마시게 한다고 했다. 홀에 테이블이 3개가 있고 작은 마루에 딸린 방이 있고 문을 드르르륵 열면 좌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방에서 따뜻한 보일러가 엉덩이를 데워주는 호강을 받으며 잎새주를 홀짝였다. (사진을 아직 못 찾고 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오리불고기와 짠 짱뚱어탕과 잎새주로 채우면서 추억 하나를 만들었다.


친구와 나는 숙소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 불이 켜진 술집으로 들어갔다. 선술집은 아니었고 야시시한 불빛이 흐르는, 꽤나 실내가 어두운 술집이고 2층이었다. 바는 없고 홀에 테이블만 있는 그런 술집이었다. 그리고 테이블 사이사이에는 파티션이 있어서 프라이버시(가 보장은 안 되지만 느낌상)가 보호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제외한 한 테이블에 여성 네 명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성들은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밍크코트 같은 귀티 나는 옷을 걸치고 귀걸이와 반지가 눈에 띄게 반짝였다. 술집인데도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음악도 없이 공허한, 그렇지만 술을 마시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친구는 맥주를 4병 주문했다. 그렇다, 이곳은 병맥주만 가능한 그런 술집이었다. 짠 짱뚱어탕 때문에 맥주를 필요로 했다. 벌컥벌컥 마시고 나니 웨이터가 와서 안주를 만들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 하더니 기본 안주만 주고 갔다. 기본 안주도 꽤 좋았다. 땅콩이니 마른안주 그런 것들. 우리는 더 고마웠다. 우리는 배를 어느 정도 채웠던 것이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병맥주는 아주 맛있었다. 천연암반수로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맥주를 마시면 그동안 긴 유리컵에 담긴 생맥주만 마셔서 그런지 병맥주의 맛이 기가 맥혔다. 사실 친구는 오리고기도 별로 먹지 않았다. 딸려 나오는 반찬으로 소주만 한 병 정도 마셨다. 그리고 짱뚱어탕을 한 번 떠먹고는 그 뒤로 안주는 입에도 안 댔다. 만약 맥주를 마시는 이곳에서 안주를 주문해야 한다면 그 안주는 또 내가 다 먹었을 것이다.


그때 웨이터가 와서 저기 테이블에서 합석을 하자는데,라고 했다. 헌팅이다. 네 명의 동네 유지 같은 여성들의 눈에서 레이저 빔 같은 것이 우리를 향해, 지지 지직 나왔다. 여성들은 어떻게 봐도 우리 돈이 많아, 나 졸부야, 같은 분위기였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았지만 우리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그렇게 보였다. 친구는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려고 했다. 얼씨구, 내가 붙잡으니 눈빛으로 괜찮으니 따라와,라고 했다. 술 사준다는데 마셔야지, 라며 나를 이끌었다. 나는 마치 나니아 연대기에서 옷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친구를 따라 옷장 건너편의 테이블로 갔다. 스르륵 빨려 들어가듯이. 나니아 연대기가 지금은 몇 편까지 나왔더라.


친구는 모르는 여성들과, 화류계의 여자들과 주고받는, 티키타카의 생리를 잘 알아서 그런지 네 명의 여성들은 시종일관 호호호, 하하하 웃음 난발이었다. 웃음이 건물 속, 술집에 갇혀서 절대 빠져나가지 않았다. 꽤나 즐거웠다. 모르는 사람들과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인간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가능한 일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네 명의 여성들은 들짐승처럼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걸치고 누벨바그의 영화에 나오는 여성 1호부터 4호 같았다. 슬로 테이크처럼 우리가 맥주잔을 들면 진한 색의 매니큐어가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움직였다. 슬로우, 슬로우. 6명은 2월의 깊은 새벽을 보냈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전 9시였다. 어제 마신 술이 소주, 맥주, 양주였다. 그래, 여행은 이래야지, 우욱. 속은 너울성 파도가 한 움큼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친구는 비너스처럼 비스듬히 누워서 전혀 꼼짝하지 않았다. 누운 쪽으로 뱃살이 멋진 형태를 만들었다. 인간만이 가능한 예술의 한 형태다. 우욱. 우리는 둘 다 박제된 동상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방안이 그야말로 고요 그 자체였다. 모텔 밖으로 사람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마저 소거된다면 우리는 사진 속의 그냥 피사체에 불과했다. 사진? 그래 어제 사진을 잔뜩 찍었다. 나는 필름 카메라와 소니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왔다. 필름은 인화를 해봐야 하겠지만 손휘는 뷰로 보면 된다. 너울성 파도는 나를 움직이는 것을 용서치 않겠다며 롤링을 심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도 몸뚱이를 움직여 카메라를 보니 술자리가 적나라했다. 영화 행오버 같았다. 하하하. 우욱.


친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돌부처처럼 생겨가지고 숨을 쉴 때마다 방바닥에 깔린 뱃살이 힘없이 움직였다. 이 모텔의 방에는 침대가 없다. 온돌식이었다. 시간은 9시 20분. 커튼을 걷으니 2월의 찬란한 빛이 방 안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계시 같은 밝음이었다. 2월 중순이 가장 좋다. 가장 좋다는 말은 일 년 중에 이벤트가 없는 날의 지속되는 시작이어서 좋다는 말이다. 명절도 지나고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생일 같은 것들도 다 지나고 아무런 이벤트가 없다. 이대로 여름까지 죽 이어진다. 그래서 이런 기분 좋음은 여름에 다다라서 절정에 오른다. 8월에 정점을 찍고 하강기류를 탄다.


모텔에 들어올 때는 삭막해서 몰랐는데 나오니 바로 전통시장이었다. 북적북적거렸다. 친구의 걷는 뒷모습을 찍었다. 타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 묘미는 그 지역의 전통시장을 도는 것과 그 지역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일상에 지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지만 사람이 북적북적거려야 재미있어한다. 모순에 모순을 거듭해야 그 모순이 모순이 아니라는 모순을 알게 되는 모순에 도달한다. 아무튼 그게 인간이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벗어나서 재미를 찾을 수 있을까. 아무리 일찍 일어나 봐라 누군가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이미 움직이고 있다. 콩코 늪지대에 가도 인간은 벌써 악어와 함께 에헴 거리며 지내고 있다.


숙취와 함께 허기도 공격을 했다. 시장에서 그냥 ‘밥, 집’이라고 된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없었지만 아마도 밥을 해서 장사를 하는 곳으로 배달을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김치찌개 뭐 그렇게 주문했다. 그런데 상에 명란젓이 나오기에 그걸 밥에 좀 올려서 밥과 함께 먹었다. 아, 젠장 이렇게나 맛있었나. 명란젓도 생각해보니 이전에는 전혀 먹어보지 못했다. 친구와 나는 다른 반찬보다 명란젓을 밥에 비벼서 야금야금 먹었다. 그리고 김치찌개 한 숟가락. 김치찌개는 또 왜 맛있고 난리지. 전부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인데 여기서 먹으니 더 맛있었다. 여기서만 먹을 수 있었던 짱뚱어탕은 맛이 없었고 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까 일탈을 바라지만 자유한 일탈 속에는 일상에서의 편안함이 없어서, 까지 말하는데 친구가 소주를 주문했다. 이상한 놈. 그러더니 차 열쇠를 휙 나에게 던졌다.


명란젓은 금세 동이 나고 우리는 명란젓을 따로 주문을 했다. 왜 안 짜지? 어째서 이렇게 맛있을까. 야무지게 먹었다. 먹어가면서 입구로 보이는 시장의 풍경은 활기찼다. 밤의 세계와는 너무나 달랐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나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대체로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어쩌면 더 정겨운 지도 모를 일이다. 한 그릇씩 비웠을 때 식당 주인이 밥을 더 퍼 주었다. 우리는 뭔가 동정심을 유발하게 보이는 어떤 무엇인가를 장착하고 다니는 걸까. 밥공기로 갖다 주는 게 아니라 밥을 밥그릇에 퍼 주었다. 배불러도 먹어야 한다. 그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어제 들짐승 여성들이었다. 친구는 다음 달에 또 온다고 했다. 그러고 여행에서 돌아와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정말 이상한 놈.


친구는 해장한다며 소주와 함께 명란젓에 비빈 밥을 맛있게도 날름날름 먹었다. 술은 낮에 마시는 게 맛이다. 밤에 아무리 술을 마셔 숙취가 있어도 이렇게 좋은 날, 오전에 마시는 술은 꿀맛인 것이다. 식당에서도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륜산에 오르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호기롭게 말을 했더니, 주인장도 영혼 없이 아, 케이블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케이블카를 탔다. (아직도 사진을 찾고 있다. 케이블 카 안에서 찍은 사진들과) 케이블카에는 5명인가, 6명 정도 탄 것 같다. 케이블카는 어릴 때 남산타워(거기도 케이블카가 있나) 케이블카를 탔는데 기억이 없다. 단지 어린 시절의 사진에 케이블 카에서 무서워하며 있던 모습이 있었다. 케이블카가 두륜산으로 올라가니 우리만 신났다. 그만 자연경관에 녹아들어 좀 떠들고 말았다. 친구와 나의 대화 스타일이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이게 평소 대화하는 스타일이다. 욕이 3분의 2 정도로 녹아들어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때 옆에서 너무 웃던 한 대학생이 있었다.


친구는 군대를 가지 않았다. 이 글의 초반에 그런 이유 때문에 친구는 군 면제를 받았다. 대학교 졸업 후에 바로 취직을 했다. 나는 제대를 한 후였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계속 웃던 그 대학생은 입대를 며칠 앞두고 홀로 자아 여행 중인 서울의 대학생이었다. 이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철우. 철우를 보니 ‘허니와 클로버'의 타케모토 녀석이랑 닮았다. 서울에서 굴러 굴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철우는 뭐가 그리도 웃기는지 우리를 한 번 보고 돌아서서 웃느라 케이블카에서 자연경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덕분에 친해지게 되었다. 친구는 골초였는데 담배를 권해도 철우는 노, 캔맥주를 권해도 노. 그런 녀석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두륜산 꼭대기까지 계단을 타고 걸어서 또 올라가야 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때마침 눈이 내려서 설경을 이루었다. 보이는 모든 풍경에 눈이 내렸다.


 눈이라는 게 죽음과도 맞먹는다. 눈이 내리면 누구든 다 맞는다. 눈이 내리면 교회든 사찰이든 어디든 다 눈으로 덮인다. 눈은 모두에게 다 똑같이 공평하다. 죽음도 그와 비슷하다. 이런 말을 하는데 친구가 죽고 싶냐며 나를 발로 찼다. 내려서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케이블카에는 꼭대기에서 어묵도 팔고 과자도 파는 작은 매점의 이모님도 탔다. 그 매점 이모는 짐이 많았다. 눈 때문에 짐을 이고 지고 올라가기 만만찮았다. 그래서 우리 세명이 이모님의 짐을 하나씩 들고 낑낑거리며 올랐다. 올라가면서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이 죽일 놈의 사진 파일들이 없다. 컴퓨터에 없다면 시디에는 구워놨을 텐데 이 시디를 넣어서 볼 수 있는 컴퓨터가 또 현재는 없다)


계단을 타고 타고 꼭대기에 올라서 장관의 경치를 감상할 틈도 없이 짐을 매점 안으로 넣었다. 도대체 이모님은 이렇게 무겁고 많은 짐을 왜 혼자서 들고 오는 것일까. 아니 이 짓을 매일 하는 것일까. 의문투성이의 이모님. 덕분에 이상하지만 오뎅국물, 육수를 만드는 물을 붓고 오뎅을 넣고, 짐을 정리하는 걸 우리가 했다. 꼭대기에 올라오는 사람도 없었다. 눈이 급똥처럼 갑자기 내렸고 한꺼번에 너무 내렸다. 기온도 엄청 떨어졌다. 아침에 밥 먹을 때만 해도 해가 쨍쨍했는데. 그렇게 정리를 다 하니 오후 1시 정도가 되었다. 또 배고팠다. 이모님이 오뎅을 마음껏 먹으라는 것이다. 오뎅이라는 게 보통 3개 정도, 국물을 한 두 컵 정도 마시면 꽤나 배부르다. 철우녀석 마음껏 먹으라고 해서 오뎅을 한 만원 어치를 먹었다. 눈치라고는 1도 없는 녀석.


먹는 동안에도 우리를 보며 웃었다. 철우 녀석은 입대를 하고 병장이 될 때까지 우리에게 메일이 왔다. 참으로 된 녀석이었다. 우리는 2명이었던 여행길이 3명이 되었다. 철우는 딱히 목적지가 없었다. 우리도 딱히 없었기에 남들 다 가는 해남 땅끝 마을이라는 표시가 있는 전망대? 암튼 거기까지 가기로 했다. 운전은 내가 했다. 수동이었다. 양발을 사용해야 한다. 오르막길에 멈추지만 않으면 수동기어는 너무나 재미있다. 하지만 경사진 길에 멈추게 되면 겨울에도 등에서 땀이 한 줄기 죽 흘러내린다. 하긴 새삼스럽지만 나는 지금도 수동기어 자동차를 몬다. 그래서 나의 활동 반경에, 차를 몰고 다니는 활동 반경에 경사진 길은 없다. 그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여리여리 유약한 철우는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너무 웃어댔다. 녀석은 그야말로 서울 촌놈으로 서울의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했다. 욕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을 것만 같은 놈이었다. 그래서 뒷자리에서 건방지게 앉아있는 철우에게 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아저씨를 막았을 때 아저씨가 화가 나면 “야이 씨바, 어데 꼬라보노, 눈까리 주 빼뿌까, 씨 바 새끼”라고 하니 따라 해보라고 했다. 철우는 또 시키니까 곧잘 따라 했다. 서울촌놈이 하이텐션으로 따라 하는 경상도 사투리가 있다. 티브이나 영화에서 하는 그런 투의 언어. 그러더니 더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입으로 할 수 있는 숫자와 동물의 조합적인 언어를 가르쳐주었다. 입대하걸랑 잘 써먹도록 하라. 말할 때 노래처럼 중간중간 3분의 2박자로 욕을 넣도록 하라.


철우는 형들을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물었다. 순간 그냥 형이라고 하면 되는데 느닷없는 질문에 씨발형이라고 불러라고 친구가 말했다. 여하튼 이상한 놈이다. 이상한 놈이 몰던 자동차라서 차도 이상했다. 그렇게 우리는 소쇄원까지 갔다. 아니지, 여기는 2박을 광주에서 하고 3일째 돌아오는 길에 들린 곳이다.


그렇게 바보 3명은 해남 땅끝마을이라고 써여 있는 전망대까지 갔다. 이제 목적지는 광주 충장로였다. 또 밤이 도래하고 충장로에서 바보 3명은 미쳐 날뛰는 밤을 보냈다. 2차전을 쓰려고 하니 너무 길어서 여기까지만 하겠다. 명란젓에 밥을 비벼먹다 보니 여행기가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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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걷고 있었다. 차들은 끊임없이 지나갔고 바람은 뿌연 미세먼지를 잔뜩 실어 날랐다. 도로공사 때문에 도로에서 떨어져 아슬아슬한 길을 걸었다. 책을 보며 걷다가 책을 덮어야 했다. 도로의 사정이 신발 바닥을 통해 바로 머리에 전달되는 그런 길이었다. 도로에 신경을 쓰며 걷고 있는데 한 로컬 카페에서 모과이의 ‘아이엠 짐 모리슨 아이엠 데드’가 흘러나와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카페로 쓱 들어갔다.


모과이는 연주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묘한 록밴드다. 내가 좋아하는 앨범은 ‘버닝’으로 그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을 한없이 숭숭 구멍을 내버린다. 그건 어쩐지 영화 ‘버닝’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에는 하루키와 윌리엄 포크너가 있었고 테이크와 테이크 사이는 온통 메타포가 구멍을 매웠고 은유로 이어져 있었다.


카페는 천장이 낮고 작은 공간이었다. 해체주의나 플럭서스가 어울릴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틀에서 벗어난 실내장식과 암울하지만 희망이 섞인 냄새가 미미하게 났다. 무엇보다 앉아 있으니 모과이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 계속 나왔다. 마침 책을 들고 있어서 책이나 좀 보면서 앉아 있다가 갈 요량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도 생명을 갓 부여받은 것처럼 신선한 맛이 났다.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새로운 식품의 종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인류에게 생기는 바이러스에 관한 상관관계를 적어 놓은 책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내가 읽기에는 꽤 어려운 책이었다. 소설만 줄창 읽는 나에게 읽어보라며 누군가 건넸는데 어째서 이렇게 어려운 책을 빌려준 건지 모를 일이다.


사실 카페에서 질 좋은 의자에 엉덩이를 파묻고 앉아서 편안하게 책을 읽어 본지는 몇 번 되지 않았다. 늘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서 책을 읽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또는 계단에 잠시 앉아서 땀을 식히면서 몇 줄의 글을 읽었고 일하는 가운데 틈이 보이면 책장을 몇 페이지씩 넘길 뿐이었다. 요즘은 그 망할 놈의 아이패드 때문에 책장을 더럽히지 않고도 활자를 볼 수 있다.


지금은 책도, 글도 누워서 읽고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책상과 불빛이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었던 시대라고 해봐야 고작 15년 정도 전인데 마치 백악기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제 정전이 도래해도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 그놈의 아이패드 때문에.


대부분이 향기로운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책을 읽는 것에 반해 나는 편안 것에 익숙지 않았다. 오랜만에 비어있는 시간이 자산처럼 불어나서 카페로 들어와 책을 펼쳤지만 생각만큼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오래된 습관 내지는 하나의 패턴에 길들여진 탓이다. 책을 펼쳤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공사 현장에 시선을 두고 모과이의 음악에 빠져들어 생각은 고랑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밑으로 밑으로 흐르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 웃긴 얘기지만 책이 가장 잘 읽힐 때가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보호자가 할 것이 없었다. 하루에 두 번 있는 면회를 잠깐 하는 것이 보호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중환자실이라는 곳에는 고도의 숙달자 들만이 그곳의 생리를 알기 때문에 어설픈 보호자의 손길은 오히려 독이 된다.


한 치수 작은 운동화를 신고 한 시간 동안 달린 것 같은 불편함 때문에 잠은 오지 않아 대기실에서 책을 읽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것, 그것뿐이다. 자정이 넘어가면 병원의 병실은 대부분 숨을 죽이고 밤의 D 세계에 녹아든다.


병원 복도 끝은 죽어버린 시간이 활동을 한다. 실체나 감각이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곧 나는 히틀러를 피해 크렘린의 미궁 속으로 기어 들어간 스탈린을 생각한다. 스탈린을 생각할수록 그는 뒷짐을 지고 수행원을 대동하여 더 깊은 궁 속으로 가버리고 만다.


나는 크렘린에서 헤매다가 사립탐정인 레미를 만난다. 레미는 나에게 말했다.


여긴 알파빌이야, 감정을 가지는 일은 용납되지 않아.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은 체포되어 공개 처형되는 도시지. 알파빌에서는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전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 말에 레미는 또 말했다.


재미있는 건 말이야, 알파빌에서도 섹스는 존재한다는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너에게서 알파빌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중환자실의 면회시간이 되었고 복도에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모과이의 ‘아이엠 짐 모리슨 아이엠 데드’도 끝이 났다. 나는 책을 덮고 카페를 나왔다.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모과이의 아이엠 짐 모리슨 아이엠 데드 https://youtu.be/5EfuLuN0V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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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위기 어떡해



https://youtu.be/lj4_AqyxGuE



시가렛의 발음을 시가레트 라고 하니 메루치 볶음이 생각난다. 내 외할머니의 메루치 볶음이 요즘의 멸치 볶음보다 훨씬 맛있었는데. 시가레트 애프터 섹스의 ‘스윗‘은 정말 스위트 한 노래다. 우리나라로 치면 밴드 Mot의 ‘날개’가 술 취해서 듣다 보면 너무 소 스위트하게 들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시가레트 애프터 섹스의 스윗의 뮤직비디오를 영화 ‘어바웃 타임’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타임 루프 영화다. 그간 타임 루프 영화는 시간을 되돌리기 위한 수단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수단은 과학적인 접근에 의해 엄청나고 고도의 기술로 그것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타임 루프 영화에서 감독들은 과거나 미래로 가는 그 과정을 보이기 위해서 시간을 엄청 투자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백 투 더 퓨처’가 그랬다. 수소라든가 전기를 끌어올 번개 라든가. 거의 모든 타임 루프 영화들이 그랬다.


그런데, 아뿔싸 ‘어바웃 타임’에서 장롱 속에 들어가 눈 한 번 질끈 감으니 과거로 가버렸다. 과학? 기계? 설비? 이 딴 게 뭐가 필요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마법이야, 마법이 필요하지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접근은 별로야 흥! 해버린 거였다.


여주가 레이첼 맥아담스다. 수많은 할리우드 배우가 있지만 활짝 웃는 모습이 이렇게 예쁜 배우는 잘 없다. 레이첼 맥아담스 하니까 예전 트윗할 때가 생각난다. 그때 영화방 같은 곳에서 영미(영화에 미친)들이 모여 열심히 영화 ‘노트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그런데 누군가 들어와서 같이 끼게 되었는데 그녀는 진짜 노트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영화 노트북이 아니라 자판 달린 진짜 노트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묘하게 영화 이야기에 잘도 끼어서 이야기를 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자판 달린 자신의 노트북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데도 무거운 엉덩이를 옮기기 싫어하는 고모처럼 눌러앉아 계속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도 딱히 여긴 이런이런 방이니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자판 달린 자신의 노트북 얘기는 그것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아주 밝고 명랑했다. 140자 활자를 통해 그것이 그대로 다 드러났다. 그러면서 당시 유행하는 트윗 언어를 따라 하면서 재미있어했다. 요컨대 현재의 얼죽아 같은 말들. 그렇게 영화 속 레이첼 맥아담스처럼 깨 발랄하던 그녀는 영미 방에서 눈팅만 하던 한 직업군인과 인사를 하더니 그다음 날 바로 만나서 사진을 공유하고 2주일인가 지나서 결혼을 했다. 짝짝짝. 결혼사진을 공유하면서도 얼죽아 같은 유행하는 말들로 태그를 걸어 놓았다. 인생 뭐 있나, 마법이지.


‘어바웃 타임’은 일본 영화로 친다면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의 느낌일까. 일본도 그간 수많은 시간의 어긋남, 시간의 후퇴, 타임리프, 시간의 격차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 영화 역시 다른 타임루프 일본 영화들처럼 시간의 뻔한 클리셰의 이야기인데 멍하게 보다 보면, 생각 없이 보다 보면 그만 빠져들게 된다.


인간들은 사랑을 하고 싶어 하고 사랑을 한다. 우리는 하나의 선으로 그 선은 일직선이다. 서로 교차하고 싶어 하지만 선은 서로 일직선으로 죽 이어진다. 누군가 노력으로 선을 조금 기울인다면 우리는 언젠가 서로 만나는 날이 온다. 그 순간은 비록 짧고 찰나지만 그 순간으로 우리는 영원을 기억하기도 한다. 사랑은 시공을 초월한다. 아주 기묘하고 기이한 감정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맙소사, 이게 무슨,라고 시작하지만 보고 나면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눈물샘이 뚫려 버릴 것 같은 영화다. 환상적 환장과 감동적인 격동이 동시 존재하는 영화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의 주인공 고마츠 나나가 스다 마사키 녀석과 결혼을 했다. 권지용이 광팬이며 이상형이라더니 정말 결혼은 이상형과는 무관하지, 싶기도 하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스타들이 결혼을 하면 그래 어디까지, 같은 시선이 있어서 여봐란듯이 잘 살기를.


메루치 볶음이 먹고픈 오늘 스윗한 시가레트 애프터 섹스로 시작해서 어바웃 타임으로, 레이텔 맥아담스와 노트북을 거쳐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나는 고마츠 나나로 마무리를 했다. 모두가 스윗하며 사랑스럽다. 분명 속을 벌리면 치열하고 울고 짜고 하겠지만 우리는 스웟한 사랑만 기억하자. 인생 뭐 있나, 마법인데.


몽상가들로 뮤비를 만든 affection https://youtu.be/IJzHSYjR0dE 

에바 그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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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1-22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참 잘 쓰십니다.
근데 2주만에 결혼이라. 한달만에 결혼은 들어 봤지만.
요즘도 잘 살겠죠?

교관 2021-11-23 11:33   좋아요 1 | URL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ㅋㅋ 그때가 2012년 쯤인데, 지금은 아들딸 낳고 햄볶하게 잘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날이 건조하고 쌀쌀하다. 조깅을 하고 오는 도중에 역전시장의 뒷골목으로 왔다. 자주 왔던 길인데 스산해지니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칼국수집과 함바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가스가 새는지 가스 냄새가 났다. 칼국수집 주방에 딸린 작은 창으로 가스 냄새가 새 나왔다. 냄새는 알싸하고 쎄 한 것이 마치 액체 같았다. 그릇만 있다면 냄새나는 가스를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스의 냄새를 맡고 있으니 가스는 오래전 밤꽃 향기가 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려 주었다. 사라졌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밤꽃 향기 가득한 곳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책 속의 활자가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그 활자들을 손으로 읽었다. 나는 상처를 줬다. 아프지 않다고 했다. 단지 상처가 났다고 했다.


가스 냄새는 내게서 빼앗아 갔던 시간을 되돌려 주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 역시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상처를 받았다면 제대로 받았어야 했다. 나는 상처도 받고 아팠다. 그러지 못했기에 나의 내부에 어딘가가 손상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가스 냄새를 맡으며 30분을 서 있었다. 숨을 쉬면 입에서 가스 냄새가 났다.


조깅화를 들어서 보니 신발 바닥에 구멍이 나 있는 것도 몰랐다. 그 상태로 계속 조깅을 했던 모양이었다. 신발 밑창이 온통 붉은색이었는데 그것은 피였다. 구멍 난 곳으로 날카로운 돌이 들어와 발바닥이 찢어졌다. 피는 계속 흘렀는데 피가 죽죽 나오는 것을 보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발바닥은 어쩐 일인지 십자 모양으로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그곳을 벌리고 들어가면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수에게 해시시를 한 대 권하고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면 아마도 예수는 자신의 힘든 것을 내게 쏟아 낼 것만 같았다.


손등을 핥았는데 달콤했다. 이런 달콤함은 난생처음 생크림을 맛본, 그런 달콤함이었다. 천삼백 원짜리 핸드크림을 잔뜩 발랐는데 그것을 나는 맛본 것이다. 먹고 죽지 않으면 식품으로 인정해준다는데 내가 이것을 식품으로 인정받는다면 이것은 식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핸드크림인데 달콤해서 핥아먹을 수 있는 크림은 정말 획기적인 크림이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머리가 아픈데 훼스탈밖에 없어서 훼스탈 다섯 알을 먹었다. 잠을 자고 싶다. 10살 때 내가 동화 부였을 때 그때 동화부 선생님이 수업이 끝나면 책상을 물리고 침낭을 준비해와 그 속에서 낮잠을 자게 해 주었다. 마치 엄마의 양수 속에 들어가 있는 그 느낌.


그리고 잠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그대로 퍽하며 들고 싶다. 망치로 한 번에 드는 잠. 제대로 드는 수면. 정말 깜깜한 잠을 자고 싶다. 하얀 잠이 아닌. 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왕뚜껑에 두부를 올려 후루룩 먹고 싶다. 그렇게 먹으면 컵라면인데 라멘 같은 맛이 난다. 그 별거 아닌 컵라면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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