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시인이라고 불리지만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의 625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참담함과 꺼져가는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보면서 그 시대를 견뎌 냈을까.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잠시 눈을 감으면, 당시의 어려운 시대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전후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도로에는 시취가 아직 났고 건물은 복구가 안 되어서 뼈대가 다 드러나 있던 시대.

친구였던 박인환 시인은 밤이면 혼돈 속에서 어쩌지를 못해 술을 마시기만 했다.


김수영 시인은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된다는 착각.

못 사는 사람들이 잘 살게 된다는 착각.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이 된다는 착각.


착각하지 마라.라는 소리는 참 듣기 싫다.

착각하고 있네, 착각하며 살지 마라, 같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미간은 좁혀지고 골이 생긴다.


심리학자들은 이 '착각'이 인간이 벗어던져야 할 나쁜 관념인가에 대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착각은 때로는 행복과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의 제시를 해 주고 동기부여를 갖게 한다.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심리 실험이 이루어진다.

3살짜리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보여준다.

그림책에는 동화가 그려져 있는데 동화 속에는 또래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용선이.

용선이는 손가락이 4개밖에 없다.

용선이는 태어날 때부터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용선이는 손가락이 5개 있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용선이가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될까,라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묻는다.


아이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어떤 아이는 자신이 용선이의 손을 만져줄 거라는 대답을 하며 동화책을 끌어안아주었다.

또 한 아이는 용선이가 어른이 될수록 새끼손가락이 자꾸 생겨난다고 대답을 한다.

또 다른 아이는 뽀뽀해주면 그 손가락은 새싹처럼 돋아난다고 했다.

아이들은 용선이의 손가락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절대 그럴 리 없지만 우리는 아이들의 대답에서 착각이 일으키는 긍정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안 될 거라고 하는 걸 나는 될 거라고 생각하는 착각.


내 아이가 첫발을 내디디면 어디든 달려갈 거라는 엄마의 착각.


누군가는 나의 능력을 믿어 줄 거라는 착각.


오늘보다 분명히 내일이 나을 거라는 착각.


이것이 우리의 긍정적 착각이다.


잘 안 되지만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그것이 착각의 '힘'이다.

진정한 착각은 우리의 두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가 고될 때 된장국을 끓인다


하루가 고될 때는 언제일까. 나에게 있어 고된 하루라는 건 육체적 노동을 많이 한 날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고민을 하거나 끈적끈적한 불안 속에서 보낸 날이다. 날 때부터 좋지 못한 위 때문에 신경을 써버리면 물도 소화를 못 시킨다. 그러면 뒤 따라오는 증상이 부정맥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위장을 잘못 달고 태어나면 이런 문제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에는 아주 천천히 먹어야 하는데 회사를 다니거나, 누군가와 만나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면 난처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수순처럼 회사는 제대 후 잠깐 아르바이트처럼 몇 달 한 것이 고작이고 사람들과의 식사도 줄어들었다. 다행이라면 술자리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술자리는 식사자리보다는 길게 끌고 가니까.


불안은 잠에서 깨어나면 따라붙는다. 잠이 들기 전까지 조금씩 증식하다가 잠이 들면 같이 잠이 드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이 깊이도 알 수 없고 고고(높고 오래된)한 불안이 잠이 들어도 따라다닌다. 그러면 어김없이 꿈에서 기이한 형태로 나타난다. 어쩌다가 불안하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러면 왜 불안하지 않지, 하며 그것 때문에 불안하다. 불안해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 불안이라는 것은 나의 위장장애처럼 평생 같이 달고 가야 할 동반자라고 받아들였다.


어린이 때처럼 하루를 아무 생각 없이 최선을 다해서 보내고 싶은데 내일이 오기 전에 내일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불안해한다. 매일 언론에서는 불안을 감추려고 불안한 뉴스가 나온다. 그 속에 내가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근본적인 불안이 머지된다. 먹고사는 것, 생존과 생계도 불안하다. 오늘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견뎠지만 오늘 이후에는 자신이 없어진다. 불안한 것이다. 이런 불안이 갈비탕을 먹고 남은 미미한 찌꺼기 같은 것이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불안에 떨다가 집으로 들어온 날은 하루가 고되다. 많이 힘들다. 이런 날은 된장국을 끓인다. 된장국은 쉬운 문제다. 된장국만큼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실수로 잘못 끓여도 된장국은 된장국이다. 물에 불려 놓은 시래기와 된장을 넣고 끓이면 된다. 복잡할 게 없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고기가 있기에 그대로 같이 넣어서 끓여버렸다. 된장국에 보이는 기름은 그래서 생겼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처음 했을 때 몸에 파스를 8개씩 붙였다. 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내가 한 첫 아르바이트가 냉장고를 나르는 일이었다. 헤헤 거리며 호기롭게 달려들었다가 첫날 하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온몸이 그야말로 몽둥이로 잘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그래서 파스를 8개 붙이고 나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오전 8시까지 가야 했고 허허벌판 곳에서 아주 큰 냉동고 같은 차에서 냉장고를 꺼내서 포터나 개인 자가용이 오면 거기에 싣는 일을 했다. 처음에 알바 구해주는 곳에서 일이 힘드니까 첫날 해보고 힘들면 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알바 자리도 많으니까 다른 거 구해준다고. 왜냐하면 몸이 다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회사도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하니 당시에 꽤 많은 돈이 바로 들어왔다. 몸은 부서질 것 같으나 돈을 만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형들이 좋았다. 텃새도 없고 그저 옛날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무척 친하게 지냈다. 냉장고가 무거워서 내가 너무 낑낑거리면 와서 잡아주었다. 그때 분명 일은 고된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으면 그 고됨이 기분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르바이트는 단발성으로 한 달 정도 하는 일이었다. 그때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벌판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형들과 같이 걸어 나왔다. 그곳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차로 태워주는데 우리는 그냥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다 보면 기찻길이 있는데 그곳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들처럼 그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가 오뎅에 소주를 한잔씩 마셨다. 겨울이었기에 몸이 녹아내리는 그 알싸한 기분을 우리는 만끽했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온 몸, 세포 끝까지 퍼지는 느낌이 분명하게 들었다. 그때 확실하게 몸을 움직여서 얻는 고된 기분을 알 수 있었다. 늦은 저녁에 집에 오면 어머니가 된장국을 끓여 주었다. 거기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고 나면 오늘도 해냈다, 같은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된장찌개는 모든 계절에 어울리는데 된장국은 딱 이 계절에 어울리는 것 같다. 아마도 추워지는 날 속에서 늘 된장국을 먹던 추억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게다.


시간에 두드려 맞으며 어느새 훌쩍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일을 하며 사람들 틈 속에서 부대끼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이토록 살얼음판을 걷고 있을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첫 아르바이트를 할 때처럼 몸이 부서지지는 않지만 마음이 조금씩 깨진다. 파스를 붙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조각난 마음을 꿰맬 수도 없다. 내 인생에서 몸이 고생인 건 군대에서 끝이 났다. 몸이 고된 건 그에 따른 결과가 분명하게 난다. 하지만 마음이 고된 건 그에 딸려오는 결과가 명확하지 않다. 불분명하고 추상적이다. 제각각이며 원인도 모르고 그늘처럼 오래 머문다. 마치 불행과 흡사하다.


마음이 여기저기에 부딪혀 고된 날 집으로 오니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서 사라졌고 더 이상 겨울에 몸을 데워줄 된장국도 없다. 그래서 오늘 된장국을 끓인다. 한 숟가락 떠먹으면 위로 까지는 아니지만 잠시나마 예전을 추억하게 된다. 그 따뜻함과 안온감, 그리고 부드러운 포근함. 지금 호로록 먹는 된장국은 몸이 고될 때 먹던 된장국이 주던 위로에서는 멀어졌다.


라디오에서 나온 말인데 어른이란 때로 어딘가를 갈 때 택시를 탈 때 느낀다. 그래 어른이구나, 그래 어른이라 택시를 탈 수 있어서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어차피 어린이로 돌아갈 수 없고 어른도 아닌 이상한 어른이로 죽 살아야 한다면 도망가지 않는 나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천천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즐기는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늘 1면으로 실려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죄를 짓는 사람들이 주로 어른들일지라도, 조직을 일으키고 단체의 수장도 대체로 어른들이다. 된장을 만들고 시래기를 말리고 하는 것 역시 어른들이 한다. 된장국을 맛있게 먹으며 위로를 받는 것도 어른의 몫이며 누릴 수 있는 약간의 행복도 어른이기에 가능하다.


이미 어른의 세상으로 들어와 버린 지금 하루가 고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여러 불안과 걱정과 고민 때문에 마음은 고되고 또 고되다. 그럴 때 된장국을 끓인다.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해 먹자.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음식을. 끓이는 동안 된장국의 냄새가 조금씩 나를 감싸고돈다. 냉기가 흐르던 집 안에 온기가 쌓인다. 된장국은 나에게 그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길고양이들이 예전에 비해서 사람들과 공생을 잘하고 있는 거 같아서 보기 좋은 요즘이다. 내가 다니는 길목에(해안도로까지) 고양이 시체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있었는데 이제는 로드킬을 당한 길냥이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영차영차 노력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늘어난 고양이가 못 마땅한 사람도 있겠지만 고양이가 사람에게 해코지를 먼저 하는 모습은 본 적은 없다.


길바닥에 떠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삶도 길바닥을 떠도는 저 고양이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매년 이맘때 길냥이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지만 이제 느닷없이 추위가 몰아닥칠 텐데 또 이번 겨울은 어떻게 버티려나,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매일 조깅을 하면서 지나치는 길냥이들이 눈에 자주 들어온다. 길냥이들과의 인연을 한데 모아서 한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참 여러 길냥이들을 스치고 만났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269


고양이들을 원래 쳐다보지 않았는데 한 10년 전에 한 길고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도시락을 열심히 싸다니던 시기였다. 밤에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대리를 불러 집으로 오고 있었다. 한 새벽 2시 정도 되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공기의 밀도가 다르고 새벽의 운치가 가득한 날이었다. 술도 올라서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아파트 단지에 다 와서 대리기사분이 도로에 뭐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차를 운전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 도로에 고양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파트 단지 밑의 도로는 2차선이다. 가고 오고. 도로의 양옆으로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그래서 차들이 새벽에 빨리 달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도 도로 중간에 고양이 몇 마리가 있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차에서 내려 고양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어미 고양이가 죽어 있고 새끼 고양이들이 주위에 모여있었다. 아직 새끼 고양이들은 어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 채 그저 어미 고양이가 일어나기만을 바라듯이 새끼 고양이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네 마리였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만화에서나 볼법한 얼굴과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차장까지 차를 넣지 말고 근처에 주차를 시켜달라 하고 계산을 했다. 만약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어쩌면 그냥 집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 시간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도시락통에서 숟가락을 꺼냈다. 그리고 조깅을 하면서 흘린 땀을 닦느라 들도 다니던 수건도 들고 왔다.


어미 옆으로 가니 아직도 이 어두운 새벽에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새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낯선 내가 다가가도 어미 옆에 붙어 있었다. 나는 새끼들을 휘휘 저어서 이 위험천만한 도로에서 내 보냈다. 후다다닥 하더니 작은 소리로 ‘왜 그러냐, 인간 놈아’ 같은 말을 하며 주차되어 있는 차들 밑으로 숨었다. 나는 죽은 어미 고양이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서 들었다. 어미 고양이는 아직 몸이 따뜻했다. 자동차의 바퀴가 그대로 어미의 몸통을 밟고 지나갔는지 입으로 피가 나오고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다. 돌돌만 어미 고양이를 안고 아파트 단지 뒤의 저수지까지 올라갔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고양이는 저수지로 올라갈수록 몸에 남아있던 온도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리고 도시락을 퍼먹던 숟가락으로 저수지에 있는 어떤 멋지게 보이는 나무 밑을 열심히 팠다. 술이 되어서 그런지 숟가락으로 팠는데도 잘 파졌다. 열심히 파다 보니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고양이의 온도는 싸늘해졌다. 그제야 고양이를 묻어줬다. 잘 가라, 네 새끼들은 열심히 살아가겠지, 나 같은 놈도 잘 살아가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날 이후 아파트 근처 고양이들을 보면 그때 그 새끼 고양이가 죽지 않고 이렇게 커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조깅을 하면서 길고양이가 있으면 잠시 멈추어서 보게 되었다. 더운 여름에는 이렇게 더운 날에는 어떻게 더위를 이겨내려나, 추운 날에는 어디에 몸을 욱여넣어서 추위를 견디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들은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나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은 그런 잘 설명할 수 없는 엔트로피, 무질서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암튼 세상은 온통 신기한 것들과 고리 터분한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

핼러윈데이에 동네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길냥이에게 핼러윈 텐트를 만들어줌. 어찌 알고 저 안에 들어가서 포즈를 잡고 있다. 고놈 참. 야옹.


담벼락 위의 고양이처럼. 이 녀석은 마치 오브제처럼 저 마시다가 두고 간 음료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다.  무슨 맛일까냥. 내가 매일 핥는 내 사타구니의 맛일까냥.


이제 슬슬 겨울을 준비해야지. 고양이들은 느긋하다. 그러다가도 물수제비처럼 재빠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 고양이들이 우리 주위, 손 닿을 수 있는 반경 내에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1-11-08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몇번 길 옆 나무잎들 사이로 옮겨준 적이 있어요.
생명이 빠져나간지 얼마되지 않은듯 손으로 전달되던 그 따스한 체온이 왜 그리 낯설고 어색하던지...

교관 2021-11-09 11:21   좋아요 0 | URL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은 언제나 적응이 어렵고 적응이 안 될 것 같아요 ㅎㅎ
 

이제 11월이 되었다. 그 말은 겨울로의 초입에 접어들었다는 말이고 곧 크리스마스가 온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는 미국과의 분위기와 다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그저 평일처럼 훅 지나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브가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내지지도 않는다. 코로나 이전에는 어딜 가나 북적이는 북새통의 골치 아픈 날이었다. 울고 짜고 가장 행복해야 할 크리스마스이브에 싸우고 헤어지는 커플이 우르르 쏟아진다.


또 분위기가 80년대, 90년대, 2천 년대 초반과도 많이 다르다. 오히려 그때가 더 미국스럽다. 미국스러운 게 꼭 좋은 건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는 미제가 좋아 보인다. 각 가정에 케이크 하나씩 놓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며 캐럴을 들으며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2천 년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그런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면서 2015년쯤에는 성탄절 주간에 울려 퍼지던 길거리의 캐럴도 사라졌다. 그래서 배캠에서 배철수 형님도 흥청망청의 연말 분위기는 별로지만 길거리의 캐럴이 사라지고 구세군 냄비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어떻게 봐도 별로라고 했다. 그랬는데 이제 21년의 크리스마스가 되면서 코로나 시국이라 완전히 분위기에서 멀어졌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흥! 하게 되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만 유일하게 성탄절이 휴일이다. 하지만 전혀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캐럴도 다양함에서 멀어졌다. 북치는 소년이나 탄일종이 땡땡땡 같은 캐럴은 이제 아예 들을 수 없고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송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11월이 되면 나는 슬슬 크리스마스 준비를 한다. 준비를 한다고 해서 딱히 별다를 건 없다. 그저 혼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12월 25일까지 죽 이어가는 것이다. 옆에서는 또 시작이군, 같은 반응이지만 적응이 되어서 그런지 근래에도 옆에서 캐럴이 좋아서 잘 듣고 있다.


먼저 잠들기 전에는 피아노곡 캐럴을 듣는다. 그리고 일을 하는 동안 루더 벤더로스의 캐럴과 빙 크로스비의 캐럴을 조금씩 듣는다. 크리스마스 장식도 하나씩 야금야금 꺼내 놓는다.


하루키가 라디오 방송으로 ‘무라카미 라디오’를 하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특별 방송을 지금부터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까지 매일 한 시간씩 듣는다. 여기에서 하루키는 10곡의 하루키가 추천하는 크리스마스 송을 틀어 주는데 전부 다 좋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080


삼일에 두 편 정도 영화를 보는데 [영화 리뷰만 올리는 인스타 계정이 있어서 영화 이야기를 주야장천 올리다 보면 감독이 댓글을 달기도 하고, 제작사가 와서 댓글도 달고, 배우도 댓글을 달기도 한다. 심지어는 옆 나라 일본의 배우도 와서 조용하게 좋아요를 누르고 간다. 재미있다] 6일에 한 편 정도는 크리스마스 영화를 본다. 지금부터 성탄절 당일까지 죽 본다. 그래서 매년 봤던 걸 또 보게 된다. 그래도 재미있다. 시즌 영화는 8, 90년대의 크리스마스 영화들이 의외로 재미있다. ‘그렘린’부터 ‘34번가의 기적’이나 ‘패밀리 맨’ 같은 영화들. 촌스럽지만 내가 촌스러워서 더 좋게 와닿는다. 그렘린은 2편까지 있는데 그렘린 녀석들이 화난 얼굴을 하고 뉴욕, 뉴욕을 부르는 장면은 참 재미있다.


그리고 곤 사토시의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도 매년 볼 때마다 재미있다. 그건 대단히 이상한 현상이다. 볼수록 재미가 더해진다. 초반에 일본의 길거리 속 삼계탕 간판의 모습도 인상 깊다. 곤 사토시가 살아있었다면 그런 영화를 와장창 만들었을 텐데, 얼마나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저메키스 감독의 스쿠루지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럴’과 ‘폴라 익스프레스’는 나의 영원한 시즌 영화다. 스쿠루지의 목소리를 짐 캐리가 해서 그런지 정말 좋다. 폴라 익스프레스에서는 마빈 게이의 딸, 노나 게이가 소녀의 목소리를 낸다. 마빈 게이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마빈 게이의 죽음을 아는 사람들은 아마도 노나 게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어서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에 나오는 크리스마스 영화도 좋다. 재미있다. 예전만큼의 충만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시즌 영화들이 계속 나온다. 부부가 함께 나오는 ‘크리스마스 연대기’도 커트 러셀과 골디 혼이 같이 나온다. 2편까지 나왔는데 아주 재미있다. 산타가 21세기에 맞춰 우당탕 하는 이야긴데 빠져든다. 역시 하늘을 나는 장면은 크리스마스 영화의 멋진 장면이다. 작년에도 딱 이맘때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140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 나에게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드는 일이다. 내가 만드는 크리스마스 카드는 특별해서 단 시간에 만들지 못한다. 하루 만에 끝나지 않기 때문에 몇 날 며칠 카드를 만들면서 크리스마스 준비를 한다.  컴퓨터로 레이아웃을 잡고 사진을 여러 장 일일이 선별해서 작업을 한다. 텍스트도 그에 맞게 다시 집어넣는다. 그렇게 하다 보면 진짜 크리스마스라는 기분이 든다. 작업이 끝나면 카드로도 만들고 액자에도 넣을 수 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기억이나 크리스마스에 대한 생각을 주위 몇몇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라는 관념은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인데 사람들 각자가 느끼는 크리스마스는 다 다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꽤나 재미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몹시. 단지 드러내 놓고 왁자지껄하게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 나는 크리스마스에 관한 건 6세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딱 이맘때 할 수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바닷가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코로나 방역도 예전만큼 심하지 않고 해변도 오늘 이전보다 오늘 이후 더 활기를 찾게 되지 않을까. 여기는 아직 낮동안은 더워서 반팔이 어울렸다. 해변이 어둠이 이불처럼 깔려도 바람이 없어서 앉아서 맥주를 마시기 좋은 날이다.


앉아서 책을 읽으며 맥주를 홀짝이다 보면 어느새 술이 오른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며 맥주를 마시면 이만큼이나 마셔야 술이 취하지만 책을 읽으며 맥주를 홀짝이면 이상하게도 요만큼만 마셔도 술이 오른다.


고개를 들어 바닷가를 보면 바닷소리와 사람들의 소리, 마시는 맥주와 안주로 먹는 튀김을 씹는 소리가 어울리다 보면 저 달달한 불란서 식 맥주를 마시는데도 금방 술이 오른다. 술이 오르면 책을 잠시 덮고 밤바다의 정취에 취하거나 풍경을 멍하게 보는 것도 좋다. 바다는 아주 고요한데 파도소리는 의외로 크게 들린다.


등을 보이며 바다를 보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본다. 다른 이들보다 오랫동안 앉아서 바다를 보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그리움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움이 많은 사람은

계절의 바다를

당신보다

오래 붙잡아 두려 한다.


이 바닷가에서 신기한 건 여기 바다는 속초의 대포항에서 나는 냄새는 나지 않는다. 강한 바다의 짠 내가 전혀 없다. 대포항에는 겨울에도, 여름에도, 작은 횟집이 몰려 있는 곳에도, 오징어순대를 파는 곳에도 바다의 짠 내가 있지만 여기는 없다. 보통 바다는 가물면 짠 내가 더 심해지는데 여기 바다는 그런 바다의 냄새가 없다.


몹시 가물거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도, 유월에 달과 지구가 가까워져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게 나는 날에도 짠 내는 나지 않는다. 오히려 고여있는 호수에서 나는 물 비린내가 난다. 민물에서 나는 물 비린내가 여기 바다에는 도사리고 있다.


저기 수평선에 오징어 배가 일렬로 죽 떠 있으면 어두워도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보이는데 오늘은 하늘과 바다의 색이 같다. 도화지에 검은 물감으로 채색을 한 것 같다. 저기 옆에서는 오랜만에 버스킹이 한창이다. 일요일이라 일찍 바닷가에 산책을 하러 나온 동네 사람들과 이 바닷가로 온 관광객이 섞여서 노래를 듣는다.


바다를 찾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다. 분명 누군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조급해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위해 영차영차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이 지구 밑에서 지구가 잘 굴러가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제는 라디오에서 토미 페이지의 노래를 들었다. 소년 같은 목소리로 ‘알 비 어 에브리띵’을 오랜만에 들었다. 토미 페이지는 가족 중 누군가가 한국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한국을 좋아한다며 오래전 배철수의 음캠에도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라이브가 엉망이었지만 끝까지 부르려고 했다. 배철수도 그런 태도를 존중했다. 그랬던 토미 페이지는 어디로 갔을까. 프린스는 프레디 머큐리를 만나러 갔고 얼마 전에 보위도 사라졌다.


그들의 음악을 잔뜩 늘어놓고 들었던 기억은 분명 살아있는데 죽은 기억이 되어간다. 바닷가에서 술이 오르면 멍하게 바다를 보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쓸데없는 생각은 쓸데없지만 쓸모없지는 않다. 그런 생각의 바다에서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