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마당에 겨울이불을 빨아서 널어놓고 이불의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어항 속의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계속 보게 된다. 이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마당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모습이 꽤 재미있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두꺼운 솜이불은 흠뻑 젖어서 무거웠고, 그 몸을 지탱하는 빨랫줄은 아슬아슬하지만 용케도 이불을 받치고 있었다. 빨랫줄은 그런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얇지만 튼튼한 빨랫줄을 신뢰했고 빨랫줄은 긴 시간 온갖 빨래의 무게를 잘 견뎠다. 나는 마당에 앉아 물이 뚝뚝 떨어져 마당 위에 떨어진 물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마도 꿈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았기에 그토록 심도 있게 이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속의 나는 이불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방울과 함께 마당으로 슬쩍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표백제로 깨끗하게 닦아버려 물이 다 빠진 마당의 차가운 온도에 나는 물방울과 함께 떨어져 말라 없어지는 꿈을 꾸었다. 이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에서 융해되는 내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다.


마당의 한쪽에는 화단이 있었다. 화단에는 무화과나무도 있고 내가 심어 놓은 포도나무가 올곧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자라서 거짓말처럼 철이면 몇 송이 열렸다. 생긴 건 포도라는 것을 알겠지만 맛에서는 멀어진 포도였다. 약을 뿌리거나 하지 않았기에 포도는 맛이라는 것이 빠져나가버린 포도였다. 어쩌면 포도는 원래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화단의 여러 나무들 틈바구니 속에서 적은 양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이지만 신기하게도 포도가 열렸다. 그런 포도나무도 겨울을 나고 있었다.


마당에 강아지가 있었다. 개를 자본주의보다 더 싫어했던 아버지는 개가 새끼를 낳으니 직접 수프를 끓여서 일일이 먹이곤 했다. 새끼들이 수프를 잘 먹을 수 있게 무엇을 만드는 일은 온통 아버지가 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일찍 귀가했기에 왜 그러나하고 보니 강아지들에게 먹일 고기를 준비하느라 그랬다. 덕분에 무럭무럭 자란 강아지들은 마당에 앉아 있으면 내 옆에 자석처럼 와서 붙었다. 꼬물꼬물 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한없이 귀엽게 보였다.


1월의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날이면 나는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하 인간을 읽었다. 처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서 행방불명이 된 아버지를 찾는 스탠리 브로더스트와 친아버지를 찾아 나선 여대생 수전. 이들과 함께 산장으로 간 아들 로니를 찾아달라는 진의 의뢰를 받은 사립탐정 루 아처. 루 아처의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 ‘지하 인간’이다.


지하 인간을 읽으며 이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가끔씩 쳐다봤다. 우리 집 개, 깜순이가 옆으로 와서 엎드리면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면 깜순이는 나의 손길이 마냥 좋은 듯, 그 검고 윤기 나는 털을 햇빛과 나의 손에 내어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졸음에 겨워한다. 깜순이의 새끼들은 배가 불러 서로 앙증맞게 굴러다니고 있다.


이불빨래를 너는 따뜻한 겨울의 일요일이면 마당에 앉아서 고민 없이 한두 시간씩 책을 읽었다. 불안도 없고 생각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공포와 두려움도 크지 않았다. 지금은 아버지도, 깜순이도, 마당도 전부 소멸해 버렸다. 그때의 그 마당은 오로지 차가운 공기의 냄새와 입자, 그걸 덮어줄 따뜻한 햇살의 기운이 가득했던 마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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