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을 했을 때 그 속에 아줌마들도 있었다. 사실 아줌마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외모에 운동을 많이 해서 배에 11자 복근이 있을 정도다. 게다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나보다 훨씬 동생들이다. 그래서 "나 결혼하고 아이가 둘 있는 아줌마예요"라고 하지 않는 이상 아줌마라고는 전혀 알 수 없는 회원들이 있었다. 독서모임의 주최자는 나니까 나도 뭔가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보통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을 열거해서 이야기를 한다. 주로 시인 백석 이야기나 윤동주의 이야기나 저 먼 나라의 보들레르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주절주절 했다.


백석은 자야를 만났을 때 가장 찬란한 시들이 탄생했다. 나타샤부터 흰 바람벽이 있어 같은 시는 온통 자야에 대한 이야기다. 백석이 가장 좋아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역시 12살 많은 루 살로메를 사랑했을 때 가장 찬란한 시가 나왔다. 릴케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이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목숨을 걸었다. 일명 루(미 비포 유의 루가 아니다)에게 목을 매는 남자들이 많았다. 니체와 프로이트도 루의 남자들이었다. 루는 자신의 처녀성을 바친 사람은 아버지뻘의 교회 목사였다. 그 사람이 루의 재능을 눈치챈 사람이었다.


루 살로메라는 영화로도 있다. 당대의 지성인 남자들과의 염문도 볼 수 있다. 단테 역시 베아트리체를 사랑할 때 최고의 글들이 나왔고, 보들레르도 흑백 혼혈 잔 뒤발을 사랑했을 때 최고의 시가 나왔다.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은 당시에 프랑스 정부에서 금지시켰다. 판매를 하지 못하게 했다. 죄악, 탐욕, 어리석음의 인간 군상을 표현했는데 사람들이 열광하다시피 했다. 아무튼 보들레르의 시는 지금도 문학도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이기도 하다.


어떻든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독서모임에서 하면 사람들은 재미있어했다. 아줌마 회원이(라고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고) 글을 잘 쓰려면, 문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하지만 나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을뿐더러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인문계 고교를 나왔지만 거기서 사진부 활동만 하다가 졸업을 했다. 그리고 건축을 전공했다. 어떤 식으로 보면 나는 자연계 쪽이지만 건축에 대해서는 기둥도 모른다. 그런데 또 소설을 좋아해서 한때는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끼인 존재 같은 인간이다. 그러니 내가 글을 잘 쓴다던가, 문학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알 수는 없다. 이런 걸 알려면 작가들의 강연을 듣거나 그들의 서적을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쩌다가 소설에 빠져서 소설을 읽고 또 읽다 보니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이 너무 없고 유명 작가들에게 빠져 있지 않는 이상 쉽게 그들의 콘텐츠를 소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독서모임을 조촐하게 하며 우리끼리 어떤 응어리 같은 것을 풀었다. 문학이라는 게 사실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마도 문학이라는 건 계란찜처럼 별거 아니게 너무나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이지 싶다.


계란찜, 계란찜이라는, 이거 먹고 싶으면 언제나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다. 그저 물만 넣고 휘휘 저어서 폴폴 삶아 시간만 되면 맛있는 계란찜을 맛볼 수 있다. 계란찜이라는 건 묘해서 특별히 맛있는 계란찜은 있지만 딱히 맛이 없는 계란찜은 없다. 식어도 맛있는 것 같다. 문학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특별하게 좋은 문학은 있지만 딱히 안 좋은 문학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좋지 않다고 느낀 문학이라는 건 문학을 읽은 후니까 그것대로 아 이런 건 좋지 못하구나, 라며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문학은 접하지 말아야지 하는 경험이 생긴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모르지만 글이라는 건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글이라는 형태는 일단 우리가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글이라는 건 어딘가에 쓰여야 하고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일단 공책이든, 노트북이든 쓰면 된다. 무슨 글?라고 묻는다면 나의 글, 자신의 글을 쓰면 된다. 여기서 자신의 글이라 해서 나 자신의 글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글도 자신의 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글이 쓰고 싶을 때 내 아이의 얼굴을 글로 써보면 재미있다. 웃을 때 이런 모습이 되는구나, 여기에 점이 있었네, 잠을 잘 때 내 아이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같은 모습이 떠오르며 다 적고 나면 몹시 재미있다. 아무래도 글은 재미있게 적으면 좋겠지. 내 아이의 모습을 글로 적다 보면 글이 순식간에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다 쓰고 난 글을 보면 또 미소가 지어진다.


그럼 이제는 내 엄마의 얼굴을 한 번 써본다. 하지만 내 아이의 모습을 적을 때처럼 수월하게 적히지는 않을 것이다. 도대체 주름이 몇 개가 있는지, 짐꾸러미처럼 잠을 든 모습에서, 갈라진 발 뒤꿈치에서 나는 어떤 무엇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내 엄마의 모습을 내가 곧 답습하게 된다. 내가 내 엄마 품에서 벗어나 내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듯이 내 아이도 나를 벗어나 자신의 울타리 속으로 갈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별거 없다. 별거 아이야. 계란찜과 같은 것이다. 늘 곁에 있지만 관심 가지지 않으면 잘 모르는, 늘 접하지만 손을 뻗지 않으면 촉감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재미있게 본 오징어 게임이나 듄 같은 영화의 기초는 시나리오다. 문학이다. 거기서 시작한다. 매일매일 듣는 노래는 가사에 음을 붙은 것이다. 가사는 바로 시다. 역시 문학이다.


문학, 즉 예술이라는 게 우리가 밥을 먹고사는 생활에 불필요할지 모른다. 없어도 무관하다. 하지만 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를 서로에게 이어준다. 문학과 예술이 발전한 나라는 대체로 몹시 선진국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계란찜은 참 별거 아니어서 별거다. 계란찜과 문학 그거 뭐 별거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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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1-03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교관 2021-11-04 12: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좋은 하루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