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시간이라는 주제로 예전에 작업을 한 번 해본 사진 중에 하나다. 이 사진은 디지털이지만 만약 초현실 사진의 대가 ‘제리 율스만’이라면 필름으로 다중노출을 하여 촬영하여 그 필름에 또 다른 필름을 올리고,, 암튼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초현실 사진을 만들었겠지만 나는 그저 포토샵으로 휙휙 작업을 해서 액자에 맞게 출력을 했다.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을 보면 시계가 녹아내리고 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우리의 의문점이며 과제이며 당면한 현실이다. 시간의 흐름은 개개인마다 다르고 그 시간이 되었을 때 바라보는 방향 또한 다 다르다. 이 세상에서 순수한 것이 제일 무서운데, 요컨대 자연재해도 순수한 것에 해당이 되고, 아이도 순수해서 깔때기 없이 말을 하니까 무섭다. 하지만 이런 순수한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시간이다. 시간이란 과학적으로의 접근은 거의 불가능하니 대체로 철학 또는 예술의 힘을 빌려 시간에 다가서는 노력을 해왔고, 하고 있고, 계속할 것이다.


마블 시리즈 중에 가장 재미가 떨어졌던 이터널스에서도 좋았던 점 하나를 꼽자면 초반에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이 나온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든다. 노래의 초반에 시계 초침 소리, 시계 종소리가 나오며 둑닥둑닥둑닥 하더니 웅장한 베이스가 디링 하며 시작한다. 이 부분이 가장 소름 돋도록 멋진데 이터널스에서 과감하게 사용했다. https://youtu.be/r8zsNX-vPD0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이 음악적으로 왜 좋은지 전문가처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은 잡아당기는 흡입력이 굉장하다. 핑크 플로이드를 처음 들었을 때가 학창 시절이었는데 그때는 열심히 헤비 한 음악을 듣고 있을 때였고 누군가를 향해 공격을 하고 싶었던 와중에 들어서 그런지 핑크 플로이드의 연주와 노래는 마치 나에게 하나의 길잡이 같은 존재처럼 여겨졌다. 연주를 듣고 가슴이 벅차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핑크 플로이드는 그 어려운 걸 해내더라고. 요즘은 유튜브로 라이브를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우리나라 말로 도대체 몇 년을 해 먹는 거야? 하지만 더 해 먹었으면 좋겠는데. 전 세계에서 활동을 가장 길게 하는 그룹 중에 단연 꼭대기에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 암실 구석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을 들으며 벽에 머리를 대고 노래와, 나와, 학창 시절과 시간에 대해서 한 10초 정도는 고민을 한 것 같다. 시간을 돌리는 영화도 수없이 많이 나왔다. 그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영화는 우디 알렌의 ‘미드나잇 인 파리’다. 작가였던 주인공 길은 자정이 되면 쟁쟁하던 극작가들이 아무렇지 않게 길거리를 다니고 와인을 마시는 곳으로 시간여행을 가게 된다.

파리의 명품을 바라는 이레즈와 빗속의 파리를 걷고 싶어 하는 길은 서로 다르다. 일본의 5분 드라마 ‘오늘의 네코무라 씨’을 보면, 한국이 좋아서 한국에서 산후조리를 했던 코유키가 이런 대사를 한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좋아해서 결혼한 사람들이 서로를 계속 좋아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 여하튼 길과 이레즈는 서로 다른 점 때문에 끌렸지만 그 이유로 헤어지게 된다.


영화 속에는 스콧 피츠 제럴드와 헤밍웨이, 저 위에서 잠시 언급한 살바도르 달리도 막 나온다. 거트루트에, 그녀의 애인이자 뮤즈인 엘리스도 너무 비중 없이(웃음) 아무렇지 않게 휙 나온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다른 점이 있지만 우디 알렌 감독이 전부 한 곳에 집결시킨다. 왜? 영화잖아? 어려울 것 없잖아? 주인공 길이 과거로 가는 마당에. 이런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부록이랄까. 미술관 가이드 역으로 칼라 브루니가 나오는데 다 알고 있듯 가수, 배우이자 그 남자의 여인이다.

길과 이레즈가 폴 커플과 걸었던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은 아주 아름답다. 원래 베르사유는 루이 13세가 사냥용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지만, 14세로 넘어오면서 건물은 증축을 감행하고 명령에 의해 대정원을 착공하게 된다. 죽기 살기로 거대 정원을 가꿨다. 베르사유 궁에는 많은 방이 있다. 그중에 유명한 방이 ‘거울의 방’이다. 영화 후반부에 길을 미행하던 장인의 끄나풀이 시간이 후퇴한 베르사유 궁으로 가게 되는데, 하필 거울의 방에 떨어져 막 헤매게 된다.


거울의 방이 가장  드러나는 영상은 2011년쯤인가 샤를리즈 테론의 자도르 디올의 광고였다. 티브이판 짧은 버전이 있고 풀버전이 있는데 풀버전을 보면 거울의 방을 통과하면서 그간 디올 사랑했던 세기의 배우들을 그래픽으로 살려낸다. 대역이 아니라 그래픽으로 살려냈다. 그레이스 켈리와 샤를리즈 테론이 살짝 입맞춤을 하고 메릴린 먼로가 자도르 디올의 향수를 들고 기쁨에 젖은 모습도 보인다.


광고 속에는 허리를 강조하고 코르셋처럼 허리끈을 묶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크리스천 디올의 특징이었다. 사치의 대명사로 오로지 귀족들만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주름과 치마의 꽃으로 무장을 했다. 샤넬은 이런 귀족들의 스타일이 싫어서 검은색과 흰색의 조화로 몸을 조이지 않는 옷을 디자인했다. 샤넬은 어릴 때 수녀원에서 자랐기에 수녀들을 엄마, 언니로 생각했다. 디자이너가 되었어도 수녀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무의식 중에 디자인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샤넬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자. 지금 하는 이야기보다 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암튼 귀족들의 사치라고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았지만 크리스천 디올은 꾸준하게 인기를 얻어 간다. 최근(이라 해도 근 10년)에는 모나코에서 왕가의 공식행사 때 샤를린 왕비가 디올의 의상을 입고 있다. 재미있는 건 수영 선수 출신의 샤를린 왕비의 얼굴이 샤를리즈 테론의 얼굴과 닮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광고업계가 준비하는 과정? 노력을 보면 소름 돋지? 샤를리즈와 닮은 샤를린 왕비는 그레이스 켈리와 자주 비교되었다.

https://youtu.be/_SrwvtAhxbE 샤를리즈 테론의 거울의 방에서 촬영한 디올 광고 영상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서 길이 과거로 가서 콜 포터를 만난다. 맙소사. 콜 포터를 보고 비틀어진 코가 한번 더 비틀어지고(주인공 오웬 윌슨의 코, 다 알죠?)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에게 이끌려 다른 술집으로 간다. 피츠 제럴드의 역작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면 제일 첫 장에 ‘다시 젤다에게’로 포문을 연다. 1920년대에 피츠제럴드는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글쟁이였다. 출판사들은 그의 글을 내고 싶어 안달했고, 피츠제럴드는 그런 미국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영화 속에는 우리의 로키 형, 톰 히들스턴이 피츠제럴드다.


피츠제럴드의 실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무척 잘생겼다. 톰 히들스턴도 그러하고. 육군 소위로 장교복을 입고 있는 피츠제럴드의 외모는 누구나 반할 만큼 멋있었다. 하지만 1차 대전이 끝나고 군복을 벗어버리자 피츠제럴드는 한낱 볼품없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광고 회사를 다니면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성적 하락으로 중퇴를 하고 광고 문구를 만들면서 꾸준하게 소설을 썼다. 하지만 그의 글은 출판사에서 언제나 퇴짜를 맞았다. 그런 생활을 하던 그의 눈앞에 일생에 한번 사랑에 빠질만한 여자가 나타났으니, 그 여자가 바로 조지아 주와 앨라배마 주에서 가장 미인인 ‘젤다 세이’였다.

젤다는 발랄했고 기가 세고 승부욕이 강했다. 무엇보다 예뻤다. 젤다도 피츠제럴드를 사랑했지만 가난한 남자와 사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녀는 명문가 집안의 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고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젤다는 가난한 삶을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는 젤다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피츠제럴드가 그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글밖에 없었다. 젤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런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서 피츠제럴드는 세상이 놀랄만한 글을 써야 했다. 아아 사랑에 목숨을 건 스콧,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한다. 오직 글만이 자신을 내보일 수 있었던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오로지 젤다를 얻기 위해 글을 썼다. 그녀는 피츠제럴드를 사랑했지만 별 볼일 없는 피츠제럴드와 약혼을 파기한다. 그만큼 젤다는 냉정하고 현실에 가까운 여자였다. 피츠제럴드는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두려움에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죽어라 글을 썼다.


고통 끝에 펴낸 자신의 첫 소설 ‘디스 사이드 오브 파라다이스’ 덕분에 젤다가 출판 일주일 후에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다. 젤다 역시 글쟁이였다. 당시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이 그냥 개츠비였는데 ‘위대한’을 삽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젤다와 출판사의 권유로 ‘위대한’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은 디카프리오가 연기했던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봐도 나온다. 그렇게 펴낸 ‘위대한 개츠비’는 실패에 가까웠다. 팔리지 않았다. 피츠제럴드는 경제적 궁핍 속에 시달려야 했지만 2차 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붐이 일었다. 시기가 맞았던 것이다. 바로 군인들 자신의 모습이 개츠비에 투사되었기 때문이었다. 1925년에 2만 부에 거친 책이 군인들 덕분에 15만 부가 넘어 팔리게 되었다. 비평가들은 개츠비에 대해서 호평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50년대의 미국에 있는 고교에서는 필독 도서로 자리를 잡았고 이후 전 세계가 사랑하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의 점화가 바로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다. 젤다를 완전히 자신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젤다가 원하는 파티를 매일 열었고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젤다가 원하면 그는 다 들어주었다. 매일 파티를 즐기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젤다가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다. 젤다와 남편인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로 성공을 거두자 명실상부한 뉴욕의 셀러브리티 커플로 알려진다. 톡톡 튀고 독립심이 강하고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그녀를 당시의 미디어와 사람들은 추앙했고 사랑했다.


젤다는 그런 삶을 더욱 사랑했고 옆에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가 늘 지켜봐 주었다. 도취될 수밖에 없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여자가 늘 웃고 있었다. 부족함이 없었다.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가 빠져 들었고 연일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여 술과 문학과 재즈를 즐겼다. 영원할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이 모든 생활이. 파티가 지속되고 개츠비 이후에 개츠비만 한 글이 안 나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피츠제럴드의 절친 헤밍웨이가 파리의 한 파티장에서 피츠제럴드를 찾아간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술잔을 한 손에 쥐고 상류층의 복장을 하고 포마드로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피츠제럴드를 찾은 헤밍웨이는 “이봐, 자네. 요즘 괜찮은가?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러자 피츠제럴드가 “이보게 친구, 잘 보게. 이것이 삶이라네.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자 한잔하고 가게나”라고 상상해서 써봤다. 암튼 이런 장면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잘 나온다. 절친이었던 헤밍웨이가 왔음에도 예전 같지 않았다. 변해있었던 것이다. 헤밍웨이는 후에 그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그의 옆에 있는 젤다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가 그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피츠제럴드와 젤다는 돈을 물 쓰듯 썼다. 술을 마시면 언제나 만취였고 호텔의 분수에 뛰어들었고 신문의 일 면을 장식했다. 연일 열리는 파티와 파티 사이에 써 내려간 단편은 거액으로 출판사에 팔려 나갔다. 피츠제럴드의 이 모든 행동과 삶은 오로지 젤다를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젤다와 개츠비 속의 데이지를 욕하지만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한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의 눈과 촉은 젤다를 향해 있었고 그녀가 움직이면 그의 촉도 같이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세 시간이 걸리는 곳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녀가 바라는 옷이 있다면 어떻게든 구해서 선물하지 않았을까. 투정을 부리면 받아줬을 것이고 눈물을 흘리면 안아줬을 것이고 매일 밤마다 그녀의 귀에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젤다의 사진을 보면 헤어 스타일이 독특했고 의상도 화려했다. 당시에 가장 핫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부족함 없이 돈을 쓸 수 있었다. 누구나 원하고 바라는 삶일지도 모른다. 부족한 것 없는 집안에서 철없이 자란 여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하지만 죽을 때까지 철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대로 꽤 멋지고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에서 코유키의 대사처럼 좋아하는 사람끼리 결혼해서 계속 좋아하기는 어렵다. 젤다와 피츠제럴드의 방탕하고 호화로운 생활은 십 년 만에 비극을 맞이한다.


미국은 29년에 대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피츠제럴드의 소설도 파국을 맞이하며 끝을 맺게 된다. 대신 미국의 문학적인 영웅을 새롭게 맞이하는데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였다. 문학의 사조가 바뀌었고 피츠제럴드의 글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헤밍웨이가 글을 통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며 총구멍을 자신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한 것에 비해 피츠제럴드는 어두운 곳에서 죽을 때까지 글을 썼다. 설령 말년에 쓴 글이 왕년의 글을 넘어서지 못하더라도 글쟁이의 본분을 잊지 않은 쪽은 피츠제럴드가 아닐까.


젤다는 몰락한 이후 자신의 퇴락해가는 모습에서 우울증에 시달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이 있었고 머리카락은 힘이 없어서 더 이상 이전처럼 예쁘게 말리지 않았다. 늙어가고 힘 빠진 모습에서 우울해지는 여자가 어디 젤다뿐이겠는가. 할머니에게 “곱게 나이를 드셨네요”라든가 “예쁘게 늙었네요”같은 말을 집어치우자. 나이라든가 늙었다는 말을 빼고 하자. 할머니라도 예쁘고 싶고 곱고 싶으니까.


젤다는 자신의 문학 실력을 살려 책도 내려고 했지만 다른 곳만 쳐다보는 출판사들 뿐이었다. 우울증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과정을 피츠제럴드가 소설에 그대로 사용을 해버린다. 그 사실로 인해 젤다의 병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깊은 배신을 받았다. 젤다의 일기와 편지들은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 그대로 남아있을 뿐 젤다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우울은 너무나 깊고 컸다. 자신을 추앙했던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면 수군거렸고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젤다가 지나가, 저 여자 매일 밤새도록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진탕 마시고 담배도 지폐에 불을 붙여 피웠대, 그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 좀 도와주지 말이야, 이젠 볼품없는 얼굴이 되었군, 남편의 글도 이젠 한물갔대나 봐, 남편은 젤다의 퇴락해가는 이야기를 소설에 섰대, 불쌍하구만.


만약이지만 젤다가 피츠제럴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데이지처럼 톰 뷰캐넌 같은 남편을 만나서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더라도 수면 위에서 평탄하게 살아갔을까. 1940년에 피츠제럴드가 죽고 정신병원을 오가던 젤다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정신병원의 화재로 인해 3월의 봄날에 그녀는 남편 곁으로 가버린다. 그런 젤다와 피츠제럴드의 최고 정점의 모습이 영화 속에 나온다.

어디까지 했지? 아 그래, 그래서 주인공 길이 젤다와 피츠제럴드에 이끌려 다른 술집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저기 보이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깃털을 달고 춤을 추는 댄서가 보이는데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춤꾼, 퍼포먼스의 대가 ‘조세핀 베이커’다. 조세핀은 늘 저런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조세핀의 얼굴을 잘 뜯어보면 참 예쁜 얼굴을 가졌다. 웃는 모습도 아기처럼 아주 해맑다. 하지만 그녀는 춤을 추며 퍼포먼스를 위해 얼굴을 늘 변형시키거나 일그러트렸다. 마치 우리나라 춤의 인간문화재 공옥진 여사처럼 말이다.

우디 알렌이 왜 조세핀 베이커를 영화에 넣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조세핀 베이커 역시 빌리 홀리데이만큼 파란만장하고 아픈 삶을 살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식모살이를 하다 13세에 길거리 댄서로 데뷔를 하면서 2년 후 세인트루이스 합창단 보드빌 쇼의 단원으로 본격적인 예술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조세핀을 일컫는 호칭은 ‘블랙펄’이다. 헤밍웨이의 극찬을 받으며 조세핀은 애칭대로 블랙펄의 위용을 떨친다. 프랑스로 건너가서 펼진 조세핀의 공연은 예술의 본거지인, 1920년 대의 프랑스에 문화적 충격을 알렸다. 미국 태생인 조세핀이 어떻게 프랑스인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을까.


조세핀도 샤넬처럼 전쟁과 첩보원 역할을 해야 했다. 조세핀이 죽었을 때 프랑스에서 미국인이었던 조세핀에 대해서 국장처럼 장례식이 치러졌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군악대가 동원되었고 그녀는 프랑스인들에게 영원한 블랙펄로 남았다. 조세핀의 일대기를 알아서 인지 영화 속에 잠깐 등장하는 조세핀이지만 감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멍하게 앉아있는 길은 작가이니 아마도 조세핀을 실제로 보는 것만으로 맙소사, 세상에, 조세핀 베이커잖아? 같은 표정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길의 표정이 그렇다.


길이 입을 벌리고 조세핀의 춤을 본 다음 날, 헤밍웨이와 함께 거트루트 스테인의 집으로 간다. 스테인의 집에서 문이 열리고 헤밍웨이가 안녕! 엘리스!라고 한다. 엘리스는 가벼운 인사로 대답하고 장면이 바뀐다. 아주 잠깐 등장하는 엘리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잠시 스쳐가 버린 엘리스는 미국 작가 거트루트 스테인(거츠)의 비서이며 거츠의 동성 애인이기도 하다. 거츠는 평론가로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검토했다. 그중에는 주인공 길의 작품도 검토를 한다. 작품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애인이자 작가인 엘리스와 많은 것을 공유했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거츠의 손을 거쳤다. 거츠는 헤밍웨이가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또 헤밍웨이는 당시의 문화를 교류했던 피카소, 모네, 조이스와 에즈라 등 작가들과 영화감독을 존경했다. 그중에서 거츠가 단연 독보적이었다. 거츠의 옆에는 조력자 엘리스가 있었다. 두 사람은 아주 사랑했다.

거츠와 엘리스가 운영했던 토클라스의 문학 살롱에는 많은 작가들이 모여들어 문학적 교류를 나누었다. 그 살롱이 영화 속에 보이는 저 집이다. 여기 살롱을 찾은 작가들로 티에스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이 이 커밍스, 제임스 조이스, 폴 발레리, 마르셀 프루스트, 장 콕도 등이 있다. 이들은 세계문학의 흐름에 대해서 고민하고 고충을 이곳에서 주도했다.


왜 미국 작가들이 파리로 몰려들었을까.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지금까지도 너무 길게 적어 버렸다. 도대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디로 막 튀어 가버리는지도 모르게 미친 것처럼 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계의 초침은 느리게 지나가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멈추거나 쉬는 시간을 가지지만 시간은 그 시간마저 쉬지 않고 이동을 한다. 인간의 심장 역시 쉬지 않고 살아있는 동안 뛴다. 아무튼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했다. 시간 여행을 한 미드나잇 인 파리는 너무 재미있고, 쟈도르 디올 속에 등장한 그레이스 캘리는 너무 예쁘고, 우리는 시간의 문학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완성해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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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병실 생활을 할 때 내가 본 것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건 나의 착각인지, 아니면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 병실생활로 인해 피곤한 탓인지 잘 설명할 수는 없다. 허나,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서 오 분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대학병원이 있으면 편리하다. 여러모로 시간과 차비 같은 것이 절약이 된다. 덕분에 간병인을 따로 부리지 않고도 어머니가 낮에는 병간호를 하고 내가 일을 마치면 야간에 아버지를 돌봤다. 사실 야간에 병간호를 딱히 해야 하는 건 없다. 밤이 도래하면 가래소리가 들끓는 내과병동도 고요한 잠의 세계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상이 있으면 간호사를 호출하면 된다. 실지로 내가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아버지의 똥오줌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비닐장갑을 끼고 기저귀를 갈았지만 언젠가부터는 장갑이 귀찮아서 그냥 맨손으로 하게 되었다. 손에 똥이 묻으면 세면장에 가서 씻으면 그만이었다. 일반적으로 손에 똥이라는 게 묻으면 더럽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고, 반복이 되면 무뎌져서 그저 씻으면 그만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병실은 6인실이었다. 인원이 더 많은 병실이 있었지만 6인실에 입실했다. 대학병원에 아버지가 입원을 하고 좋은 점이라면 겨울에도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샤워실에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시간을 들여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에서 샤워를 하고 나면 어떤 불행한 생활을 하더라도 조금은 괜찮아진다. 샤워실도 크고 예열도 필요 없이 바로 뜨거운 물이 나와서 집에서 씻지 않고 병원에서 샤워를 매일 할 수 있었다. 대중 목욕탕에 가지 않는 나로서는 집에서 겨울에 샤워를 할 때에는 보일러가 예열을 해야 하니 바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서 늘 별로였다. 게다가 아버지가 병실생활을 하고 나서부턴 집에서 샤워를 할 시간도 없었다. 집에 오면 잠들기 바빴다.


아버지가 잠이 들고 병실의 숨소리도 잦아들면 나는 밤 11시가 넘어 샤워실에서 샤워를 했다. 그 시간 이후로는 샤워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떤 날은 자정이 넘어서 샤워를 하기도 했고, 새벽 두 시에 샤워를 하기도 했다. 그 큰 샤워실에 혼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면 힘든 것도, 괴로운 것도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잊을 수 있었다. 이 혹독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느낌,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은 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었다. 그래서 매일 늦은 밤에는 샤워를 했다.


샤워실은 세면장과 붙어 있었다. 환자와 가족들은 보통 20시까지 세면장과 샤워를 하느라 분주하다. 또 어머니와 교대를 하고 병실을 나설 때가 오전 7시나 8시쯤인데 그때에도 북적인다. 그러니까 세면장과 샤워실에는 거의 환자와 가족들로 붐빈다. 거기에는 대형 냉장고가 있어서 가족들이 집에서 들고 온 밑반찬들이 그 속에 가득 들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그런 공간이 밤이 도래하면 누구도 없다는 게 참 신기했다. 마치 도심지 한복판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밤의 도심지는 인파로 북적이다 새벽이 되면 황폐해지는 모습처럼 말이다.


6인실의 병실에 동안 병실에는 환자들이 속속 교체되었다. 환자 가족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환자가 점점 악화될수록 가족들의 얼굴도 굳어가거나 환자가 쾌유되어서 퇴원을 할 때는 가족들의 얼굴도 밝아졌다. 가족들은 환자가 조금씩 몸이 나아갈수록 서로 환자의 아픔에 대해서 공유했다. 병실생활을 오래 한 가족들은 신입 간호사보다 더 잘 안다. 수치나 환자를 드는 방법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 수간호사 급이다. 환자가족들은 어떤 식으로 아프고 심각해지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생활이 일 년이 넘어가니 나는 지쳐갔다. 매일 밤 간이침대에 몸을 겨우 욱여넣어서 잠이 들었다가 아버지의 신음 소리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면 일어나야 했다. 그래서 오전에 어머니와 교대를 하고 집에 가면 그대로 뻗었다. 그리고 알람 소리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일하러 갔다가 저녁에 병원에 와서 밤이 되면 샤워를 하며 피로를 조금이나마 잊으려고 했다.


그래서일까, 하루 밤에 샤워를 두 번씩 한 적도 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상식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게 있다. 왜 하루 밤 사이에 병원에서 샤워를 두 번이나 하냐고 물어도 딱히 언어로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하루 밤 사이에 두 번이나 샤워를 하는 걸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잠이든, 늦은 밤에 샤워를 했기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요한 밤에 샤워실에 들어가 손잡이만 돌리면 뜨거운 물이 과감하게 콸콸 나온다. 틀자마자 나오는 뜨거운 물이 머리를 타고 다리 밑으로 흘러내리는 기분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행복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매일 매시간 속에서 오직 샤워만이 유일하게 느끼는 해방감이었다. 나는 씻는 건 담배연기만큼이나 싫어하는데 샤워는 좋아했다.


아버지도 낮동안 병마와 싸우느라 피곤했던지 일단 잠이 들고 나면 아픈 고통도 잠에 잠식되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동안 잠시 세상사를 잊을 수 있으니까 샤워를 하는 시간도 조금씩 늘어났다. 당시에는 샤워를 하는 게 병간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힘든 것들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이 순간이 곧 지나가리라 빌었지만 참으로 끝이 보이지 않았었다.


샤워를 하면서 양치질도 두 번씩 했다. 나는 어쩌면 아버지의 병간호가 힘들어서 샤워를 하는 동안 큰 이벤트가 일어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 생각이라는 게 어디까지가 정확한지 모호하게 된다.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정신에서 힘이라는 것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샤워를 하는 동안 간호사들이 나를 찾고 난리가 났다. 아버지의 보호자인 내가 자리에 없어서 잠이 든 아버지가 폐에 찬 가래를 뱉지 못해서 일이 난 것이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체크를 하고 있다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간호사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내가 자리에 없어서 아버지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새벽에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않을 수 있다. 내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미지의 힘이 다가와 그 생각을 뽑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안 할 수 있다. 샤워를 하는 동안 걱정도, 고민도 조금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샤워를 하는 동안 아버지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어쩌면 샤워가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에 도달했다.


아버지는 치료실로 옮겨져 폐에 찬 가래를 기계로 빼냈다. 아버지는 다시 병실로 옮겨졌다. 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다.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을 한 손으로 번쩍번쩍 들던 아버지는 더 이상 없어졌다. 나는 그 뒤로 새벽 샤워를 자제했다. 아직 사람들이 샤워실과 세면장을 이용할 시간에 나도 씻었다. 샤워는 하지 않았다.


간혹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면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니 샤워나 하고 가라고 했다. 사실 병문안을 와도 병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음료수나 먹을 걸 사 와도 아버지는 못 드시고 나도 먹을 생각이 없고, 그러다 보면 먹는 건 전부 병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밖에 없다. 굳이 뭔가를 사들고 와야 한다면 기저귀가 가장 필요하니 그걸 사 오라고 했다. 그게 가장 필요한 물품이었다. 드라마에서는 과일 바구니 또는 꽃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가지만 쓰레기만 많이 나오고 별로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일을 마치고 밤에 병문안을 오면 샤워나 하고 가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면 처음에는 뭐야? 샤워라니?라고 하던 녀석들도 나의 손에 이끌려 샤워장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난 다음에는 가끔 병원에 와서 샤워를 실컷 하고 집에 가곤 했다. 집에 가서 겉옷을 벗고 그저 따뜻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푹 잠이 들면 된다.


밤새 병원에 있는 나에게 연락을 하고 와서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샤워실에 제한은 없었다. 새벽의 어느 시간이고 간에 들어가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면 된다. 자기 몸을 닦을 수건만 들고 오면 된다. 나도 모두가 잠든 새벽에 샤워가 너무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야간에 샤워를 하는 걸 참았다. 친구들도 가끔 병원에 들러 샤워를 하는 것은- 일을 마치고 곤죽이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면 그대로 뻗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매일 뜨거운 물을 틀어서 샤워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병원에 오면 큰 샤워장에서 콸콸 나오는 뜨거운 물에 비누칠을 해서 샤워를 하면 된다. 집에서 씻는 거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하다. 게다가 집에서처럼 샤워를 한 다음 바닥이나 벽면에 튄 비눗물을 닦아내지 않아도 된다.


꺼져가는 병원 복도의 어둠을 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복도 끝이 어둠으로 물들면 그 속에 갇혀 몸이 조금씩 어둠에 먹히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은 살아있어서 몸을 움직일 줄 안다. 그리고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면 조금씩 다가와 나를 머리부터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 기분이 기이하지만 아주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기분과 흡사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이 데일 정도보다 조금 덜 뜨거운 물, 그래도 아주 뜨거워 살갗이 벌겋게 익어버릴 정도의 뜨거운 물에 몸이 잠식당하는 그 묘한 기분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한 번 적어야지 생각했다. 샤워를 하면서 이 큰 공간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샤워라면 매일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복도가 어두워지고 아버지가 잠이 들고 병실이 조용해지면 나는 샤워실에 가서 샤워를 했지만 아버지의 그 일 이후 나는 샤워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초였다. 밖이었으면 일을 끝내고 친구들과 연탄길(이라고 하는 단골 고깃집. 고기를 연탄에 구워 먹는다)에 들러 수다를 떨며 한 잔 할 시기였다. 불과 1년 전에는 그렇게 즐겁게 연말을 보냈는데, 같은 생각에 젖어들었다.


친구 녀석이 연락이 왔다. 샤워를 좀 하러 가도 되냐고. 나는 내 병원도 아닌데 마음대로 와서 샤워를 하라고 했다. 그 녀석이 사는 집은 병원이 있는 곳에서 버스를 타고 반대편으로 끝까지 가서 내리는 정류장이 있는 곳이다. 아주 동떨어진 곳이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집에서 부모님이 하던 청과물 장사를 이어받아서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이 병원에 온다는 건 일부러 오거나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오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그 녀석은 장사가 생각만큼 되지 않아 그 자리에 식당을 차리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평생 그 일을 해 오신 부모님과 의견이 대립했다. 고민이 많아 보였다. 자주 그 얘길 했는데 그 고민을 말하러 오는 김에 샤워나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어두워진 병실의 간이침대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잠이 들고 침실의 다른 환자들 역시 잠이 들었다. 병실의 환자 가족들 역시 피곤에 지쳐 속속 잠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깊은 잠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편안한 척해도 불안과 두려움, 고민이 쌓여 잠의 질까지 앗아간다는 걸 나는 안다. 나도 친구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꿈을 꾸지는 않은 것 같다.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기에 고개가 꺾여 목이 아파서 눈을 떴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이상하다, 왜 녀석이 안 오지. 그렇게 생각을 하며 폰을 보니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어서 샤워만 하고 돌아가겠다는 문자였다. 10분 전에 들어온 문자였다. 나는 일어나서 샤워장으로 갔다. 아버지의 6인실이 샤워장에서 가장 가까운 병실이었다. 누군가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실 문 밖에서 조용히 친구를 불렀다. 친구는 샤워를 하면서 대답을 했다.


복도 벤치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다. 친구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서 김을 폴폴 풍기며 나왔다. 시원해 보였다. 겨울에 느끼는 시원함은 샤워만 한 게 없다.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눴다. 늦은 밤, 이른 새벽, 대학병원 복도라는 묘한 공간감 때문인지 평소에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 속에는 낙관적이지 못한 이야기도 많았다. 나는 친구의 힘든 것들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결국 내가 처한 입장만을 열거하게 되었다. 피곤하고 힘들고 지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내일이 이 지옥 같은 생활의 마지막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말을 했다. 친구는 묵직한 모습으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친구는 대뜸 그랬다. 가치가 있나? 호전된다는 보장이 없이 생명연장이 가능해졌을 때 일 년 정도 지나면 휠체어를 타고 누군가 밀어야만 이동이 가능하고 누군가 씻겨줘야 하는데, 무엇보다 본인이, 당사자가 주위에 짐이 된다는 고통을 끊임없이 가지는데 가치가 있나 하는 거야. 나는 그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족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아버지를 살리는데 가치라든가 생명연장이라든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시스템에서 부품이 하나 나가면 곧바로 또 다른 부품으로 교체되듯 지금 당장 어딘가 허물어지면 그걸 메워야 했다. 레지던트는 나날이 나를 불러 이런 이벤트가 일어났을 때 관 삽입부터 해서 가격과 시간에 대해서 타협을 요구했다. 나는 친구가 하는 물음에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 시가 넘었다. 친구는 일어나서 가야겠다며 나에게 잘 있으라고 했다.


내일은 다 잘 되겠지. 라며 친구는 돌아갔다. 나는 친구의 뒷모습을 봤다. 친구의 뒷모습을 보는 건 새삼 처음인 것 같았다. 뒷모습이라는 건 보여주지 않으려 하거나 잘 보지 않게 된다. 거울을 봐도 거울에 비친 나의 정면을 보려고 하지 뒷모습을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친구에게 왜 이 먼 곳까지 샤워를 하러 왔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내일이라도 물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날 밤은 거의 잠들지 못했다. 간이침대로 와서 눈을 붙였지만 생각이 끊이지 않고 이어 붙어서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았지만 눈을 뜬 느낌. 잠이 들었지만 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어머니와 교대할 시간이었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조금 일찍 왔다.


집으로 가서 샤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집에 와서 이불 위에 그대로 뻗어 잠들어 버렸다. 두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갔다. 전기면도기로 대충 수염만 깎고 더러운 얼굴에 그대로 로션만 바르고 집을 나섰다. 오후가 되어서 친구에게 어제 잘 들어갔냐고 문자를 보냈다. 친구는 바쁜지 답장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문자가 왔다. 문자는 황당했다. 친구는 어제 병원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문자로 병원이 있는 이곳에 무슨 일이 있어서 왔다가 샤워만 하고 갔냐니까 친구는 이쪽으로 올 일이 없다고 했고, 무슨 샤워를 하러 병원까지 가느냐고 했다. 주말에 병원에 갈 테니까 아버지 병간호나 잘하라고 했다.


나는 밤에 도대체 누구와 이야기를 한 것일까. 나의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기억이다. 꿈이거나 허상이라고 하기에는 감촉과 느낌이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정말 내가 친구와 이야기를 했는지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의 대변에서 장기가 딸려 나온다고 했다. 곧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수속 절차를 밟고 장례식장을 잡고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고, 누군가 죽으면 그 뒤에 따르는 서류가 많다. 서류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곡차곡 앞에 나타난다. 그걸 정리하고 수순을 밟는데 시간이 걸린다.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오면 인사를 하고 부의금을 계산하고. 내내 혹독하게 춥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은 몹시 날이 포근했다.


후에 생각해보면 내가 친구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한 것이 화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의 힘듦 때문에 그만 아버지에게 이벤트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그 말을 친구에게 하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버지가 병이 호전되어서 퇴원을 한다고 해도 다시 원래의 제대로 된 생활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것과 살아있는 것은 다르다. 살고 있되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안다. 얼마나 사는 게 힘들면 그런 말을 할까. 하지만 고통이라는 건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다. 죽으면 아프다던가, 슬프다던가 미칠 것 같은 두려움조차 느낄 수 없다. 고통을 매일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 느끼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닐까.


내가 대화를 했다고 착각하는 그 친구는 지독하게 어두운 어둠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데리고 가기 전에 나에게 먼저 와서 나의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염탐을 하고 관찰해서 빌미를 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하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건 어떤 식으로든 모두에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 수는 없다. 아버지의 죽음은 적어도 나에게 어떤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죽어보지 않은 이상 알 수는 없다. 샤워실에서 만난 것은 친구가 아닌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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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냐 술자리냐


술이 좋으니? 술자리가 좋으니?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술자리가 좋다고 한다. 나에게 물으면 나는 술이 술자리보다 좋다고 한다. 술 그 자체가 좋다. 이렇게 말을 하면 열에 아홉은 술을 몹시 많이 마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며, 많이 마시지도 않는다. 소주 1병을 따면 그걸 4일 정도 나눠서 마신다. 그리고 한 번 마실 때 한, 한 시간에 걸쳐 마신다. 그러니까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면 그걸 두 번에 나눠서 마시고 다음 소주잔을 채워서 마실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캔 맥주를 따면 한 캔 정도를 마신다. 와인도 한 잔 가득 부어서 그걸 오랜 시간에 걸쳐 마신다. 제임슨을 마실 때에도 긴 시간에 걸쳐 홀짝 홀짝인다. 그렇다고 술자리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나를 보면 술자리에 안 나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 술자리가 맹목적으로 그저 냅다 술을 콸콸 마실 것 같은 자리면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건방지다는 소리를 꽤나 들었는데 그런 술자리는 끝이 가볍고 흥겹게 끝이 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취한 인간들의 뒤치다꺼리는 늘 귀찮고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술자리가 술보다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술이 더 좋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더없이 좋다. 하지만 꼭 꽐라가 될 만큼 마실 필요는 없는데 만취가 공식인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자신은 술보다는 술자리가 훨씬 좋다고 하며 술 자체는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자신은 평균에서 절대 밑이 아니라는 걸 모든 부분에서 말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튼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요즘은 술이 좋아서 혼술을 하는 영상을 유튜브로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보면 이야 이 사람들은 정말 술 자체를 좋아하는구나, 어쩜 이리도 술을 맛있게 마시지? 말을 많이 하는 다른 유명 유튜버들처럼 지식 가득한 언어를 구사하지도 않는다. 정말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데? 뭐? 같은 기류가 가득해서 좋다.

 

술이 맛있다고 느끼는 경우는 공복일 때다. 내 경우에 배가 부르면 술에서 맛이라고는 없다고 느낀다. 맥주 한 잔을 기가 막히게 맛있게 먹는 방법은 바닷가를 땀을 흘리며 조깅을 하고 난 후(주로 밤에 강변을 달리지만 오후에 바닷가를 달리는 경우) 동네 스몰비어 집이 문을 여는 시간에 들어가 맥주와 치즈스틱을 주문해서 꿀꺽꿀꺽 마시면 온 몸으로 맥주가 퍼지는 느낌이 들면서 아주 맛있다. 치즈스틱을 한 입 먹는다. 한 잔을 그렇게 마시고 나면 몸이 식으며 취기가 오른다. 그때 쓰던 글을 쓴다. 글 속에서 나는 막 날아다닌다. 정말 글이 잘 써진다. 맥주를 마시는 속도를 조절해가며 글을 써야 한다. 조깅을 하면서 에너지를 쏟아 냈기 때문에 위장에 들어간 맥주가 춤을 춘다. 맥주에 점령당한 채 글을 쓰는 건 몹시 즐거운 일이다. 김영하는 한 때에 하루 분량의 글을 쓰고 나면 마시고 싶은 술을 실컷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술을 마시기 위해 글을 쓴다?라고 되어 버려서 글쓰기가 끝나면 술을 너무 마셔서 어느 날 그것을 끊었다고 한다. 술은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술에 점령당하기에 천천히, 적당히 즐기는 쪽으로 마시면 좋다. 여기서 만약 좀 더 마셔야겠군, 하는 생각이 들면 나와서 사에키 씨가 하는 선술집으로 가서 잡담을 하며 맥주를 홀짝홀짝 마신다.


소주나 맥주나 시원하게 마셔야 아아 좀 마셨군, 하지만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는 술이 위스키다. 위스키를 여러 종류를 마셔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제임슨을 좋아한다. 잭다니엘도 좋은데 매대에 제임슨이 잭다니엘과 나란히 서 있다면 제임슨이다. 끝 맛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캐러멜 맛이 나는데 그걸 포기할 수 없다. 맥주나 소주에 비해 제임슨은 안주 없이 마시는 게 좋다. 안주와 함께 마시면 안주의 맛이 제임슨 맛을 덮어버린다. 별로다. 그래서 제임슨을 마실 때에는 집 밖에서 커피에 타마시면 좋다. 겨울을 좋아하진 않지만 뜨겁고 진한 커피에 제임슨을 타 마시는 맛은 여름보다는 겨울이다. 그런 겨울의 야외에서다. 연어처럼 회귀성이 짙어서 늘 가서 앉는 자리에 앉아서 제임슨을 탄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면 몸이 금방 데워진다.


술, 술자리 - 굳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술자리보다는 술이지만 그렇다고 술을 많이 마신다는 말은 아니다. 근래에는 이상하게 술이 더 맛이 없어졌다. 백신 접종 탓인지(웃음) 뭐 때문인지 술맛을 예전만큼 느낄 수 없다. 소주는 정말 맛이 없다고 느끼고, 와인도 예전만큼 마시지 않는 걸 보니 맛이 없다. 그렇다고 위스키나 코냑을 마시지도 않는다. 와인 한 병을 따면 보통 그걸 일주일을 마시는 거 같다. 와인잔도 다 깨 먹어서 소주잔에 부어서 마시는데 그래서 맛이 없는지 일주일 동안 와인 한 병을 야금야금 마신다.


그래서 술 약속이 생기면 요즘의 코로나 분위기와 맛이 없어진 술과 약속을 잡은 사람과의 대화를 떠올렸을 때 술 약속은 코로나 종식 이후로 전부 미루고 있다. 안 그래도 협소한 인간관계가 더 축소되고 있다.


술이 가지는 맛 이외에 술맛이 좋은 건 아무래도 하루키를 읽으며 마실 때다. 여긴 바닷가이고 한때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퍼브가 해안에 죽 있었다. 요즘에는 쉬는 날이 없지만 예전에는 수요일에는 쉬었다. 오전에 해안을 실컷 땀을 흘려가며 달린 다음 퍼브가 오전 11시쯤 문을 열면 들어가서 칼스버그를 홀짝이며 하루키를 읽었다. 그러면 맥주 맛이 참 좋다.

거기 퍼브의 주인은 김종국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 매일 헬스장에서 전문적으로 기구를 사용해서 착실하게 운동을 해서 옷을 입어도 태가 난다. 멋있다. 그러다가 여름에 조깅을 하고 땀을 닦으며 퍼브에 들어가면 주인은 나를 같은 운동 하는 사람으로 대해준다. 나는 헬스장을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어서 그런 몸을 가지진 못했지만 매일 조깅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인지 퍼브에 들어가서 첫인사를 하면 운동에 대해서 한 오분 정도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일 년을 내내 가다 보니 주인은 새로운 메뉴를 만들면 먹어보라고 한 접시씩 만들어오곤 했다. 그러면서 오전 오후에 일하는 캐리 아줌마 하고도 친해지게 되었는데 풍만한 몸매에 마음씨 좋게 생긴 50대 미국인 캐리 아줌마는 늘 주인이 어디에 가거나 주방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와서 쫌생이라고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말이 아주 빠르다. 10중에 알아듣는 말은 1, 2 정도밖에 되지 않아 눈을 보며 고개만 끄덕이는데 마치 내가 캐리 아줌마 자신의 말을 다 듣는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한 번은 하루키 말고 존 가드너의 그렌델을 읽고 있으니 자신도 이 소설을 읽었다며 뉴욕주 고등학교에서는 이 도서로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렌델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렌델은 참 좋은 소설이었다. 그렌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길어서 그만하고 반바지를 입고 퍼브의 테라스에 앉아 칼스버그를 홀짝이며 책을 읽고 있으면 맥주 맛도 좋고 아주 행복하다. 무엇보다 달랑 맥주 한 잔만 주문해도 그 누구도 눈치 따위 주지 않는다. 술을 그렇게 마시면 좋다.


요즘은 블핑이의 제니가 '처음처럼'을 광고해서 아주 맛있을 것 같은데, 병마저도 좀 더 맛있는 소주처럼 보이게 변해서 맛있을 것 같은데 소주는 그저 소주 맛이다. 또 다른 소주 '좋은 데이'는 파란 뚜껑, 빨간 뚜껑이 있는데 파란 뚜껑의 소주는 뭐야? 이게 소주야? 할 정도로 알코올 맛이 덜하다. 뭐랄까, 소주를 이 따위로 만드니까 최고 소주 소비계층인 대학생들이 각 1병으로는 전혀 성에 차지 않아서 돈을 들여서 몇 병씩 마시는 것이다. 소주회사 놈들이 그걸 다 계산하고 만들지 않았나 싶다. 겉으로는 1병만 마시고 기분 좋게 귀가하자,라고 하면서 1병으로는 너무 간에 기별도 안 간 상태에서 집으로 갈 수 없고, 회사원이라면 대리운전을 부르기 내심 아까워서 1병만 마셔도 될 것을 2병, 3병까지 마시는 것이다. 2명이서 6, 7병은 문제도 아니게 되었다. 아무튼 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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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양념통닭


그래, 카나리아 통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는 몇 군데의 아지트 같은 곳이 있었다. 그중에 한 곳이 카나리아 치킨집이었다. 구역전 시장의 입구에 있는 치킨집으로 합기도를 다니다가 형들을 따라 들어가게 되면서 생맥주와 치킨의 조합을 알아 버렸다. 그 후 우리는 지치지 않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카나리아 통닭집에서 모여 양념통닭을 뜯으며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지치지 않는 것에는 정말 지치지 않았다. 열심히 했다.


합기도 도장에 다니게 된 것은, 사진부였는데 암실에서 선배들에게 혼나고 정리를 하고 늦은 밤 집으로 오는데 깡패 3명을 만났다. 있는 돈을 달라던 깡패, 같지 않은 양아치들. 골목이었고 가로등도 없는 그런 으스스한 골목에서 맞닥뜨렸다. 나는 돈이 없는 대신 카메라가 있었다. 늘 들고 다니던 카메라. 그 카메라를 지키지 위해 고슴도치처럼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누구나 집 장롱 속에 있는 카메라. 아버지의 카메라. 아버지는 이 카메라로 어린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많이도 담았다. 가난해도 사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 의 카메라는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그때 지켜낸 올림푸스 카메라를 아직도 들고 다닌다.


자고 일어났더니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고 며칠 지나니 부어서 동그란 얼굴 한쪽이 네모네모가 되어있었다. 합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속상했던 어머니가 도장에 보내주었다. 합기도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척도가 되었다. 대신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21시까지 자율학습. 합기도 도장 22시 도착. 한 시간 정규 발차기. 01시까지 발차기 연습 겸 놀다가 집으로 와서 그대로 뻗음. 학교에서도 뻗음. 점심시간에도 밥만 먹고 뻗음. 쉬는 시간 뻗음. 한문 시간 뻗음. 불어 시간 뻗음. 자율학습시간에 이어폰으로 음악 들음. 22시 도장 도착. 01시까지, 반복, 반복. 하지만 합기도는 너무 재미있었다.


어느 날 옆을 보니 어랍쇼, 친구 녀석들까지 합기도에 합류. 같이 발차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전부 하얀 띠를 매고 열심히 발차기를 했다. 우리는 아니지만 특훈이라 불리는 특수 훈련반에도 끼여 주말에는 요즘 조깅을 하는 강변으로 가서 강바닥에 그대로 낙법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죽기 살기로 했던 것 같다. 여름이라 아스콘이 이글이글한데 맨발로 구보를 하고 며칠 지나니 발바닥이 전부 벗겨졌다. 관장님은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학교 밖에서 듣는 칭찬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에 합기도에 같이 다니는 형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이 카나리아 통닭집이었다. 토요일 저녁 맥주는 꿀맛이고, 양념 통닭은 튀겨서 바로 양념을 입혀 그대로 바로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통닭은 식어도 맛있다지만 뜨거울 때 먹는 그 맛이 있다. 단짠단짠처럼 뜨거운 양념치킨을 입에 넣어 후후 하며 먹고 차가운 생맥주를 들이켜는 맛. 그리하여 우리의 단골집이 되었다. 3년을 그렇게 일주일에 몇 번씩 다녔다.


카나리아 통닭집 구조를 설명하자면(잘 안 되겠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네 치킨집처럼 문 바로 옆에서 닭을 튀긴다. 그리고 카운터도 겸한다. 거기서 양념도 비빈다. 그런 바를 지나 들어가면 테이블이 3개가 있는 작은 홀이 나온다. 두세 평 정도로 작다. 홀에는 작은 어항이 있고 그곳에는 금붕어가 세 마리인가 있다. 어항 속 금붕어를 보는 재미가 있다. 구피나 열대어를 키우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어항 속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저 보게 된다. 세상에는 그렇게 그저 보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기쁨을 준다. 그렇게 멍 하게 보고 있으면 맥주가 나온다. 앉는 소파는 싸구려 가죽으로 덮인 소파인데 쿠션감이 좋고 편안하다. 누군가 술이 되어서 한쪽을 쥐 파먹듯 뜯어 놨다.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솜을 끄집어내는 재미를 아는 녀석들은 자꾸 그 자리에 앉으려 한다.


자주 가다 보니 생일을 전부 카나리아 통닭집에서 하게 되었다. 인원이 많으면 주인아저씨와 아줌마는 방을 내주었다. 홀의 테이블이 있는 곳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안방이 나오는 그런 구조다. 방이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 대략 8, 9명 정도가 밥상을 놓고 빙 둘러앉아서 양념통닭과 후라이드 몇 마리씩 놓고 맥주와 함께 케이크에 불을 붙여 생일파티를 했다. 그리고 케이크는 반이나 잘라 카나리아의 7살 아들내미에게 덜어 주었다. 귀여운 녀석으로 우리는 그 녀석의 사진도 찍어서 인화를 해주고 액자도 만들어 줬다. 그러면 주인아주머니가 너무 좋아했다. 생일을 하면 통닭 이외에도 주인아주머니가 만든 잡채나 요리도 해줬다. 그래서 안 갈 수가 없었다. 우리와 교류를 했던 XX여고 문예부 애들은 아들내미에게 그림책도 주고, 동화도 읽어 주면서 아들내미와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인집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우리가 오면 몹시 좋아했다. 아들내미는 우리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노는 걸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 도대체 공부는 지지리도 하지 않았구나.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조카나 동네의 친한 초딩들에게는 이왕 하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왜 공부를 해야 하냐고 묻는다. 엄마 아빠를 보면, 사는데 수학이니 자연과학이니 물리 같은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혹시 이런 질문받아본 사람이 있을까. 공부한 거 생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왜 열심히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1차적인 도움은 없을지 모른다. 수학이라든가,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사인이니 코사인이니 근의 공식 같은 것들은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놀고 싶어도 참고 앉아서 수업을 듣고 책을 보는 훈련을 하게 된다. 어른이 되면 일을 해야 하는데 사회에서 일을 하게 되면 공부하는 것보다 몇 배는 하기 싫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초등 6년, 중고등 6년, 대학교 2년에서 4년, 의대라면 좀 더 해서 6년 정도 하면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도망가고 싶어도 앉아서 했던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 훈련의 결과가 생활에 나온다. 일을 하다가 도망가고 싶다고 나 오늘 안 할래, 하며 놀러 가버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특히 창작을 하는 일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매번 창작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에 글을 쓰던, 그림을 그리던, 작곡을 하던, 그 어떤 창작을 할 때 엉덩이를 붙이고 그 일에 매달려야 한다. 그 훈련을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하면서 습득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한 사람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더 집중적으로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다. 그걸 확장하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나의 실패 아닌 실패는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와는 등을 지고 지낸 것 같다. 공부는 못해도 된다지만 나는 이왕 하는 공부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낫다고 본다. 성적이 안 좋으면 어때. 그 말도 맞지만 이왕 성적으로 나를 보여야 한다면, 학창 시절에 성적이 좋은 게 낫다고 본다. 그리고 양념 치킨을 좋아하는 시기도 딱 그때뿐이니까 먹을 때는 맛있게 먹자.


근래에 조깅을 하고 오다가 카나리아가 있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건물은 아직 있지만 폐허가 되어 있었다. 언제 허물고 새로운 건물이 지어질지 모른다. 카나리아는 졸업 후에도 계속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시간 훌쩍 지나서 가보니 카나리아는 사라졌다. 형태가 있던, 형태가 없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진다. 그러면서 점점 이 세계에서 카나리아 치킨도 하나둘씩 종적을 감추었다. 그래도 검색을 해보면 아직도 구석구석에서 열심히 양념을 바르고 후라이드를 튀기는 카나리아 치킨집이 있다. 힘내 주십시오. 아무래도 우리는 그때 그렇게 먹은 카나리아 양념치킨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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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지금도 그렇지만) 1년 전에 느닷없이 그 녀석이 귀여운 딸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다. 딸은 어려서 아빠의 다리에 붙어서 수줍어했다. 마스크를 해서 귀엽고 안타까워 보였다. 어린이들이 마스크를 한 모습은 왜 그런지 늘 안타깝다. 그 녀석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을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썩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 그 녀석은 주로 뒤에서 노는 편이었고 밴드를 하고 있어서 몸에 ‘반항’이 뿜어져 나오는 게 눈으로 보이는 그런 녀석이었다. 교복도 교복 같지 않게 입고 다녔다. 녀석은 대학교 밴드에 껴서 기타를 연주했을 정도로 기타를 잘 쳤다. 정말 누노 배텐코트 같았다. 머리를 길게 기르지 못해서 그렇지 얼굴도 잘생겼고(왜 밴드 하는 녀석들은 죄다 잘 생겼을까) 다리도 길었다. 밴드는 매틀밴드로 밴드 이름이 물레방아인가 그랬다. 스키드로우의 아이 리멤버 유의 12줄짜리 기타 연주도 곧잘 해서 날이 좋으면 학교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연주를 하곤 했다. 멋있었다. 그때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속주 기법으로 기타 연주를 하는 게 인기였다. 녀석은 당시에 고등학생 주제에 잉위 맘스틴의 곡을 연주하곤 했다. 대학교 축제에도 섰고, 각 고등학교 축제에도 불려 가서 연주를 했다. 아무튼 멋진 놈이었다. 강력한 록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녀석은 비틀스의 음악을 몹시 좋아했다. 한 번 같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잉위 맘스틴, 잉베이 맘스테인, 잉위 맘스테인으로 불렸던 잉위 맘스틴의 앨범을 나는 가지고 있다




[넌 어때? 난 말이야, 비틀스의 화이트 앨범을 좋아해.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는 조지가 만들었어. 난 조지 해리슨이 가장 좋아. 넌 어때? 이렇게 좋은 노래를 만들었잖아. 조지 해리슨의 얼굴도 네 명 중에 가장 멋지게 생겼다고 생각해.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폴 매카트니는 어딘지 구울 같은 얼굴 모습이야. 존 레넌은 점점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 같고 말이지. 링고 스타는 전형적인 미국 만화 3편쯤에 나와서 죽는 얼굴처럼 생겼어. 그런데 조지 해리슨은 퍼펙. 많은 조명이 두 사람에게만 집중되었지만 난 달라. 조지 해리슨은 패티 보이드를 가지잖아, 세상에. 봤지? 패티 보이드, 사람의 모습이 아니야. 조지가 패티 보이드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무려 7개의 하트를 그려줬잖아.  


와일 마이 기타, 저 노래를 녹음할 때 에릭 클랩튼이 놀러 온 거야. 두 사람은 정말 친한 친구잖아. 이봐, 에릭, 기타 세션을 맡아줘. 조지가 에릭에게 말했어.  어? 내 기타가 없어서 잘 될까? 망치지 않을까?  해준다는 말이지? 자 그럼 내 기타로 연주를 해줘. 에릭 클랩튼은 즉흥적으로 기타 연주를 해 주잖아. 조지는 에릭에게 기타도 빌려주고 패티 보이드도 빌려주고. 박애주의자 같은 녀석.


하지만 조지도 존에 비하면은. 존 레넌은 정말 돌아이였어. 이 녀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 먹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난 멤버들을 데리고 비틀스가 되려고 하지 않아, 그건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고.  존 레넌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존 레넌이 오노 요코를 사귀고 있을 때였어. 아직 메시아의 형상으로 돌입하기 전이었지. 아직 악동이었고 음악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어린이 같았을 때 말이야. 그 당시 일본에는 평범 펀치라는 잡지사가 있었어. 우리나라로 치면 선데이서울 같은 거지. 70년 전후에 생겨나서 거품경제가 파괴된 후 사라진 일본의 많은 잡지사 중에 하나였어. 요코 덕인지 평범 펀치라는 잡지는 존 레넌을 인터뷰하게 돼. 잡지사는 완전 대박을 친 거지.  존 레넌은 인터뷰에서 아주 화가 난 상태로 열변을 토했는데, 우리(비틀스) 네 명은 지금까지 대체로 어떤 여자든 모두가 돌리며 공유해 왔다. 그런데 이 녀석들 세 명은 요코에게만은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건 심한 굴욕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다.  친절한 박애주의를 몸소 실천하는 녀석들. 서로 평등하게 사랑을 해야 한다나 뭐라나.]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별을 보고 별의 그 모습에 홀딱 빠져서 보게 되는 그런 시기였다. 괴짜였다. 학교에 전기기타를 들고 오지 않나. 체육시간에 엠프를 켜서 징 연주를 하다가 체육샘에게 끌려가서 신나게 맞았지. 그래도 웃었다 그 녀석. 그랬던 녀석이었는데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그 이후로 기억을 잘하지 못한다. 너 그때 우리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라고 하면 미소를 지으며 교통사고를 당하고 난 뒤에 기억이 안 되는 게 많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타 연주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석유화학단지에 입사해 다니면서 선을 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하여 귀여운 딸을 낳았다. 말을 빠르게 하지 못하며 살이 많이 쪘다. 약간 옆으로 넘어질 듯 걷는다. 어제도 지나가다가 들려서 아아를 사주고 갔다. 글쎄, 뭐가 잘못된 걸까. 아니면 잘되고 있는 걸까.


어제 '노웨어 스페셜'을 봤다. 3살인지, 4살인지 마이클의 연기 같지 않은 연기에  마음을 홀딱 빼앗겨 버렸다아빠와 손잡고 걸을   삐죽거림과 시리얼을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이나 표현할  없는 감정을 담아 아빠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어린 마이클의 모습에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렸다영화는  죽음을 앞둔 34살의 시한부 아빠 존이 엄마 없는 마이클의 부모를 찾아 주려는 이야기다영화가 되게 슬플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보는 이들의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그저 덤덤하게 흘러간다이래도  정도로 덤덤하게 흘러간다.


존은 마이클을 데리고 복지사와 함께 자신 대신 맡아줄 부모의 집을 다닌다. 하지만 존의 마음에 드는 대리 부모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마이클과 다니다가 마이클은 한 아주머니의 집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 아줌마는 언제 죽어요?


영국 영화인데 영화  내내 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또 비가 오는 날 뿐이다. 영화는 감정을 모으는 신파를 보여주지 않는 대신 감정을 분산시키는 배경이나 과정으로 존의 마음과 마이클의 심정을 표현한다. 아무튼 너무 좋다. 이런 영화의 태도도 좋고, 영화가 그냥 좋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피아노 곡이 조용하게 흐르면서 존이 마이클 데리고 그 아주머니의 집을 두드리고 아주머니가 나오는데. 그때 초췌한 존의 얼굴이 보이고 마이클이 손을 잡은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볼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눈물은 전조도 없이 어떤 감정의 이입이나 돌발도 없이 그저 눈물이 죽 나와버렸다. 잘 되고 있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거겠지? 꼭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덜 불행했으면 하는 거지 https://youtu.be/qRgEvytO4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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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22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교관 2022-01-24 11:24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