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냐 술자리냐
술이 좋으니? 술자리가 좋으니?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술자리가 좋다고 한다. 나에게 물으면 나는 술이 술자리보다 좋다고 한다. 술 그 자체가 좋다. 이렇게 말을 하면 열에 아홉은 술을 몹시 많이 마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며, 많이 마시지도 않는다. 소주 1병을 따면 그걸 4일 정도 나눠서 마신다. 그리고 한 번 마실 때 한, 한 시간에 걸쳐 마신다. 그러니까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면 그걸 두 번에 나눠서 마시고 다음 소주잔을 채워서 마실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캔 맥주를 따면 한 캔 정도를 마신다. 와인도 한 잔 가득 부어서 그걸 오랜 시간에 걸쳐 마신다. 제임슨을 마실 때에도 긴 시간에 걸쳐 홀짝 홀짝인다. 그렇다고 술자리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나를 보면 술자리에 안 나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 술자리가 맹목적으로 그저 냅다 술을 콸콸 마실 것 같은 자리면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건방지다는 소리를 꽤나 들었는데 그런 술자리는 끝이 가볍고 흥겹게 끝이 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취한 인간들의 뒤치다꺼리는 늘 귀찮고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술자리가 술보다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술이 더 좋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더없이 좋다. 하지만 꼭 꽐라가 될 만큼 마실 필요는 없는데 만취가 공식인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자신은 술보다는 술자리가 훨씬 좋다고 하며 술 자체는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자신은 평균에서 절대 밑이 아니라는 걸 모든 부분에서 말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튼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요즘은 술이 좋아서 혼술을 하는 영상을 유튜브로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보면 이야 이 사람들은 정말 술 자체를 좋아하는구나, 어쩜 이리도 술을 맛있게 마시지? 말을 많이 하는 다른 유명 유튜버들처럼 지식 가득한 언어를 구사하지도 않는다. 정말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데? 뭐? 같은 기류가 가득해서 좋다.
술이 맛있다고 느끼는 경우는 공복일 때다. 내 경우에 배가 부르면 술에서 맛이라고는 없다고 느낀다. 맥주 한 잔을 기가 막히게 맛있게 먹는 방법은 바닷가를 땀을 흘리며 조깅을 하고 난 후(주로 밤에 강변을 달리지만 오후에 바닷가를 달리는 경우) 동네 스몰비어 집이 문을 여는 시간에 들어가 맥주와 치즈스틱을 주문해서 꿀꺽꿀꺽 마시면 온 몸으로 맥주가 퍼지는 느낌이 들면서 아주 맛있다. 치즈스틱을 한 입 먹는다. 한 잔을 그렇게 마시고 나면 몸이 식으며 취기가 오른다. 그때 쓰던 글을 쓴다. 글 속에서 나는 막 날아다닌다. 정말 글이 잘 써진다. 맥주를 마시는 속도를 조절해가며 글을 써야 한다. 조깅을 하면서 에너지를 쏟아 냈기 때문에 위장에 들어간 맥주가 춤을 춘다. 맥주에 점령당한 채 글을 쓰는 건 몹시 즐거운 일이다. 김영하는 한 때에 하루 분량의 글을 쓰고 나면 마시고 싶은 술을 실컷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술을 마시기 위해 글을 쓴다?라고 되어 버려서 글쓰기가 끝나면 술을 너무 마셔서 어느 날 그것을 끊었다고 한다. 술은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술에 점령당하기에 천천히, 적당히 즐기는 쪽으로 마시면 좋다. 여기서 만약 좀 더 마셔야겠군, 하는 생각이 들면 나와서 사에키 씨가 하는 선술집으로 가서 잡담을 하며 맥주를 홀짝홀짝 마신다.
소주나 맥주나 시원하게 마셔야 아아 좀 마셨군, 하지만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는 술이 위스키다. 위스키를 여러 종류를 마셔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제임슨을 좋아한다. 잭다니엘도 좋은데 매대에 제임슨이 잭다니엘과 나란히 서 있다면 제임슨이다. 끝 맛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캐러멜 맛이 나는데 그걸 포기할 수 없다. 맥주나 소주에 비해 제임슨은 안주 없이 마시는 게 좋다. 안주와 함께 마시면 안주의 맛이 제임슨 맛을 덮어버린다. 별로다. 그래서 제임슨을 마실 때에는 집 밖에서 커피에 타마시면 좋다. 겨울을 좋아하진 않지만 뜨겁고 진한 커피에 제임슨을 타 마시는 맛은 여름보다는 겨울이다. 그런 겨울의 야외에서다. 연어처럼 회귀성이 짙어서 늘 가서 앉는 자리에 앉아서 제임슨을 탄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면 몸이 금방 데워진다.
술, 술자리 - 굳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술자리보다는 술이지만 그렇다고 술을 많이 마신다는 말은 아니다. 근래에는 이상하게 술이 더 맛이 없어졌다. 백신 접종 탓인지(웃음) 뭐 때문인지 술맛을 예전만큼 느낄 수 없다. 소주는 정말 맛이 없다고 느끼고, 와인도 예전만큼 마시지 않는 걸 보니 맛이 없다. 그렇다고 위스키나 코냑을 마시지도 않는다. 와인 한 병을 따면 보통 그걸 일주일을 마시는 거 같다. 와인잔도 다 깨 먹어서 소주잔에 부어서 마시는데 그래서 맛이 없는지 일주일 동안 와인 한 병을 야금야금 마신다.
그래서 술 약속이 생기면 요즘의 코로나 분위기와 맛이 없어진 술과 약속을 잡은 사람과의 대화를 떠올렸을 때 술 약속은 코로나 종식 이후로 전부 미루고 있다. 안 그래도 협소한 인간관계가 더 축소되고 있다.
술이 가지는 맛 이외에 술맛이 좋은 건 아무래도 하루키를 읽으며 마실 때다. 여긴 바닷가이고 한때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퍼브가 해안에 죽 있었다. 요즘에는 쉬는 날이 없지만 예전에는 수요일에는 쉬었다. 오전에 해안을 실컷 땀을 흘려가며 달린 다음 퍼브가 오전 11시쯤 문을 열면 들어가서 칼스버그를 홀짝이며 하루키를 읽었다. 그러면 맥주 맛이 참 좋다.
거기 퍼브의 주인은 김종국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 매일 헬스장에서 전문적으로 기구를 사용해서 착실하게 운동을 해서 옷을 입어도 태가 난다. 멋있다. 그러다가 여름에 조깅을 하고 땀을 닦으며 퍼브에 들어가면 주인은 나를 같은 운동 하는 사람으로 대해준다. 나는 헬스장을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어서 그런 몸을 가지진 못했지만 매일 조깅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인지 퍼브에 들어가서 첫인사를 하면 운동에 대해서 한 오분 정도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일 년을 내내 가다 보니 주인은 새로운 메뉴를 만들면 먹어보라고 한 접시씩 만들어오곤 했다. 그러면서 오전 오후에 일하는 캐리 아줌마 하고도 친해지게 되었는데 풍만한 몸매에 마음씨 좋게 생긴 50대 미국인 캐리 아줌마는 늘 주인이 어디에 가거나 주방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와서 쫌생이라고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말이 아주 빠르다. 10중에 알아듣는 말은 1, 2 정도밖에 되지 않아 눈을 보며 고개만 끄덕이는데 마치 내가 캐리 아줌마 자신의 말을 다 듣는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한 번은 하루키 말고 존 가드너의 그렌델을 읽고 있으니 자신도 이 소설을 읽었다며 뉴욕주 고등학교에서는 이 도서로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렌델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렌델은 참 좋은 소설이었다. 그렌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길어서 그만하고 반바지를 입고 퍼브의 테라스에 앉아 칼스버그를 홀짝이며 책을 읽고 있으면 맥주 맛도 좋고 아주 행복하다. 무엇보다 달랑 맥주 한 잔만 주문해도 그 누구도 눈치 따위 주지 않는다. 술을 그렇게 마시면 좋다.
요즘은 블핑이의 제니가 '처음처럼'을 광고해서 아주 맛있을 것 같은데, 병마저도 좀 더 맛있는 소주처럼 보이게 변해서 맛있을 것 같은데 소주는 그저 소주 맛이다. 또 다른 소주 '좋은 데이'는 파란 뚜껑, 빨간 뚜껑이 있는데 파란 뚜껑의 소주는 뭐야? 이게 소주야? 할 정도로 알코올 맛이 덜하다. 뭐랄까, 소주를 이 따위로 만드니까 최고 소주 소비계층인 대학생들이 각 1병으로는 전혀 성에 차지 않아서 돈을 들여서 몇 병씩 마시는 것이다. 소주회사 놈들이 그걸 다 계산하고 만들지 않았나 싶다. 겉으로는 1병만 마시고 기분 좋게 귀가하자,라고 하면서 1병으로는 너무 간에 기별도 안 간 상태에서 집으로 갈 수 없고, 회사원이라면 대리운전을 부르기 내심 아까워서 1병만 마셔도 될 것을 2병, 3병까지 마시는 것이다. 2명이서 6, 7병은 문제도 아니게 되었다. 아무튼 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