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오징어인지 낙지인지 잘 모르겠다. 낙지라고 하던데 아무리 봐도 오징어 같다. 어머니 친구분 중에 횟집을 경영하셨던 분이 나 먹으라고 낙지를 이렇게 회를 떠 주셨는데 아무리 봐도 오징어 같다.


오징어 회를 이렇게 떠 주었을 뿐인데 평소 먹던 오징어 회 맛에서 벗어난 맛있는 오징어 회 맛이었다. 어머니 친구 분은 이렇게 썰어서 먹으면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말이 정말이었다. 어떻게 써는 가에 따라서 횟감은 맛이 달라진다고 했다.


예전에는 오징어 회를 자주 먹으러 가는 가게가 있었다. 우리 집은 바닷가 근처인데 자주 갔던 오징어 회 가게는 도심지 중심부에 있는, 바닷가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가게였다. 그 집은 소주를 돌 멍게 껍질에 부어서 마셨는데 바다를 그대로 입 안으로 들이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술이 술술 들어가서 나올 때는 전부 꽐라가 되어 있었다. 횟집인데 크지 않아서 사람들이 늘 미어터지는 집이었다. 전부 좌식이고 먹다가 뒤에 앉은 테이블의 사람들과 눈이 맞아서 같이 합석하는 경우가 많은 가게였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그 근처가 나이트클럽이 여러 곳이 있었고, 룸도 많은 곳이었다. 새벽에 흘러나온 남녀들로 북적이는 곳이라 새벽이 화려한 곳이었다. 술집이 가득한 곳 중간에 오징어 횟집이 있어서 전부 술에 취해 2차, 3차로 오징어 회를 먹으며 술에 잠식되어 같이 한 잔? 해서 합석을 많이 했다. 룸에서 나오는 아가씨들과 나이트클럽에서 나오는 여자들이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아서 더욱 화려한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오징어 집이 후배의 부모님이 하시는 가게라 까불지 않고 얌전하게 오징어 회에 소주를 몇 잔 마시고 나올 뿐이었다. 그 집에서 먹는 오징어 회는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초장이 없다. 달라고 하면 초장을 주지만 대부분 얇게 쓴 오징어 회를 기름장에 찍어 먹었다. 오징어 회는 그렇게 먹는 게 정말 맛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초장을 먹지 않는다. 회를 먹을 때에도 된장에 찍어 먹거나, 과메기 같은 경우는 그냥 과메기만 먹었다. 과메기를 먹을 때 초장을 듬뿍 찍어서 김에, 미역에, 파에 이렇게 쌈 해서 먹지 않았다. 과메기의 그 비린 맛을 그대로 느꼈다. 이번에 어머니 친구분이 초장을 만들어서 주셨는데 식초 맛이 많이 나고 매운, 그래서 먹다 보면 코에 땀이 맺힐 정도의 초장이었다. 판매하는 초장 맛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초장이 없으면 고추장에 사이다를 넣고 식초를 부어서 초장처럼 해 먹었다. 판매하는 초장만큼 맛은 없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이번에 먹는 초장은 단맛이 없고 매워서 싫은데 좋았다. 오징어 회에 잘 어울렸다.



오징어는 흔해서 잘 먹지 않았다가 언젠가부터 서민음식에서 멀어졌다. 저녁 밥상 위에 오징어볶음이나 오징어무침이 자주 올라왔었는데 이제 오징어도 맘먹고 사 먹어야 한다. 오징어는 어떻든 바다에 나가서 잡아와야 육지 사람들이 먹을 수 있으니 잡아오지 못하면 먹을 수 없다. 어획량이 적으면 가격은 올라간다. 그러나 또 오징어 풍년이면 가격이 떨어진다. 비싸면 잘 안 팔리고 저렴해도 어부들에게 돌아가는 비용은 적다.


내가 있는 바닷가에도 어선들이 많은데 선장 빼고 오징어를 잡는 선원들은 전부 외국인노동자들이다. 한국인은 한 명도 없다. 일이 너무 힘들고, 너무 고되고, 너무 어려운데 돈은 일한 만큼 벌어들이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오징어횟집이 많았는데 점점 없어지더니 이제 오징어횟집이라는 간판으로 장사를 하는 횟집은 잘 볼 수 없다.


여름에 횟집거리를 걸으면 여기저기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그 앞의 수족관에는 오징어가 가득 들어있다. 대야에 있는 오징어를 손으로 들면 먹물을 죽 뿌리기도 했다. 예전 아버지들은 맥주를 마실 때 마른오징어를 안주 삼아 마셨고,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에도 오징어를 씹으며 봤다. 먹물 파스타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오징어 국을 잘 조리하면 얼큰하니 아주 맛있다.


후배 부모님이 오징어횟집을 해서 그런지 예전에는 친구들이 한 잔 할 때 오징어회 먹으러 갈까,라고 했다. 삼겹살에 소주나 맥주나 한 잔 하자 같은 말은 했지만 오징어회에 한잔하자고 잘하지 않는데 우리는 오징어 회를 찾아서 먹으러 갔다.


아무튼 오징어가 바다에서 점점 사라진다면 바다에게 좋은 일이 아니며 인간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오징어와 문어는 비슷한 것 같은데 아주 다르다. 둘 다 연체류에 속하는 두족류인데 오징어는 날 것으로, 회로 먹을 수 있다. 낙지도 이에 속해서 낙지 탕탕이로, 회로 먹는다. 그런데 문어는 생으로 먹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문어는 데쳐서 먹거나 삶아서 먹지 바로 회를 떠서 먹지 않는다.


문어가 오징어, 낙지와 다른 점은 문어는 몸통이 거의 없다. 대가리와 대부분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보통 문어는 삶아서 다리 부분을 많이 먹는다. 오래전에는 문어를 낙지처럼 다리를 탕탕 쳐서 그대로 회로 먹기도 했는데 그렇게 먹고 나면 사람들이 배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가 문어는 낙지나 오징어와는 달리 진액이 엄청 나오는데 그 진액에 독소가 있다. 다리라고 불리는 것이 다리의 개념보다는 촉수의 개념이다. 그래서 문어는 촉수로 먹이를 잡아먹거나 자신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 진액에는 세균이 가득하다고 한다. 너무나 많아. 균이 너무 많아서 바다에서 잡아서 회로 다리를 먹고 나면 심각하게 배탈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꼭 문어를 회로 먹을 테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법이 있다. 문어는 죽고 나면 진액이 엄청나게 나오는데 진액을 전부 제거하고 문어를 그대로 회로 먹어도 된다고 ‘는’ 한다. 그렇게 먹으려면 전문점이나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 왜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하냐면 이 진액을 제거하는데 과정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문어는 삶아서 먹자.


그럼 주꾸미는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주꾸미도 생각해 보면 회로 거의 먹지 않는다. 다른 이유보다는 질겨서 그렇다고 한다. 주꾸미는 생으로 먹으면 아주 질겨서 먹을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회로 굳이 먹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조리를 해서 맛있게 먹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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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일이 새로운 날들인 것만 같다. 잠에서 깨어나서 어떤 화면이든 켜면 새로운 사건들이 연일 일어나고 있다. 처음 만나는 세상이다. 이전에 없었던 일들이 2년 동안, 그리고 올해, 고작 한 달도 안 됐는데 매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정말 내가 부자라면 3년만 다른 나라에 가서 살다가 오고 싶다. 신당이 속속 나오는데 [조졌당]이나 [내로남불당], [조땐거같당], [반성보다는변명당], [책한권본사람이제일무섭당] 같은 새로운 정당이 나와야 할 때다.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요 며칠 동안 인스타 스토리에 추억팔이하다 보니 반응이 꽤 있어서 신나고 막 그러네. 여기 [하찮은 음악 이야기]에 자매 밴드 [하트]와 암여우 [빅슨]에 대해서 글을 올리고 난 후 미드 리처 시리즈 7화(시즌이 끝이 났다. 시즌 1보다 시즌 2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떡밥만 잔뜩 던져준 고지라 이야기 모나크보다 훨씬 재미있다)를 보는데 스완이 기타를 치며 리처의 꼴통 특수부대원들이 [크레이지 온 유]를 부르는 것이다.


크레이지 온 유는 자매밴드 [하트]의 명곡으로 [하찮은 음악 이야기]에 올렸다. 인스타 스토리에 [하트]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계속 올리다 보니 자매밴드가 세계를 휘어잡을 때 나타난 암여우 네 명 – 빅슨에 관한 노래와 이야기를 또 짤막하게 올리게 되었다. 빅슨 이야기도 하찮은 음악 이야기에 올려놨으니.  https://brunch.co.kr/@drillmasteer/4364

https://brunch.co.kr/@drillmasteer/4377


그러면서 라우드니스의 이야기도 짤막하게 스토리에 올렸다. 그 영상은 라우드니스가 한국에 왔을 때 마왕 신해철과 김세황과 신나게 노래를 부를 때다. 라우드니스는 엑스제팬 이전의 메탈밴드로 이 형님들, 일본이 좁다며 미국으로 뛰쳐나가서는 그 텃세 심한 곳에서 인정을 받고 상도 받고 막 그랬다.

기타의 디카사키 아키라는 미국의 메탈씬에서도 인정을 받는데 끝내줬다. 지금도 끝내준다. 앞으로 끝내줄걸. 그럴 예정이다. 이 영상을 보면 이 끝내주는 아키라 형님과 맞먹는 기타 연주를 김세황 이 형님이 또 보여준다. https://youtu.be/Jwm6V-VFF-k?si=eJZbb1NnjC0NXR3Q EBS 공감 loudness like hell live


80년대 그 당시에 주다스 프리스트와 견줄만한 밴드가 라우드니스 이 형님들이 아닐까. 만고 나만의 생각이다. 미국에서 떡상하면서 미국 레이블과 정식 계약한 최초의 일본 밴드다. 아마 아시아에서도 최초겠지.


이 라우드니스 형님들은 우리나라에도 자주 왔었다. 88년에도 와서 미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욱일기 뭐 이런 게 있는데, 이 형님들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이 영상 속, 이때 마왕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리발 마왕 봐봐 노래 부르면서 존나 행복한 모습이다. 다시 봐도 존나 신나면서 울컥한 게, 이게 바로 록 음악이 가지는 상징이다.


스트라이퍼 이 형님들이 지금의 김경호를 있게 해 준 원본 같은 형님들이다. 김경호가 무명에서 스트라이퍼의 창법과 스타일을 벤치마킹 하면서 수면 위로 부앙 떠올랐다.

스트라이퍼 이 형님들, 80년대 당시 세계 유명 록밴드들이 일본만 찾았다. 일본에서의 활동만으로도 뮤직비디오를 만들 만큼 일본에만 갔다. 이번 하와이 촌놈에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 브루노(야? 부르노야) 마스는 일본에서 9일인가? 7일 동안인가 그만큼 공연을 한다. 게다가 팬 서비스도 우리와는 좀 다르다. 훨씬 좋다는 말이지. 일본 아이돌 노래도 같이 부르고. 브루노 마스 이번 일본 공연할 때 의상이나 모습을 보니까 뭐랄까 저짝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아무튼 그래.


7, 80년대에도 세계적인 록 스타들은 일본만 찾았는데 유일하게 스트라이퍼 이 형님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을 했다. 89년에 이런 엄청난 일이 있었다. 저 드럼 세트를 보라. 굉장하고 대단하고 엄청나다.  https://youtu.be/TfIChQCmIvA?si=3482mdKzuKxiFHDU Stryper - To Hell With The Devil Live in Korea 1989


록 음악 불모지인 한국이지만 이때 모여든 사람들 뭔가에 억압된 무엇인가를 뱉어내려고 소리를 질렀다. 어쩐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이 영상은 KBS [젊음의 행진]에서 방송을 했다. 그리고 거의 10년 뒤 김경호가 이 명곡을 무대에서 부른다.


김경호 이 형님의 악마가 스트라이퍼 악마를 이겨 버리는 무대. 정말 이때의 김경호는 그야말로 오직 깡과 악, 샤우트 그리고 체력 밖에 없는 것만 같다. 그야말로 샤우트 오브 더 샤우트다. 대적할 만한 샤우트가 없을 정도로 넘사벽이었다. https://youtu.be/VrAKpnO9Mb4?si=fBkBqE-_BClo8W8I 김경호 - To hell with the devil (라이브)


록 음악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떻든 인기가 별로 없다. 하지만 록 음악이 우리 나라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갑갑하고 답답하다. 그걸 어떻든 폭발시켜 버리고 싶다. 그것을 록 음악이 보통 대신 해준다. 우리나라의 여성 밴드 중에 [롤링 쿼츠]가 있다. https://youtu.be/7TG3xSQ2ZPM?si=j9s37qqNmJ3RIhQO Rock and roll Paradise & Drum solo by Rolling Quartz 롤링쿼츠


유튜브 구독자가 38만 명이나 된다. 비록 외국인들이 더 많지만 롤링쿼츠의 진가를 외국의 메탈씬에서 더 알아준다. 보통 보컬이나 기타가 인기가 많은데 롤링쿼츠는 압도적으로 드러머가 인기가 최고다. 아기아기한 얼굴인데 드럼은 또 폭발적으로 두드린다. 거기서 희열이 보는 이들에게까지 전해진다. 사운드 세례는 감동이며 완전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사망한 지금 이 시대, 남은 3년을 열받지 않고 보내려면 추억팔이가 최고다. 추억 속으로 쓱 기어들어가면 힘겹고 이 흉흉함이 새롭게 펼쳐지는 매일을 좀 수월하게 견딜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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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버스 타고 한 시간 넘게 학교 다는 게 귀찮아서 학교 앞 독서실에서 두 달인가 생활한 적이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꼬질꼬질하니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울릉도에서 와서 하숙하는 놈이 있어서 거기서 씻기도 하고, 가끔 학교 근처 사우나를 가기도 했다. 거기 사우나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꺼려했는데 거기 사우나는 요구르트도 주고 스킨로션이 일반 목욕탕보다 냄새도 좋고 느낌도 좋아서 친구와 가곤 했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나는 독서실 생활을 해서 도시락을 싸다닐 수가 없어서 애들 도시락 돌아가면서 얻어먹었는데 싫어하는 녀석들은 없었다.


독서실은 공부하는 곳인데 공부는 참 안 되는 곳이기도 했다. 막상 자려고 하면 잠이 안 오고 앉아서 책을 펼치면 꾸벅꾸벅 졸리는 신기한 곳이 독서실이었다. 잠자리가 몹시 불편한데 어떻게든 즉응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책상 밑의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잘도 쿨쿨 잠들기도 했다. 요즘의 나를 생각할 때 – 이렇게 예민하고 낯선 곳에서 잘 못 자고 냄새에 민감한데 그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러다가도 생각해 보면 아버지 병실생활을 할 때에 그 불편한 간이침대에서도 적응을 하니 쿨쿨 잤다. 낮 동안 그렇게 시끄럽고 죽음과 사투하는 환자들도 밤이 되면 고요하게 잠들었다. 병실과 병원 복도가 적요한 것도 기묘했다. 간이침대에 누우면 병실의 바닥 부분이 보이는데 처음에는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대로 눈을 뜨고 새벽을 맞이하거나 잠깐 졸다가 아침이 되곤 했는데 적응이 되며 어디서든 쿨쿨 자게 된다. 복도의 벤치에서도, 대기실의 의자에서도, 가족들을 위한 커다란 방에서도, 어디서든 자려고 하면 쿨쿨 자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정말 알 수 없는 기묘한 존재다.


학교 바로 앞에 독서실이 있어서 3분 거리다. 도로를 하나 건너면 바로 학교 정문인데 지각을 자주 했다. 새벽에 겨우 잠 들어서 눈뜨면 등교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번개날치기로 일어나서 곧바로 튀어 나가도 지각이었다. 그러면 교문 앞에 무시무시한 학주가 몽둥이를 들고 딱 버티고 있다. 저 정문만 통과하면 되는데 그게 참 힘들었다. 담벼락도 높아서 넘을 수도 없었다.


일단 학주에게 걸리고 나면 일주일이 괴롭다. 마치 좀비가 떨어지지 않고 계속 바지 끄트머리에 붙어서 따라오는 것처럼 공포가 엄습함을 느끼는 것이다. 수학여행 때 포항에서 온 여고생들과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학주가 와서 조용히 그랬다. 못 꼬시면 학교에서 죽는다고. 거기가 설악산이었고 묵었던 숙소가 포항에서 온 여고생들이 묵었던 숙소와 가까워서 그 애들 숙소에 들어가서 만나서 밤에 놀았던 기억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아주 길어서 나중에 할 수 있으면.


아무튼 학교에 가면 좋았던 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일진은 반마다 있었지만 내 기억에 아이들을 계속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또 아이들을 따돌리는 일도 없었다. 모르지? 다른 반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일단 우리 반에는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반에는 운동부도 있었는데 양궁부가 있었고, 펜싱하는 놈도 있었다. 또 학교 내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악대부도 있었는데 얘네들은 다른 학교의 일진들과 파벌싸움을 다니곤 했다. 그래서 얼굴에 멍이 늘 따라다녔는데 계급처럼 여기곤 했다. 나는 사진부라서 암실에서 주로 머물면서 놀고, 선배들에게 맞고, 사진 이야기하고 뭐 그랬다. 선배들에게 욕 나올 정도로 많이 맞았다. 그때 많이 맞아서 그런지 군대에서 구타는 뭔가 잘 견딜만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학생 때에도, 군대에서도 많이 맞았는데 사람을 한 번도 때려 본 적이 없다. 언젠가부터 한 번이라도 때리고 싶은 인간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재홍(이라고 하자)이는 기타를 신급으로 연주했다. 재홍이는 점심시간에 등나무 아래에서 기타를 연주하곤 했는데 아이들이 빙 둘러서 구경을 하곤 했다. 학교 축제 때에는 대학교 밴드와 협연을 하기도 했고 여상 클래식 콰르텟과도 합동 연주를 하는 등 인기가 좋아서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녔다.


게다가 재홍이는 주말에 학생들이 많이 가는 호산나에서 디제이를 했다. 우리는 모이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주로 록음악, 헤비메탈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앎은 얕고 가늘었지만 재홍이는 기타를 연주해서인지 각 밴드들의 차이나 특징 같은 것들을 잘 알려 주었다. 재홍이는 연습을 얼마나 했던지 당시 우리가 좋아하는 스티브 바이처럼 기타를 연주했다.


학교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이 없어서 친구와 친구의 도시락을 1교시 후에 해치우고 점심시간에는 매점으로 갔다. 하지만 매점은 늘 인산인해다. 도시락이 있음에도 매점은 항상 북적북적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다니는 독서실에 와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이 언제가 제일 맛있냐? 독서실에서 끓여 먹는 라면이다. 이상하지만 독서실에서 꼬질꼬질한 버너에서 끓여 먹는 라면은 기가 막혔다. 계란까지 야무지게 사 와서 넣어서 보글보글 끓여 먹었다. 김치는 독서실 지킴이 형이 줬다. 라면을 끓여서 호로록 먹고 있으면 젓가락을 들고 나타나는 애가 있었다.

나 이때 인기 많았다 ㅋㅋ


그 애는 여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태희가 나온 여고로 유명한 여고였다. 그 애의 이름은 연주였다. 연주는 미팅을 해서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미팅을 세 번 정도 했는데 전부 땜방으로 나갔다. 너 미팅할래?라고 다이렉트로 먼저 들어온 경우는 없었다. 땜방내지는 폭탄 제거반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나를 미팅에 데려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다. 요컨대 헤비메탈 음악에 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여자 아이들이 전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미팅에 땜방으로 나갔다가 연주가 파트너가 되었고 연주는 딩클럽이라는 학생 밴드들이 공연하는 곳에서 객원으로 키보드를 연주하는 록 마니아였다.


본조비도 반 헤일런도 좋아하는 왈가닥 여고생이었다. 연주도 독서실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여고는 명문여고로 공부로는 우리나라에서도 공부로 짱 먹는 학교라 키보드와 학업을 병행하려면 잠을 줄여 가며 공부를 해야 했다. 여자는 라면을 먹어도 그렇게 많이 먹지 않기는 개뿔, 여자인 연주는 말랐는데 참 많이도 먹었다. 야금야금 먹고 치우다 보면 테이블이 깨끗해졌다. 우리는 가끔 투다리에서 닭꼬치를 실컷 먹기도 했다. 물론 맥주와 함께.


투다리 이모와 아주 잘 알아서 교복을 입고도 잘 들여보내주었다. 중학교 고등학교가 밀집한 지역이라 투다리 이런 선술집에 단속이 왕왕 떴는데 단속이 뜨면 투다리 이모에게 연락이 오고 이모는 우리를 꽁꽁 싸메서 주방의 한편에 숨겨 주었다.


너도 도시락 안 싸왔냐?


연주는 꼭 라면 끓여 먹으려고 하면 어떻게 냄새를 맡고 오는지. 그래도 라면 먹으며 셋이 시답잖은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주 즐거웠다. 존 본조비가 어떻니 리치 샘보라의 스타일이 어떻다느니, 니키 식스가 개 똘아이라던가 귀네문트가 더 예쁜지 같은 이야기들을 하며 하하 호호 행복했다. 연주는 이번 주말에 딩클럽에서 자신의 밴드가 공연을 하니 보러 오라고 했다.


딩클럽은 그 일대에서 유일하게 학생밴드들이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생각해 보면 요즘은 그런 클럽이 전혀 없는데 그때는 구마다 그런 클럽이 있었다. 딩클럽은 11층짜리 건물 지하에 있는데 꽉 차면 백오십 명 정도? 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조명이 밴드가 연주하고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에 맞춰있어서 아주 좋았다. 음향 시설도 좋고 관객으로 온 아이들의 호응도 끝내줬다.


그때는 각 학교마다 밴드 한다고 하는 녀석들이 다 있었다. 전부 부모님에게 혼나고 한 번 쫓겨나고 손들도 울고 성적은 안 떨어지기 하겠다며 그렇게 해서 허락을 받아내서 시간을 내서 밴드 연습을 해서 노래를 불렀다. 멋진 나날들이었다.



호산나가 언급된 기사를 찾았다.https://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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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만히 귀를 대고 소리를 듣다가 나는 손으로 우물을 덮은 쇠뚜껑을 탁탁 쳤다. 그러자 히히히히 하는 소리가 뚝 끊어졌다. 나는 다시 탁탁탁 손으로 두드렸다. 5초 정도 지났을까. 톡톡톡 하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쇠로 만들어진 뚜껑이 덮인 틈으로 말을 했다.


[너 왜 거기 밑에 있니? 어른들 불러와서 뚜껑을 열라고 할게]라고 말했다.


[아니야, 나는 빛을 보면 사라지고 말아. 여기 우물 밑이 꽤 아늑하고 좋아]라고 아이가 말했다.


[너는 죽은 거니?]


[글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애]


[너 혼자 있니? 외롭지는 않니?]


그 부분에서 아이는 잠시 틈이 있었다.


[응, 괜찮아. 여기 친구들도 있어. 지금 같이 놀고 있었어]


[친구들? 정말?]


[응, 너도 친구가 되어 줄래?]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귀신과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만나?]


[이렇게 만나도 되고, 내가 너를 찾아갈게. 괜찮지?]


[응, 언제든지 찾아와. 우물 밑에서 춥지는 않아?]


[여긴 달의 뒤편 같은 곳이야. 춥지도 덥지도 않아. 내내 따뜻하거나 시원해. 그래서 밖에서 폭풍이 쳐도, 비가 여러 날 내리지 않아도 여기는 아무 문제가 없어]


[잠은 언제 자?]


[잠은 안 자]


[정말? 와 좋겠다. 나도 잠 안 자도 되면 그 시간에 태권도 배울 텐데]


[태권도? 왜?]


[그냥, 사실 나는 아이들에게 맞기 때문에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 엄마는 도장에 보내주지 않거든]


[그렇구나. 나중에 내가 태권도 가르쳐줄게]


[너 태권도도 할 줄 알아?]


[응, 나 이래 봬도 태권도 1단이야]


[와 너 대단한데. 빨리 만나고 싶구나]


[너는 내가 무섭지 않니?]


[왜? 귀신이라서?]


[그래]


[응 무섭지 않아.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너는 무섭지 않아. 무서운 건 선생님이고, 술 취한 아저씨고, 이유 없이 때리는 학교에서 짱 먹는 아이들이야]


군인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다시 가깝게 들려왔다.


[나는 가야 할 것 같애. 또 이야기하고 싶으면 여기로 오면 돼?]


[응, 하지만 내가 없을 수도 있어. 내가 너를 만나러 갈게 곧]


눈을 뜨니 나는 우물에 등을 기댄 채 잠이 들었고 아이들이 나를 찾으러 여기까지 우르르 왔다. 게임은 벌써 끝났는데 너는 도대체 여기서 잠들어 있으면 어떡하냐고 아이들이 웃었다. 군인 게임을 통해서 옆 동네 아이들과는 친숙하게 되었다. 여자애들도 다 같이 친하게 지냈다. 나는 그 뒤로 자주 우물에 갔다. 갈 때마다 뚜껑에 대고 탁탁탁 두드리곤 했다. 하지만 우물 밑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방학을 일주일 남겨두고 나는 매일 우물이 있는 곳에 갔다. 그곳에서 그 아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우물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곤 했다. 방학 동안에도 마치 일기처럼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우물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겨울 방학이 끝났다.


겨울 방학은 끝났지만 2월은 아직 추웠다. 하지만 곧 봄방학이 기다리고 있다. 이상하지만 나는 우물과 대화하는 게 좋아졌다. 마치 우물은 그 아이 같았다.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기이하게도 지난번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한 사실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편안했다. 꼭 영화 ‘사랑과 영혼’의 몰리의 마음 같았다. 비록 샘은 사라졌지만 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서 기쁨으로 매일매일 지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봄 방학을 이틀 앞두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걸레를 들고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와 다르게 걸레를 든 녀석을 변기 안으로 밀어 버렸다. 녀석은 변기에 그대로 엉덩이가 빠져서 울고 말았다. 아이들은 당황했는지 내가 노려보니까 그렇게 무서웠던 괴물 같았던 녀석들이 조무래기들처럼 느껴졌다. 왁! 하니까 아이들이 도망쳐 나갔다. 나 같지 않았지만 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야,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내일만 학교에 오면 곧 봄방학이다. 그럼 우물에 일주일 동안 매일 갈 수 있다. 이상하지만 별거 아닌 거에 기분이 좋았다.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나왔다. 교문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나의 앞으로 걸어왔다. 못 보던 여자 아이였다. 여자 아이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곧 전학 올 거야. 너 만나러 왔어]


반가운 그 목소리였다. 우리는 첫 만남에 손을 잡고 교문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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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놀기에는 여름보다 겨울이 좋았다. 아이들이 모이면 뛰어다니며 놀았는데 여름에는 더운 데다 뛰어다니면 땀이 나서 집에 들어가면 몇몇 아이들은 등짝 스메싱을 맞기 일쑤다. 도대체 빨래를 몇 번 해야 하느냐고. 그러나 겨울에는 추워서 뛰어다니면 추위가 물러갔기 때문에 놀기에 그만이었다.


그날은 옆 동네 아이들과 군인놀이를 하는 날이다. 아이들이 다 모이면 거의 15명? 16명 정도가 된다. 옆 동네 아이들과는 사이가 좋지는 않다.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 부딪힐 일이 없으니까 서로 동네에서 논다. 그러나 놀이터 같은 공터가 우리 동네에 있어서 이쪽으로 옆 동네 아이들이 와서 놀 때가 있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정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군대놀이는 계급이 적힌 종이를 한 장씩 가진다. 물론 상대편도 그렇게 한다. 서로 누가 어떤 계급인지 모른다. 그래서 게임이 시작되면 전부 샤샤샤삭 흩어지는데 성큼성큼 거리낌 없이 상대방을 잡으러 다가오는 녀석이 대체로 계급이 가장 높다. 비교적 낮은 계급을 물려받은 녀석들은 어떻든 도망을 다녀야 한다. 여하튼 게임이 시작되면 쫓고 쫓기는, 격렬하게 달려야 한다. 겨울에 안성맞춤이다.


옆 동네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전부 벽에 붙어서 해를 쬔다. 따뜻한 햇빛이 얼굴과 몸으로 떨어진다. 바람이 없어서 햇볕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하다. 아이들은 벽에 등을 대고 일렬로 붙어서 옆 동네 아이들이 오면 어떻게 어떤 식으로 몰아붙일지 계획을 짠다. 그러나 계획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잡으러 오면 어디로 달려가고 어디에 숨어야 한다는 이야기뿐이다. 따뜻한 햇빛에 잠식되어 갈 때 옆 동네 아이들이 왔다.


[이런저런 협상이 오고 간 후]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병장이다. 상대방 대부분이 나보다 계급이 위다. 잡히면 나는 죽는다. 그러나 만약 상대방과 둘이 붙어서 서로 낮은 계급이라 패를 까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그대로 지나칠 수 있다. 그래서 서로 계급이 높은 사람이 기를 쓰고 상대방을 잡으러 다닌다.


도망을 다니되 마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마을 하나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옆 동네와 합치면 숨을 곳도 많고 그 안에 교회도 있어서 제대로 도망 다니면 게임이 끝날 때까지 붙잡히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방송국으로 올라가는 골목의 도사견이 있는 집의 옆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누군가 오면 저 도사견이 크게 짖을 것이다. 그러면 옆의 구멍으로 나가면 된다. 가끔 여자애들도 낄 때가 있다. 드물지만 여자애들이 군인 게임에 끼게 되면 거의 계급이 중간 계급인 경우가 많다.


옆 동네의 여자애들은 그러지 않는데 꼭 우리 동네 여자애들은 같이 놀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실 어떤 놀이를 하던 다 같이 놀면 재미있었다. 밖에서 하는 놀이는 대부분 남자애들이 잘했다. 공기 받기도 남자애들이 잘했다. 심지어는 고무줄 띄기도 남자애가 더 잘했다. 여자애들이 군대놀이에 끼면 군대놀이에만 집중을 하지 않는다. 숨어 있다가도 재잘재잘 거리고, 남자애들만큼 놀이에 몸과 마음을 던지지는 않는다.


[너 뭐야! 너 나보다 낮은 계급이지!] 같은 소리가 들리며, 두 사람이 후다다닥 달려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멀어졌다. 해가 들지 않으니 웅크리고 숨어 있는 곳이 추웠다.


나는 어떤 쪽이냐면 돌아다니며 옆 마을 아이가 나타나면 계급이 뭔지 떠보고 거래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저 조용하게 웅크리고 모든 게 지나가길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다 끝나면 나와서 나는 남았다!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좋았다. 같이 어울리고는 싶지만 깊게 관여하기는 싫다.


이렇게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 웅크리고 있다가 지지고 볶는 시끄러운 게임이 끝나면 나가야지. 그러나 그늘 속에서는 추위가 굉장했다. 바람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게임을 하기 전 햇볕을 받았던 그 따뜻함이 금방 빠지더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러더니 이내 추위가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그곳에서 나왔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허리를 굽히고 살금살금 골목의 모퉁이를 돌았다. 이 정도 왔으면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야 할 텐데 조용했다. 나는 최대한 기도비닉으로 살금살금 놀이터가 있는 공터로 나갔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 잡힌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동네 곳곳, 구석구석에서 추격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 내가 웅크리고 있던 곳은 그늘이 이미 추위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나는 다른 숨을 곳을 찾아서 골목의 끝으로 갔다.


골목의 끝으로 가면 모퉁이의 집을 돌면 옆 마을로 이어진다. 나는 옆 마을에는 자주 가지 않았다. 옆 마을에는 입구를 막아 놓은 우물이 마을의 한 편에 있다. 그 우물을 막은 이유가 아이가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소문을 전달하면 이야기는 부풀 대로 부풀어서 아주 무서워졌다.


그 소문이 그저 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옆 동네에도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우물은 그저 우물로서, 우물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가한 시간인지 옆 마을은 조용했다.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때 군인 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 달려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점점 크게 들렸다. 내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몸을 굽히고 빨리 우물 뒤에 몸을 숨겼다.


동진이 녀석이 옆 마을, 즉 이 동네 아이를 뒤쫓고 있었다. 동진이 녀석은 싸움꾼이다. 지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우리 동네 아이들을 지켜주려고 하는 녀석이다. 단지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그런 녀석이다. 두 녀석이 후다다닥 하며 우물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여기에 웅크리고 있으니 등이 따뜻했다. 해가 나의 등에 떨어졌다.


추운데 있다가 내 몽에 떨어지는 햇볕은 그야말로 나를 치즈처럼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나는 우물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햇빛을 얼굴로 받았다. 추운 겨울의 틈을 벌리고 햇빛은 악착같이 따뜻했다. 노래가 생각나는데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런 기시감 같은 기분을 말하는 노래가 있는데. 노래를 생각하는데 우물 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이히히히 하며 아이의 노는 소리였다. 나는 귀를 우물의 벽에 바짝 대고 소리를 들었다. 분명 어린아이의 소리다. 우물의 입구는 무겁고 딱딱한 쇠로 만든 뚜껑으로 덮여 있고 쇠사슬로 우물을 둘러놨다. 우물 속에서는 히히히하며 웃는 소리와 물장구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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