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은? 중대장 집에 갔어?]


[잘 모르겠습니다. 주말이면 보통 집으로 가는데 중대장 차 때문에 어제는 관사에서 잤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집으로 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커튼도 그대로고 인기척은 없습니다. 중대장 어차피 오늘 저녁에 다시 관사에 와야 하는데 집으로 갔는지 관사에 머무르는지 여기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차는? 중대장 차는?]


[차는 없습니다. 차는 아마 어제 카센터에 급하게 들어갔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몰고 집으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행정병에게서도 뚜렷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일단 이거 구워 먹기로 했으니까 출발하자]


[중대장한테 들키면 어떡합니까?]


[일단 짐은 애들 시켜서 청소하는 척하며 동초 뒤로 옮기고 우르르 몰려가지 말고 한 명씩 조용하게 가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철조망을 넘어 부대 뒤에 있는 호숫가로 갔다. 주말에 가끔 와서 고기를 구워 먹는 장소가 있다. 국방부의 일반 군인이 아니라 우리는 법무부 소속으로 군생활을 하고 있어서 육군과는 좀 달랐다. 중대장은 국방부의 중대장처럼 군인신분이 아니라 일반인 공무원이다. 그래서 관사에서 평일에 지내다가 주말에는 보통 집으로 간다. 소대장들 역시 일반 공무원으로 돌아가면서 바뀐다.


내가 완고여서 나를 꼬신 녀석이 있었다. 굴이 이만큼 있는데 일요일에 호숫가에서 글을 구워 먹자는 나보다 한 기수 밑의 녀석이 자꾸 나를 꼬셨다. 이 녀석 때문에 한 번은 대학교 앞까지 가서 맥주를 마시고 오기도 했다. 그때 여자 후배들이 거기까지 왔었다. 따지고 보면 탈영이었다. 몰래 나가서 한두 시간 맥주를 마시고 또 몰래 들어왔다. 들킨 적은 없었다. 들킬 리도 없었다.


날이 좋은 주말에 와서 닭도 구워 먹고 고기도 구워 먹는다. 온통 산이라 누가 올 리도 없고, 누군가 온다고 해도 이 부근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그 사람들의 배농사를 도와주고 있어서 우리에게 나무라는 일도 없고 눈도 감아 주었다.


우리가 여기 오게 된 이유는 때마침 겨울이지만 날이 좋고, 통영 출신 희철이 부모님이 먹으라고 굴을 잔뜩 보내주었다. 굴이 너무 많아서 행정실에도 한 냄비 주고, 각 내무반에도 한 냄비씩 돌렸다. 그래도 한 박스나 남았다. 우리는 라면에 넣어서 끓여 먹다가 주말에 굴이나 구워 먹자는 의견이 나왔다.


보통 중대장은 주말에 집으로 가니까 왕왕 철조망 건너 호숫가에서 우리만의 주말을 만끽하곤 했다. 사실 중대장에게 걸려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바뀐 중대장은 규칙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날이 맑고 청아한 겨울날이었다. 호숫가에 비친 햇살이 튕겨 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명당자리다. 구덩이를 파고 나뭇가지를 넣어서 불을 땐 다음 고구마나 닭을 포일에 싸서 넣어 두기만 하면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고기를 구워 먹을 때 같이 마실 요량으로 운전병을 시켜서 소주를 피티병으로 사 와서 쟁여 두었다. 피티병의 소주는 독해서 물에 조금씩 타서 마셨다. 불을 지피고 불판을 올린다. 그리고 그 위에 굴을 초장에 찍어서 올렸다. 초장은 이 세상 모든 소스를 통틀어 가장 맛있는 소스다. 굴의 겉면에 바른 초장이 불에 타들어가면서 단맛과 짠맛이 익어가며 굴에 스며든다. 잘 익은 굴을 하나 집어서 차가운 소주와 함께 먹으면 겨울에는 그야말로 별미다.


나이가 엇비슷한 애들이 군대라고 와서 계급으로 나뉘어 지내다 보면 기분 상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아예 구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중대장, 소대장이 같은 군인신분이 아니라 일반 공무원인 경우 군대에서 당하는 부조리에 대해서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그럴 때 고참이 수위조절을 해줘야 한다. 가끔 이렇게 호숫가에 나와서 소풍처럼 고기를 구워 먹으며 화합의 시간을 가진다. 여름에는 돌아가면서 배 밭에 거름을 준다. 농민들이 전부 나이가 많아서 대민지원을 꾸준하게 하고 있다. 호숫가가 배 밭 옆에 있어서 숨어서 소풍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굴은 겨울에 먹는 굴이 최고다. 초장에 찍어 그대로 먹어도 맛있고 초장을 묻혀 불판에 직화로 구워 먹어도 맛있다. 굽는 족족 사라졌다. 뜨거운 굴이 입 안에서 바다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때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소주를 한 잔씩 마셨다. 희철이는 고참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고 기분이 좋아졌다. 희철이에게서 아버지의 굴 자랑이 이어졌다.


그때 행정병이 산으로 우리를 찾으러 왔다. [주, 중대장이 다 집합하랍니다. 중대장이 여기로 가는 걸 보고 있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중대 전부 운동장에 모여 있습니다. 불시 인원점검입니다]


큰일이 난 것이다. 내려가니 전부 연병장에 모여 있었다. 다른 내무반 아이들이 일요일에 불시 점검한다고 불려 나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날 중대장은 우리 모두를 영창을 보내려고 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튼 군대에서 몰래 나가면 탈영이다. 굴 한 번 구워 먹으려고 하다가 난리가 난 것이다. 굴은 요즘에 먹어도 맛있다. 굴 국밥도 맛있고, 라면에 굴을 넣어서 먹어도 맛있다. 김치에 들어간 굴도 맛있고, 초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굴 그대로의 맛이 좋다. 굴의 비릿한 맛과 함께 터지는 굴속의 시원한고 명쾌한 맛이 좋다.


굴을 좋아한다고 숟가락으로 막 퍼먹지는 않는다. 굴은 하나씩 집어서 입 안에서 그 맛을 느끼면서 먹는 게 좋다. 굴은 아무튼 그런 매력이 가득하다. 굴을 저렴하게 자주 먹을 수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굴을 생산하는 사람들도 영차영차 열심히 일을 할 것이다.

중대장은 안 그래도 법무부 소속으로 군 생활을 하는 우리가 아주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제대로 걸린 것이다. 그때 중대장에게 내가 다 벌린 일이니까 나 혼자 처벌을 받겠다고 했다. 애들은 야간 근무도 해야 하니 이 많은 인원이 전부 영창을 가면 중대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전부 뒤집어쓰겠다,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이렇게 말을 하면 나를 꼬신 그 녀석(도 바로 내 밑의 투고이기 때문에 영창을 가도 된다)도 같이 무릎을 꿇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녀석은 아이들을 배경삼이 뒤로 슬쩍 물러갔다. 저 새끼, 저거 내가 죽이고 만다.


중대장은 나의 말을 듣고 더 노발대발했다. 예전에 잠시 행정업무를 맡아서 보게 되었는데 하필 그때 중요한 서류를 청에 보내야 하는데 그만 법무부장관에게 보낸 적이 있어서 중대장이 펄떡 띈 사건이 있었다. 중대장이 하루종일 어딘가에 전화를 해서 연신 굽신굽신거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샘통이던지. 중대장은 안 그래도 나에 대한 미움이 컸다.


[그래, 좋아. 너 혼자 영창 가!]


아, 나는 망했다.


굴 한 번 맛있게 구워 먹으려고 하다가 이게 무슨 난리인가.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뒤로 숨어버린 그 녀석은 내가 죽이고 만다. 그 녀석 때문에 부글부글했는데 소대장들이 중대장을 말렸다. 일요일에 잠깐 호숫가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으려 한 것뿐인데 영창은 너무했다는 식으로 중대장을 달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막내들이 근무하는 동초근무 일주일로 끝낼 수 있었다. 동초 근무를 할 때 또 하필 사고가 터지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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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1-07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비슷한 일로 군기교육대 일주일 가서 돌군장에 폐타이어 끌다 왔지 말입니다.

교관 2024-01-08 11:23   좋아요 0 | URL
지옥도를 경험하셨군요 ㅎㅎ 고생하셨어요
 


미국의 한 구석에서 자매가 노래를 불렀다. 월슨 자매 중 언니 앤은 동생 낸시에 비해서 통통한 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말을 할 때 더듬거리거나 잘하지 못했는데 글쎄 노래를 부를 때에는 전혀 떨지 않았다. 동생 낸시는 언니와 다르게 날씬했고 기타를 잘 쳤다. 자매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끈다. 우리 밴드를 하자. 그래서 윌슨 자매는 자신들이 노래를 부를 밴드를 찾아다닌다.


[노래의 시대별 순서라든가 윌슨 자매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는 전문 리뷰어들의 영상 보기를 권합니다. 이 이야기는 학창 시절 음악 감상실에서 디제이가 하는 이야기를 입을 벌리고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내 마음대로 적는 이야기입니다]


윌슨 자매가 그렇게 찾아간 그룹이 ‘하트’였다. 하트는 형제 밴드가 하고 있었는데 자매 밴드가 합세를 하게 되었다. 이 멤버들의 조합이 희한한 게, 동생 낸시와 하트의 동생이 사귀게 되고, 언니 앤이 하트의 형과 사귀게 되면서 잘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한 조합이 된다. 형제와 자매가 사귀게 된 꼴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이 붙어서 만들어내는 곡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하트 하면 ‘얼론(언론 아니다)’이 가장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졌지만 70년대에 만들어진 ‘크레이지 온 유’는 정말 최고다. 특히 낸시의 기타 실력이 엄청나다. 끝장내버릴 어쿠스틱의 연주를 낸시는 과감하게 보여준다. 3분 가까이 전주를 어쿠스틱 하나로 연주해버리고 난 뒤 등장하는 앤의 보컬은 말해 뭐 해였다.  


Heart - Crazy On You - Ann & Nancy Wilson Live 1976  최고다!!

https://youtu.be/9kRf0DpWUP0?si=12rucJI0GCWtRCLi



꿀 떨어지는 커플이 두 팀이나 되니까 곡들이 마구 분출한다. 낸시의 기타는 남자들만의 세계였던 록 세계에 경종을 울렸고 앤의 보컬은 우주까지 뻗어나갔다. 좋은 곡들이 너무 많은데 설명하려니 힘들고, 시간이 죽 흘러 낸시의 남자 친구가 약을 하고 뭐 그러면서 불화가 터진다. 결국 한 팀에서 사랑을 하게 되면 나락으로 가게 되는 수순을 밟는다. 언니 앤도 헤어지면서 하트에는 원래 형제 멤버가 나가고 앤과 낸시만 남는다.


이상하지만 두 사람이 활동하며 만들어내는 노래는 좋은데 4명이었을 때만큼 시너지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죽 활동하다가 결국 11집인가? 아무튼 앨범을 발매하고 활동을 중단한다. 그러나 밴드 크루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어떤 레코드사도 윌슨 자매와 계약을 하지 않는다. 먹고사는 것 때문에 당시에 무슨 광고에도 출연하게 된다.


그 당시에도 언론은 앤과 낸시가 사귄다는 식의 사진과 글을 게재한다. 아무튼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쓰레기 언론은 늘 있기 마련이다. 윌슨 자매는 여러 레코드사를 찾아가지만 다 퇴짜를 맞다가 한 군데에서 계약을 하자고 한다. 단 조건은 레코사 회사에서 원하는 대로 활동을 하는 것이다.


기본의 선 머슴아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 낸시를 섹시하게 홍보한다. 낸시의 트레이드 마크인 어쿠스틱을 버리고 전기기타로 바꾸고 앤 역시 자꾸 통통 해지는 몸을 커버할 수 있는 화장과 헤어스타일로 무장을 하고 활동을 한다. 그때 나온 노래가 ‘얼론’이었다. 대박인 것이다.


완전 대박이었다. 앤은 당시 악마와의 계약이지만 어쩌구 같은 이야기를 얼마 전에 한 것으로 안다. 이때가 한창 엠티비가 세계의 인기를 독차지할 때라 듣는 것 못지않게 보는 것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때다. 얼론과 함께 나온 노래들의 뮤직비디오는 하트를 알리는데 최고였다. 앤은 토르 같은 의상을 입었지만 헤어와 화장 덕분에 정말 화려하고 예뻤고 낸시는 미국미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섹시하면서 멋졌다. 낸시가 기타를 들고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면 그 모습이 마치 바브 와이어의 파멜라 앤더슨 같았다. 그렇게 하트를 홍보했다.


Heart - Never https://youtu.be/zWzy5q_M5Ho?si=6iNdHdxOyU7vZG5r


Heart - What About Love? https://youtu.be/KE5GGMhmo-M?si=Sqdv_A-24QCLwchl


역시 얼론을 들어봐야겠지

Heart - Alone https://youtu.be/1Cw1ng75KP0?si=eOD1TEyTpuNRQWL1


최근에 원년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서 공연을 했다. 크레이지 온 유를 부르는데 소름 돋았다. 정말 너무 멋졌다. 가장 최근에는 앤의 남편이 낸시의 아이들을 폭행해서 자매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가정사는 참 어렵고 힘들다.


2016년 Crazy On You https://youtu.be/e282K74eTLY?si=VDCWkTLfI-Cal6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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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머니의 등살에 며칠 묵게 된 외삼촌의 아파트는 거대했고 주택이었던 우리 집처럼 춥지 않았다. 외삼촌은 저녁에 잠깐 볼 뿐이었지만 사촌동생과 노느라 즐거운 것도 잠시 저녁이 어스름 다가오면 나는 외삼촌을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자다가 일어나 새벽에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에 나왔다가 배를 벌리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가오리는 마치 그 벌어진 배로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새벽에 보는 가오리는 너무나 컸다. 어둠의 열매를 먹고 살아나서 날개를 펄럭이며 나를 덮칠 것처럼 보였다. 화장실에 가려면 천장에 매달려 있는 가오리들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게 무서웠다. 중학생이나 되어서 무서운 게 왜 이리도 많은지.


그럭저럭 3일이나 외삼촌 집에서 보냈다. 3일째 되는 날 저녁, 사촌동생은 학원에 갔고 막내는 도우미에게 맡긴 채 외숙모는 나를 데리고 저녁에 나왔다. 저녁이면 외삼촌이 퇴근해서 올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외숙모는 괜찮다는 얼굴을 한 채 나의 손을 잡고 63 빌딩으로 데리고 갔다. 63 빌딩을 보니 밝게 빛나고 있는데 길쭉하고 아름다운 성 같았다. 차가운 겨울 저녁을 밝히는 찬란한 불빛에 놀랐고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서 또 놀랐다. 외숙모는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나를 빌딩 안으로 이끌었다.


지하에 있는 아쿠아리움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서 거대한, 정말 거대한 가오리를 봤다. 서서히 움직이는 비행물체처럼 보였다. 머리 위에서 천천히 날개를 움직이며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꼼짝없이 서서 가오리를 보고 있으니 외숙모가 가오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오리가 왜 그런 톡 쏘는 맛이 나는지 알아? 가오리는 온몸으로 소변을 배출하는 거야. 가오리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온몸을 전부 사용한다.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는데 입으로만 하잖아. 그런 점에서 가오리는 너무나 멋진 생물이야]


외숙모는 외숙모 같지 않았다. 가오리는 보기와는 달리 ‘시’적이었다. 수족관에서 나와서 외숙모는 나를 데리고 63 빌딩 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스테이크 전문점이었는데 외숙모는 내가 잘 먹을 수 있게 고기를 썰어 주었다. 그리고 63 빌딩 모형을 사주었고 초라한 나의 외투를 벗기고 좋은 패딩도 사주었다. 팝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프린스 앨범도 사주었다. 프린스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마이클 잭슨과 나이가 같으며 라이벌 같아서 두 사람이 늘 비교된다고 했다. 한국에는 프린스가 마이클 잭슨만큼 유명하지 않지만 외숙모는 키가 작은 프린스가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노래도 마이클 잭슨보다 프린스의 노래를 더 좋다고 했다. 아마 그 뒤로 나는 지금까지 프린스의 음악을 꾸준하게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반짝이는 불빛 아랫 누나 같은 외숙모에게 몇 개의 질문을 했고 외숙모는 큰 웃음을 보이며 대답을 해주었다. 그날 밤 외숙모는 사촌동생과 나를 욕실에서 목욕을 시켰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고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이후 무섭기만 했던 외삼촌과 대적하듯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거실에 널려 있던 가오리가 밥상에 올라왔을 때 가오리 한 점을 집어 먹었다. 난생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야금야금 코끝으로 퍼지는 킁함을 느끼며 씹어 먹었다. 그해 겨울을 지내면서 조금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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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의 기운에 잠시 기분이 묘했다. 언제나 그렇다. 눈을 떴을 때 집이 아닌 경우에 느끼는 낯선 기분은 잠시 머리로 투침하여 눈을 뜨고 방의 분위기에 잠시 젖어들게 만들었다. 늘 잠들었던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집에서 잠들게 된 낯선 방에서 눈을 떴을 때의 기분은 무척 기묘했다.


창가 커튼 뒤로 아침이 밝아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낯선 방의 문제점은 너무 포근하다는 점이다. 집에서 일어났을 때 이만큼 포근한 적은 없었다. 집은 겨울에는 외풍이 심하고 두꺼운 내복을 입고 두툼한 이불을 코끌까지 올려 잠들어야 했다.


나는 일어나지 않고 누워서 낯선 방의 포근함을 느꼈다. 방의 냄새도 좋았다. 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조금 열고 싶었다. 그러면 새벽 겨울의 냉철한 기운이 화악 들어올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이렇게 따뜻한 방에서 이불을 덮고 얼굴만 내민 채 창문을 열고 차가운 겨울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외가에서는 방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었다. 아궁이로 불을 때서 방 안은 정말 후끈후끈했다. 겨울에 눈이 가득 쌓인 모습을 방에서 이불을 덮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겨울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어릴 때 그 기억 때문인지 추운 겨울의 따뜻한 방에서는 꼭 그렇게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옆에서 사촌 동생이 세근세근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 해가 온전하게 얼굴을 내미려면 한 시간 반은 더 있어야 한다. 시간을 보니 아직 일곱 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절대 이 시간에 깨지 않는다. 낯선 방이라 눈이 뜨였다. 겨울방학이라 목동에 있는 외삼촌 집에 왔다. 집에서 어머니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기 전에 한 번 다녀오라고 했다. 아직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밤 열차에 홀로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외가 친척들은 전부 서울과 경기도에 살고 있어서 엄마는 일단 나를 서울로 보내면 겨울 방학이 좀 편했다.


나는 누워서 사촌동생을 봤다. 아직 어린 사촌동생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멀리서 사촌 형이 왔다고 사촌 동생은 신났다고 외숙모에게 들었다. 외숙모는 외삼촌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외숙모는 마치 누나 같았다. 젊고 예뻤다. 세련됐고 보이는 이미지는 차가운데 그런 얼굴과는 다르게 잘 웃었다. 외숙모는 외삼촌의 세 번째 아내였다.


세 째 외삼촌은 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먼저 외숙모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외삼촌과 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친척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외삼촌과 외숙모 사이에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사촌동생들은 너무나 귀여웠다. 외삼촌은 아이들이 태어나 비로소 가족이라는 형태를 이룬 것에 대해서 행복한 것도 잠시 백혈구의 문제로 쓰러지게 되었다.


외삼촌은 병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 간호를 해야 하는 외숙모가 힘들어서 아이들을 우리 집에서 맡아 주었다. 외숙모는 병간호에 들어갔고 사촌동생들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가 있는 우리 집에서 일 년이나 지냈다. 사촌동생들 중에 막내는 아직 아기에 가까워서 어머니가 안고 업어서 돌봤다. 외삼촌의 병이 다 나아서 아이들과 헤어질 때 막내는 외숙모의 품으로 가지 않으려고 해서 어른들이 많이 웃었다.


외숙모는 늘 나에게 서울에 놀러 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목동의 외삼톤 집에서 며칠 묵게 되었다. 처음 외삼촌 집에 와서 놀란 것은 거실에 매달려 있는 가오리들이었다. 가오리 십 수 마리가 배를 가른 채 거실의 천장에 가득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지구인에게 잡혀 온 외계 종족의 모습처럼 낯설었다. 거실 한 편에 있는 거대한 진열장에는 양주가 가득했고 그림들도 많았다. 그림은 풍경화나 정물화가 아니라 초현실 그림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선물이라고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외삼촌은 저녁에만 볼 수 있었다. 외삼촌은 공부를 못하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외삼촌은 배우지 못한 어머니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사촌동생에게는 부잣집 아이들에게만 있었던 게임기가 잔뜩 있었다. 학원에서 돌아온 사촌동생과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외삼촌이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이상하지만 외삼촌이 오기 전까지는 모두가 신났는데 외삼촌이 집에 온 이후로는 대체로 조용해졌다.


외삼촌은 영어사전을 다 외울 만큼 공부를 했다. 그래서 공부를 못했던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티를 드러내는 외삼촌을 가끔 만나는 건 무서웠다. 외삼촌은 사촌동생과 게임만 하고 놀기만 하는 나에게 반에서 몇 등 하는지 물었다. 나는 말소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외삼촌이 무서워 외삼촌 집에서 며칠이나 머물러야 한다니 나는 하루라도 빨리 사촌누나의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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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거리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코로나 시기보다 더 길거리에 장식이 없고 캐럴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라디오에도 이상하지만 다른 해보다 덜 나오는 거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한 마을버스 속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커피를 투고하러 가는 길에 몇 년째 공사를 하고 있는 거대한 공터가 있다. 기존에 있던 소방서를 허물고 무슨 센터를 짓는 모양인데 공사현장 앞에는 늘 공사개요가 붙어 있어서 공기라든가, 그런 걸 다 알 수 있는데 점점 공사개요에 표기된 공사기간이라든가 벗어나더니 어느 순간 그 표지판이 없어지고 그대로 빈 공터인 상태로 코로나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땅을 파고 다 허물어서 생명체라고는 자라지 않을 것 같은데 12월 어느 날 보니 나뭇잎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며칠 굉장히 추웠던 날이었다. 그런 날에도 조깅을 하러 나왔다. 다른 해의 한파보다 덜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막상 나오니 너무 추웠다. 하지만 늘, 언제나 그렇듯이 조깅을 하고 10분 정도 지나면 등이 후끈후끈해진다. 아무리 추워도 조깅을 하는 러너가 한두 명은 보이는데 이 날은 정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던 날이다. 도로에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큰 도시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전에 비해 비둘기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한동안 닭둘기라고 해서 도심지에 가득해서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같은 글귀가 여기저기 붙었었다비둘기들이 싸질러 놓은  때문에 앓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닭둘기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예전만큼 많이 보이지 않는다일행 중에  명은 비둘기들이 다가오면 저리 가 조류독감아 라고 외치기도 했다요즘 비둘기들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여전하다예전 닭둘기들은 발로 툭툭 치면 옆으로 밀려갈 정도로 사람은 사람취급  했는데.


12월에 조깅하다 올려다본 하늘은 그대로 그림이었다. 고요하고 뿌옇고 포근해서 마치 4월 초 같은 날이었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그림 같은 풍경이다. 실내에서 트래드밀로 달리면 이런 풍경은 절대 볼 수 없다. 불편한 점이 있지만 밖으로 나오면 이런 풍경을 접 할 수 있다.


매일 오전 비슷한 시간에 커피를 투고하러 가는 길이다. 햇살이 좋았던 12월의 어느 날이다. 날이 좋으면 커피 투고 하러 가는 이 길을 걷는 게 좋다. 다운타운이어서 한창 오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매일 지나가니까 매일 비슷한 모습으로 하루를 여는 장면을 보는데 지겹지 않다.


아버님 아무리 술에 취해 잠이 오더라도 이런 데서 주무시지 마세요. 날이 포근하다고 해도 데카브리입니다 아버님. 신발까지 나란히 벗어 놓고 버스정류장에서 잠들어 있는 어르신을 보니 꺼져가는 12월이 더없이 안타까워 보인다.


책을 보면 정점을 찍으면 내려오는 길밖에 없으니 평행선을 이루면서 길게 살아가는 게 좋다는 말들이 많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점을 찍지 않는 것이 아닐까. 비록 떨어질지라도, 바닥까지 추락하더라도 꼭대기에 올라 거기서 밑을 한 번이라도 내려다보고 싶지 않을까.


인간은 예전부터 마녀사냥을 해서 자기 위안을 삼으려는 유전자가 있어서 몰려들어 한 사람을 죽이는데 적극적이 된다. 죽이는 댓글 한 줄에 정의롭다는 뿌듯함으로 매일을 보내는 사람을 우리는 쓰레기라 부른다. 동료의 죽음을 추모하면 달려가는 쓰레기는 불에 태워야지.


내가 살았던 동네는 이제 이렇게 전부 싹 없어지고 아파트가 착착 들어서고 있다. 고층 아파트가 엄청 많은데 내 아파트는 없다는 것도 기운이 빠진다. 아파트는 살기 편하지만 한 번 불편하면 한도 끝도 없이 불편해진다. 층간소음이라든가, 담배연기라든가.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으며 폭력으로 번진다.


2023년 데카브리를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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