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확인해보니 작년 4월에 한번 읽었던 책이다. 그때는 밑줄만 그어 놓아서 다시 한번 정리하는 차원에서 재독(再讀)을 하였다. 역시 <보다>를 재독할 때와 마찬가지로 책이라는 것이 읽을 때마다 그때의 내 상황과 생각과 기분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다가오는 것임을 느낀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문장들에 눈길이 갔다.
저자가 강연을 하거나 인터뷰를 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원했던 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며, 예전에 했던 것들에 대한 재탕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사느니 TED나 세바시, 힐링캠프를 검색하여 저자의 강연을 들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일관된 주장을 편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읽는다는 것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그리 아까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저자는 소설을 통하여 독자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며 소설과 소통하다가 그것이 완성되면, 그때에는 소설과 독자들의 새로운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며, 작가는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니 저자가 기획하고 있는 이 3부작의 산문은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특별한 노력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하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내면을 지켜라', '예술가로 살아라', ' 엉뚱한 곳에 도착하라', '기억 없이 기억하라'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들을 '해라'체로 구성하였다. 아무래도 '말하다'라는 제목이다보니 저자가 하려 했던 말을 이런 투로 표현한 것 같다. 아무래도 강연과 인터뷰의 편집이다보니 각 부마다 제목에 꼭 맞는 내용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1부에서는 독서라는 탐침을 통하여 자기 내면을 지켜나가는 비관적 현실주의와 감성근육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자기해방의 글쓰기를 강조한다. 2부에서는 유용성을 결여한 그 자체로의 예술을 추구할 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소설가라는 예술가가 된 저자 자신의 예(서재, 할머니의 벌집)를 일부 소개한다. '나를 작가로 만든 것들'이라는 보다 직접적인 제목은 4부에 있다.
1, 2부가 주로 독자나 청중에게 글을 읽고 쓰도록 권하는 이야기라면, 3, 4부는 소설과 문학이라는 조금 더 넓은 차원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 2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흥미가 감소되었는데, 중간중간에 끼워놓은 인터뷰에서는 저자가 썼던 소설들에 대한 Q&A가 있어,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김영하의 소설에 대한 기억이나 미처 파악하지 못한 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장점은 있다.
이 책을 통하여 저자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 삶의 방식과 지향, 작가인 동시에 독자로서 문학(특히 소설)을 대하는 태도, 글쓰기와 독서의 의미 등을 엿볼 수 있었다. 야만성을 향해 다가간 우리 사회의 퇴화, 압박면접이라는 사디스트적 행위 속에 감추어진 관계의 심리는 크게 공감이 갔다. 부모가 제시하는 조건부 혹은 유보적인 성취와 자신의 의지를 교환하지 않은 개인적 경험이나, 실패로 얼룩진 소설을 통하여 인생의 보험을 찾을 수 있다는 조언, 불필요한 관계에 휩싸이지 말고 그 시간에 내 취향과 영혼에 도움이 될 무언가를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제안들은 청년이라고 보기엔 다소 나이가 든 내게도 유용한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비관적 현실주의와 감성근육, 자기해방의 글쓰기는 책을 읽고 난 후 공감이 간다고 바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앞으로도 계속 머리와 가슴에 새겨두어야겠다.
이렇게 읽다보니, 소설 속에 숨겨진 작가의 뜻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쓴 작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말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는 단순히 소설의 숨겨진 의미나 해석 차원의 도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와 그 소설과 독자와의 사적인 관계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는 차원의 도움을 말한다. 이 소설이 무슨 의미인지를 고민하면서 읽을 수도 있고, 재미와 즐거움 혹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도 소설을 소비할 수 있겠으나, 읽고 배우며 그것을 체화한다는 의미에서는 매개체가 아닌 완성품으로서의 소설과 그것을 제조한 장인으로서의 작가를 분리해서 보는 방식은 읽는다는 행위와 읽는 대상에 대한 보다 명정한 이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변화라면, 예전보다 사회가 가진 희망의 총량이 많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이제는 희망을 품는 것은 고사하고 다들 자기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자리라도 지키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그리고 우리 사회가 문명보다는 야만을 향해 조금 더 움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자를 존중하고 사회적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 문명이라면 그 반대쪽으로 많이 움직인 것 같다는 거죠. - 11쪽
예를 들면 그런 게 있더라고요, 압박면접이라고 하나요? 그 무슨 사디스트적인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취업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거잖아요. 정확히 그건 나쁜 부모가 하는 행동이거든요. "너는 모자라다, 너는 왜 이렇게 부족해" 이런 얘기를 하면서 모욕을 주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똑같아요. 그런데도 지원자는 웃어야 되잖아요.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되고, 자기는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처신해야 하고요. 심지어 실수로라도 반항하지 않도록 강자의 논리로 자기를 설득하잖아요. ‘경쟁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이런 걸 스스로에게 설득시키고 받아들이는 거죠. 나쁜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아이와 비슷한 거죠. - 12, 13쪽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했지만 저는 분명하게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못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바람은 늘 그런 식이기 때문입니다. 대학만 들어가라, 졸업만 해라, 결혼만 해라, 아이만 하나 낳아라, 그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지만 아무 조건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날’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 17, 18쪽
보란듯이 성공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미안하지만, 여러분 앞에는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나는 작가라 여러분에게 성공하는 법 같은 것은 가르쳐줄 수가 없다. 작가는 실패 전문가다. 소설이라는 게 원래 실패에 대한 것이다. 세계명작들을 보라. 성공한 사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기껏 고생해서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상어들에게 다 뜯기고 뼈만 끌고 돌아온다. <안나 카레리나>의 안나와 <마담 보바리>의 보바리 부인은 자살하고 만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옛사랑을 얻기는커녕 엉뚱한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젊은 생을 마감한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 20, 21쪽
이제는 열심히 해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이 아니라 비관입니다. 어떤 비관인가? 바로 비관적 현실주의입니다. 비관적으로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되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기도 어렵고 가족도 바꾸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다,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 자신이라도 바꿔라, 저는 그것마저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다면 그런 책들이 그렇게 많이 팔릴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대책 없는 낙관을 버리고,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성급한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고 비관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 22, 23쪽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에요. 잘못 생각했던 거죠. 친구를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각기 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20대,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갈 것 같고 앞으로도 함께 해나갈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러잖아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은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더군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기울이고 영혼을 좀더 풍요롭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에요. - 38, 39쪽
인간만 존재하는 세상에선 인간의 본질을 생각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동물과 함께 있으니까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인간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신화인데, 신화는 계속해서 동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 것이야말로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주는 게 아닐까요? - 47, 48쪽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굴복을 거부하는 자들이니까요. - 56, 57쪽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플로베르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을 연결한 것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앞에 쓴 문장에 이어 말이 되도록 다음 문장을 쓰는 것이죠. - 69, 70쪽
제가 미친듯이 글을 써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예술가의 악마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악마는 여러분이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수백 가지의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될 수 없는 수백 가지의 이유’가 아니라 ‘돼야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 76쪽
그럼으로써 서재는 자아가 확장해가는 공간인데,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자기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또는 자기는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욕망들을 실현하는, 그런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책 속의 여러 가지 생각들을 통해서 자아가 확장되는 거죠. 작은 공간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거대해질 수 있는 확장성이 있습니다. - 80, 81쪽
아마도 칼 세이건의 말일 텐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말이었어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애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저와 소설의 관계도 그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전 세계의 소설에 역사가 있잖아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소설들이 있고, 제가 쓰는 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죠. 앞으로 남은 생애 안에 제가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밤하늘의 어떤 흔적도 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세계의 일부라는 것, 내가 그 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것, 그게 어떤 기쁨을 줄 때가 있어요. 내가 그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사실이 말이에요. 소설의 세계는 너무 거대해서 저는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못할 거에요. 그게 기쁠 때가 있어요. 광대무변한 이 우주와 나. - 89, 90쪽
계속 떠돌면서 살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런 거에요. 낯선 곳에 엉뚱하게 던져진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자기도 잘 모르는 낯선 곳에 엉뚱하게 던져져서 여기가 어딘가를 어리둥절해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99쪽
기초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문장은 쓸 수 있잖아요. 그런 정도만 되면 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이고, 그때 중요한 것은 자기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발언하는 거에요. 저는 거기서 기본적 희열이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해방감. - 136쪽
예전에 토니 모리슨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서가를 둘러보고 거기에 없는 책을 쓴다." 또 어떤 작가는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쓴다고 말했죠. 다 비슷한 말입니다. 내가 읽고 싶거나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거지요. 저는 토니 모리슨의 말을 더 좋아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서가를 둘러본다는 거에요. 서가를 둘러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책을 다 검토한다는 거죠. 작가에게 독서는 그런 의미에서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읽어보고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지요. 내가 정말 알고 싶었거나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지금껏 누구에게서 듣지 못했던 것이 있는가? 그것을 나는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서 작가는 늘 서가를 둘러보고 그 안에 넣고 싶은 책을 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작가로서 그런 야심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 139, 140쪽
독자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 소통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소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아요. 소설을 쓰는 동안에 저는 오직 제 소설과 소통을 합니다. 제가 창조한 세계에서 그 인물들과 대화하면서 사건들을 함께 겪어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면, 저는 나오는 거죠. 이제 그 공간에는 제가 아니라 독자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소설과 독자 간의 소통이 시작됩니다. 거기 제 자리는 없습니다. 이처럼 소통이란 게 상당히 간접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우리 교과서에는 어떤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묻는 것 말이죠. 저는 제 인물들과 소통을 하고 나면, 퇴장을 하는 사람이에요. 독자는 작가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죠. - 162, 163쪽
그러니 서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우리는 바람둥이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새로운 책을 만나거나, 혹은 과거에 읽었으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책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는 혼자 즐거워합니다. 이런 즐거움은 가장 가까운 친구와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이 은밀한 기쁨을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의 독서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행위입니다. 심지어 그 책을 쓴 작가와도 독서의 감상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작가 역시 그 작품을 완성한 후에는 한 사람의 독자와 마찬가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수백 번을 더 읽은 독자라는 점에서 일반 독자보다는 작품에 대해 잘 기억하겠지만, 그 기억 역시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가면서 다른 독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됩니다. - 179, 180쪽
한 권의 책과 그것을 읽은 경험은 독자 개인에게만 고유한 어떤 경험으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독서를 왜 할까요? 그것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바로 그점 때문입니다. (...) 모든 것이 ‘털리는’ 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 180, 18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