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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 갑질 공화국의 비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5월
평점 :
내가 종종 강준만 교수의 글을 찾는 이유는, 그 주제의 다양성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내재된 문제점을 깊숙히 파고들어 불편할 정도로 드러낸다는 점, 단순히 자신의 주장만이 아니라 그 문제점에 관련된 다양한 의견과 현상들을 아울러 제시한다는 점, 무책임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 위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 때문이다. 이 책도 그런 연유에서 읽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흙수저들도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오독(誤讀)되고 있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실상 우리 사회에 만연된 계층 문제, 갑을 문제, 차별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말에서는 저자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깨야한다고 주장하는 연유를 밝히고 있다. 서론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저자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강준만 교수는 머리말만 읽어보더라도 그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제기와 주요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도입부분을 공들여 쓴다는 느낌이다. 한 두 페이지의 배경이나 연유가 아니라, 계층의 이동 가능성을 표현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왜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그리고 최근 심각해지고 있는 '갑질' 문화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제1장 '갑질 공화국'의 파노라마에서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데니얼 튜더의 표현을 빌려 세계 최고와 최악이 병존하는 우리 사회의 기이성을 밝히고, '땅콩회항' 사건과 김현 의원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을 통하여 '모욕 사회' '의전 사회'의 구조를 분석한다. 제2장 '갑질'을 가르치는 교육에서는 학력과 학벌이 신분화 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키면서 '원세대' '지균충' '기균층' '지잡대'라는 용어 속에 숨어 있는 차별적 이념을 파악하고, 모욕과 차별이 하향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을 분석한다. 특히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통하여 이 책에 등장한 20대들의 사례는 곧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능력주의를 답습한 것임을 밝힌다. 제3장 지위불안과 인정투쟁에서는 끊임 없는 비교를 통하여 현실에서 낙오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우리사회의 '지위불안'과 대학등급에서 결혼등급으로 계속되는 '인정투쟁' 현상에 대해 다룬다. 제4장 갑과 을, 두 개의 나라에서는 보수 기득권층이 맹신하고 있는 '낙수효과'의 허점을 설명하면서 대기업 vs 중소기업, 인 서울 vs 지방, 경쟁 과잉 vs 경쟁 과소의 현상을 '개천의 용' 틀에서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용이 된 미꾸라지는 결국 자신의 터였던 '개천'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파괴한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전 국민이 용이 되기 위하여 '각개약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사회적 기회비용을 유도한다는 부작용은 물론, 모두가 용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통하여 극소수의 용이 모든 것을 독식하게 하는 승자독식주의를 평등으로 치환하는 자기기만과 자해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계층마저도 '개천 용'이 결국 한국 사회가 평등한 것임을 반증한다는 패러다임에 빠져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매우 날카롭다.
맺는말에서 저자는 '비교하지 않는 삶'을 제안한다. 그런 뻔한 말을 누가 못하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개인들이 용이 되기 위한 각개약진의 자세를 버리고 '꿈'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통한 '희망 고문'을 멈추어 용을 키우기 위한 미꾸라지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것 이상의 해법은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흐름을 우리가 5-10년 뒤에 따라가는 것으로 보면,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토리 세대(달관 세대)'는 어쩌면 학벌과 취업 전쟁에 시달려 3포에서 이제 연애, 결혼, 출산에 이어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해야 하는 5포 세대가 되어버린 우리 젊은이들의 미래상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더욱 큰 문제는 그나마 일본에서의 사토리 세대의 출현은 지금의 우리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보다 경제 및 사회적 분위기가 나았다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선택한 극단적인 '달관'이 어떻게 변형되어 표현될 것인지는 생각만으로도 암담하다.
이런 의미에서 "체념을 해야 변화를 위한 저항도 가능하다"는 저자의 말은 새롭게 와 닿는 면이 있다. 그것은 루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학력 루저, 취업 루저라는 루저 컴플렉스에서 벗어나 체념과 포기를 동력 삼아 지금 바로 이곳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도록 방법을 모색하는 이른바 발상의 전환이다. 스스로를 용이 되지 못한 미꾸라지나 루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천을 미꾸라지와 루저들의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라는 공동체로 새롭게 복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거대한 담론일 수 있으며, 우리 개인들은 늘상 이런 거대담론 앞에서 쉽사리 무너지고 만다. 문제점을 폭넓게 제도적으로 변경하는 연역적 해결방법이 아니라 '귀납적 개혁'을 통하여 나부터 체념하고 저항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연대를 위한 하나의 끈이 된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비교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 말이다.
갑질은 결코 많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이거니와 다단계 먹이사슬 구조로 되어 있어 전 국민의 머리와 가슴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삶의 기본 양식이다. 즉, 이른바 ‘억압 이양의 원리’에 따라, 상층부 갑질의 억압적 성격은 지위의 고저에 따라 낮은 쪽으로 이양되는 것이다. - 7쪽
"개천에서 용 난다"는 단순한 속담이 아니다. 그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모델이자 심층 이데올로기로서 무게와 중요성을 갖는다.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코리언 드림’의 토대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더불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즉 ‘갑질’이라는 실천 방식을 내장하고 있다. - 9, 10쪽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말은 용과 미꾸라지를 구분해 차별하는 신분 서열제를 깨거나 완화시키는 동시에 ‘개천 죽이기’를 중단하고 개천을 우리의 꿈과 희망을 펼칠 무대로 삼자는 뜻이다.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말은 ‘국가’니 ‘전체’니 하는 말을 앞세워 일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건 물론 성공을 거둔 뒤에도 희생을 당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않은 ‘철면피 심리’를 끝장내자는 뜻이다. - 12쪽
박명림도 한국이 단기간에 선진국에 진입한 경제발전과 기술진보는 ‘한국 기적’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면서도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단계에서 한국의 집합적 인간지표는 적절한 언어를 찾기 어려울 만큼 섬뜩함 자체"라고 말한다. "우리 공동체에는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지표와 기술지표, 세계 최악 수준의 인간존업과 인간지표가 병존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런 공동체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 서로 반대되는 한국적 기적(Korean miracle)과 한국적 재앙(Korean disaster), 한국에의 희망(Korean dream)과 한국의 수치(Korean shame)가 공존하는 한국적 신비(Korean mystery)와 한국적 수수께끼(Korean enigma)를 어떻게 이해하고 결함하며 해결할 것인가?" - 35, 36쪽
국제적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은 ‘개천에서 난 용’이다. 그런데 이 용은 늘 비교중독증에 시달린다. 대니얼 튜더는 "끔찍한 비극인 세월호 사건에 대해 부끄럽다고 얘기하는 한국인이 있다"며 "한국과 외국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서글픔을 느꼈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남과 비교하는 저주에 빠져버렸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물론 그런 ‘비교의 저주’는 일상적 삶에서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누가 용이 되었으며 누가 용의 지위에 더 근접했느냐를 놓고 한국인들은 남들은 물론 자신조차 못살게 군다. - 36, 37쪽
‘6·25 심성’은 우리에게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한 동시에 ‘전쟁 같은 삶’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물론 심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한국이 ‘갑질 공화국’이 된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다. 상호 맞물려 있거니와 각기 위상이 다르긴 하지만, 단순 나열식으로 열거해보자면 ① 압축성장의 부작용(황금만능주의 등), ② 효율을 기하기 위한 1극 중심주의가 낳은 서열주의, ③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 중심의 정책으로 인한 사회적 위계화, ④ 수출지향형 경제정책으로 인한 기업사회 구축, ⑤ 부정부패와 출세주의, ⑥ 법치의 실종, ⑦ 연고주의·정실주의·패거리주의 등 무수히 많은 요인이 얽혀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요인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감내케 한 주요원인이라는 점에서 ‘6·25 심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37쪽
구조와 시스템의 상황으로 나타날 때 사람은 상황의 노예가 된다. 사람의 특성이 아니라 상황이 중요하다고 보는 ‘상황주의(situationism)’ 또는 ‘악의 상황 이론(situational theory or evil)’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다고 하더라도, 조현아의 갑질과 내부고잘자에 대한 탄압을 설명하기엔 적합하다. 전·현직 대한항공의 승무원들이 ‘땅콩 회항’ 사건과 관련해 "이런 게 뉴스에 나왔다는 게 오히려 의아할 정도"라고 밝힌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상황이 당연하거나 자연스럽게 여겨질 정도의 시스템이라면, 그런 시스템의 문법에 충실했던 조현아 역시 그 시스템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인식, 아니 상상력이 필요하다. - 59, 60쪽
물론 의전 사회의 이데올로기 구호는 "내가 누군지 알아?"다. 윤평중은 "‘내가 누군지 알아?’를 추동하는 한국적 권력 의자와 출세관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암종(癌腫)이다. 추악한 그 암 덩어리를 단호히 끊어내야만 진정한 민주·평등 사회로의 비약이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유토피아’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나름 제법 성공을 거둔 이들이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들이 기고만장(氣高萬丈)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열심히 조성해오지 않았던가?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오직 남과의 서열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신의 서열 확인 차원에서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상대로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는 게 아닌가? - 84쪽
오래전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의 부인인 엘리노어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가 흑인 등 소수자들의 인권운동을 펼치면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오늘날의 한국에서 큰 울림을 갖고 다가온다는 게 서글플 따름이다. "당신의 승낙 없이는 그 누구도 당신이 열등하다고 느끼게 만들 수 없다(No one can make you feel inferior without your consent)." - 87쪽
이나미는 <한국 사회와 그 적들: 콤플렉스 덩어리 한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사는 법>이라는 책에서 "한에 울던 한국인, 이제 욕망 때문에 운다"고 했는데, 그는 그런 욕망에 짓눌려 ‘자녀를 범죄자로 만드는 부모들’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똑똑하고 경쟁적인 일부 부모들은 ‘기죽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설령 네가 잘못해도 꼭 사과할 필요는 없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남을 이겨라(커닝이나 폭력 정도는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네 것만 챙겨라(약하고 아픈 사람 도와줄 필요 없다)’와 같은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보내 자녀들을 냉혹하고 지능적인 범죄자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 127, 128쪽
"이십대 학생들에게 ‘수능점수’는 이런 부동산 가격과 흡사하다. 그것을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서열의 기준이 마련된다. 이들은 자신의 위치를 수능배치표에서 정확히 확인하고 이에 근거하여 행동을 한다. 그리고 이 서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날라치면, 대학생들은 자기 ‘위치 값’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친다. 집값 하락을 어떻게든 막겠다는 주민들처럼 말이다." - 139쪽
입시전쟁에서 승자가 되었건 패자가 되었건, ‘수능의, 수능에 의한, 수능을 위한 삶’을 사는 대학생들의 정신 상태에 대해 오찬호는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 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 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 142, 143쪽
그렇다. 정희진이 잘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인간이 잉여이거나 잉여 직전인 사회에서, 우리는 잉여의 공포에 떨면서도 먼저 잉여가 된 이들에게 안도감과 경멸을 느낀다." 같은 맥락에서 문성훈은 "한쪽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은 다른 쪽을 무시하면서 무시당한 설움을 풀고 훼손된 자존감을 회복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무시당한 사람들은 또 남을 무시하기 위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며, 이것이 무한분열하면서 한 사회 전체가 무시의 그물망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말한다. - 143쪽
다른 대학들에도 있는 ‘지균충’과 ‘기균충’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의 이면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균충’과 ‘기균충’은 개천에서 더는 용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학들이 점점 부잣집 자식들의 대학으로 변질되어 가는 추세에 ‘두려움’을 느낀 기존 체제 수호파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지균충’과 ‘기균충’은 명문대학들이 부잣집 자식들만의 대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면피용 상징으로 고안한 것으로,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의 허울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물론 개인들의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망정 거시적인 부석을 해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 155쪽
명문대는 사실상 ‘신호를 팔아먹는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다니려면 수업료와 기타 비용으로 매년 12만 달러가 든다. 일부 사람들은 이 경영대학원의 학위가 아무 의미 없는 ‘12만 달러짜리 신호’에 불과하다고 폄하하지만, 계속 입학 경쟁률이 치열한 걸 보면 취업시장에선 그 비싼 신호 효과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 160쪽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어떻다곤 하지만, 한국의 학벌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그것보다 악성인 면이 있다. 인도에선 선거가 카스트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최하층계급은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를 높여나간다. 그래서 카스트의 완고성은 음식과 결혼의 영역에서만 지켜지고 있을 뿐, 사회에서 서열은 카스트가 아니라 돈과 힘이라는 새로운 물질적 척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반면 한국의 학벌 카스트는 상징자본은 물론 돈과 힘까지 독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니, 한국은 어떤 면에서 인도보다 뒤떨어진 카스트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 161쪽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해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이다. 사람들은 실제적 지위야 어찌되었든 소비를 통해 그런 ‘중요한 상징’을 획득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런 상징성이 있는 상품들을 가리켜 ‘신분재(status goods)’, ‘지위재(positional goods)’라고 한다. 날로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대표적인 지위재는 학위와 학벌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의 관문이다. 한국에서 학위와 학벌의 지위재 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지위재 수준을 넘어서 신분증명서 역할까지 한다. - 202, 203쪽
우리는 지위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만,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이 지배하는 체제하에선 그 불안은 결코 해소될 수 없다. 진정한 대안은 그 모델을 모멸하면서 그 모델을 신봉하는 남의 시선에서 독립하는 것이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상상력과 용기, 이게 바로 우리가 지위 불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비교하지 않는 삶’은 정녕 불가능한가? -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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