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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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읽다가 멈추고 덮어 두었다. 도저히 앞으로 더 나갈 수가 없었다. 그건 이 책의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도 내가 너무 몰입되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어지럽게만든 잡념들 때문이었다.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내 그냥 인쇄된 글을 따라 흘러가는 내 눈을 발견하고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기를 반복했다. 계속 읽어나갈 수가 없어서 소리내어 읽기까지 해보았지만 이미 60페이지 정도를 읽어버린 내게는 더이상 아무 것도 입력되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꽤 시간도 흘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이런 맑은 날, 그것도 5월이 훌쩍 지난 시기에 이 책을 다시 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두번째로 시도하는 독서는 처음보다는 수월했다.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며 읽었기 때문일까. 많은 책과 영화, 다큐를 보고 이야기를 전해들어도 생경하기만 하였던, 가끔은 함부로 상상을 하는 것 조차도 차마 죄스러울 것 같았던, 내게는 여전히 낯선 80년 5월 광주의 상황을 차분히 묘사해가는 저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전율하고 말았다. 담담한 그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화를 내고 오열하는 어떤 목소리들 보다도 더 깊게 다가왔다. 차분하게 이루어지는, 그러나 어느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관찰과 투시는 얼룩진 역사를 개인들의 서사로 다시 재구성한다. 


1장(어린 새)에서는 동호라는 소년을 관찰하는 나로, 2장(검은 숨)에서는 육신은 이미 죽어버린 정대의 영혼으로, 3장(일곱개의 뺨)에서는 김은숙을 관찰하는 제3자로, 4장(쇠와 피)에서는 그날과 김진수에 대해 진술하는 나로, 5장(밤의 눈동자)에서는 동호와 은숙과 성희를 기억하는 선주로, 6장(꽃 핀 쪽으로)에서는 동호를 떠올리는 동호의 어머니로, 에필로그(눈 덮인 램프)에서는 작가로 각 장마다 달라지는 서술자의 관점은 5.18을 일관된 어떤 한 덩어리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파편들만 주워먹는 게 고작인 내 혼란스러운 시선과도 같았다.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그들의 상황과 이야기를 따라갈 뿐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모든 것이 명확해지지는 않았다. 사건도 사람도, 그 무엇도. 이것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명명되는 5.18에 대한 기록인가? 아니다. 기억을 위한 서사인가? 아니다. 살아 남은 자의 회고인가? 아니다. 그날 고집스럽게 상무관에 남았던 동호는 죽어버린 정대의 영혼을 거쳐, 살아남은 김은숙의 젊은 날을 거쳐, 서 선생의 연극 속의 초혼(招魂)을 거쳐, 김진수와 선주의 기억을 거쳐 작가에게 다가가 버렸나보다. 


침울하고 갑갑한 마음을 이겨낼 길이 없어 창밖으로 시선을 달래본다. 다시 일을 하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하필이면 야당대표가 전두환을 예방하겠다고 했다는 뉴스가 뜬다. 겨우 진정시켰던 가슴이 다시 갑갑해진다. (취소되었다고 한다)

똑같이 죽은 몸인데, 누군가의 손길이 남아 있는 그 몸이 한없이 고귀해 보여서 나는 이상한 슬픔과 질투를 느꼈어. 몸들의 높은 탑 아래 짐승처럼 끼어 있는 내 몸이 부끄럽고 증오스러웠어. - 53쪽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이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를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 57, 58쪽

그녀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살점 위에 피와 육즙이 고이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있는 생선을 구울 때는 눈을 감았다. 프라이팬이 달궈지며 얼었던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희끗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죽은 물고기가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은 순간을 외면했다. - 72쪽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 85쪽

그녀는 책을 덮고 기다렸다. 창밖이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96쪽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102, 103쪽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 119쪽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134쪽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135쪽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207쪽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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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8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내 사람들 반발이 커서 예방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붉은눈 2016-09-08 16:4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그런 행위가 `통합`으로 치장되는 걸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요...

comet 2016-09-09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소년이 온다를 다 읽어내기까지 펼쳤다 덮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저릴 만큼 아픈 글이었습니다. 첫 문장이 너무도 공감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