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김종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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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에 소름과 전율이 좌르륵 흘러내리는 진저리를 몇 번인가 치다보면 어느덧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있을 정도로 이야기의 재미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한다. 기시감이란 그 음험한 느낌의 언어에서 적나라한 살인의 묘사와 죽음 앞에 몸서리쳐대는 추악한 인간의 양면성이 그 형태를 달리하며 반복될 때 마다 내 몸 어딘가가 파헤쳐지는 듯 고통스러움에 머리채를 흔들게 된다.

꿈을 꿀 때마다 피살자로 빙의되고 살해자를 확인하는 거듭되는 악몽과 피살되는 인간의 수만큼 사라지는 나의 손톱, 약지에서 검지, 중지, 그리곤 어느 날은 세 개씩,...생 손톱이 사라진 곳의 통증과 선홍색 피, 꿈과 실재의 혼란이 착란처럼 다가온다. 빙의되었던 피살자인 나를 죽였던 인간이 실재한다.

‘라만고(Ramango)’, 악몽을 꿀 때마다 내 손톱을 먹어치우는, 인간본연의 영혼을 지옥으로 내치고 그 육신에 깃들어 원소유자로 살아가는 심판자! 이 괴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작품의 중요한 단서이자 핵심 소재로서 라만고는 인간에 내재하는 악의 정화자로서의 영적 존재임을 알려준다.

무참하게 살해된 자신의 여섯 살 아이에 대한 상실의 고통, 그리곤 이혼한 남편의 사망, 주변의 화냥년이라는 비난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32세의 여인, 홍지인의 악몽은 이렇게 지속되고 악몽을 현실 속에서 또렷이 찾아 헤맨다. 점점 가까이 엄습해오는 알지 못하는 죽음의 그림자, 네일아트의 공동 운영자인 친구 민경과 연인 세준까지 악몽의 주인공이 되어 모습을 나타낸다.

선택적 기억상실증, 우리 인간의 뇌는 자아의 생존 확률을 높이도록 진화되어왔다. 내 일상의 안위와 즐거움, 내 욕구의 실현을 위해 방해되는 고통의 기억을 지우는 이기적 기능을 멋지게 수행해낸다. 내가 믿는 나의 기억은 온전히 올바른 것일까? 이 작품이 인간의 원죄적 악(惡)을 말하지는 않지만 인간에 내재하는 악을 내몰고 자신을 정화하여 재생(再生)하는 고통의 본질을 처절하게 표현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뜨끈한 피가 팔목을 흘러내린다...머리의 뒤, 페부,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 손톱의 난자, 쏟아지는 내장을 움켜쥐고..., 공포와 전율이 흐르는 그야말로 공포스릴러의 진수를 보여 준다. 젊은 작가의 상상력 넘치는 대단한 스토리와 야무진 구성이 돋보인다. 뛰어난 장르소설로서 또한 그 내재하는 인간 숙원의 선과 악의 본질을 탐험하는 악몽의 여행은 우리들이 자행하는 왜곡된 진실에 대한 어두운 이면을 재생의 밝음으로 견인하는 역량으로까지 나아간다. 많은 독자들이 새롭게 형성될 것처럼 보인다. 다만, 부분적으로 작가의 다듬어지지 않은 중복되는 어휘의 사용이 독서를 이따금 방해하지만, 작품의 치밀성과 구성의 정교함, 신선감 넘치는 이야기의 전개는 수준 높은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기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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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진화가 준 최고의 선물
조너선 밸컴 지음, 노태복 옮김 / 도솔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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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나아가 자연의 모든 생물과 인간의 차별이란 가능한 것인가? 인간이 저만치 서서 홀로이 우월한 개체라고 오만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自問)을 던진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우리들 인간보다 더 오랜 시간 진화를 거쳐 온 생물들에게 감성이란 것이 존재치 않는다는 발상의 근원은 타당한 것인가? 과학에서 조차 동물들이 즐거움을 가지리라는 연구는 헛된 망상으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축적된 연구나 지식이 일천할 수 밖에 없음을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동물들은 정서적 감정과 의식적인 사고가 있다는 관점에서 그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으며, 오늘의 대다수 권위를 인정받는 생물학자, 진화론자들의 동물에 대한 편견, 즉 “동물은 생존 투쟁에서 벗어난 휴식의 순간은 극히 드물다.” 또는 리처드 도킨스의 <에덴의 강: 생명에 관한 다윈주의적 관점>의 표현에 등장하는“다른 동물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살려고 도망 다니며”와 같이 자연계에는 손톱만큼의 평화와 평온도 존재치 않는다고 결론짓는 그릇된 시선과 태도를 지적한다.

인간들은 동물이 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그들의 생존과 종족 번식에 기여하는 행동이라고 인간 본위적인 시각에 맞추어 대는 것과 같이 해당 동물로부터‘즐거움’이란 감정을 배제하는 과학적 판단에 정면에 서서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듯이 동물의 즐거움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실제 그렇게 판단해야 할 만한 동인(動因)과 과학적 타당성(반복적 입증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이 저술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제2장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연구와 조사사례들을 수록하고 있다.

동물들의 즐거움에 대해서 놀이, 먹는 행위, 교미, 접촉, 그리고 사랑과 미의식과 같은 초월적 즐거움에 대해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다. 놀이가 동물들이 살아남고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데 도움을 준다는 종족의 보호와 진화론적으로도 타당한 논리로서 저자의 설치류(쥐)에 대한 실험을 비롯해 놀이라고 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듯이 놀이라고 판단 할 만한 사유들을 소개한다. 또한 맛의 진화와 같이 동물의 먹이에 대한 선택적 행동과 균형 잡힌 식사등의 선호등과 같은 실험을 통해 생존만을 위한 행동으로서 먹이를 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유일하게 번식 행동으로서가 아닌 성적 접촉을 하는 동물이라는 견해는 저자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많은 동물들이 번식을 위한 교미가 아닌 접촉을 통해 즐기는 즉, 즐거움을 찾기 위한 행동으로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다수의 관찰과 조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이와 같이 다양한 관찰, 조사, 실험, 연구를 통해“자연 선택과 같은 종의 유전적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행위로서만 동물들의 행동을 해석하는 과학적 추구는 자연계의 전체적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고 진화론적 해석만을 주장하는 인식에 반론을 제기한다.

다만, 저자의 아쉬움과 같이 이 저술의 상당한 근거들이 일화(一話)적 사례에 의존하고 있어 이의 과학적 증거로서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으며, 인간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음으로 인해 이론적 타당성을 획득하기에는 다소의 무리가 존재하고 있다.

또한, 동물의 감정과 의식적 사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서 인간의 먹이와 생존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유발하고 있음은 많은 논쟁의 여지를 던진다. 인간이 인간과 동일하게 아픔과 슬픔, 즐거움, 그리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고한다고 할 때 도덕적으로 해당 동물을 인간의 먹이로서 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같다. 자연계의 진화라는 거대한 굴레속에서 인간은 또한 나름의 생존방식으로 많은 동물을 먹이로서 인식해왔다. 저자의 궁극적 주장인 우리에게 더 이상 동물을 먹이로 인식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것은 자연의 진화방식에 대한 새로운 거스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인간의 오만 아닌가?

성장한 동물과 새끼들의 놀이를 통하여 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새끼와 같은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핸디캡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균형되고 제한된 행위를 통해‘도덕율’의 본질이 내재하고 있다는 설명과 같이 저자의 주장은 파격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저술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물의 즐거움에 대한 연구가 인간의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측면에서만 진행되는 동물의 통증 연구와 같이 보다 많은 연구조사가, 많은 시간 축적되고 수행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발제(發題)로서 의의는 탁월하고 시의(時宜)적 이라 할 수 있다.

- 동물의 도덕적 행동에 대한 신념을 설명하는 내용 中에서

자연 선택은 다른 이들에 대해 관심 갖기를 선호한다고 짐작 할 수 있다.
도덕성이 적응에 이롭기 때문에 진화되었다고 믿는다.
미덕은 그 스스로가 보답이 된다. 공정 할수록 적응에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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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서평단 알림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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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에 깊은 감동을 선사해준 사람들, 그리고 의식의 저 뒤편에 자리하고 항상 동경을 자아냈던 자연의 풍광을 찾아 나서는 설레임과 즐거움을 무엇이라 표현 할까?

김병종의 라틴 기행은 울긋불긋한 황홀한 색채의 열정에서 자욱한 해무(海霧)의 공허함까지 우리 사람들이 쫒는 그 이상의 세계를 소설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가듯이 읊조린다.

그가 지나가는 자연과 사연들, 그리고 도시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너와나 그리고 그 대상이 서로 다르지 않은 일체감을 갖게 한다. 다름 아닌 감정이입의 시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그의 글속에서 평온하게 교차하는 라틴의 정열과 슬픔을 같이하게 된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재즈선율과 빗물에 튀기는 기타소리가 태양과 열기의 도시 아바나와 교묘히 어울리며 잊혀진 추억으로 빨려들게 한다. 20세기 불세출의 작가‘헤밍웨이’의 파편이 묻어있는 암보스문도스 호텔, 카페 프로리디타를 따라 걷는 느낌이 여행자에게서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져온다. 쿠바인에게는 사랑과 공기와 같은 존재,‘체 게바라’를 통한 억압과 차별의 역사, 아니 현실의 쿠바와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짙은 공감을 형성하게 한다.

시인이자 화가인 작가의 발길이 머무는 멕시코에서 우리는‘프리다 칼로’와 그녀의 푸른집을 마주하게 된다.“우울이 출렁이는 푸른색 깊은 곳”이라는 김병종의 표현처럼 고통의 격렬함 속에 그려진 그녀의 역동적 작품들이 그저 바로 옆에서 보여 지고 느껴지는 듯만 하다. 남미의 파리라 했던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탱고의 선율을 선사한다. 그리곤 20세기 라틴문학의 스승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구와 마주하며, 문학적 내음과 열정의 기묘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음악과 현란한 화폭, 지성과 삶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 그리고 그 주체자인 추억의 인물들을 따라가는 발걸음으로 독서가 내내 즐겁다. 작가의 다듬어진 문장과 진솔한 내면의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라틴 예술에 대한 뛰어난 에세이라 할 수 있다.

브라질의 삼바드로모,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코르코바도 예수상, 마라카낭 축구경기장, 이구아수폭포 등 역사와 사회 이면의 외면된 고통을 어루만지고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아픔을 공유하기도 한다. 안데스의 영봉아래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사실주의 현대문학의 거장인‘이사벨 아옌데’와 그녀의 작품 “영혼의 집”을 반추하며,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하는 네루다의 시(詩)에 잠시 빠져들어 잊었던 사랑을 괜시리 기억에서 꺼집어 내는 자신을 발견케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세계의 끝을 찾아오는 건, 다시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짙은 안개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리마, 로맹가리(에밀 아자르)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반추하며, 인생의 석양을 보는 듯, 화첩을 덮는다. 아름답다. 과장하지 아니하는 진정함과 예향이 솔솔 묻어난다. 면면이 놓여있는 작가의 그림들도 독서를 흥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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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08-02-1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 선정 리뷰입니다.
 
How to be happy -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
소냐 류보머스키 지음, 오혜경 옮김 / 지식노마드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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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란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한 것인가? 그렇다면 왜 나는 그토록 행복이란 단어와 괴리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내 삶이 보다 역동적이고 유쾌하고 즐거우며 열정과 성취가 이어지는 그런 상황으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 볼 텐데...

수없이 출간되는 ‘행복’을 이야기하는 저술들에서 고작 추상적이고 일화적인 경험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단편적이고 진부한 이야기만을 발견하곤 이내 실망으로 덮어버리고 말지 않았던가! 소냐 류보머스키의 “How to bo happy(행복해지는 법)"은 이러한 부류의 자기계발서와 완연한 차별을 가지고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드디어 ‘방법론’이 제시된 책이란 의미이다.

이 저술은 행복의 과학적 실천론을 제시하고 있다. 어디에 숨겨진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란다. 행복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어서 우리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야 할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행복추구가 아닌 행복창조, 행복건설이 올바른 표현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또한, 환경이나 조건이 변화되면 행복이 성취될 것으로 믿는 우리들의 그릇된 행복에 대한 인식을 과학적 실험과 연구를 통해 지적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행복 설정값 파이’를 보면 우리들의 행복결정 요인은 유전적 설정값, 의도적 활동값, 그리고 환경적 설정값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기 50%, 40%, 10%의 비중을 갖는다고 하고 있다. 즉, 취직하면, 결혼하면, 연봉이 오르면, 돈이 좀더 모이면과 같은 환경적 요인은 행복을 구성하는 비율에서 10%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의 행복창조 방법에 심각한 오류가 존재해 왔다는 의미이다. 특히, 이러한 환경(조건)적 요인은 인간의 “쾌락적응(hedonic adaptation)”현상으로 인해 성취되면 이내 행복지수는 원상태로 복귀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듯 상황을 변화시키는 일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히려 기대치만 상향시킬 뿐 행복을 오히려 둔감화 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행복창조를 위한 활동은 40%인 의도적 활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며, 저자는 이의 실천적 활동을 통해 삶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모든 인간들은 그 개개의 지성, 성격, 행동양식 등에서 다르다는 측면에서 개성에 맞는 행복활동을 처방하고 있다. 저술에 소개되어있는 ‘주관적 행복척도’, ‘우울증검사’, ‘개인-활동간의 적합성 진단’은 필히 체크를 통해 자가진단을 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각자가 행복을 위해 어떠한 행복연습을 실천해야 하는지 저마다의 다른 실천방법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저자의 심리학자로서 행복에 대한 18년의 연구결실이다. 즉,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기준과 목표, 욕구에 부합하는 가장 능률적인 실천방법이 제시된다.(참고로 본인은 1.목표에 헌신하기, 3. 삶의 기쁨 음미하기, 9.대응전략을 개발하기, 10. 용서를 배우기가 결정되었음)

이 저술의 2장은 바로 이렇듯 결정된 행복연습을 위한 방법에 대한 구체적 실행방안에 대한 세심하고 과학적인 설명이 뒤따른다. 저마다에 해당하는 방법론을 숙독하고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될 정도로 친절하다. 행복은 달성하기 위해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을 위해서만 달성 될 수 있다. 즉, 전체 행복 중에서 각자 통제 할 수 있는 부분을 활용하는 것이며, 그를 위한 과학적 행복건설 실천지침서로서 차별화되고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하겠다.

행복하고 싶은 모든 이들은 정독하여야할 저술이다. 누가 행복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질병에 처방된 약을 먹고 치유하듯이 행복 역시 꾸준히 연습 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 방법이 여기에 있다. 진정성이 압축된 노작(勞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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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 한국사 상식 44가지의 오류, 그 원인을 파헤친다!
박은봉 지음 / 책과함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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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지적 하였듯이 역사의 오류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일본의 의도된 식민사관, 조선 후기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따른 이데올로기성 오류, 새로운 사료, 유물등의 발굴로 인한 폐기된 과거형 오류, 구전으로 인한 단순 오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오류에는 이러한 이유만 존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인류의 속성이 그러하듯이 권력을 가진자에 의해 가공 윤색되기 마련이어서 역사 기술(記述)에서 균형된 시각을 읽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이렇듯 오류와 왜곡으로 그릇되게 알려진 우리의 역사속 진실을 44가지에 이르게 각종 사료와 유적을 통해 바로잡고 있다. 이들중 많은 부분이 일본의 식민사관 주입을 위해 왜곡시킨 역사가 별다른 이의나 저항 없이 우리의 역사의 진실처럼 답습되고 있는 것들임을 볼 때 답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진다. 고인돌의 남방식, 북방식하는 분류체계는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일본인들이 한강 이남에 국한하여 우리민족의 뿌리를 축소시키려는 왜곡의 역사이며, 이를 여전히 교과서에 게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우리의 역사인식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어원에 대한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로서 고조선의 고(古)는 조선시대(李氏)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사료상으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구분을 위한 분류상 표현된 것으로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기준으로 한 관점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결국 유교이념을 받든 조선 사대부들의 맹목적 사대주의에 기초한 기자조선 숭배로 인한 오류의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예로 행주치마, 숙주나물, 두문불출, 함흥차사의 그 잘못된 역사적 배경과 내역들을 보게 되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현전하는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들이 조선시대 후기의 사료들과 일본의 식민지 사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내용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한 사학자들을 비롯한 국민들의 무관심과 안일함이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왜곡을 현실로 그대로 안아버릴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그렇고 일본의 독도 망언이 그렇다.

또한 조선의 기득권 세력인 사대부들의 성리학이란 망국의 교리는 붕당으로 세상을 이끌고 역사에 대한 소명 의식이란 존재치도 않는 왜곡의 역사로 나라의 정기를 어지럽히기만 해놓았다. 임진년 및 정유년의 조일전쟁(임진왜란이라고들 함)중의 역사는 율곡을 필두로 송강이 이끄는 서인들의 그야말로 조잡하고 왜곡의 극치를 이룬 실록이 편찬되는등 역사로서의 가치 손상은 한심의 작태를 넘어선다. 10만양병설의 근거 없음은 저자의 바로잡기뿐 아니라 수많은 최근의 젊은 사학자들로부터 지적된 내용이기도 하다.

이 저술은 재미있는 일화도 숨겨져 있다. 광화문 앞의 해태상의 진의와 국회의사등에 난데없는 해태상의 건립 뒷이야기, 명성황후 사진의 진의여부에 대한 추적, 독립문의 극청(克淸)을 위한 상징이라는 이야기 등등이 그야말로 상식을 바로잡아준다.

끝으로 우리 헌법이 규정하는 대한민국의 영토에 대한 이해이다. 대한민국 헌법1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실제로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1948.12 제3차 유엔총회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안은 한반도의 38도선 이남만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북한 정부가 스러진다 하더라도 그냥 우리의 영토가 되는 것이 아니란다. 하루속히 남북의 화해와 평화적통일의 시대를 이루어 할 것이다. 후손에게 떳떳한 통일된 한반도와 오류 없는 역사를 물려 줄 수 있도록 모두 관심을 모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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