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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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의 저술들을 읽다보면 문득 그의 친절한 정신질환에 대한 다채로운 임상적 설명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충일함을 보게 된다. 신경생리학자, 정신의학자, 신경전문의라는 직업적 전문성이 대중에게 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게 함에는 그가 이 저술에서 표명하는 음악에 대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사랑,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저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저술에 등장하는 수없이 다양한 음악과 관련된 질병적 사례와 의학적 설명 하나 하나에서 어느 한 사례도 따뜻한 연민이 배제되어 있지 않음을 본다. 음악 발작에서 뇌 속에 울려대는 음악, 환청, 뇌벌레와 같이 지적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에 있어서도 그의 지식과 노력이 인간을 향한 사랑임을 읽을 수 있다.

정신 질환이 외부로 표출되는 다양한 형태의 원인이 뇌의 손상이라는 점은 모두 아는 보편적 지식이다. 그러나 손상된 뇌의 영역에 대한 포괄적 지식, 즉 측두엽과 두정엽이 맞닿은 부분에 손상으로부터 시공간감각과 평형감각의 기능이 유실되고‘체외 유리경험’또는 자기상 환시(autoscopy)를 겪는다고 이야기 하는 이상의 지식이 오늘의 의학에서도 존재치 않는다. 저자는 이와 같은 영역적이고 기능적인 범주를 이해의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의 심성이나 감수성, 삶의 본질적 측면에서 환자들의 신비롭고 기적처럼 보이는 숭고한 노력과 능력에 관심을 할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음악환청에 종일 시달리는 환자가 어느덧 그의 일상으로 울려대는 음악을 자신의 삶의 요소로 수용하는 정신적 승화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시각을 상실한 이들이 보이는 놀라울 정도의 절대음감 능력에서 “청각 장애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입력을 차단당한 대뇌의 청각피질 일부가 자발적으로 활성화”되어 잠재된(억제된) 음악적 소양이 발현되는 것과 같이 흥겨운 지적 잔치를 벌여주기도 한다.

이 위대한 저술의 의미를 특정한 하나의 주제로 정의하는 것이 주저되기는 하지만 일관된 흐름은 당연 우리 뇌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음악성을 인간의 본질적 요소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저술의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자아를 상실하고 있는 다양한 뇌신경 손상의 환자들이 보여주는 음악에서의 순간적인 안정과 정상적으로 보이는 행위들에서 “음악의 신경적 기초가 대단히 확고함.”을 입증하고 그래서“신경계의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부위와 관련된 기억과 대뇌피질과 관련된 의식과 감수성은 서로 어떻게 연결될까?”에 대한 질문을 세세하게 파헤치고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왼쪽 전두엽과 측두엽 부위의 손상과 더불어 기억상실증까지 가세한 환자가 서번트 재능이 급속히 발현되어 한번들은 음악을 멋지게 반복하고 나아가 즉흥연주까지 더한다면 기적인가? 아니, 평소 왼쪽 측두엽이 억누르거나 금지하고 있던 우반구의 일부 기능이 풀려나면서 활개 치는 것이다”와 같은 지식으로서의 재미는 이 책에서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윌리엄스 증후군’‘치매’에 걸려든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시선에서 ‘자아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자아의 보존’이라고 연민 그득한 인류에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또한‘휴링스 잭슨’의 “뇌는 고정적인 표상이나 지점을 모자이크식으로 모아 놓은 정적 구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존재, 적극적으로 억압 또는 억제된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 이런 억제가 풀리면 그런 가능성을 분출하는 존재”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대뇌 가소성(cerebral plasticity)’에 대한 뇌의 신비, 인간에 대한 경외(敬畏)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이 위대한 저술은 지식의 다양성이란 차원을 뛰어넘는 21세기 고전이 될 것이다.

Tip) 이 저술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최근작인‘로아나 여왕의 신비로운 불꽃’에 등장하는 백과사전적 지식과 같은 ‘의미기억’은 모두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나, 일화성 기억은 상실한 무기력하고 분별력을 상실한 역행성기억상실증의 주인공이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에코’의 동 소설에서도 역시 ‘올리버 색스’의 저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교차 소개되어 독서광들의 흥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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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리아드 (양장, 한정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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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적 형식을 빌린 철학의 탄생을 보는 듯하다. 발표된 지 30여년이 지난 작품이라곤 상상키 어렵게 작가의 해학적인 조어(造語)들과 과학적 편린들은 가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이들 조어와 철학적 단상, 자연과학을 빙자한 표현들이 독서의 진행을 까다롭게 하지만 그 독특한 맛이 장애로 인정치 않게 한다.

기계의 전지전능한 창조주‘트루를’과 그의 친구 ‘클라포시우스’의 우주를 방랑하며 겪어내며 들려주는 영웅담은 미래의 어느 시대를 그려내는 단순한 환상 스토리가 아니다. 이들의 천방지축같은 일화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이에 연유하는 욕망, 그리고 그 부질없음에 연민을 담고 있으며, 인간 실존에 대한 의문과 진실, 허위에 그득한 오늘의 과학적 오만에 대한 조롱과 자숙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 판타지에는“존재란 무엇인가?”하는 이 간단치만은 않은 숨 막히는 질문과 트루를의 기계(로봇)들이 하는 언어를 통해 그리스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적 사유가 기막히게 녹아있는가 하면 “있다”와 “없다”로 시작되는 존재의 속성,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진리에 대한 사유, 그리고 우주의 무계획적 생성론과 같은 물리학적 사유의 기원을 마련한‘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의‘보편적 정신’론 등이 절묘하게 패러디되어 인간 정신과 우주의 법칙을 안내하고 있다.

바로 이 탁월한 작품은 소설의 탈을 쓴 철학서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아주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또한 누구나 알 수 있는 풍자와 은유의 말로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면서 읊조린다. 시인, 철학자, 과학자...의 고식적이고 유치하며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오늘의 세계를 여지없이 비아냥대면서 말이다. 트루를의 전자시인이 인간(시인들)을 빈정대며 즉흥시를 읊어댄다.

『운명의 힘에 이끌려, 나는 노래하네 / 무기와 기계를, 지구의 해안에서 쫓겨나 망명한 / 거만한 인간의 무자비한 운명을....』그리곤 오늘의 詩作이 ‘영광 증폭 메카니즘’을 지나 난해성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그 허위성을 비웃어대는 것과 같은 식이다. 이 작품의 정수로 “게니우스 왕의 이야기 기계 세 대 이야기”라 함에 동의치 않는 독자는 없으리라.

위대한 창조자 트루를은 “동굴에 은거해서 명상에 몸 바치고 있는 게니우스 왕의 종종 다가오는 슬픔과 자기혐오”의 위안을 주기위해 요구된 이야기하는 세 대의 기계를 주문받는다.‘세(三)대’가 필요한 절묘한 이유와 같이 이 작품의 모든 어휘와 문단과 문장과 이야기는 보석처럼 빛나는 경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지나쳐버릴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일례를 보면, “두 가지의 지혜가 있네. 첫 번째는 행동하게 하는 지혜이고, 두 번째는 무위(無爲)의 지혜지. ~ 中略 ~ 그러므로 완벽은 모든 행동을 회피하는 데 있네. 여기서 진정한 지혜는 단순한 지성과는 다르지.”처럼 빛나는 지성의 보고로 가득 차 있는 것과 같다. 꺄~악~ 읽어가는 내내 작가의 무궁무진, 인류의 사상과 과학지식을 종횡누비며 그칠 줄 모르게 줄줄 새어나오는 촌철살인식 이야기속 에 “말문이 막혀 입을 떡 벌릴”정도이다.

이제 그 유명한 “가능한 한 가장 발전한 단계”인 ‘가가발단’이란 정규분포곡선에서 가장 우측에 자리 잡는 최고의 이성이 우주의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상상의 이야기에 집중해보자. 트루엘의 친구 클라포시우스가 급기야 찾아낸 가가발단의 이성들은 모래밭에 누어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가? 이 질문에 그들은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반문이 주어진다. 또한 “전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전능하다.”고 주장한다. 바로 오늘 우리 인류들의 끊임없는 지적 오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일침이다. 배꼽 빠지게 즐거우면서 진지하다. 이 황당한 농담 같은 진담이 우리세계를 신랄하게 비웃어대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인류에 대한 연민을 놓치 않는 작가의 사랑이 짙게 배어있음이 이 작품을 더욱 매혹적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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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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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하게 신을 말하던 사람들이 이 길에는 이제 없다. 그들은 사라졌고 나는 남았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세계도 가져갔다.”지구의 종말이 훑고 지나갔고 죽음의 재와 잿빛 눈, 짙게 깔린 어둠만이 남아있는 황량한 겨울의 대지위에 떨고 있는 두 짐승이 여기 생존의 길을 걷고 있을 따름이다.

남자와 아이는 삶의 숨결이 멎은, 그리고 오직 생존의 본능만 남은 사람들을 피해, 양식을 찾아, 남쪽이란 존재치 않는 이상향의 행로를 걷는다.

‘앨런 와이즈먼’의『인간 없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질문인“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가장 놀라운 존재인‘아이’가 다시 푸른 대지에서 뛰놀 수 없게 된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뒤에 남을 것인가?”에 대한 답변처럼만 보인다.

작품은 끝없는 생존의 걸음과 마지막 인간이 뱉어내는 회의와 불완전성, 그리고 구원에 대한 사색이 이어진다. 그리고 사랑, 아름다움, 선(善)과 악(惡)에 대한 배반적인 사유와 신의 실체에 대한 구체적 탐험을 지속한다.

남자와 아이,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더 이상 “할 일의 목록은 없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만이 존재한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꿈 일지도.

“때가 오면? 때가 오면 시간이 없을 거야. 지금이 그때야. 신을 저주하며 죽는 거야.”그럼 두 사람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유일한 희망은 무(無)야. 난 온 마음으로 그걸 바라.”“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 省略 ~”에서 ‘없음’,‘부존재’이외에 무엇을 선택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인간을 먹어야 하는 생존한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비와 인간들을 피해 걷는다. ‘나쁜 사람들’을 피해서, 그러나 도움을 주어야 할, 서로 위로해주어야 할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주칠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하고 반문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었소.~ 中略 ~ 아무도 여기 있고 싶어 하지 않고 또 아무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소.”그러나 우린 종말을 향해 달음박질을 치고 있다. 결코 “수의에 덮인 지구, 황량한 지구”가 우리 앞에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앨런와이즈먼의 ‘푸른 대지위에 뛰노는 아이’처럼 인류의 빛, 그리고 신(神)의 현현으로 비유되고 있다. 마치 창세기의 한 구절이 묘사된 듯이 “소년 주위가 온통 빛이었다. ~ 中略 ~ 주위를 둘러봐라.~ 中略 ~ 지구의 오랜 연대기에 나오는 모든 예언자를 오늘 여기서 기린다. 네가 어떤 형식을 이야기했건 네가 옳았다.”그리고 남자의 죽음 뒤에 찾아온 사람과 그의 가족, 아비의 유언처럼, “신의 숨이 그의 숨이고 그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삶에게로 건네진다고."

“죽음처럼 고요하고 더 깊은 죽음처럼 검은 밤.”에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아이’에 대한 이기적 보호와 사랑에서 우린 남자의 독백처럼 “아마 아름다움이나 선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 신이 존재 할까? 마침내 우리가 지구에서 종적을 감추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마침내 “어쩌면 세상의 파괴에서 비로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고 무(無)의 낭만적 논리성을 강변한다. 결국 이 작품은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애달픈 연민일 수 도 있고, 종말을 치닫는 인간의 악과 오만에 대한 경종일 수도 있다. 음울한 두 사람의 행로에서 고귀함, 아름다움, 희망의 울림이 배제되지 않고 전해져 옴을 느낄 수 있다. 노 작가에게서 우린 다소의 위로를 받는다. “슬픔과 재속의 탄생.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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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러를 빌린 백만장자
마크 피셔 지음, 지소철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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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피 할 수 없게 한다. 보다 자유로운 삶, 바로 생활과 긴장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자연과 어울려 삶의 궁극을 사유하고, 남아있는 운명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말이다.

인생이 앞으로 얼마가지 않아 끝난다고 할지라도 같은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일을 나는 하고 있는 것인가? “남은 인생이 목전에 다다른 후에야”우린 겨우 깨닫게 된다고 저자는 우릴 일깨운다.“나는 날마다 모든 일에 좋아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와 같은 집중성의 강조나, 잠재의식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에 대해“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하라.”식의 자기암시를 통한 각인을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확신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작은 저술은 부자가 되어 자유를 만끽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부자되는 법을 위한 저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저술의 중심 우화는 단순히 부자가 되는 방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들이 간과하고 있는 결정적 요인들을 지적하고 그들을 이겨내기 위한 친절한 멘토로서의 인생지침을 알려주고 있다.

역시 이 저술의 많은 조언들 또한 진부 할 수 있는 클리셰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자기가능성에 대한 확신이나, 열정에 더한 확고한 신념, 외부환경과 같은 조건의 불비 탓만 하는 비겁한 내면의 회피의식, “인간에게 가장 큰 장애는 자신의 정신적 한계이다.”와 같은 거울에 비친 자신, 즉 자신의 태도에 대한 새로운 신념의 확립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자기한계를 새로이 설정하고 숨겨진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다만, 이 저술이 이렇듯 취약한 자기불신과 내면의 비겁함을 자신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별성을 읽을 수 있다.

자, “신념은 말로 표현하고 반복해서 크게 외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말은 인간의 내면과 주변의 환경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힘을 갖고 있기”때문이라고, 그리고 “잠재의식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하라. 자기암시로 각인시켜라.” 그러면, 미심쩍은 생각은 극복된다는 논리다. 한번 실천해본다고 손해 날 것은 없다. 당분간은 이 저술에서 부자인 ‘고든’씨가 권하는 방법을 따라해 볼 작정이다. 앞으로 6년 후에는 나 역시 주인공처럼 백만장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과연 무의식, 잠재의식을 통제 할 수 있는 것일까? 와 같은 과학적 회의는 접어두려고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을 상정하고 나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백지에 50억원을 써 넣으려한다. 이 정도면 이 저술은 성공적인 자기계발서가 아닌가?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한 발걸음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진정 인생의 자유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 작은 책자를 추천한다.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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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존 업다이크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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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출간되자,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인종과 계층에 대한 인류의 고질적이고 케케묵은 병적 편견을 격정적인 사랑의 이야기에 담아낸 걸작중 걸작이다.업다이크의 작품을 펼치면 그의 겸허한 작가의 말을 접하게 되는데 이 작품 또한 예외 없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저작들과 작가들에 대한 존경을 보여준다.

작가는 죠제프 베디에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eult)』에서 분위기와 기본골격을 가져왔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트리스탕’과 이사벨’로 그 차용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다만, 죠제프가 쓴 켈트족으로부터 구전되어온 사랑의 전설인 트리스탕과 이즈(Iseut)나 로미오와 줄리엣식 낭만적 비극류와는 주제의식을 비롯해 전편(全篇)을 통해 흐르는 인간본성으로서의 성애(性愛)에 대한 그 격렬함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사랑의 형식을 보게 된다.

 

윤기 흐르는 검정색피부의 부랑아인 흑인소년 트리스탕과 고위외교관의 외동딸인 금발의 백인 소녀 이사벨이란 흑백의 대비되는 인종의 설정에서부터 백인남성과 흑인여성이라는 유럽과 백인중심사회의 일반적 권위에 의한 남녀관계를 뒤엎는 성적임무의 부여와 같이 그 관능성의 자극 수위를 극단적으로 치달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선명하게 부각된다. 또한, 주인공의 사회계층적 계급의 부여 역시 흑인 창녀의 아비를 모르는 거리의 최하층자로서 흑인을,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공식으로서 백인을 표현한 것은 다분히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상정하고 있다할 수 있다.

백색의 피부에 부여되는 권력의 사회적 무언의 합의와 같은 오랜 왜곡된 의식이 섹스에 있어 남성의 욕구를 존중하려는 여성의 열등적 행위로 가장되지만 그 실제에 있어서는 이사벨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고자 하는 잠재적 권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도피행각에서 호텔 벨 보이와의 3인의 변태적 성행위는 트리스탕의 흑인으로서의 약자이자 권위의 수용자로서의 불가피함을 암시한다.

 

성애의 묘사에 있어서 그 디테일을 통해 인간 본성에 감추어진 은밀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허위와 가식으로부터 탈피하여 육체와 정신의 일원성이란 본능의 현재화(顯在化)를 보여준다. 리우데자네이로의 뜨거운 햇살이 작열하는 해안에서 시작되어 상파울로의 산업 현장으로, 다시금 브라질리아, 그리고 고이아스, 브라질의 서쪽, 마투그로수 정글지대로 이어지는 사랑의 도피에서 보여주는 이 연인의 사랑은 음울할 정도로 깊어 외면키 어려운 야릇한 우울함에 빠지게 한다.

고이아스 금광촌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아내를 안을 겨를 없이 지쳐 잠드는 트리스탕,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이사벨, 사방 1.5M를 파내려가는 자신만의 금광 안에서 솟구치는 자신의 얌을 흔들어대는 트리스탕에서, 발견된 금덩어리, 그리고 살인으로 인해 다시금 정글로의 탈출로 이어지는 사건의 전환에서 다시금 흑인으로서의 피해의식과 보호자로서의 사회 기능적 보편성에 문제를 던진다.

 

작품의 기저에 뿌리내리고 있는 인종적 편견의 불식이라는 주제와 병행하여 남녀의 사랑과 섹스의 상호 불가분성에 대한 일관된 주장이 인간 본연성(本然性)의 측면에서 다뤄지고 있다. 트리스탕의 창녀와의 섹스에서, 이사벨의 뭇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삼촌과 그의 가정부였던 두 번째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보여주는 그 모호한 이중성과 트리스탕과 이사벨에서의 불가분성이 사랑의 본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리고 작가가 도입한 환상적 주술의 설정은 연인의 피부색을 바꿔 놓고 그 흑백의 교묘한 관계를 추적해간다. 그럼에도 육체적, 특히 외형적 변화와는 달리 영혼의 본질적 변화로까지 이행하지는 않는다. 독특한 사랑의 방식과 인종과 계층에 대한 전복적인 이 시선은 결국 우리들의 일그러진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리라. 백인 트리스탕의 주검에 오열하는 흑색의 진주 이사벨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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