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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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믿음이 상실된 사회라고 푸념하고 인간개개인과 집단의 신뢰 회복을 부르짖어도 모자란 형국에‘의심(doubt)’을 옹호하고 찬양한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겠다. 여기서 의심은‘단순히 근거없이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보편적 확실성을 지닌 소수의 진리를 제외한 영역에 대한 조심스럽고 신중한 생각이나 비판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궁극적으로 이 저작은 다원화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극한적 대립과 갈등을 무마하고 오늘의 인간사회가 지향하여야 할 가치와 도덕성으로서‘중용(中庸)’의 정치를 구현하여야하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함이지만, 이의 도달을 위한 과정으로서 우리들이 처해있는 이념과 가치의 실재에 대한 성찰은 결론적 논지(論旨) 못지않게 중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서구가 인식하는 세계사회의 다원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서, 바로 이 다원성으로 인한 숙고하여야 할 영역의 무한한 증가, 그리고 탈제도화로 인한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대두와 대립에 대한 고찰은 일부 편협하거나 왜곡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는 동일한 사안에 봉착한 우리로서는 중요한 시각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이 담론의 출발점은“서로 다른 인간집단이 사회적으로 평화롭게, 서로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상태”라는‘다원성(Plurality)’이다. 다원화라는 다양한 문화와 인간생활의 충돌은 물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지와 규범의 차원에서 선택하여야 할 영역을 증가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즉 개인이나 집단에게 선택이 이미 정해진 제도의 많은 것들이 이 다원화로 인하여 선택을 숙고하여야 하는 문제로 전환되거나 새로운 결정의 요구를 양산한다. 예전에는 물론이라고 당연시되던 것들이 더 이상‘물론’이 아닌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다시말해‘상대화’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다른 것을 존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거나 또는 무관심으로 수용하기도하며, 방어하기도 한다. 즉 개인이나 집단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시각과 새로운 정보가 모순이 되어 충격을 받고 흔들리게 되면, 그 부조화의 정보를 전달하는 자를 회피하거나, 아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아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방어 또는 인지방어를 시작한다.

특히 종교와 정치권력은 이러한 인지방어 수단의 개발에 탁월하단다. 즉 부조화 전달자를 매장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죄인이다. 이단자다. 열등인종이다. 무지한 자들이다...”식의 인신공격을 통해 완전 신용 불가능한 범주로 묶어버림으로서 무슨 말이 나오든지 믿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허무화시키고 물리적 청산을 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사회의 오래된‘빨갱이’,‘친북’과 같은 언어로 반국가 사범으로 매도하거나, ‘미네르바’사건처럼 하찮은 부류의 무지한 처사로 치부하여 아예 사회에서 격리시켜버리고 권력의 부도덕성이나 정책의 실패를 은폐하는 것에서 발견 할 수 있다.

한편 이렇듯 다원화로 인한 수용의 태도와 행동은 진리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진리라는 개념자체가 무의미하게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모든 사안에 대해 의심으로 시작하는‘상대주의’와 “진리의 빛이 넘치는 내부세계와 무지의 어둠이 뒤덮고 있는 외부세계”로 엄격하게 이분법적 체제로 구분하여 자신들만이 명백한 진리라고 주장하는‘근본주의’로 나뉜다. 근본주의자들은“믿음의 부족은 죄이며, 신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의심을 받아주지 않으며, 상대주의자들은 무한한 의심으로 개인과 집단 모두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결국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 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심은 어느 정도까지에서 멈추어야 할 것인가? 과잉도 아니고 과소도 아닌 균형의 어느 지점에서. 여기서‘허버트 미드(Herbert Mead)’의 “타인의 역할-태도를 상호적으로 가정/내면화”하는 상호성 체험으로서 감정이입은 도덕성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고문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데, 누군가 고문희생자의 입장을 상호성을 통해 느낄 수 있다면 폐지를 주장할 것이고, 자신과 상호성의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감정이입을 회피할 수 있다. 즉 홀로코스트 동안의 나치 학살자들의 심리상태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봉쇄와 같이 아예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말해 가장 악랄한 공격으로 타자의 본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내면화한 사회이미지의 수준에 따른 도덕적 범위를 정하여 정의화(正義化)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곤 이렇게 외친다. “우리 주 예수여, 이 심판을 내리소서”,“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며, 단지 신의 도구일 따름이다! 라고. 희생자를 만드는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한다. 이렇듯‘제한된 책임성’이라는 개념으로 거대한 허위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의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확실성’이라는 소수의 명백한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도덕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그리 명백하지 않으며, 결국 주저와 의심이 더 많이 장려된다고 할 수 있다.

확신과 의심의 위태로운 경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서‘낙태’의 문제를 보면, 태아의 인권을 어느 시점에서부터 인정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우린 문제의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도덕적으로 타당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모든 인권을 갖춘 사람은 임신 후 5분 만에 성립한다는 견해와 태어나기 5분전까지도 사람이 아니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나뉜다. 과연 존엄성을 가진 인간을 우린 결정할 수 없으며, 알지도 못 한다. 그래서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의심을 빼놓지 않는 접근법을 통해 확실성과 의심 사이에 균형을 찾아 중용의 제도로 타협한다. 이는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즉 확실성과 의심의 중간지대를 찾는, 바로 의심을 유지하고 옹호하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하겠다.

반대파 목소리를 보장하고, 집권자의 정책 비판역할을 위한 다당제처럼 민주주의는 의심에 기반을 두어 존립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헌법국가와 민주적 정치체제가 의심에 사로잡혀있어서는 혼란으로 아무런 일도 취할 수 없게 되며, 바로 이 의심을 유지하려면 국가와 민주적 체제가 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렇다고 의심을 적대시하면 법률지상주의나 독재정치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처럼 틈만 있으면 확실성으로 억압당할 수 있기에 의심은 취약하고 위태롭다. 그래서 불확실성, 선택의 영역이 증대한 다원화된 오늘의 사회에서 중용의 미덕은 실로 중차대하며, 의심이 옹호되고 찬양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 생활관습이 그야말로 첨예하게 충돌하는 다원화시대에서 인간사회가 어떻게 화합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가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도덕철학의 수작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대성에 대한 서구 일방적인 시각이나, 포스트모던을 급진적 상대주의라고 논의 없이 왜곡하기도 하고,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실재의 정의를 위태롭게 한 주범이라는 등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의 시각은 커다란 흠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쉬움을 남기는 중용의 사회학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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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영미 옮김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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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업 환경을 묘사한다면 가히‘살인적인 경쟁’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세계화라는 자유 시장경제체제에서 이를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더 저렴한 비용, 더 싼 인건비를 찾아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고 상시적 구조조정상태 하에서 경쟁회사간의 생존을 위해 벌이는 극한 경쟁은 당연한 기업의 생태로 인식된다. 무력한 근로자들은 상존하는 해고의 두려움으로 노동기계로 전락하고, 경영자들은 자신의 도덕성을 합리화시키고 사회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아마 돌아버릴 정도의 강도 높은 심적 갈등을 이겨내도록 강요된다. 우린 이 틀을 상생할 수 있는 구조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일까? 이 작품은 제목처럼 아주 특이한 실험을 감행한다. 가상의 현실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심리치료의 현장에 우리들은 안내되어 관찰하는 자를 다시금 관찰토록 하는 지위를 얻게 되고,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들락거리는 이 기이한 치료 방식에 매료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아무 상처도 입히지 않고 어머니 대지를 변화시켰다.”고 공언할 정도의 친환경 건강, 의약산업의 최고기업인‘클린 지구(Clean Earth)'의 CEO인‘그레이엄 블레이크’는 수요의 급격한 감소와 경쟁으로 인한 이윤 감소로 적대적 M&A에 놓이는 취약한 상황에 이른다. 근로자의 대량해고를 수반하는 구조조정, 공장폐쇄 등으로 극심한 심적 고통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300만 달러에 이르는 치료계약에 사인하고‘톨게이트 씬드롬’이라는 심리치료에 돌입한다.

치료의 첫 단계는,‘록산나’라는 여성과 그녀의 가족에 대한 전능(全能)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즉“상상력이 유일한 속박이고”,“의지가 유일한 한계”인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여성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하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때 과연 우린 어떤 행동들을 할 수 있을까? 환자인 블레이크에 대한 이 심리치료는 독자에게는 심리실험의 과정을 목격하는 흥미로운 시간이 된다. 자신의 사적 욕구를 반대할 어떠한 공적 힘도, 규제도, 경쟁도 없는 곳에서 탐스러운 여성과 그녀의 한 가족을 꼭두각시처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우린 우리의 윤리의식을 적나라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록산나를 온통 소유하기 위해 그녀의 애인에게 마약소지의 누명을 씌우고 그녀의 가족을 도탄에 빠뜨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떠한 치료자들도 능가할 정도로 사악하게 행동하지만 비탄에 빠진 여인의 자살상황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스크린 밖의 현실로 뛰쳐나갈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가상의 현실로 뛰어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이를 위반하고 블레이크는 록산나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환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지 이해하게 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이 희한한 치료요법은 블레이크에게 강박을 구현하고, 그 강박들이 최종적인 도덕적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성공한 듯 보인다.

이 소설의 맛은 바로 다음의 반전된 장면에 있다. 블레이크가 전능한 조종의 권한을 행사한 현실은 허구의 현실, 즉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한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의 실제 모델이 된 블레이크 자신의 공장에서 근로자들의 보건치료사인‘로즈’를 발견하면서 블레이크는 현실에서 자신의 통제력을 실험하기에 이른다. 실제에서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나 상상 속에서는 자신의 것이었던 록산나에 대한 감정의 이입은 현실의 로즈에게 몰입하게 한다. 자신의 치유 이행기의 연장일 뿐이라는 정당화 속에서 로즈와 그녀의 가족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하고, 클린지구는 경쟁력 상실로 이사진들의 강한 폐쇄의 압력에 빠진다. 친환경의 윤리적 기업인‘클린지구’를 적대적으로 인수하려는 자와 같이 믿음이 유지 될 수 없는 사회,  확장, 성장, 팽창, 번영, 경쟁의 언어만 힘을 얻는 환경은 사실 우릴 좌절케 하고, 살아갈 힘을 빼앗는다.

소설은 그러나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정말이지 희망이 존재함을 믿지 않고서는 아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존재치 않을 것이다. “나 한테만 속한, ~ 내가 왜 현재의 나인가에 대한 이야기죠. 그건 당신에게 주는 내 선물이에요.”로즈가 블레이크에게 주는 이 믿음이란 선물, 인간에 대한 신뢰만큼 커다란 선물이 있겠는가? 이 특별한 심리치료는 누구나“다른 사람들을 가지고 장난칠 수 있고, 끔찍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 상처를 복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최 선단에 있는 미국사회와 그닥 다를 바 없는 우리의 기업환경을 볼 때 소설 속‘생명치료쎈터’의 프로그램은 꽤나 잘나갈 장사처럼 보인다...

한편, ‘단테’의『신곡』 「지옥」편 29곡과 19곡, 그리고 「천국」편 13곡을 은유한 듯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세상의 구역질나는 실체와 신뢰의 가능성을 희곡적 대화와 독백으로 미묘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독특한 체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제아무리 경제성이라는 효율 중심의 사회라지만 “좀 더 깊은 어떤 것, 좀 더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자아를 발견하게 될”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블레이크의 망설임 없는 시도는 어쩜 진정한 삶에 대한 희망이자 가능성의 예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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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의 지붕
한수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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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도 아닌 죽은 영혼이나 사는 저승(冥界)의 지붕이라니 얄궂은 제목에서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의 형벌로 가득한 장소가 바로 어디겠는가? 그런 세상을 조망하는 장소로 지붕만큼 적절한 곳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플루토(Pluto; 명왕성)를 바로 차용하여 소설 배경이 되는 동네이름이‘명왕3동’임을 알고는 희죽 웃음이 나온다. 작가의 은유가 해학으로 왕창 버무려지겠구나 하는 재미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순간이다.

필리핀에서 이주한 엄마를 둔 소년‘민수’가 話者이다. 생존을 위협받는 모자에게 날아온 취학통지서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공포의 위력으로 다가오고 이를 피해 찾아든 동네가 바로 명왕3동이니, 모자가 숨어살기에 적절한 허름한 동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심심해서, 아니 무서워서 엄마가 일 나가면 지붕위에 올랐다고 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건 자폐증의 어린 소년은 지붕위에서 9차원의 세계를 감지하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모아 듣게 해주는 청진기라는 30차원의 도구까지 두르게 해주어 전지적인 능력을 부여한다.

아이가 바라보고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들, 세상의 권위를 흉내 낸 현대정육점, 삼성클리닉, 대우부동산, 두산이발소, 쌍용슈퍼, 그리고 이 속에 끼어있는 채플린비디오와 성신설비, 우포순댓국집과 태평양약국이 늘어선 코믹한 골목길의 표정에서 어설프고 소박한 사람들이 보인다. 느닷없이“환태평양 시대의 비전을 담은 공원을 건설할 계획”이라며 정부는 뜬금없는 이지역의 재개발계획을 가지고 밀고 들어온다. ‘이라크 해안봉쇄 작전을 벤치마킹한 작전’을 가지고서 말이다. 힘없는 서민들이 무슨 멸종시켜야할 악의적인 적대 세력인 냥.

소설은 바로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생존의 터전을 떠나기까지, 이 권위의 두려운 위협을 잊기 위한 잠시 동안의 에피소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태평양 약국 김약사와 쌍둥이 오빠인 일명 삼촌이라 불리는 백수의 관계에서부터, 겨울잠을 자는 듯 첫눈이 내리면 설비점포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봄이 되어야 나타나는 녹두장군의‘별천지’, 이상(理想)의 마을을 찾아 헤매는 신비스러운 이야기들, “술에 취하면 너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넘어 만물이 하나라는 경지에 다다른”술꾼인 남편 깔따구의 주먹질에 샌드백이 된 뚱보 순댓국집 아줌마의 사연,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모든 인간과 사물을 ‘좆만이’라 부르는 택시기가 용만이의 “인생은 엔조이”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청진기에 집음(集音)되어 애틋하고 간절한 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갈수록 경쟁력을 상실하여 가족형 소기업이 되고 끝내는 사라져가는 양말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이주여성인 엄마‘데릴라’에 대한 약국‘삼촌’의 짝사랑이 결실을 맺기까지의 과정은 서사의 한 축이 되어 사람들이 떠나 갈수록 을씨년스럽고 스산해지는 명왕3동의 유일한 행복의 화제가 된다. 한편 소설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로 병행하여 “색색의 꽃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 아름다운 사람들, 함께 일하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마을, 해달별 거르지 않고 뜨는...그런 마을”이라는 녹두장군이 들려주는 몇 백 년을 찾아도 나오지 않는 마을의 이야기는 명왕3동 사람들의 삶과 겹쳐 기묘한 어울림을 낳는다. 지옥같은 현실계의 명왕3동과 “그러니께 그런 마을이 있는규?”하는 이상향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만 같은 그런 것 말이다. 우울하고 어두워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명랑하고 쾌활하기까지 할 정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전달되는 것은 다가올 알 수 없는 미지의 두려움이 아니라 그러한 삶 속에서 조차 끊임없이 찾아드는 꿈과 이상이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겁고 엄숙한 사실의 진술로서가 아니라 순박한 일상의 진실에 묻어나는 삶의 애환들이 청명한 목소리에 담겨 유쾌하게 들려지고, 훨훨 날아가는 지붕들과 삶의 때가 묻어있는 도구들이 멀리 멀리 아무런 고통도 없는‘그런 마을’에 도착할 것 만 같은 위로를 갖게 된다. 샴푸 향기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고, 푸른 멍의 상처를 녹이는 안티푸라민연고 같은 곳. 시종 피식 피식 묻어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재미 속에서도 작품의 진득한 연민의 의식에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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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자유,음악,평화 그리고 역사
우드스탁 센세이션 - 젊음, 자유, 음악, 평화 그리고 역사
마이클 랭 외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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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스탁(Woodstock)'은 뉴욕 북부의 작은 대안 마을의 지명이 아니라 1969년 이후부터는 “페스티벌 역사의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음악과 자유와 평화, 그리고‘문화공동체의 엄청난 에너지’의 집적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 저작은 바로 1960년대를 풍미하던‘마이클 랭’이라는 한 젊은 히피문화의 주자가 “느슨하고 자유로운 페스티벌”을 열고 싶다는 불가능하기만 해 보였던 전망을 실현시킨 공동체 정신과 유토피아 비전이란 이상을 입증한 마술 같은 음악향연, <우드스탁 1969>의 생생하고 진솔한 기록이다.

미국 남부도시 마이애미 비스케인 만에 위치한‘카운터 컬처’의 거점인 그로브라는 지역에서 헤드숖을 열고 지역밴드를 섭외해 연주회를 여는 것으로 소일하던 청년‘마이클 랭’의 서로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하고 이들이 만나 하나가 되는 문화공동체의 구상에서 시작된 페스티벌이 어떤 이상과  이를 실현하는데 부딪친 많은 장애들, 그리고 극복과 세세한 준비과정에서부터 행사일인 1969년8월15일부터 8월17일까지 3일간의 경이적이고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자유’의 대 축제, 그야말로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그날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사실 뉴욕시 북쪽으로 90마일 떨어진 우드스탁에서 이 페스티벌은 열리지 못한다. 우드스탁을 포함하는‘월킬’시의 시민집단과 공권력의 극렬하고 조직적인 반대로 불과 공연을 2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중지되는 위기를 맞는다. 이는 1960년대 소비자본주의의 완성으로 소외와 고립의 경험이 양산되자 이로부터의 출구를 찾던 미국 대중문화의 한 돌파구로서의 히피문화에 대한 주류집단과의 갈등의 산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로큰롤과 히피는 곧 마약과 성, 폭력의 집단이란 왜곡된 시선과 기성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던 당대의 첨예한 접촉점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건‘우드스탁 벤처스’라는 4명의 젊은이들이 합작한 이들의 도전은 우드스탁과의 거리는 멀어졌으나 뉴욕시 북부‘베델’의 600에이커에 달하는‘맥스 야스거’농장의 극적인 장소협조를 받기에 이른다. 역사가 창조되는 장소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무언의 힘에 의해 점지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드디어 역사상 전쟁이 아닌 경우로 한 공간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것으로 기록될 전례없는 엄청난 에너지와 자유, 멋진 음악의 잔치가 펼쳐질 준비과정의 소소한 부분들이 전달된다. 여기서 대형페스티벌을 기획, 홍보, 제작, 운영에 관련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동감 넘치는 매뉴얼이랄 수 있는 화장실의 수량 선정에서 주차, 섭외, 무대설치, 음식물과 매점, 식수공급, 흥행 등에 이르는 세세한 문제들과 진행과정의 노하우를 얻을 수 도 있다.

행사장에서 반경 20마일 지역의 모든 도로가 차단될 정도였다니 공연 참석자 행렬의 이동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한 장소에 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으니 이들의 안전문제와 먹고 자는 문제는 그야말로 끔찍한 사고의 전조로 여겨진다. 그러나 수많은 군중들은 어느덧 치안을 떠맡고 스스로 규율하고 통제하여 그냥 알아서 돌아가기 시작했다니 자유를 갈구했던, 그래서 스스로 야만인이 되어 진정한 인간의 권리 회복과 해방을 지향했던 소외된 대중들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멋지게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이 저작에는 당시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청중, 공연준비자, 지원인력, 가수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날들의 생생한 기억들을 전해주는데, 한결같이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전체가 하나의 문화공동체가 된 실로 마술같은 유토피아 마을”이라고 일관된 회상을 하는 것을 보면 타락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출구를 찾지 못해 절망하던 이들에게‘우드스탁’은 진정한 출구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이러한 우드스탁의 문화, 사회정치적 의의에 대한 모습 못지않게 시선을 이끄는 것은 당시 이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가수들과 그룹들의 면모라 할 수 있다. 우드스탁에 참여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가 이후 로커들과 그룹사운드의 명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을 정도이니 참여를 거부했던 이들에게는 땅을 치는 아쉬움이었을 것만 같다. ‘카를로스 산타나’, ‘슬라이스 스톤’, ‘지미 핸드릭스’, ‘로비 로버트슨’, ‘레본 헬름’, ‘그레이스 슬릭’, ‘폴 버터필드’등 전설적인 유명 밴드와 가수들의 당시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떠한 긴장도, 분노도, 스트레스도 놓아버린 천연의 자유가 온통 화이트레이크에 넘실대는 것만 같은 낙원의 환영이 다 보이는 것만 같다. 참석 군중들의 모습에 떠오르는 한결 같은 환희의 웃음을 머금은 얼굴들과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 거대한 바다를 이루었다는 증언처럼 그 3일간은 정말 비현실적일 만큼 환상적인 자유가 넘치는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전쟁과 인종차별, 폭력이 넘쳐나던 당대의 기형적인 자본주의 미국사회에 대한 강한‘거부’의 의사이기도 하였으며, 공동체 정신과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거대한 에너지의 실체를 보여준 위대한 사건이기도 하였으리라. 이후 이 정신이 계승되어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장을 ‘워싱턴 우드스탁’이라 명명하였다는 것을 보면 1969년의 우드스탁은“대단한 사회적 실험”으로 유구하게 인류의 중요한 지적 재산중 하나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사설처럼 비폭력도 전염성이 있으며, 개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이상을 입증한 실험으로 말이다. 우리의 풍토에서 이러한 문화공동체의 축제를 실현 시킬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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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킬러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24
제프 린제이 지음, 김효설 옮김 / 비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냉철함이나 지성과는 한참이나 먼 게다가 실수를 해대고 멍청하기 조차한 사이코패스의 살인마라면 분명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더구나 주인공‘덱스터 모건’은 소설 속에서 자신이 쫓는 연쇄 살인범에게 번번이 역습을 당하고 끝내는 본인의 목소리로 “피와 살육의 현장에서 내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뭔가 어색”했다며 구경꾼으로 전락하기까지 한다.

사실 이러한 요소는 정통 추리스릴러에서는 발견키 어렵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의도적으로‘B’급의 수준으로 낮추어 도덕관이나 정의, 사법 체제등 기존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대중적 말하기를 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덱스터의 “모든 이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강자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인류가 고안해낸 개념”을 정의(正義)라고 한다는 주장은 세상을 좀 비켜가도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는 항변을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사경찰인 여동생‘데보라’의 보조격으로 혈흔을 조사, 분석하는 경찰지원인력인‘덱스터’는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하고 영혼도 없는 희대의 살인귀다. 물론 악의 무리를 처단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이는 법을 초월한 엄연한 살인행위이고 극형을 피할 수 없는 범죄이다. 소설은 이처럼 주인공의 신분이나 성격에서부터 이미 노골적으로 B급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골치 아프게 정의론이 어쩌니 법과 연대의 충돌이 저쩌니 하는 지성의 토론을 아예 차단하고 시작하자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냥 즐기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산하지 못한 응어리들을 현대인들이여 날려버려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이 재미있지 않고 베길 수 없지 않겠는가? 어지간한 잔혹 물들을 능가하는, 만일 영상으로 표현한다면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살해 묘사에도 불구하고 엄숙함이나 진지함이 깃들지 않는다. 이 사이코패스 덱스터의 살인에 대한 광적 집착의 설명으로서, 아내‘리타’와의 파리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의 즐거움이,“인간쓰레기들을 잡아 죽이는 안정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재개”하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대변되는 식의 일상적 가벼움이듯이 말이다.

사건은 참혹한 치장을 하여 전시하듯이 배열된 사체들의 연쇄적 발견으로 시작된다. 데보라와 덱스터 모건 남매가 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 중 데보라가 칼에 찔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살인범을 쫓던 경찰, 그리고 희대의 살인귀 덱스터가 먼저 당한 것이다. 이처럼 어수룩하고 희극적인 출발은 소설의 배경 설명조차 모순어법을 사용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축복 받은 악과 폭력의 땅 마이애미”라는 것이다. 악과 폭력이 축복을 받는 곳이라니? 덱스터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살인행위의 토양이라는 말씀이다. 이 조롱하듯 뒤틀린 이율배반이 소설을 코믹하게 하여 역겨운 장면들을 순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랄 수 있다.

더욱 재미를 배가하는 것은 사이코패스임을 알아본 아버지가 어린시절부터 일찌감치 덱스터를 악을 처단하는 살인자로 키웠다는 것이고, 학대의 상처로 사이코패스가 되어가는 결혼한 아내 리타의 어린 자녀들인‘코디’와‘애스터’에게 덱스터가 자신의 배움을 그대로 전수하는 모습이다. 어린 꼬마 사이코패스들의 앙증맞은 맹목적 살의와 그 활약이라니...
더구나 이야기가 더욱 당혹스럽게 전개되는 것은 동생 데보라를 찌른 범인이라 생각하고 은밀히 살해하여 토막처리한자가 정작 범인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난 후의 덱스터의 독백이다. “멍청한 속단이었을 뿐, ~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다. ~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내가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야 하나? ”하고 단지 불건전한 기분이 드는 것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곤 별일 아니라는 듯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리곤 진범을 쫓지만 연쇄살인범은 오히려 덱스터를 쫓는다. 두 살인마의 싸움. 점입가경이라 할 수 있다. 살인보다는 그 살인행위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는 살인자, 즉 살인행위를 영상예술로 생각하는 살인자다. 최신장비나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복하고 발랄하게 살육의 시간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덱스터와 이 전시예술 살인자‘와이스’의 대결은 그야말로 조마조마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이 작품의 주요 테마들을 구성하고, 덱스터의 숨겨진 정체가 폭로되기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어울려 화려한 서스펜스를 자랑하기도 한다.

순진하고 어질고 착하기까지 한 연쇄살인범이라는 이 희한한 조화가 이렇게 완벽하게 어울릴 수 있는지 작가의 재치와 해학, 상상력에 그만 홀딱 반하게 되고, 엄숙주의를 완전히 일탈하여 리얼리티를 과대할 정도로 진행시킨 의도적 B급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준다. 정말의 스릴러를 즐기려 한다면 덱스터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 진정 재미를 선사할 줄 아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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