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믿음이 상실된 사회라고 푸념하고 인간개개인과 집단의 신뢰 회복을 부르짖어도 모자란 형국에‘의심(doubt)’을 옹호하고 찬양한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겠다. 여기서 의심은‘단순히 근거없이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보편적 확실성을 지닌 소수의 진리를 제외한 영역에 대한 조심스럽고 신중한 생각이나 비판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궁극적으로 이 저작은 다원화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극한적 대립과 갈등을 무마하고 오늘의 인간사회가 지향하여야 할 가치와 도덕성으로서‘중용(中庸)’의 정치를 구현하여야하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함이지만, 이의 도달을 위한 과정으로서 우리들이 처해있는 이념과 가치의 실재에 대한 성찰은 결론적 논지(論旨) 못지않게 중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서구가 인식하는 세계사회의 다원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서, 바로 이 다원성으로 인한 숙고하여야 할 영역의 무한한 증가, 그리고 탈제도화로 인한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대두와 대립에 대한 고찰은 일부 편협하거나 왜곡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는 동일한 사안에 봉착한 우리로서는 중요한 시각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이 담론의 출발점은“서로 다른 인간집단이 사회적으로 평화롭게, 서로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상태”라는‘다원성(Plurality)’이다. 다원화라는 다양한 문화와 인간생활의 충돌은 물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지와 규범의 차원에서 선택하여야 할 영역을 증가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즉 개인이나 집단에게 선택이 이미 정해진 제도의 많은 것들이 이 다원화로 인하여 선택을 숙고하여야 하는 문제로 전환되거나 새로운 결정의 요구를 양산한다. 예전에는 물론이라고 당연시되던 것들이 더 이상‘물론’이 아닌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다시말해‘상대화’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다른 것을 존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거나 또는 무관심으로 수용하기도하며, 방어하기도 한다. 즉 개인이나 집단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시각과 새로운 정보가 모순이 되어 충격을 받고 흔들리게 되면, 그 부조화의 정보를 전달하는 자를 회피하거나, 아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아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방어 또는 인지방어를 시작한다.

특히 종교와 정치권력은 이러한 인지방어 수단의 개발에 탁월하단다. 즉 부조화 전달자를 매장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죄인이다. 이단자다. 열등인종이다. 무지한 자들이다...”식의 인신공격을 통해 완전 신용 불가능한 범주로 묶어버림으로서 무슨 말이 나오든지 믿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허무화시키고 물리적 청산을 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사회의 오래된‘빨갱이’,‘친북’과 같은 언어로 반국가 사범으로 매도하거나, ‘미네르바’사건처럼 하찮은 부류의 무지한 처사로 치부하여 아예 사회에서 격리시켜버리고 권력의 부도덕성이나 정책의 실패를 은폐하는 것에서 발견 할 수 있다.

한편 이렇듯 다원화로 인한 수용의 태도와 행동은 진리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진리라는 개념자체가 무의미하게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모든 사안에 대해 의심으로 시작하는‘상대주의’와 “진리의 빛이 넘치는 내부세계와 무지의 어둠이 뒤덮고 있는 외부세계”로 엄격하게 이분법적 체제로 구분하여 자신들만이 명백한 진리라고 주장하는‘근본주의’로 나뉜다. 근본주의자들은“믿음의 부족은 죄이며, 신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의심을 받아주지 않으며, 상대주의자들은 무한한 의심으로 개인과 집단 모두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결국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 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심은 어느 정도까지에서 멈추어야 할 것인가? 과잉도 아니고 과소도 아닌 균형의 어느 지점에서. 여기서‘허버트 미드(Herbert Mead)’의 “타인의 역할-태도를 상호적으로 가정/내면화”하는 상호성 체험으로서 감정이입은 도덕성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고문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데, 누군가 고문희생자의 입장을 상호성을 통해 느낄 수 있다면 폐지를 주장할 것이고, 자신과 상호성의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감정이입을 회피할 수 있다. 즉 홀로코스트 동안의 나치 학살자들의 심리상태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봉쇄와 같이 아예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말해 가장 악랄한 공격으로 타자의 본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내면화한 사회이미지의 수준에 따른 도덕적 범위를 정하여 정의화(正義化)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곤 이렇게 외친다. “우리 주 예수여, 이 심판을 내리소서”,“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며, 단지 신의 도구일 따름이다! 라고. 희생자를 만드는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한다. 이렇듯‘제한된 책임성’이라는 개념으로 거대한 허위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의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확실성’이라는 소수의 명백한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도덕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그리 명백하지 않으며, 결국 주저와 의심이 더 많이 장려된다고 할 수 있다.

확신과 의심의 위태로운 경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서‘낙태’의 문제를 보면, 태아의 인권을 어느 시점에서부터 인정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우린 문제의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도덕적으로 타당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모든 인권을 갖춘 사람은 임신 후 5분 만에 성립한다는 견해와 태어나기 5분전까지도 사람이 아니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나뉜다. 과연 존엄성을 가진 인간을 우린 결정할 수 없으며, 알지도 못 한다. 그래서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의심을 빼놓지 않는 접근법을 통해 확실성과 의심 사이에 균형을 찾아 중용의 제도로 타협한다. 이는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즉 확실성과 의심의 중간지대를 찾는, 바로 의심을 유지하고 옹호하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하겠다.

반대파 목소리를 보장하고, 집권자의 정책 비판역할을 위한 다당제처럼 민주주의는 의심에 기반을 두어 존립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헌법국가와 민주적 정치체제가 의심에 사로잡혀있어서는 혼란으로 아무런 일도 취할 수 없게 되며, 바로 이 의심을 유지하려면 국가와 민주적 체제가 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렇다고 의심을 적대시하면 법률지상주의나 독재정치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처럼 틈만 있으면 확실성으로 억압당할 수 있기에 의심은 취약하고 위태롭다. 그래서 불확실성, 선택의 영역이 증대한 다원화된 오늘의 사회에서 중용의 미덕은 실로 중차대하며, 의심이 옹호되고 찬양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 생활관습이 그야말로 첨예하게 충돌하는 다원화시대에서 인간사회가 어떻게 화합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가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도덕철학의 수작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대성에 대한 서구 일방적인 시각이나, 포스트모던을 급진적 상대주의라고 논의 없이 왜곡하기도 하고,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실재의 정의를 위태롭게 한 주범이라는 등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의 시각은 커다란 흠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쉬움을 남기는 중용의 사회학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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