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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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달린 술(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달리는 말처럼, 딱딱하게 얼어버린 채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감시원의 눈길을 의식하며 걸을 수밖에 없는 두려움이 일상화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고문과 감금,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공포의 세계, 독재자‘차우세스쿠’의 사익을 위해서만 작동되던 1970,80년대의 경찰국가 루마니아 전체주의정권의 스케치이다. 사실 우리의 70년대 전후시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어서 소설 속 네 명의 청춘을 온통 빼앗아버린 살풍경(殺風景)한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다.

개인의 내면적 사유의 자유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사회, 권력이 지시하는 것에 순응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향인 전체주의사회는 거짓과 불신을 조장한다. 거리와 상점, 식당, 학교 어디든 감시원의 귀와 눈초리가 사람들을 침묵하게 한다. 소설은 이런 암흑의 세계에서 상처입고 헐떡이는 젊은이들의 불안한 초상을 중심으로 작가 특유의 응축된 시적언어로 처연하면서도 강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 초반‘네모’로 표현되는 대학 기숙사의 방처럼 소설의 언어와 문장은 메마르고 건조하며 지극히 짧게 완성되지만, 그 어떤 장황한 묘사보다 독창적이고 풍부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어 여운과 감동이 소실되지 않고 지속되는 특유의 풍요로운 감정적 느낌을 갖게 한다. 바로 네모는 공간의 형태이기도 하지만 그대로 그 공간에 있는 여자 대학생들의 감성이기도 하며, 각박한 사회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네모의 벽장 속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는‘롤라’의 공책에 쓰인 “...라고 롤라는 썼다.”라는 진술들은 그야말로 시로 승화된 소설 아닌가 할 정도의 백미(白眉)들이다.

개인의 짐을 넣어둔 사적 장소인 트렁크조차도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나라 안에는 똑같은 트렁크 열쇠가 수없이 많았다. 모든 열쇠가 거짓이었다.”는 문장처럼 이상의 너절한 수식과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불법 수색과 압류, 사적자치의 불인정, 국가권력의 위선과 기만, 공포가 모두 내장되어있다. 또한, “옷 속에 그림자만 들어 있는 것 같은, 하루 일과에 지친 남자가 보인다.”라는 한 문장에서 비참한 노동자, 민중들의 희망이라곤 기대하거나 찾을 수 없는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듯이, 문장들은 고밀도로 단단하게 짜여있어 그 풍부한 의미를 음미하느라 쉬이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롤라의 의심쩍은 죽음이 인연이 되어 모인 여대생‘나’와 남학생‘쿠르트’,‘에드가’그리고‘게오르크’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와 시를 얘기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들의 시와 노래는 부조리하고 불온한 세상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흐른다. 이는 전체주의에 기탁하여 민중의 피를 빨아대는 개새끼들과 개의 형상을 한 감시원, 비밀경찰의 음험한 시선을 모은다. 졸업 후 국가에 의해 배정된 지역과 공장으로 뿔뿔이 흩어지지만 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주구(走狗), 경감 프엘레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은 은밀한 고발과 감시만이 설쳐대고 신뢰라고는 한 조각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서로의 상황을 주고받기 위한 편지 속에는 머리카락 한 올을 넣고, 손톱가위는 심문, 수색은 신발, 미행은 감기 걸렸다...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쉼표하나로 약속한다. 그러나 이들의 편지에는 어김없이 이 단어들과 문장이 들어있고, 호칭 뒤의 쉼표는 지나치게 두꺼워지기만 하며, 수시로 가해지는 심문과 수색, 그리고 고문은 죽음의 휘파람 소리를 점점 가까이 들리게 한다. 전체주의에 순응하지 않거나 작은 조짐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도시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영혼이 사라진“도시의 정신병자들은 절대 죽지 않아. 쓰러지면 그들이 서있던 그 자리, 아스팔트에서 똑같은 사람이 솟아”오르듯이 인간의 본원적 정신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

침묵 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죄책감을 죽지 못해 사는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로 정당화하지만, 그렇다고 파괴된 도덕성까지, 정의까지 모른 채하기에는 너무 젊기만 하다. 사악한 권력은 끝내 청춘의 목숨을 하나씩 앗아가고, 떠날 수 있는 자는 독일로, 헝가리로 도피한다. 발령 받은 곳에 자신의 짐을 풀 수 없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안에는 불안감에 날이 고추선 흉흉한 자의식인‘마음 짐승’만이 도사리는 곳, 독재자의 확인되지 않은 병에 대한 소문은 모두에게 쾌재를 부르게 하는 곳, “바늘귀에 꿰인 실처럼” 굴욕이 이어지는 곳, 오로지 불신만이 깊게 드리워진 세상이 젊음과 자유를, 인간의 존엄을 누른다. 전체주의의 무참함과 옥죄는 공포의 긴장이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시선에 불안하게 흔들리며 소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잔혹하고 뼈아픈 우리 인간사회의 기록이다. 다시금 헤르타 뮐러의 시적 감수성이 농축된 언어를 통해 음울한 이 시대의 초상을 우아하게 읽어냈다. 이 같은 역사의 오류, 인류의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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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노트북
제임스 A. 레바인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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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권익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적착취의 만행이 그 잘난 이성으로 무장된 인간사회에서 근절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읽는 내내 무참함과 분노가 짐승처럼 마음을 어지럽힌다. 돈이라는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거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은 존재치 않는 세상이다. 인간에게서‘존엄성’이라는 단어는 수식적인 그럴듯한 의미만으로 사용되고, 정신의 숭고함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인 효율지상의 물신주의의 단면을 어린 소녀의 고귀한 영혼의 외침 속에서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아홉 살 어린 소녀가 애비의 손에 붙들려 천진난만한 불안과 호기심속에 대도시 뭄바이로 이끌려가는 여정부터 그 심산(心酸)함이 가슴을 억누른다. 자신을 포주에게 넘기고 돈뭉치를 건네받으며“기뻐하면서도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의 아비를 바라보는 아이‘바툭’의 망연한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고, 포주의 손에 끌려가면서,“아빠, 날 데려가줘요, 제발.”하는 그 간절한 절규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듯하다.

더러움이 켜켜이 쌓여만 가는 쇠창살이 쳐진 화장실만한 작은 방을“황금으로 만들어진 자궁”이라고, 그 속성을 버리지 않은 채 화려한 공간으로 상상하는 소녀의 삶을 견뎌내려는 안간힘에서 참았던 내 인내도 무참히 무너져 내린다. 아동의 노동과 성을 착취하는 공공연한 장소가 되어버린 고아원의 수심(獸心)만 무성한 인간사회의 더러운 거래가 적나라하다. 창녀가 된 어린 아이들이 출산한 유아는 또 다른 생산물이 되어 거래되고 착취의 도구로 이용된다. 어디에도 이성으로서의 인간의 사유는 작동하지 않는다.

소설은 사창가에 팔려간 아홉 살,‘바툭’이 열다섯 소녀가 되기까지 6년간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의지이자 결연한 자존의 출구로서 쓰인 비밀 글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바툭은“뭄바이 커먼가(街)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다.”손님에게 최상의 서비스, 소위‘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어주기(성적 향응)’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자신의 휴식시간을 조금 더 얻어 내는 지혜임을 깨달을 정도로 적응하고, 그래서“넌 그중 제일 맞잇는 케이크야”라고 포주에게 환대를 받는 창녀로 성장하지만, 진정한 자신의 삶의 가닥이 완전히 끊어진 듯한 상실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손님을 받고 난후 잠간의 휴식시간이면 숨겨둔 파란공책(Blue Notebook)에 이야기를 쓰며, 자신을 투영하는 유일한 즐거움이 어느 순간부터는 글을 쓰는 중간 중간에 손님을 받는 것이라고 내면의 질서를 승화시켜 나간다. 또한 고향 마을 강가에 나가 강물의 소리와 물위의 아른거리는 햇빛에 매혹 되곤 했던 시절의 기억은 세상에 홀로 있지 않다는 위로가 되 주었듯이, 험한 커먼가 역시 자신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강물이라 위안하기도 한다. 이처럼 어린 소녀를 포위하고 있는 온통 사악하고 잔인한 환경을 버텨내기 위해선 반복되는 엄청난 감정들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했을 것이다.

대부호의 자식을 위한 노리개로 팔려가‘히타’라는 하녀에게 안겨 봇물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강물 내음이”, “내 고향 내음이” 났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열다섯 소녀에게서 그 북받치는 감정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외로움과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부도덕과 정의를 논의할 공간이 없는 가진 자들의 파탄된 정신세계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은 물론 고통에 대한 공감이란 인식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착취, 학대, 폭력, 그리고 살해에 이르기까지 보호 받지 못하는 취약계층의 삶이 다시금 인간사회의 추악한 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고깃덩어리를 달라고 애원하는 늙은 개 같은 표정”을 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이 소설을 외면치 않고 마지막 까지 읽어내는 것은 정말 힘겨운 작업이 된다. 비록 사랑에 대한 이해로 맺는 어린 소녀 바툭의“은빛 눈동자를 지닌 표범”이야기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마지막의 간절함이 되어 울리지만, 세계의 어디에선가 신음하는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이 환영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까지 잠재우지는 못한다. 우리 인간사회의 주변부에서 자행되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폭력의 주체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세상에 경쟁적으로 몰입하는 바로 우리들 말이다. 아이들만이라도 제발 이러한 세계에서 구원해 낼 수 있는 세계, 그 아이들이 바로‘나’자신으로서 이해 될 수 있는 가치와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세계 말이다.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써내려간 어린 창녀의 처연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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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3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턴가 이러한 종류의 수기, 소설, 보고서 등 모든 글을 끝까지 읽질 못하게 되었어요. 그 시기는 제가 아동후원을 시작하던 때와 맞아떨어지고, 아동성범죄 예방에 대해 공부를 하던 때와도 일치합니다.
너무 아픕니다. 이런 사실들.

필리아 2010-08-30 13:08   좋아요 0 | URL
네, 읽다가 덮기를 몇번씩 반복해야 했지요...
 
메모리 북
하워드 엥겔 지음, 박현주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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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자이자 신경전문의인‘올리버 색스’의 대중적 유명저작이 된『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등장 할 법한 인물로서‘의미기억’은 잃지 않았으나, 단기성 기억력은 취약하기 그지없고, 글자를 쓸 수는 있으나 읽지는 못하는‘실독증’이란 독특한 신경생리학적 이상자의 재활의 기록이자,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의 추리 소설이다. 특히 작가인 ‘하워드 엥겔’이 바로 이‘실서증(失書症)없는 실독증(失讀症)’의 투병중에 집필한 분투와 노고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숭고한 인간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후두부가 함몰되어 2개월 남짓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사립탐정,‘베니 쿠퍼맨’의 재활 무용담(?)이라 할까? 단기기억상실로 인해 자신의 두개골이 왜 깨지게 되었는지, 어떤 사건에 연루되긴 한 것인지, 그리고 왜 갑자기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된 자신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동료 경찰의 병문안에서 토론토의 한 대학 쓰레기장에서‘매컬파인’이라는 여자와 나란히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는 경황을 듣게 된다.

사고력, 언어구사력 등 인지능력은 온전하지만 읽기능력과 단기기억 상실로 인해 기억을 보전하고, 다시 불러내기가 수월치 않다. 재활치료센타의 쿠퍼맨은 무력감에 시달리지만, 사라져버린 기억들에 시동을 걸 수 있는 메모리 북의 기입과 글자모양을 시각화하여 읽기능력을 복원키 위해 노력한다.
과연 기억의 저 너머로 사라진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낼 수 있을까? “진실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왜곡된 형상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사립탐정의 인간한계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버겁기만 해 보인다. 불쑥 떠오르는 알 수 없는 이름,‘로즈’를 단서로 연인인‘애나’의 도움과 고향 친구들의 우정으로 조각난 기억들을 맞추어 나간다. 이처럼 암흑에 묻힌 사건의 근원에 다가가는 전형적인 추리의 진전도 정교한 논리성을 요구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유머러스한 표현들에서 한 줄의 문장을 읽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시간을 소요하는 무기력을 극복하고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작가의 노력에 절로 경외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로즈’는 자신이 버려진 채 발견된 대학의 학생이며, 고향 친구인 ‘스텔라 세코’의 딸임을 알게 되고, 바로 이 소녀가 자신의 의뢰인이었음을 짐작한다. 여기서‘스텔라’라는 인물을 묘사하게 되는데 “젖떼기도 전에 벌써 캐리어를 구축하기 시작한 여자”라는 문장처럼 인물성격에 더 이상의 너저분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해버리며,  또한 사건을 수사중인 형사,‘사이크스’의 무례하고 거친 말을 점잖게 눙치면서“사적인 대화를 할 때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사를 했다.”고 자신과 사이크스의 성격을 한 문장에 담아낼 정도로 세련된 문장미를 뽐내기도 한다.

역시 본질은 추리소설이듯이 의심이 가는 다양한 용의자들이 선상에 오르는데, ‘스티브 메입스베리’라는 로즈가 다니던 대학의 교수 실종 사실이 더해지면서 대학과 교수들의 성향으로 시선을 모으고, 마약 밀거래라는 범죄성이 결부되기에 이른다. 치료병동에 앉아 실독증의 탐정이 좁혀가는 추리의 진전을 따라가는 재미가 기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지성(知性)의 정상층에 있는 교수들과 뇌손상 환자인 탐정과의 두뇌싸움이니 볼만 한 게임이지 않은가! 실종된 스티브 교수의 적극적 지원자였던‘파커 샘슨’교수, 쿠퍼맨에게 대학을 쑤시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의 편지를 보낸‘네스빗’교수, 신분을 바꿔가며 쿠퍼맨을 찾아왔던 묘령의 여학생, ‘로즈’의 상황을 은폐하기만 하는‘스텔라’등 복선과 함정을 여기저기에 묻어두고 독자의 심리를 지배한다.

허나 오늘의 세상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물질과 소비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욕구, 바로 이기적이기만 한 탐욕 아니겠는가. 거대한 이윤을 제공하는 마약 중개와 유통의 사슬은 범죄라는 은밀한 속성으로 조직의 견고성에 손상을 가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헉! 가장 살갑고 가까운 사람이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인 모양이다. 반전조차도 결코 격하거나 급하지 않고, 부드러운 잔물결이 흐르는 듯한 구성에서 절묘한 쾌락을 끌어낸다. 인간 의식의 경이로움을 동반한 수고의 이 작품에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감동을 느끼는 것은 물론,‘경험의 진실’에 입각한 추리소설이라는 면에서 그 작품적 가치는 고귀하다고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신경학과 추리문학이 융합된 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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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아멜리 노통브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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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보여온 아멜리식 대화방식의 이죽거리는 화술, 독자를 흥분과 악의로 가득 차게 하여 기진맥진케 하는 서사는 사라졌다. 하지만 집요한 추궁이나 핑계와 구실 등‘비정상적’사유는 여전하다. 그리곤 여기에 사랑의 증명을 위해 몸을 사르는 낭만적 서사가 더해졌으니, 예전의 작품에 비해 감성적 작품이 되었다고 할까?

자신의 삶에 이렇다 할 목적을 부여하지 않고, 그저‘대단히 자동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마흔의 남자, 전력공사의 직원으로 이사 온 사람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고지서를 발부하는 그저 그런 일에 봉사하며 불만 없는 인생을 살아가던‘조일’이라는 인물에 돌이킬 수 없는 생의 전환적 사건이 발생한다. 12월의 어느 날, 파리 몽토르괴이 지역의 전입자인 여류 소설가‘A. 말레즈’의 집을 호기심과 환상을 가득 안고서 방문한다.

단열도 되지 않는 낡은 지붕에 난방도 하지 않아 몇 겹씩 옷을 껴입은 두 여자, 한 눈에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장애를 지닌 여인과 미모의 여인을 발견한다. 서점에서 부랴부랴 ‘알리에노르 말레즈’의 소설을 찾아 읽곤 미모의 여인에 대한 환상을 키우지만, 정작 소설가는“좀비같은 비정상”의 여자, 미모의 여인은 장애자인 알리에노르와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파트너이자 보호자이며 비서인‘아스트로라브’.

알리에노르에 헌신적인 아스트로라브를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알리에노르의 출판된 모든 작품을 읽고선 찬양의 편지를 보내고 환심을 사기에 이른다.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알리에노르와 함께한 자리에서만 만나겠다는 아스트로라브의 조건부 만남의 수락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랑의 광란상태에 빠진 남자는 거부할 수 없다. 전력사용료를 부담 할 수 없어 얼음장 같은 그녀들의 집에서 조일은 아스트로라브와의 만남을 지속하고,“추위에 몸을 떨다보면 흥분이 극으로 치닫지만” 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진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만 하다.

“겨울과 사랑은 시련을 통해 욕망을 채운다”고 했던가? 추위는 우울한 희열을 부추기만 하고, 알리에노르의 장애는 곧 조일에겐 고통과 같은 단어가 되어버린다. 그러나“추위의 신기루”, 아스트로라브를 잃고 싶지 않다. “함께 입을 수 있는 얼음 화상에는 한계가 없지”않은가! 환각버섯을 먹여 아스트로라브를 탐하려 하지만 실현되지 못한다. 이제 그녀가 정한 규칙(조건부 만남)으로 인해 피어나는 증오는 이미 그것이 생겨나게 된 원인을 넘어서 버리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역사상 가장 난폭한 키스를 준비 하게 한다. 그녀가 들려준 아멜리라는 여인을 위한 구스타프 에펠이 건축한‘사랑의 구조물’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파괴행위로 체화 해내”는 것이다.

아멜리의 'A'를 상징하듯,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알리에노르, 그리고 사랑의 진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스트로라브의‘A'를 의미하는 구조물, 에펠탑에 보잉기를 몰아 멋지게 충돌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이미 파리를 굽어보는 거대한‘A’를 자신의 욕망에 부딪혀 파괴하리라는 결심을 굳힌 순간, 아스트로라브의 “~ 앞으로는 숙맥처럼 굴지 않을게. 약속해. 적어도 당신 덕분에 너무 행복해서 혼란스럽다는 걸 더 이상은 감추지 않을 거야.”라는 사랑의 밀어가 담긴 뒤늦은 서신은 감동한 나머지“머리가 샴페인 병마개처럼 튀어 오르는 것만 같았”을 지언정, 결행의 의지를 막지는 못한다.

사랑이란,“모든 현실이 파괴되는 완벽한 각성 상태” 아닌가? 사랑과 파괴는 그래서 이렇게 한 쌍으로 묶여져야 하는 것일까? 미칠듯한 사랑에 빠지면 으레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비정상’이란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이젠 봄이 시작 될 것 같다.”는 야릇한 여운을 남기는 추운 겨울 시린 사랑의 이야기가 음울하게 피어나는 파리 연인의 이야기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파괴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하려는 슬픈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겨울의 냉기 속 불같은 사랑의 감미로움이 충격적인 아멜리식 환각상태에 의지하여 몽롱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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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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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상실된 사회라고 푸념하고 인간개개인과 집단의 신뢰 회복을 부르짖어도 모자란 형국에‘의심(doubt)’을 옹호하고 찬양한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겠다. 여기서 의심은‘단순히 근거없이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보편적 확실성을 지닌 소수의 진리를 제외한 영역에 대한 조심스럽고 신중한 생각이나 비판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궁극적으로 이 저작은 다원화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극한적 대립과 갈등을 무마하고 오늘의 인간사회가 지향하여야 할 가치와 도덕성으로서‘중용(中庸)’의 정치를 구현하여야하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함이지만, 이의 도달을 위한 과정으로서 우리들이 처해있는 이념과 가치의 실재에 대한 성찰은 결론적 논지(論旨) 못지않게 중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서구가 인식하는 세계사회의 다원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서, 바로 이 다원성으로 인한 숙고하여야 할 영역의 무한한 증가, 그리고 탈제도화로 인한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대두와 대립에 대한 고찰은 일부 편협하거나 왜곡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는 동일한 사안에 봉착한 우리로서는 중요한 시각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이 담론의 출발점은“서로 다른 인간집단이 사회적으로 평화롭게, 서로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상태”라는‘다원성(Plurality)’이다. 다원화라는 다양한 문화와 인간생활의 충돌은 물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지와 규범의 차원에서 선택하여야 할 영역을 증가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즉 개인이나 집단에게 선택이 이미 정해진 제도의 많은 것들이 이 다원화로 인하여 선택을 숙고하여야 하는 문제로 전환되거나 새로운 결정의 요구를 양산한다. 예전에는 물론이라고 당연시되던 것들이 더 이상‘물론’이 아닌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다시말해‘상대화’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다른 것을 존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거나 또는 무관심으로 수용하기도하며, 방어하기도 한다. 즉 개인이나 집단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시각과 새로운 정보가 모순이 되어 충격을 받고 흔들리게 되면, 그 부조화의 정보를 전달하는 자를 회피하거나, 아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아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방어 또는 인지방어를 시작한다.

특히 종교와 정치권력은 이러한 인지방어 수단의 개발에 탁월하단다. 즉 부조화 전달자를 매장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죄인이다. 이단자다. 열등인종이다. 무지한 자들이다...”식의 인신공격을 통해 완전 신용 불가능한 범주로 묶어버림으로서 무슨 말이 나오든지 믿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허무화시키고 물리적 청산을 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사회의 오래된‘빨갱이’,‘친북’과 같은 언어로 반국가 사범으로 매도하거나, ‘미네르바’사건처럼 하찮은 부류의 무지한 처사로 치부하여 아예 사회에서 격리시켜버리고 권력의 부도덕성이나 정책의 실패를 은폐하는 것에서 발견 할 수 있다.

한편 이렇듯 다원화로 인한 수용의 태도와 행동은 진리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진리라는 개념자체가 무의미하게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모든 사안에 대해 의심으로 시작하는‘상대주의’와 “진리의 빛이 넘치는 내부세계와 무지의 어둠이 뒤덮고 있는 외부세계”로 엄격하게 이분법적 체제로 구분하여 자신들만이 명백한 진리라고 주장하는‘근본주의’로 나뉜다. 근본주의자들은“믿음의 부족은 죄이며, 신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의심을 받아주지 않으며, 상대주의자들은 무한한 의심으로 개인과 집단 모두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결국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 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심은 어느 정도까지에서 멈추어야 할 것인가? 과잉도 아니고 과소도 아닌 균형의 어느 지점에서. 여기서‘허버트 미드(Herbert Mead)’의 “타인의 역할-태도를 상호적으로 가정/내면화”하는 상호성 체험으로서 감정이입은 도덕성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고문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데, 누군가 고문희생자의 입장을 상호성을 통해 느낄 수 있다면 폐지를 주장할 것이고, 자신과 상호성의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감정이입을 회피할 수 있다. 즉 홀로코스트 동안의 나치 학살자들의 심리상태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봉쇄와 같이 아예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말해 가장 악랄한 공격으로 타자의 본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내면화한 사회이미지의 수준에 따른 도덕적 범위를 정하여 정의화(正義化)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곤 이렇게 외친다. “우리 주 예수여, 이 심판을 내리소서”,“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며, 단지 신의 도구일 따름이다! 라고. 희생자를 만드는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한다. 이렇듯‘제한된 책임성’이라는 개념으로 거대한 허위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의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확실성’이라는 소수의 명백한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도덕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그리 명백하지 않으며, 결국 주저와 의심이 더 많이 장려된다고 할 수 있다.

확신과 의심의 위태로운 경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서‘낙태’의 문제를 보면, 태아의 인권을 어느 시점에서부터 인정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우린 문제의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도덕적으로 타당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모든 인권을 갖춘 사람은 임신 후 5분 만에 성립한다는 견해와 태어나기 5분전까지도 사람이 아니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나뉜다. 과연 존엄성을 가진 인간을 우린 결정할 수 없으며, 알지도 못 한다. 그래서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의심을 빼놓지 않는 접근법을 통해 확실성과 의심 사이에 균형을 찾아 중용의 제도로 타협한다. 이는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즉 확실성과 의심의 중간지대를 찾는, 바로 의심을 유지하고 옹호하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하겠다.

반대파 목소리를 보장하고, 집권자의 정책 비판역할을 위한 다당제처럼 민주주의는 의심에 기반을 두어 존립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헌법국가와 민주적 정치체제가 의심에 사로잡혀있어서는 혼란으로 아무런 일도 취할 수 없게 되며, 바로 이 의심을 유지하려면 국가와 민주적 체제가 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렇다고 의심을 적대시하면 법률지상주의나 독재정치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처럼 틈만 있으면 확실성으로 억압당할 수 있기에 의심은 취약하고 위태롭다. 그래서 불확실성, 선택의 영역이 증대한 다원화된 오늘의 사회에서 중용의 미덕은 실로 중차대하며, 의심이 옹호되고 찬양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 생활관습이 그야말로 첨예하게 충돌하는 다원화시대에서 인간사회가 어떻게 화합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가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도덕철학의 수작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대성에 대한 서구 일방적인 시각이나, 포스트모던을 급진적 상대주의라고 논의 없이 왜곡하기도 하고,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실재의 정의를 위태롭게 한 주범이라는 등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의 시각은 커다란 흠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쉬움을 남기는 중용의 사회학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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