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북
하워드 엥겔 지음, 박현주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정신의학자이자 신경전문의인‘올리버 색스’의 대중적 유명저작이 된『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등장 할 법한 인물로서‘의미기억’은 잃지 않았으나, 단기성 기억력은 취약하기 그지없고, 글자를 쓸 수는 있으나 읽지는 못하는‘실독증’이란 독특한 신경생리학적 이상자의 재활의 기록이자,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의 추리 소설이다. 특히 작가인 ‘하워드 엥겔’이 바로 이‘실서증(失書症)없는 실독증(失讀症)’의 투병중에 집필한 분투와 노고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숭고한 인간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후두부가 함몰되어 2개월 남짓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사립탐정,‘베니 쿠퍼맨’의 재활 무용담(?)이라 할까? 단기기억상실로 인해 자신의 두개골이 왜 깨지게 되었는지, 어떤 사건에 연루되긴 한 것인지, 그리고 왜 갑자기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된 자신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동료 경찰의 병문안에서 토론토의 한 대학 쓰레기장에서‘매컬파인’이라는 여자와 나란히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는 경황을 듣게 된다.

사고력, 언어구사력 등 인지능력은 온전하지만 읽기능력과 단기기억 상실로 인해 기억을 보전하고, 다시 불러내기가 수월치 않다. 재활치료센타의 쿠퍼맨은 무력감에 시달리지만, 사라져버린 기억들에 시동을 걸 수 있는 메모리 북의 기입과 글자모양을 시각화하여 읽기능력을 복원키 위해 노력한다.
과연 기억의 저 너머로 사라진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낼 수 있을까? “진실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왜곡된 형상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사립탐정의 인간한계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버겁기만 해 보인다. 불쑥 떠오르는 알 수 없는 이름,‘로즈’를 단서로 연인인‘애나’의 도움과 고향 친구들의 우정으로 조각난 기억들을 맞추어 나간다. 이처럼 암흑에 묻힌 사건의 근원에 다가가는 전형적인 추리의 진전도 정교한 논리성을 요구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유머러스한 표현들에서 한 줄의 문장을 읽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시간을 소요하는 무기력을 극복하고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작가의 노력에 절로 경외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로즈’는 자신이 버려진 채 발견된 대학의 학생이며, 고향 친구인 ‘스텔라 세코’의 딸임을 알게 되고, 바로 이 소녀가 자신의 의뢰인이었음을 짐작한다. 여기서‘스텔라’라는 인물을 묘사하게 되는데 “젖떼기도 전에 벌써 캐리어를 구축하기 시작한 여자”라는 문장처럼 인물성격에 더 이상의 너저분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해버리며,  또한 사건을 수사중인 형사,‘사이크스’의 무례하고 거친 말을 점잖게 눙치면서“사적인 대화를 할 때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사를 했다.”고 자신과 사이크스의 성격을 한 문장에 담아낼 정도로 세련된 문장미를 뽐내기도 한다.

역시 본질은 추리소설이듯이 의심이 가는 다양한 용의자들이 선상에 오르는데, ‘스티브 메입스베리’라는 로즈가 다니던 대학의 교수 실종 사실이 더해지면서 대학과 교수들의 성향으로 시선을 모으고, 마약 밀거래라는 범죄성이 결부되기에 이른다. 치료병동에 앉아 실독증의 탐정이 좁혀가는 추리의 진전을 따라가는 재미가 기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지성(知性)의 정상층에 있는 교수들과 뇌손상 환자인 탐정과의 두뇌싸움이니 볼만 한 게임이지 않은가! 실종된 스티브 교수의 적극적 지원자였던‘파커 샘슨’교수, 쿠퍼맨에게 대학을 쑤시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의 편지를 보낸‘네스빗’교수, 신분을 바꿔가며 쿠퍼맨을 찾아왔던 묘령의 여학생, ‘로즈’의 상황을 은폐하기만 하는‘스텔라’등 복선과 함정을 여기저기에 묻어두고 독자의 심리를 지배한다.

허나 오늘의 세상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물질과 소비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욕구, 바로 이기적이기만 한 탐욕 아니겠는가. 거대한 이윤을 제공하는 마약 중개와 유통의 사슬은 범죄라는 은밀한 속성으로 조직의 견고성에 손상을 가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헉! 가장 살갑고 가까운 사람이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인 모양이다. 반전조차도 결코 격하거나 급하지 않고, 부드러운 잔물결이 흐르는 듯한 구성에서 절묘한 쾌락을 끌어낸다. 인간 의식의 경이로움을 동반한 수고의 이 작품에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감동을 느끼는 것은 물론,‘경험의 진실’에 입각한 추리소설이라는 면에서 그 작품적 가치는 고귀하다고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신경학과 추리문학이 융합된 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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