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아멜리 노통브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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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보여온 아멜리식 대화방식의 이죽거리는 화술, 독자를 흥분과 악의로 가득 차게 하여 기진맥진케 하는 서사는 사라졌다. 하지만 집요한 추궁이나 핑계와 구실 등‘비정상적’사유는 여전하다. 그리곤 여기에 사랑의 증명을 위해 몸을 사르는 낭만적 서사가 더해졌으니, 예전의 작품에 비해 감성적 작품이 되었다고 할까?

자신의 삶에 이렇다 할 목적을 부여하지 않고, 그저‘대단히 자동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마흔의 남자, 전력공사의 직원으로 이사 온 사람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고지서를 발부하는 그저 그런 일에 봉사하며 불만 없는 인생을 살아가던‘조일’이라는 인물에 돌이킬 수 없는 생의 전환적 사건이 발생한다. 12월의 어느 날, 파리 몽토르괴이 지역의 전입자인 여류 소설가‘A. 말레즈’의 집을 호기심과 환상을 가득 안고서 방문한다.

단열도 되지 않는 낡은 지붕에 난방도 하지 않아 몇 겹씩 옷을 껴입은 두 여자, 한 눈에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장애를 지닌 여인과 미모의 여인을 발견한다. 서점에서 부랴부랴 ‘알리에노르 말레즈’의 소설을 찾아 읽곤 미모의 여인에 대한 환상을 키우지만, 정작 소설가는“좀비같은 비정상”의 여자, 미모의 여인은 장애자인 알리에노르와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파트너이자 보호자이며 비서인‘아스트로라브’.

알리에노르에 헌신적인 아스트로라브를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알리에노르의 출판된 모든 작품을 읽고선 찬양의 편지를 보내고 환심을 사기에 이른다.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알리에노르와 함께한 자리에서만 만나겠다는 아스트로라브의 조건부 만남의 수락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랑의 광란상태에 빠진 남자는 거부할 수 없다. 전력사용료를 부담 할 수 없어 얼음장 같은 그녀들의 집에서 조일은 아스트로라브와의 만남을 지속하고,“추위에 몸을 떨다보면 흥분이 극으로 치닫지만” 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진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만 하다.

“겨울과 사랑은 시련을 통해 욕망을 채운다”고 했던가? 추위는 우울한 희열을 부추기만 하고, 알리에노르의 장애는 곧 조일에겐 고통과 같은 단어가 되어버린다. 그러나“추위의 신기루”, 아스트로라브를 잃고 싶지 않다. “함께 입을 수 있는 얼음 화상에는 한계가 없지”않은가! 환각버섯을 먹여 아스트로라브를 탐하려 하지만 실현되지 못한다. 이제 그녀가 정한 규칙(조건부 만남)으로 인해 피어나는 증오는 이미 그것이 생겨나게 된 원인을 넘어서 버리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역사상 가장 난폭한 키스를 준비 하게 한다. 그녀가 들려준 아멜리라는 여인을 위한 구스타프 에펠이 건축한‘사랑의 구조물’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파괴행위로 체화 해내”는 것이다.

아멜리의 'A'를 상징하듯,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알리에노르, 그리고 사랑의 진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스트로라브의‘A'를 의미하는 구조물, 에펠탑에 보잉기를 몰아 멋지게 충돌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이미 파리를 굽어보는 거대한‘A’를 자신의 욕망에 부딪혀 파괴하리라는 결심을 굳힌 순간, 아스트로라브의 “~ 앞으로는 숙맥처럼 굴지 않을게. 약속해. 적어도 당신 덕분에 너무 행복해서 혼란스럽다는 걸 더 이상은 감추지 않을 거야.”라는 사랑의 밀어가 담긴 뒤늦은 서신은 감동한 나머지“머리가 샴페인 병마개처럼 튀어 오르는 것만 같았”을 지언정, 결행의 의지를 막지는 못한다.

사랑이란,“모든 현실이 파괴되는 완벽한 각성 상태” 아닌가? 사랑과 파괴는 그래서 이렇게 한 쌍으로 묶여져야 하는 것일까? 미칠듯한 사랑에 빠지면 으레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비정상’이란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이젠 봄이 시작 될 것 같다.”는 야릇한 여운을 남기는 추운 겨울 시린 사랑의 이야기가 음울하게 피어나는 파리 연인의 이야기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파괴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하려는 슬픈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겨울의 냉기 속 불같은 사랑의 감미로움이 충격적인 아멜리식 환각상태에 의지하여 몽롱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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