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평론가의 글이 정확하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들어보았지만,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도 처음에는 읽을 생각이 잘 들지 않았던 게, 제목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할 지 알 것 같다는 자만심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호기심에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는데 몇 장 넘기고 나서 깨달았다. 이 책은 사보았어야 했다는 것을...

 

이 책은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표제와 가장 맞닿아 있는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1부가 가장 좋았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치열하게 이해하려고 고민한 글들이 이렇게 정제되고 또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슬픔이다. 이 역설을 인정할 때 나는 불편해지고 불우해진다. 그러나 인정은 거기서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 -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 그런 감수성이 더 필요하다. 

 

2부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이다.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는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나 싶다.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이방인>은 마침 얼마 전에 읽은 터라 그 평론을 기대했는데 그렇게 새롭지는 않았다. 그 밖에도 좋은 소설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고, 그 소개에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 소설을 왜 읽는가 등-을 담고 있다.

 

2부에서 소개한 책들 중에 읽어보고 싶은 책들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 추상적인 명제이지만 정직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 고뇌는 반드시 전달된다."(제발트만큼 고집불통인)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3부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

사회적 인정의 문제. 메릴 스트립의 연설. 비판과 풍자와 조롱의 문제- 대상이 강자인가 약자인가,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 그 웃음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명박근혜 정권 때 쓰여진 글들도 상당수 실려 있다. 어둡고 답답했던 시기를 돌이켜보았다. 지금은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지만, 언제 또 올지 모른다.  

 

 

 

 

 

 

 

 

 

 

 

 

 

4부는 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극소량의 폭력성도 함유하고 있지 않은 언어의 상태에 도달하여, 그로써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자주 오해되지만 그런 비폭력적인 언어의 상태가 순한 단어와 예쁜 표현들로 달성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시선'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런 시선을 가능케 하는 어떤 '자리'에 설 때 생겨난다. 그럴 때 시인은 발생하는 것이다."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더 많은 시를 더 필사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시는 좀처럼 다가가기 어려운 그대이다. 남이 좋은 시라고 소개해 준 걸 읽어보면 그렇게 좋은데, 내가 시집을 사서 읽으면 반쯤은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 그가 소개하는 좋은 시 중에는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시집에 실려있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좋은 시를 알아보는 이들이 부럽다. 읽다보면 시와도 화해하는 날이 올까.

 

 

 

 

 

 

 

 

 

 

 

 

 

 

 

 

 

 

 

 

 

 

 

 

 

 

 

 

 

 

5부는 문화에 대한 이야기. 사랑, 적과의 관계, 그외에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한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글에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요컨대 진정한 비판은 적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부분과 맞서는 일이다. 그럴 때 나의 비판 또한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돼 있다.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적을 사랑하면서 고귀해질 것인가, 적을 조롱하면서 공허해질 것인가.(...)"

"월리스에 따르면 그것(인문학)은 곧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 외에도 추천한 책들 중에서 읽어보고 싶은 책들. 다른 리뷰들을 읽어보니 이 분의 전작들이 더 좋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이전의 책들도 찾아서 읽어보아야겠다.

읽고 싶은 책들이 또 잔뜩 늘었네. 이 중에 얼마나 읽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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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많이 들어본 '조지 엘리엇'의 대표작이라는 '미들마치'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현재 국내에 번역된 것으로는 발췌본밖에 없다고 한다.

 

허세 돋아 원서를 찾아보니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이건 도저히 내 능력으로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우리말 발췌본을 읽어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19세기 영국의 정신을 그리고 있는 서사시적 소설'이라고 한다. 발췌본만 보아도 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이 모두 개성있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인공 도로시아의 결혼과 실패 과정이, 그 이후 윌과의 사랑을 그린 부분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아름답고 부유한 명문 집안 사람인 도로시아 브룩은 사회에 대한 봉사욕구와 지적 호기심, 열정이 강한 사람으로, 남편에게 정신적 지도자와 스승의 역할을 기대하고 18세인 자신보다 27세 연상인 45세의 목사 캐소본과 결혼한다. 하지만 사실 캐소본은 학자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무능하고 편협한 인물이라, 도로시아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조지 엘리엇이 실제 자신의 경험(당대의 저명한 문학비평가로서 문학적 스승이자 유부남이었던 루이스와의 생활)을 투영한 것인지, 캐소본의 편협함과 열등감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생생하다. 얼마 안 되는 이 책의 분량에서 그런 캐소본의 존재감은 정말 대단하다.

등장인물들이 서로 결혼과 배우자에 대한 이상이 달라 좌절하거나(도로시아-캐소본, 리드게이트-로저먼드 커플처럼) 상대방의 부족한 모습을 받아들이는 모습(프레드-메리, 불스트로트 부부처럼)도 생각해 볼 만하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반드시 이상적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의 부부들은 상대방에 대해 지나치거나 잘못된 기대를 갖는 경우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 기대는 당시 사회통념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배우자상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도로시아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주어진 여건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조지 엘리엇 자신은 여러 편의 소설을 쓰는 등 작품 활동을 하고 <웨스트민스터 리뷰>라는 잡지의 부편집장을 할 정도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음에도, 도로시아라는 열정적인 주인공을 결혼 생활에서 자아를 찾는 것에 만족하는 인물로 그린 것이 의아하기는 하다. 그래서인지 도로시아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선택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그 선택 또한 평범한 이가 처한 외부 환경과 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한 결과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작가가 살던 선택지가 많지 않은 시기(1819-1880)에 애쓰던 다른 이들을 긍정하는 시선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원래 문학작품을 발췌본으로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이건 원전을 1/15 분량으로 줄인 것이라 줄거리 요약에 가까운 것 같아 더 안타까웠다. 해설에 의하면 원작에서는 당대의 선거법 개정과 토지개혁 등 정치사회적 변화를 자세히 묘사했다던데, 이런 부분은 발췌본에 거의 드러나있지 않다. 심지어 전개상 중요한 것 같은 장면도 생략되어 있다. 궁금한 부분은 원서에서 찾아보아야 하나... BBC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니 드라마를 보는 것도 나름 궁금함을 해소하는 방법이겠다.

옮긴이의 말로는 이 책의 번역이 아주 어렵다던데, 그래도 누군가 힘내주셔서 완역본을 꼭 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 조지 엘리엇의 본명은 '메리 에번스'로 여류작가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편견 때문에 '조지 엘리엇'이라는 남성의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했고, 조지 엘리엇 스스로 '여성 작가들의 어리석은 소설들'이라는 에세이에서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상투적 로맨스나 쓰는 당시의 여성 작가들을 경멸하면서 자신은 그런 작가들과 다름'을 천명했고, '여성 작가라기보다는 당대의 어느 남성 작가에 견주어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위대한 작가', '여성의 감성을 뛰어넘은 탁월한 지적 작가이자 도덕적 작가'로 평가되었다는데,

그 경멸당한 '여성 작가들'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제인 오스틴은 조지 엘리엇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 하고, 설마 브론테?), 전반적으로 당시의 다른 여성 작가들을 낮추어 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러한 평가가 온당한지는 그들의 소설들을 다 읽어보지는 못해서 잘 모르겠고, 칭찬 같지 않은 칭찬 같은 느낌.

 

 

 

 

"전 판단력으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저보다 뛰어난 사람을 남편으로 맞고 싶어요."
...
그녀는 캐소본 씨를 향해, 당신이 과연 내게 어울리는 훌륭한 남편인지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면서 그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이 과연 캐소본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는지 걱정스럽게 자문하고 있었다.

아직 그녀는 현명한 남편을 갖는 데 만족할 만큼 자신을 포기하진 않았다. 가엾게도 그녀는 자신이 현명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에게 똑똑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지만, 브룩 양의 생각에는 확실히 순진한 데가 있었다. 그다지 똑똑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실리아 쪽이 오히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빈 사람의 가식을 훨씬 재빨리 파악했다.

오랫동안 지식을 쌓았지만 그 지식에 대해 어떤 흥미나 공감을 못 느끼는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열정적인 젊은이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캐소본 씨는 가엾게도 그 자신이 이 작은 골방과 구불구불한 계단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는 신혼여행이 처음이고, 자신이 상상하던 것보다 더욱 부인에게 얽매이는 종속 관계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 매력적인 젊은 신부는 자신에게 애정을 달라고 강요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가장 위로가 필요한 지금, 무정하게도 그를 괴롭힌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는 인생에서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갈채에 인색한 냉담한 청중을 피할 부드러운 울타리를 얻으려 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울타리 대신 깐깐한 청중을 얻은 게 아닌가?

사실 그는 아내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 젊은 래디슬로를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첫째로 그녀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는데 다시 불평하는 게 매정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둘째로 더 말을 해서 자신이 흥분하는 일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강한 질투심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강한 질투심은 학문적 동료를 질투하는 것만으로는 양이 안 차서 그 밖에도 상대만 있으면 그냥 내버려 두질 않았다. 질투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태울 불길이 거의 필요 않은 질투도 있다. 그러한 질투는 열정이 아니라, 자신감 없는 에고이즘이라는 흐릿하고 음울한 절망 속에서 자란다.

그의 경험이라고 해봤자 동정을 피하고, 자기 기분을 남에게 들키는 것이 가장 두려운, 가련한 경험뿐이었다. 다시 말해 거만하고 편협한 예민함 때문에 동정으로 변할 만큼 너그러운 마음이 없어서 자기 일에만 몰두하든지, 아니면 기껏해야 이기적인 신중함 같은 좁은 조류에 갇혀 실처럼 떠는 그런 경험들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매우 가엾게 여긴다. 소위 고도의 학식을 지녔지만 누리지 못하다니, 또 이런 멋진 인생의 장관 앞에서 굶주려 떠는 의심 많은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영광을 목도하면서도 그 영광에 맘껏 사로잡히지 못하다니, 의식을 황홀하리만큼 생생한 사상이나 열정적인 열의, 정열적인 행동으로 바꾸지 못하고, 항상 학식은 많지만 영감은 모르고, 야심은 있지만 소심하며, 작은 일에 구애되어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도 편한 운명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그건 내 잘못이 아니고 남편 잘못이야"라고 쓰라리게 내뱉었다. 그녀의 존재 전부에 담겨 있던 동정심이 모두 엎질러져 버렸다. 남편의 존재와 남편의 훌륭함을 믿은 게 그녀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남편은 어떤 존재인가? 그녀는 남편을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남편의 눈빛을 살피고,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녀의 가장 소중한 영혼을 감옥에 가둬놓고 남몰래 그것을 방문했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상 남편(윌 래디슬로)은 항상 악과 싸웠고 아내로서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도로시아에게는 가장 기쁜 일이었다. 도로시아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립적이고 드문 뛰어난 여성이 다른 사람의 삶에 흡수되어 그 사회에서 아무개의 아내와 어머니로만 알려지는 것을 참으로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 힘으로 어떤 다른 일을 해야 했는지 아무도 정확히 말하지 못했다. 제임스 체텀 경만 해도, 그녀가 윌 래디슬로와 결혼하지 말아야 했다는 부정적인 처방 이상은 내리지 못했다.

그녀의 생애를 결정한 이 두 가지 행동이 분명히 이상적으로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온갖 불완전한 사회 상태의 조건 속에서 힘차고 고귀한 충동으로 고군분투한 결과가 이와 같이 선악이 반반 섞인 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그와 같은 사회에서는 위대한 감정이 때로 오류로 간주되고, 위대한 신념이 때로 망상으로 간주된다. 아무리 내적 존재가 강해도, 그것을 에워싼 외부 환경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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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 폐지에 적극 앞장섰던 빅토르 위고가 27세(1829년)에 써서 익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무슨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귀한 가문 사람인 것 같은 주인공은 3일간의 재판 끝에 유난히 날씨가 좋은 마지막 날,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비세트르 감옥으로 이송된 후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검사장의 집행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6주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고통을 담은 수기를 쓴다(그래서 이 책의 서문에는 실제 어느 사형수의 수기가 발견된 것인지, 한 몽상가가 쓴 책인지 선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쓰여 있다). 

그는 감방 안에서 먼저 이 방을 떠난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죽은 사람들의 환각을 보기도 한다. 도형수들이 툴롱의 도형장으로 떠나는 날은 감옥 안 축제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세찬 비가 내리면서 상황은 우스꽝스럽고 침울해진다. 도형수들이 떠나고 난 후 감방에는 열다섯살 소녀가 흉측한 가사로 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감옥이 모든 것을 퇴색시킨다고 생각한다.

최후의 날, 그는 콩시에르주리 감옥으로 이송된 후 그레브 광장에서 사형 집행될 예정이다. 그는 콩시에르주리로 이송되어, 그날 사형선고를 받은 다른 사형수를 만난다. 그 사형수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교수형으로 잃은 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도둑질, 강도, 살인으로 생활해오다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당하게 된 사람인데, 반강제로 주인공의 프록코트를 빼앗는다. 업무상 찾아온 신부는 그의 불경함을 꾸짖을 뿐이고, 멍청한 얼굴을 한 헌병은 그에게 복권 번호를 알려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한다. 그는 살아생전 천국 같았던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단두대의 고통, 국왕, 죽음 이후에 대해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세살박이 딸을 본다. 딸은 벌써 아버지를 잊었다.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탈옥을, 또는 사면을 꿈꾸지만 헛된 꿈이다. 사람들이 고함을 치고 신나게 떠드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는 단두대에 오른다.   

 

빅토르 위고는 읽는 사람들이 사형수의 마음에 좀더 공감할 수 있도록 일부러 주인공의 범죄 장면은 뺐다고 한다. 사실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면 대체로 당대의 사람들이 '흉약한 범죄'라고 생각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여서, 범죄 장면을 구체적으로 썼으면 사람들이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겠다(이 소설의 주인공은 정치범은 아닌 것 같고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갈구하는 주인공의 마음, 사형수를 하나의 업무로만 여기는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단, 간수, 신부, 관람료까지 지불해가면서 사형집행을 유희거리로 삼는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사형수를 구경거리로 생각하는 동료 죄수들의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빅토르 위고가 젊었을 때 쓴 것이라서 그런지 글에서 뜨거운 혈기도 느껴졌다. 

아무튼 이 책은 당시 아주 잘 팔렸다고 하지만, 빅토르 위고가 바랐던 것처럼 프랑스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된 것은 그로부터 150년 가까이 지난 1981년에 이르러서이고, 놀랍게도 1977년까지 기요틴에 의한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흉악범에 대해 사형을 선고할 것을 강력히 외치는 우리나라에서 사형제 폐지는 요원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나 또한 흉악범에 대해서는 사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사적 보복을 금지하는 법 체제에서 응보라는 감정을 고려하면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형을 집행한다고 해서 피해자 유족의 감정이 오롯이 위로받을 수 있을지, 국가가 행하는 '합법적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죽음에는 죽음으로 갚는다는 응보의 본성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제도가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지, 이런저런 면에서는 반대의 생각도 든다.  

프랑스에서도 사형제를 폐지할 당시에는 반대하는 여론이 더 많았는데 폐지한 후 여론이 법을 따라왔다고 하니, 입법적 결단이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책.  

 

 

 

 

 

 

 

 

 

 

 

 

 

 

프랑스에서 사형제 반대를 위해 평생 싸워 결국 사형제 폐지에 공헌한 로베르 바댕테르의 '사형제도에 반하여'(가톨릭신문사)라는 책이 있다고 하는데 알라딘에서는 구입할 수가 없다(그래24에서는 가능).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물이 고인 안뜰의 돌바닥에는 물이 철철 흐르는 알몸의 도형수들밖에 없었다. 침울한 침묵이 소란스런 허세의 뒤를 이었다. 그들은 추위로 몸을 떨었고, 이를 딱딱 마주쳤다. 가느다란 다리와 뼈만 앙상한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 새파래진 팔다리에 흠뻑 젖은 내의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의, 그리고 바지를 걸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벗고 있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유일하게 한 늙은이만이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았다. 그는 젖은 내의로 몸을 닦으면서 "이것은 각본에 없던 것인데"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하늘에 주먹질을 해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변호사가 뭐라고 했지? 도형에 처하라고? 아! 그래, 천 번이라도 사형이 낫지! 도형장보다는 단두대, 지옥보다는 죽음이 낫다. 목에 도형수의 쇠고리를 차느니 기요틴의 칼날에 목을 맡기는 것이 낫지! 도형이라니, 빌어먹을!

상소란 끊어질 때까지 매 순간 우두둑거리는, 심연 위에 당신을 매단 줄에 불과하다. 기요틴의 칼날이 6주에 걸쳐 떨어지는 것과 같다.

이 선량한 간수는 온화한 미소, 다정한 말투, 아첨하며 감시하는 눈, 두툼하고 넓적한 손과 함께 감옥 그 자체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비세트르 감옥이다. 내 둘레에 있는 모든 것이 감옥이다. 나는 모든 형태 속에서, 철책과 빗장의 형태뿐만 아니라 인간적 형태 속에서도 감옥을 본다. 벽은 돌로 된 감옥이다. 문은 나무로 된 감옥이다. 간수는 살과 뼈로 된 감옥이다. 감옥은 반은 집이고 반은 사람인, 무시무시하고 완벽한, 분할 불가능한 존재다. 나는 그의 먹이다. 감옥은 나를 품고, 자신의 모든 주름으로 나를 포옹한다.

지금의 나는 편안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정말 끝났다. 소장이 방문해 생겨난 소름 끼치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고백컨대, 여전히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조금 전에는 두려웠다. 지금은 다행히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아, 사면을 받을 수 있다면! 사면을! ... 기꺼이 도형장에 가겠다. ... 종신 도형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하지만 목숨만은!

아! 하이에나 같은 고함을 지르는 끔찍한 군중. 내가 그들에게서 벗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살아날지, 특사를 내릴지 누가 알겠는가? ...나에게 사면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아! 비열한 사람들! 그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것 같다.

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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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 동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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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식에 공감하고 발상도 좋았고 군데군데 좋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문장이 읽기 힘든 책이었다.

꾸역꾸역 읽다가 결국 시간이 아까워서 포기.

 

노동윤리의 중요성은 포스트-포드주의 조건 아래서도 여전하며, 그 취약성 또한 그러하다. 일 바깥의 삶에 대한 욕망을 견인차 삼아 일하는 능력은 아마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노동윤리의 힘에 달려 있을 것이다. 노동윤리는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일에 끊임없이 헌신하도록, 일을 삶의 마땅한 중심으로 끌어올리도록, 일 그 자체를 목표로 긍정하도록 일관되게 처방한다. 이는 현대의 축적하는 체제와 이 체제가 힘을 쏟는 사회적 노동의 특정한 양식에 적합한 종류의 노동자와 노동역량을 생산해 내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노동과저에 일어난 변화는 노동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더 중요하게끔 만들면서, 동시에 그 가치관의 설득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노동윤리는 확실성을 선사하는 인식론적 보상에서부터 사회 이동성을 약속하는 사회경제적 보상, 의미와 자아실현을 약속하는 존재론적 보상까지 여러 모습으로 재구성된다. ...오늘날은 노동과정의 질과 그에 따르는 물질적 보상의 양은 윤리 담론이 새로운 일의 이상을 전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노동윤리에 대한 불복종.무급가사노동의 거부 논의에서 비롯. 기본소득 요구.노동시간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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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와 얼굴들 - 4집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 - CD + 게임북
장기하와 얼굴들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극찬하는 사람이 많은데, 5집을 먼저 들었더니 4집이 그렇게 좋은 줄 잘 모르겠다. 4집 먼저 들었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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