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베카 솔닛이 오늘날의 미국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 문제, 여성혐오 현상, 대외정책, 기후 및 환경 문제, 이민자 문제, 젠트리피케이션, 인권, 역사 등에 관하여 쓴 책이다. 그녀는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명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그 본질을 인식하고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행동의 중요성, 희망에 대해 말한다. 인용하고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요약인용> ------------------------------------------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무대책, 무관심, 망각을 눈감아주고, 완충해주고 흐리게 하고 가장하고 회피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거짓들을 끊어낸다. 호명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호명은 분명 중요한 단계다."

"명명은 해방의 첫단계다. ...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숨겨져 있던 잔혹함이나 부패를 세상에 드러낸다. 혹은 어떤 중요성이나 가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야기를 바꾸는 일, 이름을 바꾸는 일,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 때 핵심적인 작업이다. 해방을 추구하는 운동들에서도 새 용어를 만들거나 알려지지 않은 용어를 널리 알리는 작업은 늘 중요했다."

"말의 엄밀함, 정확함, 명료함은 중요하다. 또한 당신이 말하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 사람이 되었든 지구가 되었든 그 말의 주제나 역사적 기록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기를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오래된 문화들은 '말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고 여긴다."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란 물론 우리가 각자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행동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삶을 어떻게 묘사하고 자신외에 무엇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혐오를 비정상으로, 여성을 다시 인간으로>

"세상에 어떤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고, 그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이 전진할 때, 종종 한명의 가해자와 한 건의 사건에 초점이 집중되곤 한다. 그러면 여성혐오가 사회 구석구석 퍼져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사건이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예외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그러나 그런 사건들은 이상이 아니라 정상이다. 미국 사회는, 다른 문제들도 많이 겪지만, 아직도 만연한 여성혐오로 인해 왜곡되고 제약된 사회다. ...우리는 이 상황을 비정상화함으로써 우리를 재인간화해야 한다. (하비 와인스틴 사건을 필두로 사실 그런 일은 공공연하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무지는 일종의 용인이다. 우리 사회가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 사회인 척하는 것이든, 여성혐오 따위는 진작 극복한 옛일에 불과한 사회인 척하는 것이든 마찬가지다. 무지는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는지, 왜 그러는지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 미국은 11초에 1명씩 여성이 구타당하고, 여성 살인 사건의 1/3은 전/현재 파트너가 가해자이며, 와인스틴은 109명이 넘는 여자들을 성추행/폭행해왔다. 각각의 행동은 어느 한 남자의 혐오나 부당한 권리의식에서 생겨났겠지만, 그것들은 결코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그런 행동들이 누적되면, 여성이 사적, 공적, 직업적 영역에서 움직이고 말할 공간을 축소시키는 효과, 여성이 힘을 얻을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많은 남자들은 직접 공격을 자행하지는 않겠지만, 마침내 몇몇 사람들이 지적하기 시작했듯이 그런 남자들도 이 상황으로부터 혜택을 입는다. 이 상황이 그들의 경쟁자를 일부 제거해주고, 늘 평평하다고 말하는 운동장에 실은 마리아나 해구만큼 깊은 함정을 파놓았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과 그 후의 침묵 강요. 피해자를 불신하거나 모욕하거나 처벌하거나 쫓아내는 것은 피해자를 같은 방식으로 다시 한번 학대하는 짓이다. 남자가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는 말을 꺼낸 여자들은 너무 자주 미친 여자나 앙심에 찬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았다. ... 그러한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면 피해 여성들의 삶은 어땠을까? 우리는 이런 폭력으로 그동안 어떤 여성들을 잃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셀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의 창조적, 전문적 역량이 트라우마와 위협으로, 폄하와 배척으로 훼손되는 세상이다. 여성이 동등하게 자유로우며 사회에 기여하도록 동등하게 격려받는 세상, 만연한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과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가해자로 폭로된 남자들의 창작자 경력이 끝난 것을 안타까워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짓밟히고 배척당한 탓에 우리에게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 사람들이 과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성혐오와 인종차별로 인한 손실은 한번도 정상상태가 아닌 적이 없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상태를 비정상화하는 것, 이 상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다. 모두의 이야기가 들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 또한 이야기들의 전쟁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고독>

"우리는 실패와 역경을 통해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 세상이 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익숙해진다. 그 사실에 익숙해질 필요가 없는 사람은 취약하고, 유약하고, 반박을 감당하지 못하며, 늘 자기 마음대로 해야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불평등은 거짓말쟁이와 망상을 낳는다. 힘 없는 사람들은 마지못해 진심을 숨기게 되고 힘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멍청해진다. 무지는 특권 고유의 결핍이다.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타인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불모지 같은 세상에 혼자 남는 것이다."

 

<여성혐오의 중요한사건들>

트럼프 vs. 힐러리 미국대선 이야기. 같은 일을 해도 힐러리는 여성이라서 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야기하는 화제의 횟수, 정체성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편향된 시각으로 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백인 남자들이 그녀를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데 실패한 일에 대해 그들 자신을, 유권자들을, 체제를 비판하지 않았다.

 

<사라진 2,000만 명의 이야기꾼>

투표는 일종의 말하기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말하는 한 방법이다. 역할을 가진다는 것,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 그런데 지난 선거에서 약 2,000만 명의 유권자가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엄격해진 투표자 신원 확인법 등으로 박탈당한 투표권을 되찾아주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싸움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고립 이데올로기>

고립 이데올로기와 기후변화 문제. 기후 변화의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고립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대신 그 문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고 우리가 공동행동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순진한 냉소주의는 변화를 일으킬 역량이 있는지를 의심한다. 미국 내 송유권 설치 문제. 변화와 불확실성을 수용하려면, 더 느슨한 자의식이 필요하고, 더 다양하게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고정된 입장에 붙박이인 사람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성공을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차라리 그것을 실패로 전환해버리는 것은 수세적 조치다. 지상의 삶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승리,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종종 유의미한 승리로부터 등 돌리는 일이다. 경중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일이다.

순진한 냉소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무엇이든 발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앞으로 벌어질 일은 보통 축복과 저주의 혼합일테고 상당힌 긴 시간에 걸쳐서 펼처지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특권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은 분노를 유달리 쉽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분노를 넘어서는 것. 그런 논리로 정당화된 폭력은 개인적 표현의 한 형태다. 내 경험상, 장기적 계획으로 실제적 변화에 헌신하는 사람들일수록 분노의 드라마에 가장 덜 관여한다. 그들이 최우선으로 받드는 임무는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그들이 우선시하는 것은 자기 표현이 아니라 행동이다.

 

<성가대에게 설교하기>

종종 의견이 일치한느 청중에게 자꾸 의견을 늘어놓아 귀찮게 군다는 뜻으로 쓰인다. 특히 선거기간에 자주. 그러나 정말 아무 의미 없는 행위인가? 그러다 정체성을 잃고 같은 편마저 잃는다. 설교가 '개종'이라기보다는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려는 것이라면, 같은 편인 사람들과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이상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타협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가끔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결국 머물고 싶어할 장소로 먼저 가 있으면 된다. 교유 correspondence.우리는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기 때문에 교류한다. 최고의 대화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이 터무니없거나 부적당한 것이 아님을 확인해주었고, 내 편이 되어주고 내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해주었으며, 우리에게 가치와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대화로써 자신을 강화했고, 서로간의 유대를 강화했다. 대화는 우리가 상대에게 지지와 사랑을 전하는 주된 방법이다.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대화로 함께 어떤 생각을 탐구하는 일은 의미와 이해의 폭을 넓히고 출발점으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는 데서 오는 섬세한 기쁨이 가득한 모험이다. 대화의 가치. 이웃이나 공동체, 사회로 묶어내는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시시덕거림과 유쾌함. 함께 걸을 사람들, 즉 함께 대화할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기쁨뿐 아니라 힘을 얻는다.

 

<기후변화는 폭력이다>

산업적 규모의 체계적, 전지구적 폭력이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면, 그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우선순위와 가치에 대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잔학함에 대한 저항은 그 잔학함을 숨기는 언어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반석위에 흐른 피>

1846. 6. 28. 미국 샌프란시스코만에서 프란시스꼬와 라몬, 삼촌인 호세 데라레예스 베레예사가 총살당한 사건.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전쟁. 이는 오늘날 라틴계 주민 지위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과도 관계가 깊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으킨 죽음>

샌프란시스코에서 평생 거주해 온 알레한드로 니에또는 범죄자로 몰려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 죽음의 원인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있다. 비백인 인구가 살던 동네에 새로운 백인 주민이 유입되고, 백인 주민들이 그 동네에 살던 원주민들을 범죄 용의자로 간주하여 신고하는 것이다. "내가 장례식에서 강하게 느낀 것은 진정한 공동체의 생명력이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장소를 기억으로, 의식과 습관으로, 애정과 사랑으로 짜인 천처럼 경험하는 이들이었다. 장소를 그런 잣대로 바라보는 시각은 돈이나 소유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관계들하고만 상관이 있다. ... 새로운 테크경제는 '파괴적 혁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이 토박이들이 보는 것은 집, 공동체, 전통, 관계가 파괴되는 모습뿐이었다. ...집을 잃은 사람은 이런저런 어려운 처지에 쉽게 빠지고, 그런 상황들 중 일부는 치명적이다."

 

<들어갈 길도 나갈 길도 없는>

미국에는 죄수가 220만명 있고, 어느 시점에든 집 없는 사람이 50만명에서 150만명 가량 있다. 이들은 버려도 좋은 사람들로 여겨진다. 감옥과 거리는 이들이 버려지는 장소다. 이 두 장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유지하며 악순환한다. 1980년대 이전에는 지금과 같이 노숙인이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다.

 

<새장 속의 새>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헤로인 중독, 위탁가정 속에서 방치되어 자라나 소년원을 거쳐 감옥에 수감된 후 교도관 살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자비스 매스터스 이야기. 그는 교도소 내에서 폭력과 자살을 막았고,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했고, 동료 수감자들의 성장을 격려하고, 교도관들에게도 호감과 신뢰를 받는 듯했으며, 글쓰기로 바깥 세상과 연결되었다. 

 

<기념비 전쟁>

남북전쟁, 노예제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부의 기념비들, 흔적들. 그들의 위조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의 단순한 이야기를 다른 단순한 이야기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되는 세부들과 복잡한 사실들을 더하는 것이다. ... 우리는 지금 서 있는 동상들이 현재의 배제와 모욕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현재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각도 참여나 평등의 최종적 실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후세는 우리가 기여한 바를 수정하거나 아예 무를 것이고, 우리가 깨닫지도 못한 채 저지른 죄들에 대해서 우리를 욕할 것이다. 동상은 한자리에 서 있지만, 문화는 그것을 지나쳐 흘러간다.

 

<스탠딩록에서 온 빛>

이상을 지키고자 한 노력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단합.

 

<비탄 속의 희망>

슬픔과 분노, 불면과 분개가 그 자체로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미국에 공공의식을 갖춘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간접적 영향을 칭송하며>

1971년 엘즈버그가 일급 기밀이었던 펜타곤 문서를 누출한 일이 수십년 뒤 에드워드 스노든에게도 일어났다. 행동이 일으키는 파문은 종종 직접적인 목표를 넘어서는 지점까지 퍼져나간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고, 설령 결과가 즉각적이거나 명백해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희망에 따라 행동해야 할 이유가 되어준다....내게 희망이란 늘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뜻했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어쩌면 스스로 미래를 써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희망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고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정보에 근거하여 영리하게 판단하되 늘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희망은 앞을 내다보지만, 과거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역사를 아는 데서, 특히 우리가 거두었던 승리를 아는 데서, 나아가 그 승리의 복잡성과 불완전선을 아는 데서, 희망은 썩 좋은 것의 적이나 다름없는 완벽에 집착하지 않고, 승리의 문턱에서 굳이 패배를 낚아채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고 그 내용이 일부 우리에게 달려있는데도 꼭 미래의 일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 과거는 우리에게 패턴, 모형, 비슷한 사례, 원칙, 자원을 알려준다. 영웅적이고 탁월하고 끈질겼던 이야기들을 알려준다. 중요한 일을 할 때 느끼는 크나큰 즐거움을 알려준다. 이런 것들을 갖춘다면, 우리는 가능성을 붙잡고 희망을 현실로 바꿔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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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으로서, 그 형태를 벗어난 가족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차별한다.

가족 내 성차별적 위계구조와 자녀를 소유물로 대하는 부모라는 권력이 아동학대를 낳는다. 인권은 가장 가깝고 작은 곳에서부터 보장되어야 한다.

 

아이에 대한 '체벌'을 이야기할 때, '학대는 안 되지만, 체벌은 어느 정도 필요할 수 있다'는 견해는 아직도 어느 정도 지지를 얻고 있는 듯하다. 나도 체벌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육환경에서 자라나서, 체벌받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늘 끔찍히 싫었지만, 남의 가정에서 교육 목적으로 적절한(?) 체벌을 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체벌부터 전면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체벌과 학대의 경계는 생각보다 모호해서 실제로 체벌의 강도가 점점 더해지면서 학대가 된다는 것이다. 체벌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학대에 대해서도 민감성이 떨어지는 등 둘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교육목적이라는 말도, 성인에 대한 폭력과 아이에 대한 폭력을 달리 보아야 할 것인가, 라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이를 별개의 인격체로 보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체벌은 반사회성이나 공격성을 기르고 폭력을 내면화하고 공포를 기를 뿐 기대하는 바와 같은 교정효과는 없다고 한다. 체벌로 반성을 이끌어낸다기보다는 모욕감을 주고 체벌이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시킬 뿐이다. 어릴 때 맞아서 괜찮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맞았음에도 괜찮은 사람이 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을 짓'이라는, 폭력을 정당화할 때 종종 쓰이는 파렴치한 그 말이 왜 아이에게는 쉽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결국 나도, 체벌받는 건 끔찍하게 싫었으면서도 남의 가정에서 체벌이 이루어지는 것은 간섭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은 아이를 그 가정과 양육자에 종속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동 인권이 중요하게 된 역사는 서구에서도 그리 길지 않다고 한다. 1923년 세이브더칠드런의 아동권리선언에서부터 신체, 비신체적 처벌을 모두 금지하는 1989년 UN 아동권리협약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여러 차례 아동의 권리를 선언하고 확인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아동의 권리가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꼬마 니콜라에서도 아이들이 말썽을 부렸다는 이유로 뺨을 맞는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1979년에 이르러서야 스웨덴에서 최초로 (가정 내) 체벌을 금지하는 입법을 하였다고 한다. 생각보다 늦지만 우리보다는 낫다.

우리나라는 아동복지법에서 아동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민법에서는 여전히 친권자가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결국 체벌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하지만 글쓴이가 쓴 것처럼, 체벌은 쉽게 학대로 이어지고 실제 효과도 거의 없는 점, 아동도 개별 인격체라는 점에서 금지되어야 한다. '친권'을 앞세워 아이에 대한 개입을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나, 부모의 '친권'은 권리가 아니라 자녀의 보호를 위한 '의무'로 보아야 한다. 아동은 공공의 보호가 필요한 가족 내 약자이다. 친권이 아이의 인권을 침해할 때에는 국가가 개입해서 '아동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영아유기/입양의 상당수는 혼외로 태어나는 아이들(미혼부모의 아이들)에게 일어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한 사회적 차별, 생계문제, 직접 키울 때보다 입양 보낼 때 지원금이 더 높다는 것, 출산이나 양육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 등의 문제들이 양육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정 형태나 인종, 국적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혜택과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사후관리가 허술한 입양절차도 보완이 필요하고, 민간입양기관과 지자체에서 담당하는 분야가 중복되어 제도가 일관되게 운용되지 않는 것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본다. 이 책에서는 실상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이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자녀를 소유물로 보는 심리와, 가족이 복지와 양육부담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상황, 즉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급속한 근대화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가족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하는 제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제도들은 결국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저해한다. 그리고 가족주의의 확산은 다른 집단에 대한 신뢰 약화와 배타적 경향을 낳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스웨덴의 경우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가 기본 접근방식이라고 한다. 개인의 자율성과 평등은 강조하되 이를 위한 환경, 제도를 사회에서 만드는 것으로 오히려 사회적 신뢰가 높다고 한다. 이처럼 '공감'이라는 정서에 기대기보다는,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확대가족'의 시선(내 아이처럼, 내 가족처럼) 말고, 개인의 개별성, 인권 존중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돌봄, 약자보호에 대한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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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인용)

우정이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모든 사물에 관한,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 지혜를 제외하고는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미덕은 우정을 낳고 지켜준다.

 

우정은 약점이나 결핍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인 사랑 amor에서 유래되는 것(amicitia)이다. 이해관계를 떠나 선의를 맺어주는 것. 사랑의 감정과 결합된 호감에서 비롯되는 것. 성품과 본성(미덕)에 끌리는 사람을 보았을 때 생기는 호감.

  

미덕을 저버리는 행위로는 우정이 존속될 수 없다. 도의에 어긋나는 것은 요구해서도 안 되고 요구받더라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거리낌없이 솔직하게 충고해야 하고, 충고를 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정의 버팀대는 신뢰이다. 솔직하고 사교적이고 뜻이 맞는 사람을,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을 친구로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신뢰할 수 있으므로.

 

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동등해지는 것이다. 누가 미덕과 재능과 행운에서 우월하다면 그것을 나눠주고 공유해야 한다. 이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나눌 때 가장 큰 결실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줄 수 있는 만큼, 받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끌어올려야 한다.

 

우정의 솔기는 확 찢어내기보다는 한땀한땀 따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우정이 소멸하더라도 적대관계가 시작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이는 수치스러운 일이므로. 이 모든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너무 서둘러 사랑하지도 말고 그럴 가치도 없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

  

자신이 먼저 선한 사람이 된 다음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우정의 안정성이 확보될 수 있다. 자연의 최고선에 이르는 최선의 동반자 관계. 이런 것들이 있다면 인생은 행복하다. 행복은 최선의 목표이다.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미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가하고나서 친구를 사랑해야지 사랑하고나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친구를 고를 때에는 신중해야.

 

친구에게 하는 바른 말은 미움을 낳기 쉬우므로 신중하게, 귀에 거슬리지 않게 모욕적이지 않게 해야 한다. 충고를 할 때는 거리낌은 없되 거칠지 말아야 하며 충고를 받을 때는 참을성은 있되 대들지 말아야 한다. 우정에 아첨과 아부와 맞장구보다 더 큰 해악이 없다. 위선은 우정에 적대적이다-신뢰를 소멸시키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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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관하여는 조금 더 나중에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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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건축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재미있는 것 같다. 이 책들은 건축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나에게 입문용으로 딱 적당했다. 
먼저 쓰여진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걷고 싶은 거리는 어떤 거리인지, 현대 도시들의 풍경, 권력을 만들어내는 건축과 공간, 도시의 순환과 재생 사례, 계획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사람들에 의해 변화해 온 강남,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온 강북, 교회를 비롯한 종교시설의 건축, 공원, 사무실, 아파트, 인터넷 가상공간, 뜨는 거리의 법칙, 건축디자인에 대한 이야기(크기가 다르므로 제품디자인과는 달리 접근해야 한다는 것), 동양과 서양의 건축, 건축과 자연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이 담겨 있다. 걷고 싶은 거리, 도시 재생, 종교건축, 전반적인 공간과 건축의 의미를 해석하는 부분이 특히 재미있었다. 그리고 건축은 지어지는 땅과 인간, 기술, 경제 등의 상호관계를 고려해서 지어져야 한다는 것, 공간은 실질적인 물리량이라기보다는 결국 기억이고, 건축은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것이라는 글쓴이의 생각에 공감했다.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는 학교건축, 회사 건물(사옥), 공적 공간 문제,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 건축물 리모델링, 권력과 건축, 종교건축, 발명과 도시의 형성, 기후와 건축, 서울의 공간들, 도시가 더 좋아지기 위한 건축-다리, 공원, 마을도서관 등, IT와 도시의 미래 예측, 중력을 이겨내는 건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작을 읽고 연달아 읽어서 그런지 중복되는 부분들이 눈에 띄어서 전작보다는 신선함이 덜했고, 가끔 주제와 상관없는 듯한 이야기가 툭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학교건축과 사옥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건축물의 진정한 의미는 건축물이 사람과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는 글쓴이의 생각에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공감한다.  
간혹 너무 비약하는 것 같은 부분들이 있었고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들도 있었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과 환경, 건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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