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과 잿빛의 세계 7
이리에 아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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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이 슬픔을 극복하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 완결권.
이야기를 더 끌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그림도, 이야기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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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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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만들어질 당시 참여한 저자가 영화보다 풍부하게 쓴 마르탱 게르라는 사람의 실화.   

1540년대 남서프랑스 랑그독 지방에서 아내와 가족을 떠난 바스크 족 출신의 마르탱 게르.

몇 년 후 1556년 자신을 마르탱 게르라고 칭하는 자가 돌아온다. 그는 아내와 함께 딸까지 낳고 살아가다가, 작은 아버지 피에르 게르와 재산 문제로 분쟁을 겪은 후 가짜 마르탱 게르라는 이유로 소송을 당한다. 당시의 소송 형태는 민사와 형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것인지 아내와 검사가 청구인이 되어 마르탱 게르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하였는데, 결국 마르탱 게르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툴루즈 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맡았던 판사 장 드 코라스는 이 사건에 대해 <잊을  수 없는 판결>(Arrest Memorable)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크게 히트를 친다. 코라스는 그 책에서 자신은 항소심 재판에서 여러 증거들을 종합하여 본 결과 무죄로 심증이 기울었는데, 극적으로 진짜 마르탱 게르가 의족을 하고 나타나 결국 재판을 받는 마르탱 게르에게 유죄를 선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징벌은 절름발이의 형태를 하고 오지만 가장 민첩한 범죄자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호라티우스), 절름발이가 된 진짜 마르탱 게르가 나타나 가짜 마르탱 게르를 징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통쾌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 진짜 마르탱 게르는 아내를 버리고 떠난 무책임한 사람이었지만 가짜 마르탱 게르는 아내에게 훨씬 다정한 사람이어서, 아내는 가짜 마르탱 게르를 남편으로서 받아들이고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그를 돌보았던 것이다. 재판에서는 그녀를 '가짜에게 속은 순진한 여자'로 보아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아내인 그녀가 속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한 기록자들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비극인 결말이다.

저자는 이를 '창안된 결혼'이라고 칭한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규범이 되던 가톨릭교에서 정한 결혼의 교리를 넘어는 것이어서(중혼일 수도 있으므로), 저자는 이들 부부가 신교를 믿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이 신에게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신교 신자인 장 드 코라스 판사도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그 후 장 드 코라스 판사는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직후 체포되어 군중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에는 주목되지 않았으나 저자가 특히 주목하여 주의깊게 서술한 부분은 아내 베르트랑드의 독립적인 성격과 결혼생활, 그리고 소송에서의 이중 게임이다. 그녀는 원고로서 마르탱 게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사실은 작은 시아버지의 종용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진술을 하였다(이로써 결혼생활 동안에는 마르탱 게르가 진짜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을 호소하여 남편이 진짜가 아닐 경우 자신의 안전망을 확보하면서도, 소송에서의 태도로 가짜 마르탱 게르를 도울 수 있었다). 

또 흥미로웠던 것은 재판 부분이다. 150명이나 되는 증인들을 불러 꼼꼼하게 증언을 듣고, 증언의 신빙성을 분석하여 판단을 내리려 하였다(결과적으로는 진짜 마르탱 게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잘못된 판단이었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한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아직 고문이 심문방법의 하나로서 남아 있던 시절이었지만, 고문은 생각만큼 '자유롭게' 사용되지는 않았고, 그것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요건이 필요했다. 이 사건에서도 고문은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일 수도 있는 사형이라는 형량. 혹시, 만에 하나라도 정말 피고가 마르탱 게르였다면. 장 드 코라스가 자신의 책 수정판에서 마르탱 게르가 사형집행장으로 가기 전에 범행을 자백했다는 진술을 추가했다고 하나, 그 부분을 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몽테뉴는 이 재판을 실제로 보고 재판에서 밝혀지는 진실의 불확실성과 불완전성, 그럼에도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의 대담함에 대해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500년대 구교와 신교의 갈등 양상(제네바에서는 신교가 우세했고, 프랑스에서도 점차 신교가 지지를 얻어가던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 농민들의 삶(가제유 계약 등), 바스크 족과 프랑스 랑그독 지방 농민들의 재산상속 형태의 차이, 상속토지 매각 방식, 조세제도, 영주와 농민들의 관계, 결혼 풍습, 교회법이 규율하였던 혼인(당시 구교에서는 남편이 부재한 경우 그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아내가 자유롭게 재혼할 수 없다고 주장-유스티니아누스 법. 당시 관습법은 당사자들의 동의가 있다면 혼인이 성립한다는 것이나, 1564년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혼인 예고와 본당 사제의 결혼 주관을 요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기존의 결혼풍습이 지속되었다. 한편 신교 도시 제네바에서는 더 이상 결혼이 성사가 아니었고 이혼과 재혼에 대한 요건도 완화되어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 아내에 대한 상속관습,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풍습에 대한 구교와 신교의 태도, (사진도 없던 시절) 사람들의 기억의 불완전함, 150명이나 되는 증인이 나섰지만 저마다 증언이 달랐던 재판에서 판단을 내린 방식(로마법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었고, 변호사의 조언을 얻을 권리가 있었다), 아이가 적출인지 서출인지 결정하는 방식(아마도 상속에서 차이가 있는 듯), 공증인, 혼인계약서, 지참금 제도 등의 내용들이 많지 않은 분량의 이 책에 빽빽하게 압축되어 서술되어 있다.    

 

 

 

그때 "기적처럼" 나무 의족의 사나이가 법정에 나타났다. 그것은 피에르 게르를 보호하고 장 드 코라스에게 그가 틀렸음을 보여 주기 위한 섭리이자 신의 은총이이었다. 코라스는 2년 전 하드리아누스와 에픽테투스 사이의 대화를 번역하면서 거짓말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에픽테투스: 다른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입니다.
판사는 "우리들의 시대는 불행하게도 어떤 지위에 있든 자신의 거짓말, 구실, 위선을 가장 잘 그럴듯하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흔히 가장 존경받는 시대이지만, 사실상 사람들 사이에 속이고 숨기는 것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고 주석을 달았다.

변호사, 관리, 판사 지망자들은 모두 16세기에 새로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라면 다 그렇듯이 자기 형성(self-fashioning)-스티븐 그린블랫의 용어를 빌자면-즉 자신들의 출세를 도운 화법, 예절, 태도의 연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디에서 자기 형성이 끝나고 거짓이 시작되는 것일까? 몽테뉴가 자책이 담긴 에세이에서 이 문제를 독자들에게 제기하기 오래 전에 팡세트의 창안의 능력이 판사들에게 그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몽테뉴는 진실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 이성이 얼마나 불확실한 도구인지를 강조한다. "진실과 거짓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 우리는 하나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본다."...분별없이 확신하기보다는 주저하는 것이, 열 살에 박사로 자처하기보다는 나이 예순에 견습공이 되는 것이 낫다.

해명할 수도,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소송에 말려들었을 때 소송당사자들에게 100년 후에 다시 와 재판을 받으라고 명령한 아레오파고스 회의(고대 아테네 귀족정 시기 핵심 기관)의 재판관들보다 더 자유롭고 솔직하게 다음과 같은 형태의 판결문을 용인하도록 하자. "법정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몽테뉴)
- 우리의 추론이 불완전하다는 것, 상상력이 우리를 압도하기도 한다는 것. 당연한 판결만이 존재해야 하며 그 이상 나아가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나 같은 괴물, 나보다 더 불가사이한 것을 본 적이 없다. ...... 나 자신에 대해 숙고하고 알면 알수록 더욱 나의 기형성에 놀라게 되고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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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 사는 듯 살고 싶은 판사의 법정 이야기
정재민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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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 판사로 재직하다가 2017년경 그만둔 글쓴이가

재판(특히 형사재판)을 했을 당시를 회고하며 쓴 이야기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실제 사건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시선이 따뜻하다. 왠지 좋은 판사였을 것 같다.

 

반면 재판을 할수록 점점 확신이 드는 것은, 너무나 뻔한 소리지만, 인간은 모순이 한 몸에 공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위대함과 초라함이, 평안과 불안이, 생명과 죽음이, 용기와 두려움이, 집단성과 개인성이 양립할 수 있다. 여러 모순된 측면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복잡한 존재이므로 한 측면이 있다고 해서 반대의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을 겪으면서 무엇보다도 내가 판사로서 하는 일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오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런 지옥으로 몰아넣었을까. 그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사건 이후 재판을 대하는 자세와 관점이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마치 운전하다 가족을 잃어본 사람이 다시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법복 안쪽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세줄의 표어가 새겨졌다.
˝음식 장사는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되고,
의사는 병으로 장난치면 안 되며,
법조인은 정의로 장난치면 안 된다.˝

나는 판사가 위법과 적법을 판단하는 사람이지 도덕성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도덕적 판단은 각자의 마음속 판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도 작은 법정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대개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내 삶을 두고 악이라고 몰아세우는 검사와 선이라고 변호하는 변호사가 격론을 벌인다. 내 마음속 판사는 날마다 내게 묻는다.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 라고. 그때마다 나는 피고인석에 앉아서 대답을 찾느라 힘겨워한다. 법정의 햄릿이 된다. ˝자백이냐 부인이나, 그것이 문제로다˝라면서. 몸과 정신이 연약하고 늘 변한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도덕적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비도덕적인 것 아닌가 투덜거리면서,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피고인석을 걷어차고 마음속 법정에서 판사의 자리를 꿰차는 날을 꿈꾼다. 나 스스로 나의 모든 행위의 준칙을 자신 있게 설정하고, 나 스스로 나의 행위의 가치와 당부를 판단하는 마음속의 판사가 되기를 꿈꾼다. 아니, 법정이라는 판단의 공간 자체를 걷어치우고 궁극의 자유로움을 얻기를 꿈꾼다.

국민 눈에는 재판이란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결과 채무다. 의사가 아무리 친절하고, 인품이 좋고, 설명도 잘해주고, 성실하게 치료해도 오진을 내린다면 누가 좋은 의사라 하겠는가. 그저 돌팔이일 뿐이다. 차라리 불친절하고 성의 없어 보여도 정확히 진단해서 확실히 치료해준 의사가 진짜 의사다. 아무리 인품이 좋고, 친절하고, 연륜이 높아도 판결이 엉터리라면, 인품이 나쁘고, 불친절해도 정확한 판결을 하는 판사보다 못하다. 아니, 훨씬 나쁘다.
많은 사람들이 판사의 인품이 훌륭하지 않은지, 자신과 소통을 기피하려 하는지가 아니라 사실과 다른 판결, 억울한 판결을 받을까봐 불안해한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형량이 약해지는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인간의 고결함과 위대함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그렇게 고결하다거나 선하다거나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간혹 그런 인간이 출현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여건이 맞아서 그런 업적이 성취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은 그저 그렇다. 나쁘다기보다는 유약하다. 지식과 지혜를 배우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젊음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다. 몸도 정신도 약하다. 그래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면 악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불행한 일이 닥칠 수 있다.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선의로 한 일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을 때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이 사건과 같이 누군가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의도치 않게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 큰 피해를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에 누가 누구를 얼마나 원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서로의 가슴이 가장 적게 아플 수 있을까.

사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문제를 비판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문제의 대안을 제시해서 해결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을 참아주고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어쩌다보니 그 쉬운 일을,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직업으로 매일 하게 되었다. 매일 이 일을 할 때마다 ‘그러면 너는 제대로 살아왔느냐, 너는 네가 말하는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느냐‘는 양심의 질문이 쿡, 쿡, 쿡 아프게 나를 찔러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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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공화국 - 욕망이 들끓는 한국 사회의 민낯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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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제제기에 공감한다.

특히 서울 초집중화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과 예산, 지자체 문제에 대해.
그러나 당장 개개인의 욕망과 무관심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도적으로는 서울 초집중화 및 불균형발전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한 제도설계자/실행자들도 대체로 서울을 기반으로 삼고있어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문제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 문제.

바벨탑 공화국의 시민은 다른 면에선 선량할망정 자신의 서열과 그에 따른 이익을 지키려는 데는 악착같고 집요하다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오직 남과의 서열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신의 서열 확인 차원에서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상대로 "내가 누군지 알아?" 를 외치는 게 아닌가?

법과 제도는 스스로 진화하진 않는 법이다. 그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과 투쟁에 의해서만 변화가 가능하다. 집단적 차원에서 학습된 무기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갑질‘은 결코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이 바벨탑 공화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학습된 무력감을 가져야만 무난하게 살 수 있다는 신념을 요구한다.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조차 체념의 지혜를 갖고 살더라도, 투표만큼은 그 지혜를 잠시 유예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나만 알 수 있는 건데, 투표를 하는 순간만큼은 서울 초집중화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잠시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마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우리 모두의 비극이 있다.

예산 분배 과정이 중앙 권력자들의 출신 지역과 관계없이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지역주의 투표를 해야 할 이유는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이런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나는 ‘공적 분노, 사적 평온’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사적 평온이나 행복을 유지하고 가꾸면서 공적 분노에 작은, 아주 작은 에너지나마 투자하면 좋겠다. 남도 아닌 나의 가족의 미래를 위한 소박한 이기심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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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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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수다스럽고 집요한 에세이다. 각주까지 달린 건 처음 봤다.

그렇게 내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의외로 빵터진 부분들이 많았다. 내 취향이 의심스러워질 정도다.  

 

  

...이 현상에서 드러난 것은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는 방종에 따르기 마련인 미묘한 창피함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방종이 사실은 방종이 아니라고 누구에게든 설명하고 싶은 욕구다. 내가 마사지를 받는 건 마사지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옛날에 무슨 운동을 하다가 다친 허리가 죽을 만큼 아파서 하는 수 없이 받는 거라는 식, 나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피우는 게 아니라 담배가 ‘필요해서 피우는 거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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