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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 사는 듯 살고 싶은 판사의 법정 이야기
정재민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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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 판사로 재직하다가 2017년경 그만둔 글쓴이가

재판(특히 형사재판)을 했을 당시를 회고하며 쓴 이야기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실제 사건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시선이 따뜻하다. 왠지 좋은 판사였을 것 같다.

 

반면 재판을 할수록 점점 확신이 드는 것은, 너무나 뻔한 소리지만, 인간은 모순이 한 몸에 공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위대함과 초라함이, 평안과 불안이, 생명과 죽음이, 용기와 두려움이, 집단성과 개인성이 양립할 수 있다. 여러 모순된 측면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복잡한 존재이므로 한 측면이 있다고 해서 반대의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을 겪으면서 무엇보다도 내가 판사로서 하는 일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오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런 지옥으로 몰아넣었을까. 그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사건 이후 재판을 대하는 자세와 관점이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마치 운전하다 가족을 잃어본 사람이 다시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법복 안쪽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세줄의 표어가 새겨졌다.
˝음식 장사는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되고,
의사는 병으로 장난치면 안 되며,
법조인은 정의로 장난치면 안 된다.˝

나는 판사가 위법과 적법을 판단하는 사람이지 도덕성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도덕적 판단은 각자의 마음속 판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도 작은 법정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대개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내 삶을 두고 악이라고 몰아세우는 검사와 선이라고 변호하는 변호사가 격론을 벌인다. 내 마음속 판사는 날마다 내게 묻는다.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 라고. 그때마다 나는 피고인석에 앉아서 대답을 찾느라 힘겨워한다. 법정의 햄릿이 된다. ˝자백이냐 부인이나, 그것이 문제로다˝라면서. 몸과 정신이 연약하고 늘 변한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도덕적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비도덕적인 것 아닌가 투덜거리면서,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피고인석을 걷어차고 마음속 법정에서 판사의 자리를 꿰차는 날을 꿈꾼다. 나 스스로 나의 모든 행위의 준칙을 자신 있게 설정하고, 나 스스로 나의 행위의 가치와 당부를 판단하는 마음속의 판사가 되기를 꿈꾼다. 아니, 법정이라는 판단의 공간 자체를 걷어치우고 궁극의 자유로움을 얻기를 꿈꾼다.

국민 눈에는 재판이란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결과 채무다. 의사가 아무리 친절하고, 인품이 좋고, 설명도 잘해주고, 성실하게 치료해도 오진을 내린다면 누가 좋은 의사라 하겠는가. 그저 돌팔이일 뿐이다. 차라리 불친절하고 성의 없어 보여도 정확히 진단해서 확실히 치료해준 의사가 진짜 의사다. 아무리 인품이 좋고, 친절하고, 연륜이 높아도 판결이 엉터리라면, 인품이 나쁘고, 불친절해도 정확한 판결을 하는 판사보다 못하다. 아니, 훨씬 나쁘다.
많은 사람들이 판사의 인품이 훌륭하지 않은지, 자신과 소통을 기피하려 하는지가 아니라 사실과 다른 판결, 억울한 판결을 받을까봐 불안해한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형량이 약해지는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인간의 고결함과 위대함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그렇게 고결하다거나 선하다거나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간혹 그런 인간이 출현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여건이 맞아서 그런 업적이 성취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은 그저 그렇다. 나쁘다기보다는 유약하다. 지식과 지혜를 배우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젊음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다. 몸도 정신도 약하다. 그래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면 악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불행한 일이 닥칠 수 있다.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선의로 한 일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을 때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이 사건과 같이 누군가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의도치 않게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 큰 피해를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에 누가 누구를 얼마나 원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서로의 가슴이 가장 적게 아플 수 있을까.

사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문제를 비판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문제의 대안을 제시해서 해결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을 참아주고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어쩌다보니 그 쉬운 일을,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직업으로 매일 하게 되었다. 매일 이 일을 할 때마다 ‘그러면 너는 제대로 살아왔느냐, 너는 네가 말하는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느냐‘는 양심의 질문이 쿡, 쿡, 쿡 아프게 나를 찔러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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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공화국 - 욕망이 들끓는 한국 사회의 민낯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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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제제기에 공감한다.

특히 서울 초집중화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과 예산, 지자체 문제에 대해.
그러나 당장 개개인의 욕망과 무관심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도적으로는 서울 초집중화 및 불균형발전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한 제도설계자/실행자들도 대체로 서울을 기반으로 삼고있어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문제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 문제.

바벨탑 공화국의 시민은 다른 면에선 선량할망정 자신의 서열과 그에 따른 이익을 지키려는 데는 악착같고 집요하다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오직 남과의 서열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신의 서열 확인 차원에서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상대로 "내가 누군지 알아?" 를 외치는 게 아닌가?

법과 제도는 스스로 진화하진 않는 법이다. 그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과 투쟁에 의해서만 변화가 가능하다. 집단적 차원에서 학습된 무기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갑질‘은 결코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이 바벨탑 공화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학습된 무력감을 가져야만 무난하게 살 수 있다는 신념을 요구한다.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조차 체념의 지혜를 갖고 살더라도, 투표만큼은 그 지혜를 잠시 유예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나만 알 수 있는 건데, 투표를 하는 순간만큼은 서울 초집중화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잠시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마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우리 모두의 비극이 있다.

예산 분배 과정이 중앙 권력자들의 출신 지역과 관계없이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지역주의 투표를 해야 할 이유는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이런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나는 ‘공적 분노, 사적 평온’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사적 평온이나 행복을 유지하고 가꾸면서 공적 분노에 작은, 아주 작은 에너지나마 투자하면 좋겠다. 남도 아닌 나의 가족의 미래를 위한 소박한 이기심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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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베카 솔닛이 오늘날의 미국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 문제, 여성혐오 현상, 대외정책, 기후 및 환경 문제, 이민자 문제, 젠트리피케이션, 인권, 역사 등에 관하여 쓴 책이다. 그녀는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명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그 본질을 인식하고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행동의 중요성, 희망에 대해 말한다. 인용하고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요약인용> ------------------------------------------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무대책, 무관심, 망각을 눈감아주고, 완충해주고 흐리게 하고 가장하고 회피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거짓들을 끊어낸다. 호명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호명은 분명 중요한 단계다."

"명명은 해방의 첫단계다. ...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숨겨져 있던 잔혹함이나 부패를 세상에 드러낸다. 혹은 어떤 중요성이나 가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야기를 바꾸는 일, 이름을 바꾸는 일,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 때 핵심적인 작업이다. 해방을 추구하는 운동들에서도 새 용어를 만들거나 알려지지 않은 용어를 널리 알리는 작업은 늘 중요했다."

"말의 엄밀함, 정확함, 명료함은 중요하다. 또한 당신이 말하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 사람이 되었든 지구가 되었든 그 말의 주제나 역사적 기록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기를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오래된 문화들은 '말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고 여긴다."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란 물론 우리가 각자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행동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삶을 어떻게 묘사하고 자신외에 무엇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혐오를 비정상으로, 여성을 다시 인간으로>

"세상에 어떤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고, 그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이 전진할 때, 종종 한명의 가해자와 한 건의 사건에 초점이 집중되곤 한다. 그러면 여성혐오가 사회 구석구석 퍼져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사건이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예외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그러나 그런 사건들은 이상이 아니라 정상이다. 미국 사회는, 다른 문제들도 많이 겪지만, 아직도 만연한 여성혐오로 인해 왜곡되고 제약된 사회다. ...우리는 이 상황을 비정상화함으로써 우리를 재인간화해야 한다. (하비 와인스틴 사건을 필두로 사실 그런 일은 공공연하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무지는 일종의 용인이다. 우리 사회가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 사회인 척하는 것이든, 여성혐오 따위는 진작 극복한 옛일에 불과한 사회인 척하는 것이든 마찬가지다. 무지는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는지, 왜 그러는지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 미국은 11초에 1명씩 여성이 구타당하고, 여성 살인 사건의 1/3은 전/현재 파트너가 가해자이며, 와인스틴은 109명이 넘는 여자들을 성추행/폭행해왔다. 각각의 행동은 어느 한 남자의 혐오나 부당한 권리의식에서 생겨났겠지만, 그것들은 결코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그런 행동들이 누적되면, 여성이 사적, 공적, 직업적 영역에서 움직이고 말할 공간을 축소시키는 효과, 여성이 힘을 얻을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많은 남자들은 직접 공격을 자행하지는 않겠지만, 마침내 몇몇 사람들이 지적하기 시작했듯이 그런 남자들도 이 상황으로부터 혜택을 입는다. 이 상황이 그들의 경쟁자를 일부 제거해주고, 늘 평평하다고 말하는 운동장에 실은 마리아나 해구만큼 깊은 함정을 파놓았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과 그 후의 침묵 강요. 피해자를 불신하거나 모욕하거나 처벌하거나 쫓아내는 것은 피해자를 같은 방식으로 다시 한번 학대하는 짓이다. 남자가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는 말을 꺼낸 여자들은 너무 자주 미친 여자나 앙심에 찬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았다. ... 그러한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면 피해 여성들의 삶은 어땠을까? 우리는 이런 폭력으로 그동안 어떤 여성들을 잃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셀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의 창조적, 전문적 역량이 트라우마와 위협으로, 폄하와 배척으로 훼손되는 세상이다. 여성이 동등하게 자유로우며 사회에 기여하도록 동등하게 격려받는 세상, 만연한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과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가해자로 폭로된 남자들의 창작자 경력이 끝난 것을 안타까워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짓밟히고 배척당한 탓에 우리에게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 사람들이 과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성혐오와 인종차별로 인한 손실은 한번도 정상상태가 아닌 적이 없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상태를 비정상화하는 것, 이 상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다. 모두의 이야기가 들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 또한 이야기들의 전쟁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고독>

"우리는 실패와 역경을 통해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 세상이 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익숙해진다. 그 사실에 익숙해질 필요가 없는 사람은 취약하고, 유약하고, 반박을 감당하지 못하며, 늘 자기 마음대로 해야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불평등은 거짓말쟁이와 망상을 낳는다. 힘 없는 사람들은 마지못해 진심을 숨기게 되고 힘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멍청해진다. 무지는 특권 고유의 결핍이다.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타인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불모지 같은 세상에 혼자 남는 것이다."

 

<여성혐오의 중요한사건들>

트럼프 vs. 힐러리 미국대선 이야기. 같은 일을 해도 힐러리는 여성이라서 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야기하는 화제의 횟수, 정체성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편향된 시각으로 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백인 남자들이 그녀를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데 실패한 일에 대해 그들 자신을, 유권자들을, 체제를 비판하지 않았다.

 

<사라진 2,000만 명의 이야기꾼>

투표는 일종의 말하기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말하는 한 방법이다. 역할을 가진다는 것,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 그런데 지난 선거에서 약 2,000만 명의 유권자가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엄격해진 투표자 신원 확인법 등으로 박탈당한 투표권을 되찾아주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싸움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고립 이데올로기>

고립 이데올로기와 기후변화 문제. 기후 변화의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고립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대신 그 문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고 우리가 공동행동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순진한 냉소주의는 변화를 일으킬 역량이 있는지를 의심한다. 미국 내 송유권 설치 문제. 변화와 불확실성을 수용하려면, 더 느슨한 자의식이 필요하고, 더 다양하게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고정된 입장에 붙박이인 사람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성공을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차라리 그것을 실패로 전환해버리는 것은 수세적 조치다. 지상의 삶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승리,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종종 유의미한 승리로부터 등 돌리는 일이다. 경중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일이다.

순진한 냉소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무엇이든 발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앞으로 벌어질 일은 보통 축복과 저주의 혼합일테고 상당힌 긴 시간에 걸쳐서 펼처지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특권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은 분노를 유달리 쉽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분노를 넘어서는 것. 그런 논리로 정당화된 폭력은 개인적 표현의 한 형태다. 내 경험상, 장기적 계획으로 실제적 변화에 헌신하는 사람들일수록 분노의 드라마에 가장 덜 관여한다. 그들이 최우선으로 받드는 임무는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그들이 우선시하는 것은 자기 표현이 아니라 행동이다.

 

<성가대에게 설교하기>

종종 의견이 일치한느 청중에게 자꾸 의견을 늘어놓아 귀찮게 군다는 뜻으로 쓰인다. 특히 선거기간에 자주. 그러나 정말 아무 의미 없는 행위인가? 그러다 정체성을 잃고 같은 편마저 잃는다. 설교가 '개종'이라기보다는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려는 것이라면, 같은 편인 사람들과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이상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타협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가끔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결국 머물고 싶어할 장소로 먼저 가 있으면 된다. 교유 correspondence.우리는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기 때문에 교류한다. 최고의 대화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이 터무니없거나 부적당한 것이 아님을 확인해주었고, 내 편이 되어주고 내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해주었으며, 우리에게 가치와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대화로써 자신을 강화했고, 서로간의 유대를 강화했다. 대화는 우리가 상대에게 지지와 사랑을 전하는 주된 방법이다.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대화로 함께 어떤 생각을 탐구하는 일은 의미와 이해의 폭을 넓히고 출발점으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는 데서 오는 섬세한 기쁨이 가득한 모험이다. 대화의 가치. 이웃이나 공동체, 사회로 묶어내는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시시덕거림과 유쾌함. 함께 걸을 사람들, 즉 함께 대화할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기쁨뿐 아니라 힘을 얻는다.

 

<기후변화는 폭력이다>

산업적 규모의 체계적, 전지구적 폭력이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면, 그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우선순위와 가치에 대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잔학함에 대한 저항은 그 잔학함을 숨기는 언어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반석위에 흐른 피>

1846. 6. 28. 미국 샌프란시스코만에서 프란시스꼬와 라몬, 삼촌인 호세 데라레예스 베레예사가 총살당한 사건.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전쟁. 이는 오늘날 라틴계 주민 지위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과도 관계가 깊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으킨 죽음>

샌프란시스코에서 평생 거주해 온 알레한드로 니에또는 범죄자로 몰려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 죽음의 원인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있다. 비백인 인구가 살던 동네에 새로운 백인 주민이 유입되고, 백인 주민들이 그 동네에 살던 원주민들을 범죄 용의자로 간주하여 신고하는 것이다. "내가 장례식에서 강하게 느낀 것은 진정한 공동체의 생명력이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장소를 기억으로, 의식과 습관으로, 애정과 사랑으로 짜인 천처럼 경험하는 이들이었다. 장소를 그런 잣대로 바라보는 시각은 돈이나 소유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관계들하고만 상관이 있다. ... 새로운 테크경제는 '파괴적 혁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이 토박이들이 보는 것은 집, 공동체, 전통, 관계가 파괴되는 모습뿐이었다. ...집을 잃은 사람은 이런저런 어려운 처지에 쉽게 빠지고, 그런 상황들 중 일부는 치명적이다."

 

<들어갈 길도 나갈 길도 없는>

미국에는 죄수가 220만명 있고, 어느 시점에든 집 없는 사람이 50만명에서 150만명 가량 있다. 이들은 버려도 좋은 사람들로 여겨진다. 감옥과 거리는 이들이 버려지는 장소다. 이 두 장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유지하며 악순환한다. 1980년대 이전에는 지금과 같이 노숙인이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다.

 

<새장 속의 새>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헤로인 중독, 위탁가정 속에서 방치되어 자라나 소년원을 거쳐 감옥에 수감된 후 교도관 살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자비스 매스터스 이야기. 그는 교도소 내에서 폭력과 자살을 막았고,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했고, 동료 수감자들의 성장을 격려하고, 교도관들에게도 호감과 신뢰를 받는 듯했으며, 글쓰기로 바깥 세상과 연결되었다. 

 

<기념비 전쟁>

남북전쟁, 노예제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부의 기념비들, 흔적들. 그들의 위조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의 단순한 이야기를 다른 단순한 이야기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되는 세부들과 복잡한 사실들을 더하는 것이다. ... 우리는 지금 서 있는 동상들이 현재의 배제와 모욕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현재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각도 참여나 평등의 최종적 실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후세는 우리가 기여한 바를 수정하거나 아예 무를 것이고, 우리가 깨닫지도 못한 채 저지른 죄들에 대해서 우리를 욕할 것이다. 동상은 한자리에 서 있지만, 문화는 그것을 지나쳐 흘러간다.

 

<스탠딩록에서 온 빛>

이상을 지키고자 한 노력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단합.

 

<비탄 속의 희망>

슬픔과 분노, 불면과 분개가 그 자체로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미국에 공공의식을 갖춘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간접적 영향을 칭송하며>

1971년 엘즈버그가 일급 기밀이었던 펜타곤 문서를 누출한 일이 수십년 뒤 에드워드 스노든에게도 일어났다. 행동이 일으키는 파문은 종종 직접적인 목표를 넘어서는 지점까지 퍼져나간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고, 설령 결과가 즉각적이거나 명백해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희망에 따라 행동해야 할 이유가 되어준다....내게 희망이란 늘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뜻했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어쩌면 스스로 미래를 써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희망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고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정보에 근거하여 영리하게 판단하되 늘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희망은 앞을 내다보지만, 과거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역사를 아는 데서, 특히 우리가 거두었던 승리를 아는 데서, 나아가 그 승리의 복잡성과 불완전선을 아는 데서, 희망은 썩 좋은 것의 적이나 다름없는 완벽에 집착하지 않고, 승리의 문턱에서 굳이 패배를 낚아채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고 그 내용이 일부 우리에게 달려있는데도 꼭 미래의 일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 과거는 우리에게 패턴, 모형, 비슷한 사례, 원칙, 자원을 알려준다. 영웅적이고 탁월하고 끈질겼던 이야기들을 알려준다. 중요한 일을 할 때 느끼는 크나큰 즐거움을 알려준다. 이런 것들을 갖춘다면, 우리는 가능성을 붙잡고 희망을 현실로 바꿔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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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으로서, 그 형태를 벗어난 가족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차별한다.

가족 내 성차별적 위계구조와 자녀를 소유물로 대하는 부모라는 권력이 아동학대를 낳는다. 인권은 가장 가깝고 작은 곳에서부터 보장되어야 한다.

 

아이에 대한 '체벌'을 이야기할 때, '학대는 안 되지만, 체벌은 어느 정도 필요할 수 있다'는 견해는 아직도 어느 정도 지지를 얻고 있는 듯하다. 나도 체벌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육환경에서 자라나서, 체벌받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늘 끔찍히 싫었지만, 남의 가정에서 교육 목적으로 적절한(?) 체벌을 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체벌부터 전면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체벌과 학대의 경계는 생각보다 모호해서 실제로 체벌의 강도가 점점 더해지면서 학대가 된다는 것이다. 체벌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학대에 대해서도 민감성이 떨어지는 등 둘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교육목적이라는 말도, 성인에 대한 폭력과 아이에 대한 폭력을 달리 보아야 할 것인가, 라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이를 별개의 인격체로 보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체벌은 반사회성이나 공격성을 기르고 폭력을 내면화하고 공포를 기를 뿐 기대하는 바와 같은 교정효과는 없다고 한다. 체벌로 반성을 이끌어낸다기보다는 모욕감을 주고 체벌이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시킬 뿐이다. 어릴 때 맞아서 괜찮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맞았음에도 괜찮은 사람이 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을 짓'이라는, 폭력을 정당화할 때 종종 쓰이는 파렴치한 그 말이 왜 아이에게는 쉽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결국 나도, 체벌받는 건 끔찍하게 싫었으면서도 남의 가정에서 체벌이 이루어지는 것은 간섭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은 아이를 그 가정과 양육자에 종속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동 인권이 중요하게 된 역사는 서구에서도 그리 길지 않다고 한다. 1923년 세이브더칠드런의 아동권리선언에서부터 신체, 비신체적 처벌을 모두 금지하는 1989년 UN 아동권리협약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여러 차례 아동의 권리를 선언하고 확인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아동의 권리가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꼬마 니콜라에서도 아이들이 말썽을 부렸다는 이유로 뺨을 맞는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1979년에 이르러서야 스웨덴에서 최초로 (가정 내) 체벌을 금지하는 입법을 하였다고 한다. 생각보다 늦지만 우리보다는 낫다.

우리나라는 아동복지법에서 아동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민법에서는 여전히 친권자가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결국 체벌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하지만 글쓴이가 쓴 것처럼, 체벌은 쉽게 학대로 이어지고 실제 효과도 거의 없는 점, 아동도 개별 인격체라는 점에서 금지되어야 한다. '친권'을 앞세워 아이에 대한 개입을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나, 부모의 '친권'은 권리가 아니라 자녀의 보호를 위한 '의무'로 보아야 한다. 아동은 공공의 보호가 필요한 가족 내 약자이다. 친권이 아이의 인권을 침해할 때에는 국가가 개입해서 '아동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영아유기/입양의 상당수는 혼외로 태어나는 아이들(미혼부모의 아이들)에게 일어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한 사회적 차별, 생계문제, 직접 키울 때보다 입양 보낼 때 지원금이 더 높다는 것, 출산이나 양육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 등의 문제들이 양육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정 형태나 인종, 국적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혜택과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사후관리가 허술한 입양절차도 보완이 필요하고, 민간입양기관과 지자체에서 담당하는 분야가 중복되어 제도가 일관되게 운용되지 않는 것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본다. 이 책에서는 실상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이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자녀를 소유물로 보는 심리와, 가족이 복지와 양육부담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상황, 즉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급속한 근대화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가족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하는 제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제도들은 결국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저해한다. 그리고 가족주의의 확산은 다른 집단에 대한 신뢰 약화와 배타적 경향을 낳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스웨덴의 경우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가 기본 접근방식이라고 한다. 개인의 자율성과 평등은 강조하되 이를 위한 환경, 제도를 사회에서 만드는 것으로 오히려 사회적 신뢰가 높다고 한다. 이처럼 '공감'이라는 정서에 기대기보다는,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확대가족'의 시선(내 아이처럼, 내 가족처럼) 말고, 개인의 개별성, 인권 존중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돌봄, 약자보호에 대한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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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 읽는 남자 - 삐딱한 사회학자, 은밀하게 마트를 누비다
외른 회프너 지음, 염정용 옮김 / 파우제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글쓴이는 슈퍼마켓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기본 입장)와 사회적 지위를 가로세로축으로 하여 분석한 '시누스'(독일의 사회 시장 연구소로서 환경들을 발표해 목표 집단 분석을 위한 방법을 제시함) 환경이라는 개념을 통해10가지 집단(시민 중산층, 힙스터, 자유주의자, 보수적 기득권층, 진보적 지식인층, 순응적 실용주의자, 전통주의자, 성과주의자, 쾌락주의자, 불안정층)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슈퍼마켓에서 만난 사람들의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들과 그 사람들이 걸친 옷/안경/가방 브랜드, 머리스타일, 핸드폰 기종까지 분석해서(그것이 신상인지 지지난 시즌의 것인지까지) 그 사람을 재빨리 위 10가지 집단 중 하나로 분류한 다음 각 집단의 특성에 대해 썼다. 대체로 중상/상류층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고 하류층에 대해서는 가혹하게도 써놓았다. 내가 알거나 모르는 특정 브랜드들이 아주 디테일하게 수시로 등장해서, 왜 이 브랜드를 구입하거나 걸치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걸릴 때가 많았다. 읽을수록 저자가 아주 불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난 척에 오지랖도 그런 오지랖이 없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나름 반전이 있다. 글쓴이가 왜 자신이 그런 식으로 썼는가를 마지막 장에 써놓았다. 읽다가 불쾌(하고 지루)해서 책을 놓을뻔 했는데 그나마 마지막 장까지 읽기를 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찜찜함은 남아있다. 각 집단에 대한 평가 부분은 글쓴이의 진심이 담긴 것처럼 보이니까.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독일 사회에 대해 궁금하다면 재미있게 읽어볼 수도 있겠다. 독일 사람들은 이런 걸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구나...+ 마지막 장의 교훈 정도가 남았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런 책이 쓰여진다면 사뭇 다른 지표들이 등장하겠지. 사실 걸치고 있는 브랜드, 사는 동네/아파트, 나온 학교, 직업, 소득에 따라 곧바로 사람을 분류하고 줄세우기하는, 불쾌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더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제발 내가 사람들과 사회환경에 관해 적어놓은 내용을 100퍼센트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기 바람.

이 책은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신호를 어떻게 지각하고 평가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보는 우리 시각을 어떻게 만드는지 등의 내용을 다룬다.
(...)
우리는 사람, 제도, 상황 같은 것들에 재빨리 그리고 거리낌없이 낙인을 찍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것은 항상 선의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며 게다가 우리는 매우 과시적으로 일단 최악의 상황부터 가정하고 시작한다. 그래서 아랍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기본적으로 테러 의심을 받고, 저개발 주거지에서 홀로 자녀를 키우는 여성은 RTL-II 사회 보조금을 받는 희생자로 여겨진다. 무직인 남자는 사회에 기생하는 사람으로, 전쟁과 테러를 피해 빠져나온 사람은 경제 난민으로 간주된다.

누구나 늘 오직 자신의 모든 경험과 가치관이 반영된 유리창을 통해서만 우리를 바라본다. 사람들이 보는 것이 반드시 우리가 보는 것일 필요는 없다. 그러니 곧장 진실을 본다고 가정하지 말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한번 눈길을 보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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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01-02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끝까지 못읽고, 중간에 조금 기대와 달라서 하차한 경우인데 끝까지 읽었어야 했군요

vearnim 2019-01-02 09:19   좋아요 0 | URL
저도 중간에 기대와 달라서 하차하고픈 유혹을 많이 받다가 결국 끝까지 읽긴 했지만 시간이 아깝긴 했어요^^; 하차해도 괜찮은 책인 것 같아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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