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문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9.6





 이 책은 '비행기 납치, 밀실 살인, 판타지의 수수께기 3종 세트!'라는 선전 문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에 이끌려 읽은 사람들은 '이도저도 아닌 난잡함과 산으로 가는 막장'을 선사했다고 입을 모으던데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근거가 궁금해서 읽게 됐다. 무슨 청개구리 심보냐고 내 자신도 의아했지만 때론 이런 것도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남이 가지 말라는 길도 한 번쯤 걸어볼 만한 것 같다.

 '스승님'을 구하기 위해 비행기를 납치하는 3명의 납치범. 나름 순조롭게 납치극이 진행되는 중에 벌어진 이해불가한 밀실살인. 그리고 납치범들의 진의. 기대 이상으로 즐길 요소가 많았고 내 개인적으로는 각각의 요소 자체만으로도 재미를 느꼈고 이들의 연결고리 또한 자연스러웠다고 느꼈다. 기대를 안 하고 읽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 중에 제일 재밌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대형 납치극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것이라 크게 기대되진 않았다. 이런 비행기 납치의 목적은 대체로 답도 없는 인질 교환(납치범의 경우엔 조직의 두목이나 교단의 교주 정도?)이나 거액의 돈, 아니면 묻지마 류의 쾌락 범죄가 대부분이라 이 책의 납치범들도 이 중 한 부류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처럼 그 진의가 쉬이 파악되지 않는 납치극은 처음이었다.

 결연하면서도 때론 경건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이 3명의 납치범의 저의에 대한 궁금증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 간다. 물론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나는 괜찮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질색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궁금증을 제시하고 끌고 가는 능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추리소설의 원초적인 재미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런 전개를 펼쳤다고 생각한다.


 밀실살인도 마찬가지다. 납치극엔 어울리지도 않고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발생해서 도대체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집어 넣었는지 궁금해 계속 읽어나가게끔 만든다. 독자인 우리들만큼이나 등장인물들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인데 이때 사건을 해결할 탐정역으로 선출되는 인물인 '자마미 군'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오키나와의 자마미 섬이 프린팅된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붙여진 별명의 이 남자는 의도치 않게 추리력을 선보였다가 반강제적으로 밀실 살인을 풀어야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닌 자마미 군은 그를 빌미로 납치 사건을 들쑤시려 드는데 이런 대담무쌍한 인물은 난생 처음 봤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우스이 유카라는 탐정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자마미 군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아마 더 이상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을 텐데 비교적 단순했던 밀실살인의 트릭보다도 이 캐릭터와 티격태격하는 납치범 마카베와의 케미가 난 더 기억에 남았다. 탐정을 비롯해 캐릭터의 매력이 어째서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이 밀실살인이 그렇게 필요한 장치였는지는 의문스럽긴 하다. 맥락상 꼭 필요했다기 보다는 오로지 재미를 위해 첨가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하지만 차마 사족이라고까지 매도하지 못하겠는 이유는 일단 추리 과정이 정말 재밌었고 밝혀지는 동기가 작품의 판타지한 세계관을 제대로 드러내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동기는 정말 산으로 가버렸다는 의견이 다분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개성이라 생각한다. 믿고 안 믿고, 설득 당하고 말고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그를 믿은 작자들이 그들 나름의 논리로 이런 일을 벌였다, 이런 것이라면 추리소설로 성립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나 싶은데 이 작품이 딱 그런 경우였다. 솔직히 작가가 창조한 판타지적 세계관이나 그에서 비롯된 동기들은 하나도 이해 안 가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나름의 논리성을 구축하고 있어서 지나친 반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여러가지 걸리는 점은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장점도 크게 돋보여 도무지 나쁘게 읽히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이 한 가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최대 문제는 판타지한 요소가 아닌 '스승님'이란 존재를 너무 우상화한 것이라 생각한다. 판타지를 사용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고 대신 '스승님'이란 존재를 믿고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 이 작품의 관건이었는데 이때 '스승님을 향한 믿음'에 대해 설명이 충분하지 못한 건 많이 아쉬웠다. '스승님을 만나 보면 안다'라는 문장이 자주 나오는데 정작 스승님을 만나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런 엄청난 사태를 저지른 납치범들을 크게 꾸짖지 않는 스승님은 흔히 말하는 캐릭터 붕괴가 아닌가 싶어 한숨이 나왔다.

 작가 나름대로는 설득력있게 스승님의 매력을 그리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크게 와닿지 않았다. 밀실살인의 동기나 납치의 동기, 마지막에 터지는 사건의 동기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근거는 갖추고 있어서 '참 특이한 동기도 다 있구나' 하며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동기의 근원인 스승님의 존재가 너무 초월적이어서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다. 탐정 캐릭터를 그렇게 잘 만든 것에 반해 스승님은 기대에 못 미쳐서 아쉬움만 남는다.


 그래도 이것만 제외하면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던 추리소설이었다. 이색적인데 그 안에서 추리 과정은 꽤나 본격적인 것 등 하나같이 흥미진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작가에 대한 흥미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다시금 관심이 간다.

요즘 세상에 야심 없이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처럼 골치 아픈 존재는 없을 거야. - 249p




타인의 악의를 견뎌낸다는 건 타인에게 악의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 2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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