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피트 - Wheel of Fortune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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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지난 번에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봤다. 타임슬립을 연애소설식으로 풀어낸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번에 내가 읽은 <리피트>는 같은 소재인 타임슬립을 추리소설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강렬한 반전을 선사한 이누이 구루미의 또 하나의 국내 출간작이기도 하다. 국내에 딱 두 작품만 출간했는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이대로 묻히기엔 너무 아쉬운데.

 사실 처음 이 작품의 소재를 들었을 땐 그렇게 흥미가 일진 않았다. 타임슬립이란 소재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보긴 하지만 그런 만큼 다뤄지기도 많이도 다뤄져서 진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래를 예고하는 시간여행자가 주인공 앞에 나타나면서 대놓고 시간여행 설정을 드러내는데 그 이후가 평범하리만치 신선했다. 이렇게 현실적인 시간여행이 있을 수 있나? 오히려 지금까지 접한 시간여행자의 이야기들이 와닿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주인공은 과거에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미치도록 후회하는 일도 없고 과거를 바꿔서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주인공에게 시간여행을 제안한 '리피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특별한 사명감이 아닌 단지 심심해서 주인공과 여러 사람들을 시간여행에 초대했으니 정말 말 다했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 가면 10개월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현재까지 무려 9번을 돌아간 리피터는 자신과 함께 인생을 '리피트'하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그의 미래 예언은 전부 들어맞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어 신중하게 되지만 결국 제안대로 리피트를 하는 주인공네들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10개월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락없이 10개월 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그들은 다시 돌아온 인생의 기회를 살리고자 미리 알아둔 경마 기록으로 돈을 벌고 사소한 실수를 만회하거나 아니면 미리 알게 된 세상사에 어떤 식으로 개입할 방법은 없는지 고심하면서 10개월을 다시 살게 된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시간의 흘러가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성질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후회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남기 마련이지만 그 횟수를 줄이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전제가 뒤바뀌면 우리네 삶의 방식에 큰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의 경우에는 리피트라는 확실한 기회가 있으니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살게 된다. 더욱이 앞의 결과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만큼 공략법도 터득했으니 결코 첫 번째와 같이 살 수는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는 반드시 당사자 이외의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만다.

 개인적으로 시간여행이란 순전히 인간의 희망에 불과하며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과거로 간다 해도 내가 같은 시간대에 두 명이 있는지, 아니면 정신만 과거의 몸으로 돌아가는지 애매한 상황에서 과거를 바꿔 미래도 바꾼다는 이야기, 하물며 과거와 미래의 평행 세계에 관한 이론 역시 재미는 있지만 허무맹랑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 사실 시간여행 소재를 그렇게 반기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좀 남달랐다.


 일단 한없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점을 들 수 있다. 일체의 감상적 요소를 배제하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다시 살지 고민하거나, 혹은 남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김에 어떤 식으로 세상에 기여할지 고민하는 게 실로 공감됐던 것이다. 물론 과거의 첫사랑을 만나러 가거나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어떤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건 너무 극적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처럼 어정쩡하게 10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면 극적인 연출이 마냥 쉽진 않을 것이다.

 이 10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는 제약이 리피터들로 하여금 제법 차분하고 게임하는 기분을 이끌어내는가 보다. 흡사 '인생 게임'을 몇 번이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10개월 간의 삶을 철저히 지배할 수 있는 재미를 안겨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보는 내내 주인공네들의 행동거지가 어딘지 부러운 한편 너무 계산적이라서 질리기도 했다. 그런 내 심정에 부응한 걸까. 몇 번이고 반복하는 인생에 자꾸 변수를 두는 리피터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임에 참여했음을 여지없이 시사하고 있다.


 SF 문학이나 과학계에서 익히 다뤄온 시간 여행의 위험성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작품이었다. 이걸 또 추리소설적인 미스터리함과 반전으로 풀어내 의외성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과연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작가답구나 싶었다. 그 작품에서의 놀라움이나 복선이 있던 것은 아닌데 리피터들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반전인지라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막장에 가까운 전개가 펼쳐지면서 주제의식이 심화되니 그것 참 볼만했다.

 지금까지는 운명을 다소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이뤄야 하는 목표가 있어 시간여행이 미화된 반면, 이 작품에선 한낱 사사로운 고양감을 위해 운명에 손대는 이들을 단죄하고 있어 새삼 설정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마주보게 된다. 비록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 혹시 미래에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난 믿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미래의 시간여행자가 몇 번이고 과거와 현재에 들락거릴 텐데... 어쩌면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절로 달라지니 참 의미있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만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은 이상 타인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더욱 만만히 볼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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