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7.5





 작가 이름을 보고 읽은 것도 있지만 소재 때문에라도 꼭 읽고 싶었던 작품이다. AV(Adult Video), 한마디로 야동은 일본하면 떠오르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성姓문화가 없는 나라야 없지만 일본만큼 규모가 큰 나라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내 의견을 간단히 밝히자면 난 이 사업 일체에 찬성한다. 합의 하에 이뤄지기만 하면, 그리고 소비자 연령층이 온전히 성인이기만 한다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지 않을까. 여기에 남자로서 첨언을 하자면 야동은 범죄를 부추기기는 커녕 이따금 찾아오는 '성의 명령'을 - 나는 그렇게 부른다. - 잘 달래주며 억제하는 역할을 상당 부분 해내기에 긍정하는 편이다.

 물론 필요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야동 때문에 잘못된 성적 관념과 취향이 생길 수도 있고 내용을 따라한답시고 재앙이 벌어지는 것 또한 분명 없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출연자와 연출자의 자발적인 합의에서 만든 내용물이라면 불법으로 단속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지 않나 싶다.


 이 작품은 기리노 나쓰오가 탄생시킨 무라노 미로가 활약하는 두 번째 작품으로 이번엔 행방이 묘연한 AV 배우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맡게 된다. 강간을 컨셉으로 잡은 한 AV가 실은 합의가 아닌 강제로 촬영됐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인권 단체 소속의 의뢰인이 해당 작품의 배우를 찾아 이야길 듣고 싶다고 한다. 내키진 않지만 경제 사정이 시원치 않던 미로는 의뢰를 받아들인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에서의 강렬함을 확인하기엔 무라노 미로는 너무 허술하고 연약했던 것이다. 남성이 아닌 여성 탐정이 주체가 된 이야기는 흐름 자체엔 신선한 부분이 있었지만 어딘가 전편에서보다 화력이 줄어든 느낌이다. 주인공인 미로는 군데군데 내가 봐도 경솔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일부분에서는 얘 왜 이러지 싶을 만큼 이해가 안 되는 행동거지를 펼치고 이를 작가가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것도 있어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더욱이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도 지루한데 아무래도 두루뭉술한 서술과 이해가 가지 않는 이음새가 포진해 있어서 몰입이 안 된 것도 있다.


 게다가 AV 사업에 대한 통찰이 깊게 이뤄지지 못한 것도 불만스러웠다. 그래도 나름 우리 시대의 그늘이라고 볼 수 있고 아무리 합의로 이뤄졌다고 해도 용인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하는 사업이기도 한데 말이다. 위에서 합의 하에 촬영이 이뤄지면 찬성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합의가 아니라면 단호히 단죄해야 한다는 -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강간이니 - 말이기도 한데 이런 의견을 도출시킨 출발점은 매우 좋았다. 지루한 중반부도 그래서 참을 수 있는 정도라며 넘길만 했다.

 하지만 결말로 나아갈수록 사회적 이슈가 아닌 개인의 문제가 치부해야 될 맥빠지는 것들이 나오자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어 읽는 내가 다 의욕을 상실했다. 포부는 좋았지만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한 안타까운 경우가 아닌가. 심지어 전개도 뜬금없어 초반에 드러난 주제의식이 묻히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작가의 작품 중에 구미가 당기는 것이 많은데, 가령 <그로테스크>라든가 <부드러운 볼> 같은 것들... 재고해야 할 것 같다. 이거 실망스러운걸.

나도 요즘에야 깨달았는데, 성인비디오란 한마디로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리나란 애는 불쌍하지만 자업자득인 셈이지.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남자들은 그런 여배우들을 보고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이런 데 나오는 멍청한 계집애라고 비웃으며 보는 거지.

멍청한 녀석들이라 생각하면서 보지. 나도 그렇고. 젊은 아가씨랑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은 죽어도 안 보겠지. 웬만큼 외롭고 불행하니까 보는 거야. 아, 나보다 더 멍청한 녀석도 있구나, 하면서. 안 그러면 칙칙하게 그런 걸 어떻게 봐! - 27p




남자의 구애를 받고 도취하는 게 뭐 어때서. 그걸 비웃는 사람이 훨씬 멍청해. 남자도 마찬가지잖아. - 2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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