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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8.4
<화이트 래빗>은 이사카 코타로가 간만에 초심으로 돌아간 느낌으로 쓴 범죄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러시 라이프> 같은 초창기 작품에 자주 출연한 도둑 구로사와가 오랜만에 주역으로 등장하고, 때마침 토끼의 해가 얼마 남지 않았던 연말에 토끼와 관련된 소설을 읽어서 묘하게 반가웠던 소설이다. 게다가 소설의 문체가 내가 좋아하는 <레 미제라블>을 패러디한 문체인 터라 그 점도 인상적이었다. 옛스러운 걸 넘어 가끔은 촌스럽게도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점을 노리고 쓴 것 같아 나중엔 순수하게 즐기면서 읽게 됐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즐거움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철학적인 요소가 다분했던 다른 작품에 비해 트릭과 반전에 공을 들인 작품이라 작가 특유의 퍼즐식 구성을 기대했다면 만족을, 반대로 내적 깊이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싱거울 수 있다. <레 미제라블>을 비롯해, 오리온자리, 토끼 등 여러 소재가 다뤄지지만 의미 있게 활용되기보다 그때그때마다 이야길 원활하게 풀어나갈 소도구로 기능할 뿐이다. 이 소재들에 얽힌 잡설 또한 가볍게 읽고 넘어가면 됐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에선 짧게 언급되는 잡설도 놓쳐선 안 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터라 이런 가벼움이 2% 부족한 아쉬움을 자아냈다.
재밌고 유쾌했던 작품이지만 재독하거나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평하기엔 약간 주저된다. 주역인 구로사와라는 캐릭터가 하도 오랜만이라 외려 낯설었고 작가의 다른 캐릭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이라 구로사와가 출연한 작품이라며 소장할 생각까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상술했듯 작가가 철학적 깊이를 크게 노리지 않고 집필된 작품이라 다시 곱씹을 만한 얘깃거리가 사실상 없었다. 서사도 트릭의 놀라움에 비해 꽤 단순해서 재밌었지만 두 번이나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다.
작품의 핵심 트릭은 분명 후반부에 그 내막이 밝혀졌을 때 놀랍긴 했지만 놀라움을 제외하고 봤을 때 대단한 의미가 있었나 싶다. 뭐하러 이리 복잡하게 썼을까 하고 의문이 남자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훌륭한 트릭이다. 하지만 오직 놀라움과 즐거움에 주목했지 작품 내적으로 긴밀하게 얽혀있는, 이른바 그 트릭을 써야만 주제의식이 살아난다는 감탄이 나오지 않으니 엔터테인먼트 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감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란 정체성이 작품의 단점이라 얘기할 순 없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이라 나도 모르게 까다롭기 그지없는 잣대를 들이대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깔 만한 작품이 아닌데... 연말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작중 활극이나 드라마의 묘미가 스며들지 못했던 것 같다. 작가가 바라듯 그저 즐기며 읽으면 그만인 것을.
그래서 나중에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내가 작가의 팬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읽으면 뭔가 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만약 다시 읽는다면 <레 미제라블>을 읽은 다음에 읽어보는 게 좋겠다. 그럼 등장인물들의 수다나 인용이 더 반가우면서 감동적으로 읽힐는지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