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게네스 변주곡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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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찬호께이의 단편은 <풍선인간> 이후로 오랜만에 접했다. 이 작가는 대체로 <13.67>처럼 500페이지는 거뜬히 넘기는 분량의 책을 집필하곤 하는데 과연 단편에서도 솜씨를 뽐낼 수 있을까? 장편에 능한 작가가 단편에서 죽을 쑤는 경우는 흔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안고 책장을 펼쳤다.

 첫 수록작부터 그저 그래서 이 작가가 역시 단편은 약하구나 싶었다. 가끔은 중편도 섞였는데, 첫 수록작인 '파랑을 엿보는 파랑'은 반전이 있긴 해도 분위기가 딱 전형적인 싸이코 스릴러였던 터라 읽으면서 큰 감흥이 일지 않았고 이색적인 배경이나 설정, 장르를 내세운 단편은 대개 기대보다 두세 단계 아래의 만족도를 안겨줬다. 이토록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작가란 감탄이 나오기보단 그냥 이번 책은 작가의 습작을 짜깁기한 책이라고 멋대로 단정하고 읽어내려갔다. 전율을 안겨줬던 <풍선인간>과 달리 연작 소설집이 아니다 보니 모처럼 재밌는 단편을 읽어 흥미가 생겨도 그 다음에 사라지고... 흥미가 생기다 말기를 반복해 전반적으로 전율 없이 담담하게 읽혔다.


 그래도 마음에 든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커피와 담배'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미스터리하게 풀어나가는 아이디어를 대단히 좋아하며 의미심장한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찬호께이의 작품엔 이렇게 정신적인 이유든 뭐든 억울한 처지에 놓인 화자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이 많은 것 같은데 단편에서도 주인공의 절박함이 임팩트 있게 잘 녹아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만약 내가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상상만 해도 식은 땀이 난다.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과 마지막 수록작인 '숨어 있는 X'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내용의 작품들이라 함께 얘기하고 싶다. 일단 전자는 읽으면서 기분만 나빴고 결말은 더욱 기분 나빴던 반면 후자는 집중력이 가장 저고조였음에도 순식간에 몰입하며 읽었던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이었다. 전자는 추리소설가로 등단하기 위해 이유 없는 살인을 범하려는 추리소설가 지망생의 이야기고 후자는 피 한 방울 튀기지 않으면서 추리소설의 진면목을 그려나가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추리소설 읽기 교양 수업에서 벌어지는 추리 게임이 이토록 지루하지 않게 읽히다니... 대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작가의 <염소가 웃는 순간>이 연상됐는데 그 작품보다도 적어도 천 배는 더 괜찮은 소설이었다. 차라리 이 작품으로 장편을 내주지. 만약 후속작이 나온다면 무조건 읽을 것이다.

 두 작품은 추리소설이나 추리 게임을 주제로 삼았음에도 분위기와 지향점이 완전히 반대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은 우타노 쇼고의 <밀실살인게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인륜을 저버린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미쳤다는 것 외엔 별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재의 참신함에도 안쓰러움이 느껴진 반면 '숨어 있는 X'는 추리소설이라면 모름지기 살인사건이 다뤄지는 법이라는 선입견을 반박함으로써 <밀실살인게임>이나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의 살인광을 죄다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추리소설의 지적 쾌감이니 뭐니 떠들지만 실은 그저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데 추리소설을 핑계로 삼는 싸이코에 불과하며, 완전범죄를 저질러야만 추리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음을 주장하는 듯했다.

 이 마지막 수록작 한 편을 읽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구입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결말까지 산뜻해 아주 좋았고 실제로 작중에 묘사된 추리소설 교양 강좌를 나도 수강 신청하고 싶었다. 나도 이렇게 재밌게 학교를 다녔으면 참 좋았을 텐데. 과거에 딱히 미련이 없는 나로 하여금 학창 시절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추리소설뿐 아니라 일종의 청춘소설로써의 완성도도 뛰어났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작품은 몰라도 마지막 수록작은 꼭 읽었으면 좋겠다. 불리한 전략일 수 있지만, 가장 뛰어난 작품이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게 단편 소설집의 만족도를 크게 향상시키는 것 같다. 덕분에 작가의 묵직한 장편 못지않게 이 책도 좋게 기억에 남게 될 것 같다. 작가의 단편집이 몇 권 더 출간됐던데 그 책들도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이 책과 같은 완성도이길 바란다. 


만약 누군가 돈 때문에, 혹은 고통을 회피하려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팔아버렸다면......, 자네는 그 사람이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그 사람을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네. 하지만 1만 글자 분량의 단편소설로 한 사람의 일생을 묘사해버리는 일처럼 참 재미없다고 생각하겠지. - 122p


증명할 수 없는 추리라는 건 연예면의 가십 기사 같은 거야. 들으면 재미있지만 나하고는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지. - 410p


한 사람의 작가에게는 유명해지고 큰 돈을 버는 것보다 나무통 안에 숨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4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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