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쏘다 반니산문선 4
조지 오웰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3


 인상적인 제목의 표제작과 첫 번째로 수록된 '너무나 즐겁던 시절'이 기억에 남는 조지 오웰의 산문집을 읽었다. 조지 오웰의 대표작은 흔히 <1984>와 <동물농장>이 꼽히는데 두 작품 다 안 읽었다. 아니 못 읽었다. 읽다가 흥미를 못 느껴서 이탈했다. 이 산문집을 다 읽은 지금은 두 작품을 다음엔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읽어야겠노라고 벼르고 있다. 일단 그 전에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하는 <버마 시절>부터 먼저 읽어야지. 표제작 '코끼리를 쏘다'처럼 이국적이고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사뭇 기대된다.

 조지 오웰은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에세이스트로서의 명성도 상당하다는데 대표적인 에세이로 스페인 내전 참전을 바탕으로 쓴 <카탈루냐 찬가>를 들 수 있겠다. 아무튼 이 책엔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짧고 인상적인 제목의 에세이가 총 일곱 편 수록됐다. 위에서도 말했듯 첫 번째로 수록된 '너무나 즐겁던 시절'과 두 번째로 수록됐으면서 표제작이기도 한 '코끼리를 쏘다'가 제일 인상적이었고, 그밖에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와 '영국적 살인의 쇠퇴' 등의 글은 나름대로 흥미로웠지만 제목이 주는 기대감을 충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짧은 분량임에도 오웰의 시선, 절대주의를 혐오하고 목적성을 띈 정치적 글쓰기에 대한 소신을 확실히 엿볼 수 있어 여러모로 충족감을 안겨주는 글들이었다. '나는 왜 쓰는가'는 내가 나중에 <1984>와 <동물농장>까지 읽고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저자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입장과 당시 가졌던 마음가짐이 부분부분 언급돼 해당 작품을 읽고서 그 글을 접하면 더 감명 깊게 읽힐 듯하다. 


 '너무나 즐겁던 시절'은 오웰이 자신의 학창 시절을 통해 아동의 인권에 대한 고찰과 동정심을 드러낸 수준급 에세이다. 길이도 제일 길고 실제로 다루는 에피소드도 다양하고 많아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속물적이고 폭력적인 학교, 지금 기준으론 도저히 빈말로라도 학교라 부르기 힘든 인권 유린의 현장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반면교사 삼아야 하며, 조지 오웰이 그렇듯 보상 심리를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린 시절을 불합리하다 여겼던 만큼 지금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태도로 배풀어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뜻깊은 글이었다. 작가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가감없이 묘사된 폭력 교사나 부자 가문의 자제들의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는데 나도 그렇게 묘사될 만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아주 철저히 반면교사 삼으려고 한다.

 '코끼리를 쏘다'는 오웰이 제국주의 경찰로 버마(지금의 미얀마)에 근무할 당시에 겪었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인간적인 에피소드를 다룬 짧은 글이다. 오직 피식민지인들인 버마인들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수 없단 이유로 코끼리를 쏴죽이는 내용인데, 발정난 코끼리라는 심증만 있는 상태에서 소보다 안전해 보이는 눈앞의 코끼리에게 무자비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은 너무 사실적이고 그에 대해 뉘우치거나 훗날 여러 정황 증거로 인해 면죄부를 받는 순간에서도 부끄러워하는 묘사가 일품이었다.


 여담이지만 오웰이 행동하는 지식인이긴 하지만 '코끼리를 쏘다'의 경우 작가가 스무살 초반이었던 지라 그 당시의 감정이 깊이가 얕고 버마인들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 않으며 서스럼없이 '노란 얼굴'이란 표현을 쓰는 등 작가의 명성에 비해 좀 깨는 구간이 몇몇 있다. 그래도 결국 제국주의 시대 영국에서 태어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차별적인 언행을 보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얼마든지 멋있게 포장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았던 건 그냥 작가가 에세이 특유의 자기 고백적 성격에 충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뭐, 그래봤자 '백인의 의무' 같은 개소릴 운운했던 키플링의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이 점 유의하며 읽으면 보다 흥미로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오히려 이런 솔직한 태도가 작가가 그토록 추앙받는 비결이려나? 작가의 소설들도 읽어봐야겠다. 올해가 바로 조지 오웰의 진정한 명성을 확인해볼 시기인 것인가! 새해부터 좋은 글을 읽어 올해 어떤 좋은 책들을 접할지 몹시 설렌다. 


‘내가 저지른 무엇인가‘만이 죄가 아니었다. ‘내게 일어난 무엇인가‘도 죄가 될 수 있었다. - 15p


아이가 정말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란 몹시 어렵다. 겉으로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아이도 실제로는 드러낼 수 없거나 드러내기 싫은 공포에 시달리고 있을 수 있다. 아이는 일종의 이질적인 수중 세계에 살고 있고, 우리는 기억이나 점술을 통해서만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단서는 우리도 한때는 어린아이였다는 사실뿐이다. - 93p


아이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또한 무엇이든 쉽게 믿기 때문에 남들에게 쉽게 휘둘린다. 남들의 농간으로 열등감에 쉽게 빠지고, 이해할 수 없고 가혹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에 쉽게 물든다. - 97~9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