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 웨스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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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서가파먹기 프로젝트 #008>

 

이번에는 살만 루슈디다. 재작년에는 이언 매큐언을 그리고 작년에는 로맹 가리와 제발트를 죽어라고 읽었다. 아마 올해에는 나의 애정작가가 살만 루슈디가 될 것 같은 예감이다. <광대 샬리마르>에 이어 1994년에 발표한 단편집 <이스트, 웨스트>를 읽었다.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좋은 소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었다. 대가라고 해서 모두 균질한 작품을 양산해낼 수는 없을 테니까라고 생각한다.

 

<뉴요커> 같은 곳에 실리는 영미권 단편을 읽으려고 해본 적이 있다. 상당히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제는 내가 그들 문화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령 예를 들어 ‘김수한무 두루미와 거북이’ 같은 고전 유머를 푸른눈의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작가의 유년 시절을 다룬 <코터>에 등장하는 플린스톤 가족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존 굿맨 주연의 영화로 보긴 했지만, 원래 텔레비전 시리즈였는데 그건 미처 모르고 있다. <아이 러브 루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좀 이상한 방식으로 시작했는데, 어쨌든 맨 마지막에 배치된 <코터>는 potter를 잘못 발음한 서튼리-메리 아이아 혹은 아야에게서 유래한 별칭이다.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인 가족의 신산한 삶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 그들의 수위 메시어, 작가가 ‘믹스트-업’이라고 이도 마찬가지 신세다. 메리와 일종의 썸을 타게 되는데, 알고 보니 메시어 씨가 전직 체스 그랜드마스터였다는 사실이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아파트 차단기를 빨리 올려 주지 않아 차에서 내려 경비 아저씨를 한바탕 후들겨 패고 났는데 알고 보니 그가 예전에 원자폭탄을 개발하던 핵물리학자였다 정도가 될까.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하라자들의 비행 때문에 칼잡이들에게 대신 두들겨 맞은 메시어 씨의 기사도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고국을 떠난 서튼리-메리에게 심장병이 생긴 건 당연지사인가. 고향으로 돌아가 아무런 문제없이 건강하게 잘먹고 잘 살았다는 썰이 왜 이렇게 와 닿는지 모르겠다.

 

그전에 등장한 <체코브와 줄루>는 커트 선장과 뾰족 귀 스폭이 등장하는 <스타 트렉>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소설이다. 아니 <스타워즈>도 아니고 <스타 트렉>이라니! 오래전 AFKN에서 주말 마다 방영되던 바로 그 텔레비전 드라마 말인가? 조국 인도를 떠나 영국에서 외교관 활동을 하는 주인공들의 삶이 어쩌면 우주를 떠도는 외계인들의 그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시크교도에게 암살당한 인디라 간디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구나. 그리고 보니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에도 암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었나?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을 현혹시킨 이탈리아 출신 사기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무어인들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정복하고 에스파냐를 통일하는데 성공한 군주 이사벨라에게 감히 “관계”를 요구한 배짱 좋은 뱃놈 콜럼버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발하기 위해 여왕에게 후원을 요청한다. 이사벨라 여왕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알안달루스의 회복이 아니었던가. 마지막 술탄 보압딜에게 무슬림의 평화로운 거주를 약속하고 그라나다의 성문을 열게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슬림들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영토이자 고향이었던 알안달루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사벨라 여왕의 기사들과 전투를 치러야했을까? 어쨌든 그렇게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유대인들마저 쫓아내는데 성공한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인 환영과 계시가 결국 무모한 사기꾼 콜럼버스를 후원하게 만든 모양이다. 영 가망이 없어 보이던 투자가 에스파냐 제국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 때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단편을 연상하게 만드는 <좋은 충고는 루비보다 드물다>는 파키스탄을 떠나 영국행 비자를 받으려는 멋쟁이 아가씨 레하나의 이야기다. 아디치에 소설의 주인공이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비자를 받기 원했다면, 루슈디의 소설 주인공은 영국행 비자가 필요했다. 이런 일에는 브로커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자주적인 모습의 아가씨는 굳이 영국에 가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나가 남편의 시중이나 들 팔자라면 나라도 거부하고 싶지 않았을까.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나에게 가장 좋다고 판단되는 걸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9편의 단편 중에서 최고는 ‘이스트’의 <예언자의 머리카락>이었다. 우연히 획득하게 된 예언자 무함마드의 머리카락 유물 때문에 고리대금업자 하심이 갑자기 열렬한 무슬림 신도로 변해 가정의 독재자로 거듭나게 되는 장면을 살만 루슈디는 유쾌하지만 비극적인 터치로 그려냈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광신”이야말로 가장 기피해야 하는 점을 강조한다. 아들은 도둑들에게 예언자의 머리카락을 훔쳐 달라는 부탁을 하러 나섰다가 두들겨 맞아 빈사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번에는 딸 후마가 나서 예의 의뢰를 이어 받는다. 루슈디는 하심의 본업인 고리대금업이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무슬림 율법과 어긋난다는 점을 예리하게 꼬집는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고나 할까.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루슈디는 한바탕 소동극을 창조해냈다. 하심이 개과천선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싶었지만, 독자의 바람과 다른 방식으로 소설은 전개됐다. 결국에는 모두가 불행하게 되었다는 결말로 끝난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행로에 대한 소설적 편린이라고 해야 할까.

 

<광대 샬리마르>는 상당히 버거운 도전이었는데 단편소설집 <이스트, 웨스트>는 또 상대적으로 너무 쉬운 느낌이 들었다. 자 이제 루슈디의 대표작 <한 밤의 아이들>을 읽을 차례가 된 모양이다. 바로 옆에 있으니 집어서 펼치지만 하면 된다.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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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3-19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홀 올해는 살만 루슈디가 선택된거군요! ㅎㅎ
<한밤의 아이들> 까이것 2권짜리 금방 읽을 겁니다. ㅋㅋㅋ 화이팅! ^^

레삭매냐 2019-03-19 14:02   좋아요 0 | URL
사전에 두 권을 읽어서 워밍업이 잘된
모양입니다. 진도가 잘 나가네요 일단은~

살만 루슈디의 책들을 가지고 있는 게
제법 돼서 당분간 읽을 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더라는.

moonnight 2019-03-19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께 간택된 영광의 작가네요 ^^ 저도 하고 싶은데 서가 파먹기ㅠㅠ 어째 내도록 사기만 하고 읽지는 않아서. 시무룩 ㅜㅜ

레삭매냐 2019-03-19 14:26   좋아요 1 | URL
제가 최근에 인스타로 해외 책쟁이들의
일상을 엿보니, 어디서나 비슷한 것 같
습니다.

일단 사들이고,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사재기를 끊지 못하는. 물론 독서 속도
는 사재기 속도를 못따라 잡구요.

화이팅입니다!!!

페크pek0501 2019-03-19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살만 루슈디의 책은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엔 왜 그리 좋은 책이 많은 겁니까?
이제 겨우 올해에 열중할 작가로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장편으로만 만났던 톨스토이의 단편집을 모조리 찾아 읽기, 를 계획해 놨습니다. 단편 소설의 매력에 빠져 지내는 중입니다. 언젠가는 단편집 리뷰를 올려야지, 하고 있어요. 시간은 적고 책은 많고... 그렇습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

레삭매냐 2019-03-19 19:05   좋아요 2 | URL
서양 책쟁이들의 인스타에도 어김
없이 등장하는

so many books, so little time...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

저도 오르한 파묵을 읽어 보겠노라고
결심했으나 불과 한 달만에 어그러져
버렸습니다 뉴뉴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9-03-20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선 스타워즈보다 오히려 스타트렉의 열성팬이 더 많을거란 생각이 듭니다.스타워즈는 1970년대 후반에 영화로 나왔지만 스타트렉은 이미 60년대부터 TV방송을 했기에 열성팬이 더 많을 거에요^^

레삭매냐 2019-03-20 17:33   좋아요 0 | URL
공감하는 바입니다 -

예전에 즐겨 보던 미드 <빅뱅>에 보면
정말 열혈팬들이 <스타워즈> 팬에 비해
더 많은 것 같다는.

지인 결혼식장에 가서 사진 촬영하는데
하객 중의 한 분이 스톰트루퍼 헬멧을
쓰고 계셔서 정말 깜짝 놀랐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