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의 알파벳
시배스천 폭스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특별한 시기에 만나게 되는 책이 현재의 삶을 관통하기 마련이다. 나에게 지난주에 사서 읽게 된 시배스천 폭스의 책 <바보의 알파벳>이 그런 책이다. 가히 인생의 책이라 부를 만하지 싶다. 올해 <리옹 도르의 여인>으로 시배스천 폭스를 알게 되었는데 최애하는 작가로 삼아야지 싶다. <새의 노래>와 <초록 돌고래의 거리>도 속히 구해서 읽어야겠다. 다만 문제는 두 책 모두 절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원서로 폭스의 최신간 <파리 에코>도 주문해야겠다.

 

어찌해서 <바보의 알파벳>을 나의 인생책이라 부를 만한지 썰을 풀어 보도록 하자. 프랑스, 전쟁, 로맨스 그리고 멜로드라마라는 주제에 있어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널리스트 출신 시배스천 폭스가 1992년에 세 번째로 발표한 소설에는 삶을 망라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생의 과정, 만남, 이별, 죽음, 사랑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주제들이 넘실거린다. 우리의 주인공 피에트로 토마스 러셀은 우선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의 아버지 레이먼드 러셀은 2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치닫던 1944년 이탈리아 안치오 해변에 상륙해서 독일군의 치열한 방어전 와중에 부상을 당하고 후방으로 이송된다. 이렇게 폭스의 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전쟁 시퀀스로 소설은 시작된다. 시작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시작이 이 정도로 강렬해야지.

 

그렇게 후방에서 만난 19세 이탈리아 소녀 프란체스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요건 좀 클리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 신부가 되어 러셀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한 프란체스카는 아들 피에트로를 낳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문제는 그녀가 암에 걸려 그 행복한 시절이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할 점은 소설 <바보의 알파벳>은 모두 알파벳 자수대로 2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장소를 오가며 마치 한 편의 퍼즐 게임을 맞추는 듯한 전개가 이어진다. 지금 당장 내가 전혀 모르는 사건이 등장한다고 해서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작가가 치밀하게 구성한 내러티브가 이어지니 말이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 엄격한 훈육이 시행되는 기숙학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평생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소녀 로라를 만나고, 평생지기 해리 프리먼을 만나기도 한다. 어여쁘고 재능도 출중한 로라와 사랑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였을까? 시간의 더께를 가지고 성장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벨기에 출신 부르주아 계급의 아가씨 한나와 결혼한 점도 삶의 아이러니를 반영하는 것일 게다.

 

피에트로는 자신의 정체성만큼이나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 러셀이 집착적으로 몰두하는 어원학에서 유래했을 지도 모를 A에서부터 시작해서 Z까지 이어지는 어떤 공간들이 순차적으로 배열되는 목차를 보고 나도 소설에 등장하는 도시들 가운데 몇 군데나 가보았는지 꼽아봤다. 로마, 파리, 뉴욕, 주룽 그리고 잠깐 거쳐 갔던 소렌토까지 하면 5곳이었다. 엑셀로 나도 한 번 소설의 궤적을 기록해보려고 했지만 어차피 다 완성하지 못할 바에야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그만둬 버렸다. 난 참 포기도 빠른 인간이다. 여하튼 간에 폭스가 그리는 기억의 연대기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내 삶을 대입해 봐도 유사한 궤적들을 찾을 수가 있어서 더욱 더 애착이 가지 않았나 싶다. 바로 이런 책이야말로 인생책이라 부를 만한 게 아닌가.

 

한국사람 가운데 과연 여행을 떠나면서 책을 챙겨 가는 이들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서구 작가들의 책을 읽다 보면 어디서고 책이 등장한다. 산책하지 않는 시간에는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게 너무나 당연한 풍경 중의 하나다. 영국에 가서 찰스 디킨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아마 구입해서 다시 읽었지 싶다. 아니 여기서 또 포인트는 새로 읽은 것이 아니라 다시 읽었다는 점일 것이다. 나같은 책쟁이들이 절대 놓칠 수 없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도무지 평생 갈 일이 없을 것 같은 Q로 시작하는 과테말라의 케찰테낭고에는 왜 갔을까? 로라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해변에서 이별하고 그대로 차를 달려 멕시코 국경을 넘어 케찰테낭고에까지 간 것이다. 그곳에서 이탈리아계 영국인 피에트로는 현지 주민들에게 한낱 부유한 그링고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어느 궁금증에 대한 호기심을 살살 달래 주는 작가의 실력 역시 감탄할 만하다.

 

누구처럼 강박적인 독서가 아니라 때가 되어 읽고 싶다는 주인공 피에트로의 변명 아닌 변명도 마음에 든다. 교과서에 나오기 때문에 혹은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독서의 진정한 쾌락을 깨달은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지경에 도달했단 말인가. 내가 아마 이 책을 이십대에 읽었더라면 절대 인생책으로 치부할 수 없었으리라. 죽음이나 육아 혹은 친구를 배신하고 물질을 추구해야 하는 갈림길 같은 삶의 어느 지점에서만 고유하게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만 작가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게 됐다. 프랑스 휴가 중에 산악자전거를 타고 가족과 만났지만, 첫째 딸 메리가 없어져서 애타게 찾는 와중에 자신이 상상한 끔찍한 결말이 차라리 빨리 왔으면 하고 생각하는 고뇌를 애를 길러 보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미국 에번스턴에서 만나 사진작가 피에트로에게 옵션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며 친구를 배신하라고 종용하는 어느새 상사가 된 폴 콜먼의 유혹은 또 어떤가. 아무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평생기지를 배신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자신을 유혹하는 맘몬을 밀쳐내고, 사표 받을 준비를 하라는 피에트로의 결기에 통쾌한 느낌이 절로 솟아났다. 해리 가족과 여행에서 마사의 질문에 피에트로가 머뭇거린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참으로 멋진 내러티브의 전개다.

 

분쟁의 코어 예루살렘을 방문한 피에트로와 해리가 현지 유대인들과 벌이는 정치적 대화도 작가의 저널리스트다운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현지 유대인의 의식을 대표하는 몇몇 이들이 원래 그곳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공존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요르단이나 시리아 같은 나라의 국적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유대인들이 그곳을 그렇게 비옥한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펼친다. 천년 넘게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들이 그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받은 자신들의 땅이라며 영주권을 주장하는 게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까. 다시 한 번 그곳에서는 어떤 해결책도 쌍방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롬보에서 싱할라족과 타밀족이 겪는 갈등에 대해서는 예전에 송도에서 만난 국제기구에서 일한다는 스리랑카 아저씨와의 대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타밀 일람 호랑이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 아저씨는 무척이나 놀랐었지 아마.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데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피에트로의 할아버지 만한 끈이 없었으리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셀 가문이라. 유럽의 18세에서 30세에 이르는 청년들의 30%가 전장에서 전몰되었다는 끔찍한 사실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한 세대의 1/3이 세계대전에서 아무런 의미 없는 보몽이나 티에프발 같은 참호전에서 사라져 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왜 우리 세대에 반전이 필요한 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시배스천 폭스가 삶이나 죽음 혹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문제 혹은 세계대전 같은 거창한 주제들만 다루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와 함께 한 이탈리아 소렌토 여행길에 식사를 하던 리스토란테에서 “엄청난 양의 밥이 실망스럽게도 일정한 색”을 띠고 있었다느니 “치즈가 거미줄처럼 숟가락에 달라붙어” 있었다는 디테일은 또 어떤가. 콜먼 휘하에서 일하는 각종 풍문과 스캔들이 난무하는 진원지에 대한 이야기나 매점에 팔리는 샌드위치의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다진 정어리와 참치 마요네즈”나 재가공된 햄으로 보이는 푸석푸석한 살코기들을 나사못처럼 보이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묘사는 정말 대단했다.

 

소설은 A 이탈리아의 안치오에서 시작해서 Z 이탈리아의 차니카에서 끝난다. 그것은 피에트로 인생의 기원이 되는 알파와 오메가였던 것이다. 처음에서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끝내는 종결은 작가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보다 더 멋진 결말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제 소설 속의 피에트로보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삶에 대한 욕심이 더 많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어디선가 만난 질문이 계속해서 뇌리를 때린다. 당신은 인생을 즐기고 있는가라는. 좀 더 많은 시배스천 폭스의 책을 읽어야겠다. 결론은 슈퍼그뤠잇!!!


[뱀다리] 너무 급하게 리뷰를 적다 보니 사진작가 피에트로의 사진 이야기를 빼먹었구나. 그의 행적을 쫓다 보니 예전 흑백필름 현상과 인화를 배우던 시절 생각이 문득 났다. 그전에도 무지 사진을 찍었었지만, 언제고 기회가 되면 현상/인화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가 있었다. 첫 번째 유럽여행에 가서 찍은 흑백사진들을 현상액을 잘못 부어 망친 일들, 암실 대신 암실옷(?)을 입고 캐니스터에 필름을 감다가 그만 빛을 쬐어 날린 경험들이 <바보의 알파벳>을 읽는 동안 오롯이 피어올랐다. , 치열했던 나의 어느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 것만으로도 독서한 보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나무 2019-02-12 11: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때문에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의뢰로 번역되어 있는 책들이 좀 되는군요.
슈퍼그뤠잇인 이 소설은 절판이나 품절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ㅎㅎㅎㅎ

레삭매냐 2019-02-12 11:50   좋아요 2 | URL
폭스의 책이 무려 18권이나 되는데...
국내에 번역된 건 꼴랑 5권이랍니다.

그나마 두 권은 절판, 오늘 초록 돌고래
중고서적으로 주문 날렸습니다.
상태가 좋은 녀석으로 와야 할 텐디...

<파리 에코>도 읽어 보고 싶네요.

목나무 2019-02-12 11:57   좋아요 1 | URL
이 작가의 다른 책들에 대한 레삭매냐님 리뷰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서니데이 2019-02-13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있으면 조금 더 책을 읽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여행을 떠날 때도 그렇고요. 재미있는 책으로 챙겨가지만, 많이 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가방속에 넣고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아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레삭매냐 2019-02-13 21:04   좋아요 1 | URL
저도 2013년 여름 캄보디아/태국 여행 길에
욕심에 책을 한껏 가져 갔었지요.

피피섬으로 가는 배 위에서 그 험한 풍랑이
넘실거리는 데도 눈이 빠져라 책을 읽어서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던 기억이...

그 책이 바로 정영문 작가의 <어떤 작위의
세계>였었는데 아직도 못 다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

뒷북소녀 2019-02-14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또 절판. 왜 레삭매냐님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작가들의 책은 모두 절판인거죠?ㅋㅋㅋ

레삭매냐 2019-02-14 13:40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
이 하나 없네요.

멤포 지아르디넬리의 책은 구할 수가 없어
서 결국 책바다 서비스를 신청했네요. 너무
읽고 싶어서요.

글구 오늘 시배스천 폭스의 <초록 돌고래
의 거리>도 도착했답니다. 물론 바로 읽기
시작했구요...

카알벨루치 2019-02-14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모르는 작가를 넘 많이 아셔서 ㅜㅜ쩝

레삭매냐 2019-02-14 13:41   좋아요 1 | URL
뭐 저도 올해 알게 되어 읽은 작가인
걸요.

<리옹 도르의 여인>, <바보의 알파벳>
그리고 오늘부터 <초록 돌고래의 거리>
를 읽습니다.

기회가 되면 원서로 <파리 에코>도 만
나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답니다.
열린책들에서 도통 새로운 책 번역을
하지 않고 있네요.

카알벨루치 2019-02-14 13:49   좋아요 1 | URL
원서라....👍👍👍

레삭매냐 2019-02-14 14:03   좋아요 1 | URL
무언가 오해를 하심이...

원서는 모름지기 읽기용이 아니라
소장각으루다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