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해에도 다행히 서재의 달인/북플마니아로 선정되어 굿즈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플래티넘 혜택은 거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굿즈는 늘 기다려지는 면이 있다. 갈수록 적어지는 활동량 때문에 사실 올해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녀가주시고 글도 남겨주시는 분들 덕분에 2012년부터 8년쨰 굿즈를 받게 되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진중권의 책은 유명한 시리즈를 몇 권 갖고 있으나 아직 제대로 읽은 것이 없어 그의 글에 대해 할 말은 없다. 진보성향으로 알고 있었고 그간 이런 저런 토론과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안다. 그가 최근 쏟아내기 시작한 이런 저런 날선 말들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독설로 흥한 자는 독설로 망하는 것인지. 단순히 입진보라는 둥, 적이라는 둥 비난하는 것으로는 이런 현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조금 뭘 할만 하면 사분오열되는 '진보'라는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이 안타깝다. 그를 지식인이나 지혜로운 사람으로 본 적은 없다. 아니, 독설가로써 특별히 토론을 잘 하는 사람으로 본 적도 없다.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작은 일에 화를 내며 다른 이들에 대한 막말을 쏟아내면서 개인적인 일에서는 사사로운 정에도 많이 흔들리는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변희재의 '진보'버전이라고 할 만큼 '서울대학교'출신이라는 점에 집착하고 자랑스러움을 갖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그의 독설이 틀리지 않았던 적도 있으나 이번 건은 과연 그럴지 의문이다. 10년을, 20년을, 30년을 두고 볼 때 사람의 말과 행동은 늘 조심스럽다.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진영논리를 떠나서 또 하나의 김지하가 나온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
어쩌다 보니 12/25까지 이번 달엔 하루에 한 권을 읽은 꼴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의 시간을 좀더 많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10월에 내 패턴이 흐트러진 후 이를 회복하려는 노력과 실패의 사이에서 글을 쓰는 패턴이나 서점에 나오는 패턴이 많이 무너진 듯, 크리스마스 세일로 사람들로 가득찬 서점에서 잠시 떠나 있었다. 덕분에 글을 쓰는 것도 많이 힘들었고 책을 읽으면 그저 짧게 평을 남기는 것으로 일단 흔적을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건 회복에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예전보다 못한 글쓰기가 늘 아쉽고 또 아쉽다.
무척 일본스럽게 잔잔하고 아련하다. 학교를 갖 졸업하고 부띠끄 건축사무소에 합류한 주인공. 사무소는 매년 여름 전체의 operation을 시골별장으로 옯겨 자급하면서 한 시즌을 보내는데 그 한때를 지나면서 생긴 일을 현재의 시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오십 대가 거의 다 된 시점에서 담담하게 추억한다. 가볍다면 가벼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는 건 아마도 나이를 먹은 탓도 있을 것이다.
별 대단한 것도 없지만 과거의 인연 혹은 그 언저리에서 오가던 이들을 떠올리면 늘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참으로 개념정리가 부족하던 어린 시절, 감도 많이 딸리던 더 어렸던 한때. 지금 내가 사는 모습에서 그때의 나를 찾아보면 별로 남은 것이 없다. 수수하게 있는 그대로 살지 못했던,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던,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살던 그 시기를 보는 나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100세 인생이라고들 하는데 대충 그 반을 향해 나아가는 지금은 그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소중하게 꺼내어 보는 옛날의 내모습,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과 시간들. 이 책과 함께 작가의 다른 책을 장바구니에 넣고야 말았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추리소설을 여러 권 읽고 있다. 나름 다작이고 드라마화된 작품도 있는 인기작가인데, 정통추리의 면과 함께 사회파적인 면이 강한 듯 작품마다 굵직한 사회문제를 테제로 삼아 이야기를 그린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정신이상을 이유로 감경을 받는다. 그리고 오랜 기간의 치료와 보호를 거쳐 사회에 나온다. 그의 정신이상이 감경의 사유가 될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그가 세상에 나올 자격이 있는지,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살 수 있는지, 그를 바라보는 일정한 수준의 편견이 무조건 나쁜 건지 등등 쉽게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이슈들이 사건의 전개를 통해 다뤄진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나에겐 어려운 추리였는데 읽고 보니 결정적인 단서를 주기는 했다. 이 정도면 fair game. 다만 범인보다 더 나쁜, 진짜 범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 인물의 경우 조금 논리가 늘어난 것 같다.
최대한 높은 효율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줘야 하는 구제연금. 효율과 필요, 거기에 가짜를 걸러내야 하는 이유까지 해서 심사는 복잡하고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노인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일본 (한국도 점점 그리 될 것이다)의 경우 시시비비를 올바르게 가리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공무원이 펜대를 굴리며 편안한 철밥통에 기대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그저 숫자와 통계에 기대어 단순하게 법칙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갈려 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사라지는 목숨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다. 직업안정성이 제로를 향해 가는 고령화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극단적으로 달리고 있는 2020년의 G-20 국가들이 모두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인물과 사건을 교묘하게 짜집고 평행선을 그린 트릭이 좋았다.
덱스터를 연상시키는 갱생한 변호사. 가족도 무엇도 집착하는 존재도 없이 하루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밖에서 볼 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주제에 어리다는 이유로 소년원에 갔고 공부를 해서 변호사가 되어 사회적으로 물의가 있는 사건들을 맡아 큰 돈을 버는 악질. 어느 사회나 일정 부분 그런 면이 있지만 일본처럼 폐쇄성이 강한 곳에서는 이렇게 한번 label이 붙으면 그야말로 남은 인생은 험난한 여정일 수 밖에 없다.
그런 미코시바 레이지도 어떻게 하지 못할 인연을 굴레. 이로 인해 맞게 된 케이스에서 그는 과거와 조우해야 한다. 추리소설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로 재미를 느끼는 이 시리즈 또한 한 가지 굵직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면이 없지 않다. 유죄와 무죄를 떠나 의뢰인이 정당한 절차로 재판을 받게 해주는 것이 변호사의 기본적인 의무. 한국의 잘 나가는 전관들은 그 개념조차 잡을 수 없을 기본적인 변호사의 윤리는 선악을 구별짓고 빨리 범행을 입증하길 원하는 사회와 늘 충돌할 수 밖에 없다.
특이하게도 피아니스트가 주인공 명탐정으로 설정되어 있는 시리즈. 다작이면서도 이렇게 여러 가지로 설정을 나누고 이에 따라 다른 주제를 이용한 작품을 내는 것도 상당한 재주가 아닌가 싶다. 도플갱어를 모티브로 한 듯, 우연한 사건과 오해가 겹치고 그 과정에서 황당하게 전개되는 사건. 그 결말도 약간은 오픈이라서 추리소설로써는 다소 낮게 평가할 수도 있는 면이 있다. 하지만 해박한 음악지식을 바탕으로 스토리에 잘 블랜딩한 드뷔시나 쇼팽의 피아노연주곡과 심리묘사나 상황설정이 참 멋지고 덕분에 잘 모르면서도 늘 끌려가는 클래식의 CD를 주문할 수 밖에 없었다. 몇 곡을 YouTube에서 찾아서 들어보니 꽤 익숙한 것도 있다. 이렇게 자기가 하는 일을 넘어서 다른 취미를 갖고 있으면서 작품세계에 이를 녹이는 건 참 대단한 솜씨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에세이는 그런 면에서 접근이 용이하다고 보는데 완전한 창작인 소설의 경우 더 대단한 것 같다.
만나는 책마다 작가나 저자마다 다 친해질 수는 없다. 다양한 책을 읽을수록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나같은 잡식성 다독가이자 장서가의 숙명이다. 책과 읽기에 대한 고민과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언젠가부터 종종 이렇게 책에 대한 책을 구해서 읽는다. 한 권씩 시작한 것이 이젠 제법 책장 하나 정도를 채울 정도로 많이 모였는데 쓸데없는 것들을 몇 개 처분하고도 그만큼 많다는 건, 그리고 여전히 읽게 된다는 건 역시 끝나지 않을 고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책이라도 어느 정도는 나와 궁합이 맞아야 한다. 정확하게는 (1) 책 그 자체도 잘 읽혀야 하고 (2) 나아가서 저자의 속이, 그러니까 읽어온 책이 나와 어느 정도라도 접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참 힙겹게 읽었다. 아무리 책의 세상이 길고도 넓고도 깊고도 높고도 오래된 것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도 겹치는 것이 없었을까. 읽는 과정도 꽤 험난했던 것이 무척 길고 지루한 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건 나의 주관적인 이야기니까 저자나 책을 폄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호흡이 맞지 않아서 고생했고 그런 면으로만 생각하면 글을 쓰는 내내 저자가 고생했을 것만 같다. 누군가에겐 좋은 양식이 되고 양서를 소개하는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와는 맞지 않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냥 저냥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맞이하고 클라이맥스를 넘어 12/26을 맞았다. 여전히 모두들 어디론가 떠났는지 사무실은 옆방의 중국사람들이 떠드는 걸 빼고는 조용했다. 오후에 퇴근해서 운동을 하고 푹 쉬자는 맘으로 이렇게 앉아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