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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사람은 언제나 안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 가장 안전한 방법을 찾아다녔으며, 생명의 위협을 가장 덜 느끼는 곳을 찾아 거주지를 정했다. 그러기에 인류의 등장은 신의 등장과 함께 했다. 신이라는 우산아래서 주위의 위협으로부터 심리적 안정을 느껴왔다. 또한 신이 있기에 인간 행동에 방향과 한계를 규정할 수 있었다. 반대로 신이라는 존재에 의문을 가지게 될 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침반은 부서지게 되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욕과 욕정, 잔인함과 악랄함이 걸러지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세상으로 소환된 이런 감정들은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눈덩이처럼 더 커져간다. 제어기이자 탈출구였던 신 대신 인간은 돈, 권력, 술, 마약 등과 같은 다른 탈출구에 집착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감정의 정화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추악함만이 더욱 발현된다. 인간으로 가지고 있던 가치와 존엄성은 벼랑 끝에 몰리게 되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살아남는다.
“... 그 땐 바다가 잔잔했어요. 나른하게 넘실대는 파도 위에서 배가 졸릴 정도로 천천히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죠. 승객들은 모두 잠들고 승무원들도 눈에 띄지 않았죠. 인간의 소리라곤 들리지 않았어요.....함께 잠들어 있는 하늘과 바다 위로 여명이 마치 채색된 꿈처럼 살그머니 퍼져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말예요. 그 때 황홀한 해방의 순간이 온 거예요. 평화, 탐색의 끝, 마지막 항구, 인간의 더럽고 비참하고 탐욕스런 공포와 희망과 꿈들을 초월한 성취가 주는 환희.....보이지 않는 손이 만물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한 순간 우리는 만물의 신비를 보고, 그러면서 자신도 신비가 되는 거죠. 순간적으로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다 그 손이 도로 베일을 덮으면 다시 혼자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목적지도. 그럴 듯한 이유도 없이 비틀거리며 헤매는 거죠. 전 인간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인간이 되는 바람에 항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진정으로 누구를 원하지도, 누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어디 속하지도 못하고, 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p.191-192”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진다.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처럼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아 어디에 첫 발을 내딛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방향을 잃은 첫 발걸음이 자칫 ‘나’라는 존재의 소멸로 이어질 것 같기에 더욱 두렵고 무서워진다. 하지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헤매고 있을 때 하나의 손이 뻗어온다. 그 손은 힘없이 처져 있는 나의 손을 잡고 힘이 풀려버린 다리에 힘을 준다. 붙잡은 손은 짙은 안개 속에서 다시 일어날 힘 뿐 만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까지 제시해 준다. 그 손을 따라 걷다보면 우연찮게 지쳐 땅에 쓰러져 있는 다른 사람을 마주하게 되고 다시 그 손을 잡고 일으켜 앞으로 나아간다. 손과 손을 마주잡고 가다보니 어느 덧 안개는 걷히고 다시 황홀한 해방의 순간, 평화와 희망의 순간이 빛난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좌절에 지친 인간이 결국 과거의 좋은 때만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면서 장면을 마감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눈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또 다른 희망이라고. 상처 입은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되는 것처럼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