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노래 - 출간 25주년 기념 특별판
신경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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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이제 새롭게 외로움을 알고
그 외로움으로
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 노래로 칼을 세우는 법을 세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배운다
새벽 안개 속에서
다시 강가에서-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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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6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7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난한 사랑노래 - 출간 25주년 기념 특별판
신경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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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산자의 목을 잡고
발목을 잡고
어깨에 매달려 등에 업혀
일년이라 열두 달
편할 날 없다 나무라는구나
우리들이
구지레한 산동네 떠나지 못함은
갯마을에서 외진 산골마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화물차에 실려온
이 산동네 떠나지 못함은
원통한 죽음 빚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년이 백년이 하루 같은
너희 사는 꼴 안타까워서이니
깨어진 장독대에서
덜컹대는 삽작에서
우리들 훨훨 털고 일어나
구만리나 머나먼 구천길
편히 가게 하려거든
허구한 날 굿거리 세마치로 뛰질 말고
밝고 빛나는 횃불을 들라
삶과 죽음이 뒤엉킨 산동네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죽음을 부르는 자들을 몰아내고
골목골목 구석구석 환하게 비치면서
오직 대낮 같은 삶만이 남게 하는
밝고 빛나는 횃불을 들라-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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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노래 - 출간 25주년 기념 특별판
신경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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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산동네에 오는 비는
진양조 구성진 남도 육자배기라
골목골목 어두운 데만 찾아다니며
땅 잃고 쫓겨온 늙은이들
한숨으로 잦아들기도 하고
날품팔고 지쳐 누운 자식들
울분이 되어 되 맺히기도 한다
산동네에서 듣는 남도 육자배기는
느린 진양조 밤비 소리라
세월한테 자식 빼앗긴 아낙네
숨죽인 울음이 되어 떠돌기도 하고
그 자식들의 원혼이 되어
빈 나뭇가지에 전봇줄에
외로이 매달리기도 한다
산동네에 오는 밤비는
진양조 구성진 남도 육자배기는
방범등 불빛 얼비치는 골목길
땅바닥에 돌층계에 얼룩진 땀
우리들의 땀 그 땀 피가 되어
벌겋게 살아나게도 하고
슬레이트 지붕에 블록 담벽에 벤
우리들의 한숨 우리들의 울분
함성이 되어 온동네에 퍼지게도 한다-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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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3-02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시를 읽고 마음이 아파서... 나를 달래는 나...

책장을 넘기다가 사인본이라는 걸 알았다.
고맙습니다!^^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구판절판


그것을 기억하기에 내가 태어난 것만 같은
도피이며 종착적인
두 팔 없이도 포옹할 수 있는
불이면서 흙인
그것에 닿는 순간 불면이 시작된
얼굴에 있으나 심장에 속한
입술

나이 들어 고향 마을에 갔을 때
알게 되었지
그녀가 미쳐 버렸다는 것을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
처음 입술을 준 여자
강둑을 멀리 떨어져서 걸었으나
붐빛이 우리 사이의 공간을 채워 주던 이
이제는 정신이 나가서
꽃나무들 사이로 어른거리며
지나갔지

날리는 꽃잎들 아래서 마주치자
나를 보고 웃었지만
나를 기억하기 때문에 웃은 것이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게 내 봄은 줄어들었지-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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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3-0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대충 알았지만 다는 아니더라도 슬픈 글들이 있다...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구판절판


당신은 홍차에 레몬 한 조각을 넣고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쌉싸름한 맛을 좋아했지
단순히 그 차이뿐
늦은 삼월생인 봄의 언저리에서 꽃들이
작년의 날짜들을 계산하고 있을 때
당신은 이제 막 봄눈을 뜬 겨울잠쥐에 대해 말했고
나는 인도에서 겨울을 나는 흰꼬리딱새를 이야기했지
인도에서는 새들이 힌디 어로 지저귄다고
쿠시 쿠시 쿠시 하고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시간 같은 것은 없었지
다만, 늦눈에 움마다 뺨이 언 꽃나무 아래서
뜨거운 홍자를 마시며 당신은
둘이서 바닷가로 산책을 갔는데 갑자기
번개가 쳤던 날
우리 이마를 따라다니던 비를 이야기하고
나는 까비 쿠시 까비 감이라는 인도 영화에 대해 말했지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슬프고
망각의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언젠가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개로 하루를 성스럽게 하는 시간
다르질링 홍자를 마시며
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 슬픔을 듣기도 했다는 것
어느 생에선가 한 번은 그랬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 당신 몸에 난 흉터를 만지는 것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견뎌 냈다는 것
누랑지빠귀 우는 아침, 당신은 잠든 척하며-89~91쪽

내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아주 잠들어 버리겠지
그저 당신의 찻잔에 남은 레몬 한 조각과
내 빈 찻잔에 떨어지는 꽃잎 하나
단순히 그 차이뿐
그러고는 이내 우리의 찻잔에서 나비가 날아올라
꽃나무들 속으로 들어가겠지
날짜 계산을 잘못해 늦게 온
봄을 따끔하게 혼내는 찔레나무와
늦은 삼월생의 봄눈 속으로-89~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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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3-0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차 생각이 나는구나...
마트에 가면 잊지 않고 사 와야겠다

쿠시 -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