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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꾼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제1권이다.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로흐두에서 펼쳐지는 살인사건을 다룬다. 로흐두는 가상의 마을이다. 현재 이 시리즈는 31권까지 나왔다. 첫 작품은 1985년도에 출간되었다. 30년 동안 시리즈가 계속 나왔다는 것은 이 시리즈의 인기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가끔 영미권 시리즈에서 이런 긴 세월을 다룬 작품을 본다.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김성종의 작품 중 하나가 긴 세월 동안 나오고 있지만 상당히 기복이 심하다. 개인적으로 정말 아쉽다. 그리고 이런 긴 시리즈의 첫 권부터 읽는다는 것은 아주 큰 즐거움이다. 대부분의 시리즈가 첫 권부터 나오는 경우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리즈 첫 권이다 보니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해미시는 자원해서 이 마을에 부임했다. 그의 급여 대부분은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나간다. 그가 근무하는 산간지역의 로흐두 마을은 아주 조용한 곳이다. 밀렵을 제외하면 특별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다. 그런데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살해당한 사람은 낚시 교실에 참가한 교육생 중 한 명인 레이디 제인이다. 이 낚시 교실에 참가한 인원은 모두 여덟 명이다. 이 교실의 운영자는 존 카트라이트 부부다. 소설을 읽으면서 죽을 사람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누가 죽을지 금방 알 수 있도록 레이디 제인은 낚시 교실에서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급여 등을 모두 집으로 보내는 해미시 순경이 커피를 얻어 마시러 왔을 때 시비를 건 인물이기도 하다. 아주 이기적이고 감정을 뒤흔드는 말투와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말로 낚시 교실의 수강생들을 흔들어 놓는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이 이유를 해미시가 찾아낸다. 레이디 제인의 살인 사건을 통해 탁월한 추리와 수사 능력을 각성했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괜히 낚시 교실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그가 작정하고 수사에 나서면서 진실은 쉽게 밝혀진다.

 

해미시 순경 시리즈라고 해서 해미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에서 가장 자주 많이 등장한 인물은 앨리스다. 그녀가 변호사인 제러미 블라이스에게 빠져 보여주는 심리 변화와 행동은 한 편의 로맨스 소설 같다. 순진한 19세 소녀가 자신의 환상과 감정에 빠져 남자에게 휘둘리는 모습은 과연 20세기 후반의 소설인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이와 더불어 해미시와 프리실라의 묘한 관계가 나온다. 귀족의 딸인 프리실라는 해미시에게 관심이 있지만 신분의 벽은 이 둘이 더 밀착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 시리즈의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 둘의 밀고당기는 연애가 아닐까? 이 둘의 연애도 현대적인 모습은 아니다.

 

낚시 교실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낚시에 대한 설명이 많다. 낚시에 관심이 없다 보니 조금 지루하다. 하지만 이 비싼 프로그램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주 열정적이다. 연어를 잡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모습이나 자신이 잡은 척하는 행동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여덟 명이 참석했지만 작가는 이들 모두를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앞에서 말한 앨리스의 비중이 가장 많다. 그리고 제러미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모습이다. 다만 앨리스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답답한 마음이 읽는 내내 생겼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작가는 아가서 크리스티다. 해미시가 보여준 몇 가지 수사와 추리능력은 미스 마플이 연상되었다. 요즘 잔혹하고 강한 살인마가 등장하는 빠른 전개의 소설과 달리 느리고 평범한 살인범이 나온다. 해미시의 수사 과정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친척들을 이용한 정보 수집이다. 비싼 장거리 전화를 통해 정보를 모으는 그의 모습은 살짝 눈에 거슬리지만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가 앞으로 해결할 사건들이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고, 밑밥으로 깔아놓은 로맨스의 마지막도 궁금하다. 30년 내공의 기초를 살짝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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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통 - 죽음을 보는 눈
구사카베 요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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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통. 제목대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무통증 환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무통증을 앓고 있는 등장인물이 있지만 그 영화와 관련이 없다. 하나의 중요한 소재일 뿐이다. 이 소설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일본 형법 제39조다. ‘심신상실자의 행위는, 이를 벌하지 않는다. 심신박약자의 행위는, 그 형을 경감한다.’가 법조문이다. 이미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인물을 등장시켜 이 주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자극적이고 노골적이고 잔혹하지는 않았다.

 

크게 여섯 명이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가장 핵심은 의사 다메요리다. 이 의사는 아주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현실적이지 않는데 아주 매력적이다. 그 능력은 환자를 진찰하면 그 인물의 병을 알고, 중병인 경우는 완치가 될 수 있는지도 같이 아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또 한 명의 천재의사가 등장한다. 시라가미다. 시라가미는 자신의 능력을 병원의 확장에 사용한다. 오만하고 도덕적 관념이 그렇게 투철하지 않다. 자신의 의료법인이 더욱 확장되길 바라는데 그 장애 요소 중 하나로 다메요리의 진료소가 등장한다. 그리고 다메요리가 보낸 환자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이 둘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소설의 문을 여는 것은 이시카와 일가족 살인사건이다. 아주 잔혹한 네 가족 살인사건인데 단서가 없어 수사가 지지부진하다. 그러다 아내가 신문에 낸 글과 사진을 보고 시체들이 놓여 있는 모습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현장에서 발견된 신발 크기와 모자 크기는 모순되어 있어 충분한 단서가 되지 못한다. 이 수사 현장에 참여한 하야세 형사는 자신이 체포한 범인이 형법 제39조 덕분에 풀려난 경험을 했다. 때문에 이 조항을 대단히 싫어한다. 작가는 하야세를 통해 이 법조항의 의미를 되새긴다. 새로운 경험이 쌓이면서 하야세가 변화하는데 작가는 그렇게 녹녹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인물들을 중간에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나미코다. 남편과 사별한 후 아들과 살다가 이상한 남편과 재혼 후 다시 이혼했다. 다메요리의 지갑을 주은 것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녀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녀와 관계된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무통환자 이바라와 나미코의 전남편 사다다. 사다의 행동이나 심리 표현을 보면 도저히 나미코와 연결될 수 없는 인물이다. 상황이 묘하게 꼬이면서 결혼했다. 하지만 행동에 문제가 생기면서 이혼당했다. 이후 나미코 주변을 머물면서 스토킹한다. 그의 집착과 찌질하고 조악한 행동들은 읽는 내내 기분이 나빴다.

 

제목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바라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둘 있다. 하나는 맹신하는 시라가미고. 다른 하나는 동경하는 나미코다. 일상에서 그는 자신의 성격 덕분에 직장에서 아주 꼼꼼한 일처리를 한다. 하지만 그의 취직은 시라가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수술하는 장면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아주 참혹하고 잔혹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다. 작가가 이렇게까지 묘사하고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할 정도다. 한 편의 공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잔혹한 장면이 나오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의사들이 있지만 그래도 역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형법 제39조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이 주제가 마음을 흔들었다. 이전에 본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면서 나의 의견을 물었다. 쉽지 않다. 심실상실자와 심실박약자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술에 취해서, 혹은 약에 취해서 이런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나지 않았는가. 정치인들도 술에 취했다는 핑계를 얼마나 많이 대었는가. 음주운전 사고도 마찬가지다. 물론 소설은 이보다 더 잔혹한 살인을 다루고 있다. 선의의 피해자를 막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피해자 가족을 생각하면 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시카와 가족 살인사건의 범인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조금 더 나간다. 반전을 위한 장치를 만든 것이다. 하야세 형사의 마음과 시선을 따라가면 형범 제39조가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들이다. 현직의사의 너무 사실적인 묘사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논쟁거리를 만들었다는 점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전 작품도 역시 논쟁적이고 자극적이었다. 단순한 오락소설로 읽을 수도 있지만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국민들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주제다. 점점 범죄자 연령이 낮아지고, 사건이 잔혹해지는 요즘은 인권을 위해 만든 법들의 허점이 자주 드러난다. 작가가 마지막에 남겨 놓은 여운은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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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별곡 - 혼돈의 시대
차현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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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은 현재 한국은행이다. 이 책은 한국은행의 역사 중 일부를 다루고 있다. 그 시기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에서 1950년 한국은행 설립까지다. 실제 대한민국의 독립적인 한국은행은 이 시기 이후다. 원래는 1997년까지 다루려고 했다고 한다. 저자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은행도 현재의 한국은행과 연관성이 있다고 말한다. 은밀히 따지면 이 둘은 성격이 다르다. 책에도 나오듯이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은 식민지 조선을 통치, 운용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조선은행을 공부하는 것은 근대, 현대 중앙은행의 변천사를 알 수 있게 만든다.

 

중앙은행 역사를 다루고 있어 경제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요즘 한국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동결시키는 이유를 저자는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에서 이런 부분이 나오길 조금은 기대했는데 현재 한국은행 직원인 것을 간과했다. 낮아진 금리가 대출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소식이지만 그것이 결국 부동산 대출로 이어지면서 부동산 거품과 엄청나게 거대한 개인 부채로 이어진 부분은 경제에 엄청난 부담이다. 이를 둘러싼 수많은 비평과 비난이 있지만 금리는 하향세를 유지하고 있다. 제1은행권에서는 대출금리가 확실한 담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낮아졌지만 신용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변화가 없거나 더 올라갔다. 대부업이 성행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이런 거시경제정책을 조금은 직접적으로 다루어주었으면 했는데 생략되어 아쉽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선은행을 한국 중앙은행의 한 단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살고 있던 선조들의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도 중점적으로 다루듯이 이 시대 조선은행은 일제의 목적에 따라 은행이 운영되면서 독립성이나 조선의 경제 안정과는 아무른 연관성이 없었다. 일제의 만주 침략과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 모양세다. 또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경제 용어인 금본위제와 은본위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 초보자들에게는 더욱 어렵게 다가온다. 하지만 단순히 조선은행의 역사만 다루지 않고, 그 시대의 세계 경제와 각 나라의 중앙은행을 같이 다루면서 세계의 중앙은행 변천사도 같이 들여다본다.

 

중앙은행은 정권과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물론 그 나라의 경제나 경제정책과 동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권의 목적에 봉사하면 그 존립 이유가 위태로워진다. 저자는 일본은행과 조선은행의 역사를 다루면서 이 부분을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한 나라의 화폐가 군대에서 발행하는 군표와 다름없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중앙은행이 통화량 조절에 실패하면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은 나라들 사례를 들려줄 때 이것이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안다. 저자가 일제의 패망이 없었다면 통화정책의 실패로 인한 엄청난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고 말할 때 순간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중앙SUNDAY>에 연재한 글을 낸 책이다. 연재할 때부터 각 장의 첫 부분에 주제, 시대배경 등과 같은 것을 요약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이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 장은 현재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 시절 세계와 일본과 조선의 중앙은행에 대한 정보를 쏟아낸다. 흥미로운 정보의 조각들을 엮어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것도 많다. 조선은행의 폐지를 둘러싸고 대장성과 군부가 대립한 것도 새로운 사실이다. 군부가 만주로 진출하고,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면서 조선은행은 실질적으로 중앙은행의 역할을 상실했다. 이 부분을 시대순으로 조목조목 짚어가는데 상당히 새롭고 놀라웠다. 경제학과 통화정책 관련 수업 교재로 사용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중앙은행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가득한 속에서 현대 한국은행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흥미롭다. 재무부와의 대결은 현재 진행형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조선은행 직원들이 한국은행 설립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승진이 되지 않았던 인물들에게 해방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리고 새로운 중앙은행 이론은 열정적인 직원들의 학습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 부분은 그 열정에 살짝 감화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은행 직원에서 한국은행 직원으로 신분세탁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진짜 한국은행 이야기는 이제부터인데 책은 여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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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의 소리 - 이와아키 히토시 단편집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애니북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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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를 처음 만화방에서 봤을 때 그림을 참 못 그린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내가 좋아하는 그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읽고 있는 것을 봤지만 읽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읽을 만한 만화도 없고, 이 만화에 대한 좋은 평을 읽으면서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끝까지 읽었다. <기생수>가 담고 있는 세계관이니 하는 것은 모르겠고 아주 재미있었다. 그 이후 이 만화는 일본 만화를 말할 때면 늘 나의 머릿속에 머물렀다. 그런데 정작 작가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발음하기 힘들고, 작가의 다른 만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을 받고 한참 지났다. 몇 번이나 펼쳤다가 놓았다. 겨우 여섯 편이 실려 있는데 손이 쉽게 나가지 않았다. 마침 다른 책 한 권을 다 읽고 시간이 비어 손에 들고 읽었다. 역시 단숨에 읽었다. 이전에 그냥 들쳐보던 것과 다른 내용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다른 작품들도 흥미로웠지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미완>, <와다야마>, <뼈의 소리> 등 세 편이다. 특히 표제작 <뼈의 소리>의 몇몇 장면은 <기생수>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자신의 눈앞에서 남자 친구가 자살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열정은 한순간 광기를 발산했다. 사랑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열정의 아드레날린 폭주라고 해야 하나. 눈물의 따뜻함을 말하는 장면은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는 순간이기도 하다.

 

<미완>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조형과 조수의 이야기다. 누드 그림이 나와 조금 놀랐지만 여주인공을 모델로 조형물을 만들고, 그녀로 인해 아파하는 남자의 질투 등을 엮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정으로 조각하던 돌이 단단하다고 말하고, 돌에 기대앉은 후 표정이다. <와다야마>는 오랜만에 모인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벌어진 낙서 사건을 미스터리하게 풀어간다. 동창생들 얼굴에 기묘한 낙서가 그려지는데 누구도 그 인물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와다야마다. 그에게 모임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한 명씩 기묘하게 얼굴에 낙서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것을 피해 달아나는 동창생의 모습이 무섭기보다는 코믹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본 와다야마의 모습은 약간 의외였다.

 

첫 작품 <쓰레기의 바다>의 마지막 장면이 얼마전에 있었던 추락사고와 연결되었다. 비현실적인 마무리다. 약간 어설픈 듯한 구성이다. <살인자의 꿈>은 연쇄살인마가 살인하는 장면을 꿈에서 보는 남자 이야기다. 초현실적인 설정인데 그의 곁에는 이런 상황을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있다. 평범한 꿈과 살인의 연결인데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마무리로 재미있었다. <반지의 날>도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언니의 약혼반지를 끼고 나갔다가 하천에 빠진 개를 구해주면서 잃어버리고, 이것을 찾는 과정을 그렸다. 뻔한 전개와 마무리지만 주인공의 주저하는 모습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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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간 책들 - 진중문고의 탄생
몰리 굽틸 매닝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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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문고. 한자를 같이 표기했다면 금방 그 뜻을 알았겠지만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다. 한글만으로 표기되었을 때 그 뜻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이 그렇다. 조금 불친절한 편집이다. 물론 이 책을 선택했을 때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그리고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사상전이었는데 책 내용은 그 부분을 강조하지 않는다. 진중문고에 어떤 책들이 포함되었고,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바라는 것인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이 책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어려움도 같이.

 

나치의 책 태우기부터 시작한다. 아주아주 옛날 진시황이 그 유명한 분서갱유를 펼치지 않았는가. 역사 속에서 점령자들이 책을 태운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것의 현대판이 1933년 5월 10일 독일 베를린 베벨 광장에서 벌어졌다. 나치의 정치적 목적에 맞지 않은 책들을 공개적으로 태운 것이다. 이런 행동은 2차 대전이 펼쳐지는 와중에 점령지에서도 펼쳐졌다. 예상하는 추정 숫자는 1억 권이 넘는다고 한다. 엄청난 숫자다. 그런데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발간한 진중문고의 숫자는 이것을 넘어선다. 1억 2300만 권 정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숫자가 아니다. 이 책들이 전쟁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처음 들어가면 하는 일도 없는데 피곤하다. 주어진 일도 없으니 멍하니 시간만 보낸다. 이때의 무력감과 피곤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독서가 있는데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책을 꺼내 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터라면 어떨까? 늘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는 곳에 머물고 있다면? 다음 전투까지 그냥 무료하고 무력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면 어떨까? 이때 그들에게 전달된 책들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을 것이다. 책을 좋아했다면 더 좋아할 것이고, 이전까지 제대로 책을 읽지 않는 군인이라면 그 시간을 즐겁고 재밌게 보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생긴 것이다.

 

이 책 이전에 단 한 번도 진중문고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바로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죽음이 보이는 곳에서 책을 읽었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다음 전투를 위해 쉴 때 가끔 책을 읽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보통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2차 대전 당시는 달랐던 모양이다. 병원의 환자라면 그 무료함을 보낼 책이 좋은 선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보통의 부대라면 글쎄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 재밌고 놀라운 것은 벙크에 빠진 군인이 포탄이 날아오는 와중에 그 속에서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다친 몸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하지만 놀라운 장면이다. 아마 영화 등에서 이 모습을 보았다면 아주 비현실적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진중문고 이전에는 승리도서란 것이 있었다. 각 가정에 있던 책들이 군대로 보내졌다. 하지만 하드커브 책들은 무겁고 두껍고 휴대하기 불편하다. 하지만 이 책들은 군인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지치고 무기력한 군인들을 즐겁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이 역할을 책이 맡은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처음에 보내졌던 기증도서와 달리 군에 의해 제작된 진중문고는 훨씬 가볍고 휴대하기 편하다. 군인의 상의나 하의 속에 접어서 넣을 수 있을 정도다. 언제 어디서나 주머니에서 꺼내 읽을 수 있다. 이런 모양이 책을 처음에는 단순히 이전에 나온 페이퍼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달랐다. 이 책 속에 사진이 없는 것은 조금 아쉽다.

 

진중문고의 탄생과 운영을 보면서 한국 군대의 금서 사건이 떠올랐다. 군의 사기를 위해 전쟁 중에 좋은 책들을 선정해서 군인들에게 나눠주었는데 한국은 어떠했는가? 물론 미국에서도 진중문고의 운영을 둘러싼 잡음과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진중문고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환호 속에 사라졌다. 싸게 만들면서 생긴 문제도 있었지만 더 많은 책을 공급하기 위한 노력들은 보는 나로 하여금 단순한 책 한 권의 의미를 넘어섰다. 수많은 진중문고 중에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위대한 개츠비>다. 다른 작품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읽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리고 이 책도 양장본이 아니다. 페이퍼백으로 더 싸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서 뒷주머니에 진중문고를 꽂고 행군하는 군인의 이미지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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