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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평점 :
다카노 가즈아키의 초기작품이다. 2003년에 출간되었다. 번역된 작가의 전작을 읽은 나에게 이런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13계단>에서 시작된 인연을 생각하면 더 빨리 번역될 수도 있었지 않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물론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왜 이제 번역되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개인적으로 구해놓았다.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다른 작가들처럼 작품 수라도 많다면 그렇구나 하고 금방 수긍이라도 할 텐데.
소설은 작가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문제가 되는 것을 꼼꼼하게 조사하여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낸다. 이 작품도 임신과 중절과 빙의라는 소재를 잘 엮어서 풀어내었다. 임신과 중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빙의라는 초자연적 현상과 엮었고, 다시 이것을 정신의학과 연결하여 풀어내었다. 읽다보면 그 시대에 유행했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담겨 있고, 이성과 굳은 의지가 문제를 정면에서 해결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에 초자연적 현상임을 알려주는 설정을 넣어서 독자의 시선과 사고를 흐려놓기는 하지만.
<쾌적하게 사는 법>이란 책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슈헤이. 그는 성공에 도치되어 좋은 맨션을 구입한다. 처음 읽을 때 인쇄만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구입이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계약금을 치를 정도다. 아내 가나미와 열심히 벌어서 이자와 잔금을 갚을 생각을 하는데 덜컥 아내가 임신을 한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중절이란 답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수술을 위해 병원에 간 아내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른다. 수술은 중단된다. 그리고 아내에게서 다른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중절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악령에 빙의된 것 같다.
이소가이. 정신과 전문의다. 그의 환자 중 한 명이 불임으로 고민하다 자살을 시도한다. 이 때문에 휴직을 했는데 슈헤이 부부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원하지 않았지만 임신부와 증상이 그를 자극한다. 환자 치료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중절 수술을 한 후 전과한 이력이 있다. 이런 그에게 가나미의 상태는 결코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슈헤이와 가나미 부부가 겪게 되는 수많은 현상들을 현대 과학과 분석으로 냉철하게 해석한다. 빙의에 대한 그의 설명은 매스컴과 미신이 만들어낸 환상이 얼마나 우리에게 강한 허상과 공포를 심어줬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단순히 빙의 현상을 과학의 힘으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내용은 바로 원하지 않는 임신과 중절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중절을 하는 여자들이 있지만 그 고통을 그대로 껴안고 가는 것은 역시 여자다. 물론 남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이 중절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면서 슈헤이의 선택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남자의 시선이라고 말하면 사실 할 말이 없다. 여자가 더 쉽게 낙태 수술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은 현실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변명이 될지 모르지만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초자연적 현상 빙의가 한때 우리나라에도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이 소설이 나왔다면 좀더 많은 호응을 얻고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이 이야기가 나의 가슴으로 솔직히 와 닿지 않는다. 재미가 없다기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흡입력이 좀 떨어지기 때문이다. 너무 이성적인 분석이 자주 나오다보니 긴장감이 떨어진다. 작가의 장점이 소설의 단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건을 억지로 연결한 듯한 설정은 개인적으로 조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현실이 더 거짓 같지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