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421 | 4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인간, 즐거움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17편의 에세이가 쉽게 읽히는 와중에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잠시 딴 생각을 하면 에세이 한 편이 후딱 지나갈 정도의 분량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 음미하는 동안에는 잠시 시간이 조용히 흘러간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모두 읽은 지금 표지의 푸른 색 외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왜일까? 집중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공감하지 못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해력 부족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다시 책을 펼쳐본다. 어둠과 문장을 엮은 글이 보인다. 보통 간단하게 표현되는 이 문장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명확함을 뒤로 하고 은유가 더 부각되니 문장들이 낯설다. 아마 이것이 이유가 아닐까? 낯선 표현과 문장이 쉽게 가슴에 와 닿지 못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만 집중하면 문장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이 그렇다. 그냥 아무 곳이나 펼쳐도 음미할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모두 한 줌의 빵 부스러기로 돌아간다.”(138쪽)는 문장도 방금 펼친 곳에서 발견했다. 보통 한 줌의 흙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빵 부스러기라니 낯설다. 낯선 표현은 한 번 더 집중하게 만든다. 아마 이 책은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 세 번 읽을 때 더 가치가 빛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랑하면서 느끼는 고통 역시 사랑이며, 그 고통은 말도 안 되는 위로로 사랑이 어둠 속으로 밀려들어 가듯 우리의 사랑이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준다.”(76쪽) 이 사랑에 대한 문장은 사랑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조금 과장된 표현인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살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란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감정과 감성이 엮이고 이것이 행동으로 표현될 때 그 사랑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는 문장일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어떤 글은 작품이나 연주자 등에 대한 감상을 풀어낸다. 그 평가가 너무 시적이고 현학적이면서 깊게 다루어져 도저히 작가의 감상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읽는 내내 부러웠다. 어떻게 이런 평가와 감상을 쓸 수 있지 하고 말이다. 일상의 기적을 말할 때 그 평범한 듯한 일상이 왜 그렇게 성스럽고 중요한지 알려준다. “우리의 영혼은 그 성스러운 눈으로 보았던 순간을 차곡차곡 담아 우리의 일상을 버티게 한다.”(103쪽)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일상이 무료하고 지루하다면 아마도 이런 성스러운 눈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섬세한 문장과 통찰이 만들어낸 이 책은 사유의 깊이와 상관없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린 문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한 남자가 벌거벗은 채 바닷가에서 눈을 뜬다. 춥다. 생존을 위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가 보인다. 차 안으로 들어간다. 푸시 버튼을 눌러 시동 건다. 온기가 느껴진다. 아늑한 시간이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곳은 어디지? 나는 누구지? 집중한다. 하지만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을 잊었다. 차안을 뒤져 차량등록증을 찾아낸다. 차 주인 이름이 대니얼 헤이스다. 자신을 대니얼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이제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움직인다. 왜 자신이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있었는지 말이다.

 

잊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아무 정보도 없이 우선 쉬기 위해 모텔에 들어간다. 그곳 방송에서 여배우 에밀리를 본다. 자신을 자극한다. 낯익은 정보가 들어온다. 그녀는 누굴까? 이 의문을 품고 있는데 풋내기 경찰이 그를 급하게 달아나게 만든다. 에밀리를 통해 자신의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BMW를 몰고 달려간다. 이 여행은 별로 힘들지 않지만 말리부와 LA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여기에 베넷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당이 등장한다. 자신의 정체를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그는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 사람을 조정한다. 처음엔 해결사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보다 훨씬 무서운 인물이다.

 

중요한 인물 세 명이 등장한다. 기억을 잃고 자신을 대니얼 헤이스라고 생각하는 남자. 악당 베넷. 마지막으로 베넷을 잘 아는 여자 벨린다 니콜스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당연히 대니얼이다. 미국 동서를 가로질러 도착한 후 마주한 사실은 자신이 대니얼 헤이스의 외모와 똑같고, 여배우 에밀리를 연기한 레이니를 죽인 제1용의자이자 그녀의 남편이란 것이다. 기억이 분명하지 않는 가운데 이 사실은 큰 충격이다. 하지만 독자에게 이 사실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가 펼쳐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중반으로 넘어가면 예상하지 못한 만남과 사실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때 다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호기심을 품는다. 레이니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 외에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이 모두 풀리는 것은 반전으로 펼쳐지는 마지막 부분이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보여준 각자의 활약과 예정된 장면들은 대니얼이 시나리오 작가란 사실을 바탕에 깔고 있다. 어떤 순간에는 너무 뻔한 설정으로 혼이 나고 어떤 순간은 모두의 허를 찌른다. 하지만 이 때문에 풀리는 어두운 기억은 개인적으로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정도의 것인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마지막 장면과 엮인다. 너무 쉽게 적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내가 결정한 것이다. 지금 내가 결정한 것이다. 지금 내가 결정하는 것이 미래의 나를 만든다. 이런 당연한 일들을 약점과 협박이란 수단을 통해 사람을 조정하는 베넷의 존재는 읽는 내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또 어떤 사람을 등장시켜 새로운 상황을 만들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일에 파탄이 생기는 것은 자만심이 가슴 한 곳에서 자랄 때다. 과거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바라는 바를 성취했던 그가 역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소설의 오락적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속고 속이는 과정에 이를 엿보는 사람과 불신하는 관계가 형성되고 반전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기억 상실자와 시나리오 작가를 동일한 위치에 놓으면서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벨린다를 통해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을 표현한다. 잘못된 선택과 행동을 한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베넷은 냉정한 포식자이지만 자신도 그 무리 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려준다. 선택과 결정, 그리고 행동. 이것을 통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사실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다. 두 번의 죽음 후에 발견한 어둠의 끝은 그를 웃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누군가의 선택과 결정에 의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과란 제목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한자로 뭐일까? 였다. 破瓜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작가는 후기에 破果도 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독자에게 어느 한자가 당신의 결론인지 묻는다. 정말 불친절한 후기다. 시작은 분명 破果인데 破瓜를 같이 놓으니 사실 헷갈린다. 소설을 모두 읽은 지금도 어느 한자가 더 적합한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10대나 20대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당연히 후자지만 65세 살인청부업자 할머니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떻게 보면 전자에 더 어울릴 것 같지만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후자도 무시할 수 없다. 나의 결론을 말한다면 솔직히 상관없다. 둘 다 모두 가능하다.

 

65세 할머니 살인청부업자 조각.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방역업자라고 부른다. 문맥을 보면 수많은 신부름센터 중 하나 같이 보이지만 할머니가 속한 조직을 보면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이 연상된다. 그렇다고 영화처럼 엄청난 조직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월급쟁이처럼 일하는 것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청부살인을 방역으로 부르는데 이것을 위해 그녀는 늘 운동을 한다. 나이를 넘어선 엄청난 근육을 보고 감탄하거나 놀라는데 이 때문에 방송작가도 엮인다. 그녀 직업 상 당연히 멀리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늙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점점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은퇴를 고민하는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바로 이때 과거의 한 방역으로 인한 인연이 슬며시 나타난다.

 

할머니 킬러 조각 이야기다. 동시에 그녀가 살아온 시대에 대한 극단적 현실 표현이다. 살인청부가 난무하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라고 할 수 없다. 대단히 비현실적인데 읽다보면 한국형 느와르 소설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지점까지 작가가 나가지 않았다. 액션보다 조각의 심리 묘사와 변화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액션 비중이 적다고 느와르 소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단지 작가가 그런 지점까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적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장르소설에서 빌려온 장치와 설정마저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이것을 잘 사용하여 재밌고 흥미로운 장면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뭐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장르소설의 외형 속에 잔잔히 흐르는 조각의 마음은 순정소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자신을 킬러 세계로 인도한 류에 대한 애정이 바로 그것이다. 조각의 회상 장면을 보게 되면 그 시대 사람들의 삶 한 자락이 잘 나타나 있다. 많은 형제자매와 무관심한 부모. 식모 생활. 실수와 오해. 술집 생활 등. 여기에서 뻔한 전개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류의 존재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 실력을 가졌고, 이것을 이용해 돈을 번다. 조각의 재능이 이 뻔한 역사의 전개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를 인도하는 새로운 세계는 어떻게 보면 뻔한 전개보다 못하다. 삶의 안정을 전혀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류의 가정이 파괴되고, 류와 그녀마저 다른 업자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협 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에 조그만 틈이 생기면 그 틈새로 수많은 변화가 들어온다. 조각에게 그 틈은 노쇠다. 노쇠는 일반적인 방역도 약간의 실수를 저지르게 만들고,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엿보게 만든다. 살짝 드러난 비밀을 강 박사가 덮어주지만 불안한 그녀가 그의 주변을 맴돈다. 이런 그녀를 뒤따르며 엿보는 젊은 방역업자 투우가 등장한다. 먹이사슬 관계가 만들어지는데 20년 전 방역의 피해자였던 투우의 호기심과 엇나감 감정이 변수를 만든다. 심리 묘사가 중심인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은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존재가 바로 투우다. 과거와 현재가 어느 시점에서 만나고 충돌한다. 그때 바로 새로운 인생의 실마리가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 때문에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지지만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의 심장]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하일 볼가꼬프의 중편소설집이다. 표제작 <개의 심장>과 <악마의 서사시> 두 편이 실려 있다. 그렇게 긴 분량이 아닌데 읽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그것은 언제나처럼 러시아 이름 등이 입이나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과 내용과 전개가 상당히 난해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도 좀 간단했다면 속도가 나고 좀더 집중하면서 재미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중반까지 상당히 고전했다. 이 고전 덕분에 머릿속은 복잡해졌지만 그 여운은 강하게 남는다. 몇몇 장면과 상황이 지금도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작가의 출세작인 <거장과 마르가리따>를 읽기가 상당히 두렵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의 심장>은 어느 정도 설정을 알고 읽으면서 도입부를 오해했다. 개가 생각하는 것들이 이미 수술 후 상황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 자신만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샤릭이란 떠돌이 개가 어슬렁거리는 장면은 의인화가 너무 잘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 개가 소시지에 유혹당해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 집으로 들어간다. 이때만 해도 좋은 집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귀족개처럼 생각했다. 교수의 실험에 의해 새로운 존재로 바뀌면서 완전한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실험방식의 실현 가능성 여부는 뒤로 하고 개가 사람처럼 바뀐다. 여기서부터 바뀐 존재 샤리꼬프의 전횡과 무례함과 파괴와 폭력 등이 펼쳐진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성향과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러시아 혁명 후 사회, 문화, 경제적 혼란과 어려움은 극에 달해 있었다. 과격한 사회혁명은 기존 삶을 완전히 바꿀 것을 강요하지만 이것이 모두에게 쉽게 적용될 리가 없다. 경제적 빈곤은 삶을 더 힘들게 만든다. 부르조아를 타도했지만 혁명세력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 필립 교수의 집과 병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소동이다. 주택위원회가 한 사람의 권력자에게 너무 쉽게 무너진다. 혁명이 뿌리내리지 못해 일어난 일시적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그 후 러시아 역사가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의 법칙을 위반한 수술 때문에 필립 교수 일행은 고통 받는다. 샤리꼬프의 행동이 너무나도 많은 혼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때 “의사 선생, 인류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진화론적인 질서 속에서 매년 수없이 많은 대중으로부터 가치 없고 쓸모없는 사람들이 배출되어 나오면서도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유명한 천재들이 수없이 창조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191쪽)라고 말한 교수의 말 속엔 작가가 생각하고 느낀 혁명에 대한 반론이 담겨 있다. 어쩌면 이 말을 하기 위해 샤릭을 샤리꼬프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덧붙이자면 샤리꼬프가 된 후 이야기는 상당히 진도가 잘 나가고 흥미롭다.

 

<악마의 서사시>는 난해하다. 현실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가 비약한다. 착각과 오해가 만들어낸 상황들이 이어지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파편적이라 전혀 몰입할 수 없었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넘어선 진행이다. 동문서답이 오가는 장면들이 이어질 때는 뭐지? 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앞부분에서 급여 대신 생산품을 받을 때만 해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전개다. 주인공의 착각에서 비롯한 실직이 새로운 모험으로 이어진다. 쌍둥이가 핵심인데 당사자는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또 그와 비슷한 이름을 둘러싼 오해는 다른 상황을 만든다. 이 두 상황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읽으면서 하나로 연결하기가 어렵다. 그냥 달릴 뿐이다. 하나의 명령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인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는 평을 제대로 감상조차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뭔가 하나씩 머릿속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스트 폴리스맨 - 자살자들의 도시
벤 H. 윈터스 지음, 곽성혜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종말이 정해진 세계를 다룬 미스터리다. 종말 직전에 일어난 한 의문스런 죽음과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찾는다. 자살처럼 보이는 죽음을 대부분의 경찰은 자살로 처리한다. 소행성 마이아와가 지구와 충돌할 것으로 예정된 세계에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거나 기존 생활을 포기한 상태다. 이런 사회 분위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살의 형태를 가진 죽음은 자살로 생각한다. 종말이 정해진 후 경찰력마저 엄청나게 약해진 상태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세상에 변수가 있다. 그것은 종말 때문에 정식 일정보다 빠르게 형사가 된 헨리 팔라스다. 그의 의심으로 모두의 죽음이 확정된 세계에서 살인자 찾기가 시작된다.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보험 회사 직원 피터 젤이 목매단 채 발견된다. 모두가 자살이라고 단정짓는다. 당연하다. 세계 곳곳에서 자살자가 늘어나는 현실에서 이 죽음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임무에 충실하고 강직하면서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느끼는 헨리는 다르다. 이미 경찰의 행정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세계에서 숨겨진 진실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다른 동료나 상부 부서에서 이상한 놈 취급당한다. 누구도 그의 범인 찾기에 관심이 없다. 몇몇은 이미 경찰을 떠난 다른 사람처럼 떠나지 못해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참 형사가 제대로 된 수사를 한다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사건을 파헤치면 금방 단서가 나올 것 같은데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가 일했던 근무처에도 가고, 그의 집에 있던 메모를 단서로 누나를 찾아가보기도 한다. 근무처에서 하나의 과거 소식을 듣지만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경비가 알려준 정보가 다른 단서를 쫓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누나는 왠지 모르게 자꾸 그를 피한다. 왜 피할까? 동료들의 비협조와 경찰 조직 붕괴와 사회 기본 시설 파괴에 따른 어려움 때문에 진도는 더디기만 하다. 어떤 때는 정말 자살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이런 의문을 부채질하는 것은 당연히 세계의 종말이다. 물론 이런 종말 때문에 사소한 범죄로 경찰서에 갇히는 것을 엄청나게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종말까지 갇힌 삶이란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다.

 

처음 소설을 읽으면서 초반에 범죄자가 금방 잡힐 것 같았다. 아니면 자살로 결정되거나. 하지만 종말이 예정된 사회를 통해 삶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더디게 진행된다. 어쩌면 인터넷도 제대로 되지 않고 협업이 사라진 현실에서 결코 더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여동생 남편 실종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헨리 팔라스를 힘들게 만든다. 알 수 없는 사람에게 구타와 협박을 당하고, 종말을 피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무리에 갇히기도 한다. 전혀 사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강한 의지와 책임감이 없다면 앞으로 더 나가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 소설은 바로 이 지점을 무리없이 연결한다. 단서가 하나씩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숨에 범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말을 다룬 수많은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와 다르게 종말 전 세계를 다룬다. 죽음이 정해진 세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낼까 하는 의문을 하나씩 풀어낸다.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고, 자살로 현실을 바로 벗어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날까지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 소설은 바로 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풀어낸다. 금제가 풀린 세상에서 기본 욕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말이다. 읽으면서 나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도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사람의 욕망이 얼마나 강하고 깊은지 알 수 있다. 반면에 사회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현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뭐 이럴수록 더 강한 통제력이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421 | 4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