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 42년간의 한결같은 마음, 한결같은 글쓰기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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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호승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서울의 예수>였다. 제목은 명확하게 기억하는데 이 시집을 끝가지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후 다시 만난 것은 안도현의 <연어>가 성공한 후 비슷한 풍으로 나왔던 <항아리>나 <연인> 등이었다. 이때 정호승은 시인이 아니었다. 그러다 다시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란 산문집으로 다가왔다. 이 변화가 그 당시는 조금 어색했다. 시인이 동화풍의 글을 쓴다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도 있었고, 그 내용에 특별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잘 몰랐기에 생긴 일들이다. 그런데 이번에 42주년 시인 생활을 담은 개정판이 새롭게 나왔다. 다시 시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그가 시인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 단지 나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얼마 전 도종환의 시선집 <밀물의 시간>을 읽었다. 그의 시집을 출간 순으로 놓고 그 속에서 몇 편의 시를 뽑았다. 발표 순이다 보니 그의 시풍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굴곡진 그의 삶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선집은 시집 발표순으로 편집하지 않았다. 출처도 표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인의 작품을 시 그 자체로 이해하고 분류해야 된다. 시어의 선택이나 묘사 등을 보고 쉽게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것이 나만의 생각인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평론가들의 해설이 중요한 변화를 알려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시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경계하는 것이 상징의 주입 등으로 고착될 시의 의미와 해석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시들이 있다 보니 개인적 취향을 탈 수밖에 없다. 시인이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집중도도 다르다. 비교적 쉽게 머리와 가슴으로 와 닿는 시가 있는 반면 무슨 시인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시도 적지 않다. 최근 가능한 하루에 한 편의 시를 읽고자 노력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것이 시다. 그것은 길이와 상관이 없다.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 뒤에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몇 번을 읽는 경우도 허다하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시에 대한 나의 내공은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 그럼에도 가슴과 머리는 시인이 그려내고 보여준 시어들에 잠시 동안 머물다 간다.

 

그에게 희망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불행하고 / 희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더 불행하다’<밤길에서>는 불행의 가감으로 다가온 듯하다가 ‘내 지금까지 결코 버리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 그것은 희망의 그림자다’<희망의 그림자>처럼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시어였던 것이 제목으로 변하는 순간도 시들 속에서 보이고, 같은 제목도 몇 편 나와 다른 분위기의 시들로 나의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아버지에 대한 시들은 가깝고도 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고, 슬픔을 노래하고, 기다림을 표현할 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순간도 생겼다.

 

기독교 신자라는 생각을 하고 읽었는데 어느 순간 선문답 같은 시가 나와 당혹스러웠다. 예수와 고 김수환 추기경이나 명동성당을 소재로 시를 썼을 때와 절이나 부처 등이 소재로 등장할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되었다. 단지 있는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나의 마음이 흐려 그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사물의 모습은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햇살과 한몸을 이루는 기쁨만 있을 뿐 / 이슬에게는 슬픔이 없다’<이슬의 꿈>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다. 고착된 생각을 벗어던진 시인의 시선은 그래서 반갑고 재미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벽>라는 인식의 전환은 세월 속에서 얻는 지혜의 한 자락이다. 젊은 시절 앞에 놓여 있던 벽을 얼마나 무너트리려고 했던가. 하지만 이제 그들이 벽이 되어 있는 현실을 마주한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들은 사랑과 연민과 기다림 과 반성 등이다. 읽으면서 순간 뜨끔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표제시인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서 그늘 없는 사람과 눈물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던 시다. ‘모든 인간에서 시를 본다’는 시인의 말은 남다른 관찰력을 엿보게 한다. 이 글을 쓰면서 대충 펼쳐 다시 읽으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시들이 있다. 다음에 무작위로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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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채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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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과학철학을 생각하지 못했다. 과학자들이 과학을 끌고 와 종교나 철학 등과 억지로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과학, 철학을 만나다란 제목 때문이다. 과학철학이 분명 과학과 철학이 만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많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철학 입문서란 광고와 서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늘 어렵게 생각했던 과학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잔뜩 안고 책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 세 파트와 열두 장으로 구성된 책이다. 첫 파트가 과학지식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면 두 번째 파트는 그곳에 실천적 감각을 더했고, 마지막 파트에서는 풍성한 창조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여정이 뒤로 가면서 조금 더 과학적 내용으로 발전하면서 나의 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학창시절에도 과학에 대한 점수가 형편없었고, 이 수업을 지겨워했던 과거가 다시 되풀이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과거를 좀 씻어내고, 과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읽은 책인데 말이다. 초반의 재미는 과학 실험과 설명과 해설로 이어지는 순간 조금씩 증발했다.

 

저자는 포퍼와 쿤으로 대변되는 두 과학철학 거두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쿤이 패러다임을 강조했다면 포퍼는 반증주의 이론을 세웠다. 이 둘이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데 저자는 이 둘의 포용하고 융합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로 다원주의가 등장했고, 마지막 파트에 이것을 넣으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실제 과학계에서 한 시대를 대표했던 과학 이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다시 융합되는지 보여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절대성이나 독재를 경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뉴튼의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이 각각 다른 분야에서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보고 조금 더 시야를 넓히는 기회를 가졌다.

 

포퍼가 과학적 태도란 곧 비판적 태도라고 하면서 종교나 정신분석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똑같은 주장만 되풀이할 뿐, 발전과 향상이 없다고 했을 때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었다. 과학의 시초를 고대 그리스의 철학 전통에서 본 포퍼와 이것을 과학이 제대로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로 본 쿤의 의견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과학의 시초에 대한 책이 어떤 의견에서 비롯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무비판적으로 단순히 받아들였던 그 분류가 현대 과학철학의 두 흐름 중 하나를 대표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 과학혁명의 논란이나, 과학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과학이 정말 진보하는지 등의 질문을 던질 때 과학 교육으로 인해 굳어져 있던 과학 상식들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파트에서 산소와 물이 H2O란 것을 어떻게 아는가와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끊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이것을 하나씩 실험하면서 설명할 때 주입식 교육에 의한 과학 상식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닌 수많은 물음표를 남기기 시작했다. 저자가 과학방법론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과학의 결과만 믿는 것은 맹신에 불과하고, 믿지 않는다면 근거 없는 비이성적인 거부라고 말하고, 이런 과학의 본질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과학정책을 세울 때 큰 문제일 것이라고 지적할 때 우리의 과학교육이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과 불안이 생겼다.

 

어려운 화학식이나 실험방법들은 잘 모른다고 해도 과학자들이 어떤 연구과정과 어떤 사고방식으로 그 결과를 얻어내는지 안다면 주입식 과학 상식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과학이 어렵고 재미없었던 이유가 어쩌면 바로 이런 주입식 상식의 암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마지막 파트에서 다원주의적 과학을 주장하기 위한 저자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상대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인식의 지평을 조금 더 넓힐 수 있었다. 물론 현재까지는 이 책 속의 수많은 지식이나 정보를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더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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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집 예찬
김병종 지음, 김남식 사진 / 열림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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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나무 집 예찬>이란 제목을 읽었을 때 한옥에 대한 작가의 조사와 연구가 중심에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한옥 ‘함양당’ 이야기다. 이 함양당은 <자스민, 어디로 가니>를 읽으면서 호기심이 생겼던 곳이다. 그가 주말이면 찾아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머물다가 간 곳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가 어떻게 함양당을 받았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새롭게 짓고, 생활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김남식 사진작가의 사진과 간결한 김병종 작가의 글이 어우러져 이 시대와 동떨어진 듯한 나무 집의 예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예찬은 어릴 때 기억 한 자락을 뒤흔들어 깨우고 한옥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함양당은 인연을 쌓아올린 집이라고 말한다. 처음 그 집을 받았을 때부터 다시 짓게 되었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인연이 놓여 있다. 우연히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인연이 되어 결국 한옥 짓기까지 이어진다.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그 곳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인연은 짧게 끝났을 것이다. 현대 집들의 편리한 구조와 모습을 생각하면 불편하기만 한 곳이다. 최근 개량 한옥이 등장하여 이 불편함을 최소화했다고 하지만 그가 이곳을 받았을 때는 그냥 쉽게 개량, 개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주 싼 가격에 물려받았고 그에게 집을 넘겨준 검정옥 선생에 대한 배려와 다른 땅 주인 때문이다. 이 문제는 땅 주인이 땅을 사라고 말하고, 힘겹게 그 값을 치룬 후 해결되었다.

 

매일 살지 않고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나무 집은 불편한 곳이다. 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하나씩 풀어낸다. 빠름과 편리함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이 느림과 불편함은 오히려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고 시간을 늘리는 효과를 보인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이 단순한 공간은 자신에게 더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자투리 시간을 내어 겨우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단숨에 몇 권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 텔레비전, 인터넷도 없는 그곳에 있는 유일한 전자기기는 전축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더 집중해서 실컷 감상할 수 있다. 부럽기만 한 삶의 여유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앞에서 말한 나무 집 인연을 에세이로 풀어내고, 2부와 3부는 가을과 겨울 사진과 함께 간결한 글로 구성되어 있다. 새롭게 지어진 함양당과 주변의 풍경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을 사진으로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준다. 먼 풍경은 풍경대로, 밀착 사진은 또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으로 함양당 혹은 협선재를 차분하게 드러낸다. 사진이 먼저인지 글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둘이 잘 어우러져 진한 여운을 남긴다. 집 구석구석을 한 장의 사진과 작가의 감상으로 풀어낼 때 그 나무 집은 이미 단순한 나무 집이 아니다. 추억과 여유와 그리움과 정적과 고요함으로 가득한 곳이다.

 

언제부터인가 한옥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아파트 생활이 주는 피로를 급격하게 느낀 순간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때 본 한옥들은 대부분 개량 한옥이거나 한옥의 모습만 갖춘 집들이다. 한옥을 개량한 커피숍이나 식당을 가면 그 부산함으로 그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대부분이지만 잠시 여유를 누릴 때면 이곳에서 삶이 불편하다고 해도 한 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뭐 요즘은 황토집에 더 눈길이 가기는 하지만 뚜렷한 의지가 있어서라기보다 텔레비전을 보고 한 후 생긴 순간의 변덕이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 일순위고, 다음이 한옥이나 황토집이다. 작가처럼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다. 돈도 문제고 좋은 목수 구하기는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인연 이야기가 부럽기만 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아주 행복한 꿈을 꾸었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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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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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란 이상한 제목으로 먼저 나에게 다가왔던 작가의 최근 소설이다. 열다섯 자폐증 소년을 주인공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심리 묘사로 나를 사로잡은 적이 있는 작가다. 그런데 이번 소설 제목이 <빨간 집>이다. 제목만 보면 뭔가 섬뜩한 느낌도, 야한 느낌도 든다. 표지를 보면 다르지만. 마크 해던이란 작가 이름을 보면 전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감정이 충돌하면서 소개글을 읽으니 가족이란 단어가 불쑥 떠오른다. 많은 소설에서 중요 소재로 등장하여 다양한 갈래로 갈라졌던 그 가족 말이다. 그리고 수많은 호평들이 이 가족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왔다.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두 가족이 함께 집을 빌려 일주일 동안 함께 산다. 누나인 안젤라 가족과 동생 리처드 가족, 이렇게 8명이 웨일스 국경 근처 헤이온와이 마을 옆 별장으로 떠난다. 안젤라 가족은 남편 도미니크와 큰 아들 알렉스, 딸 데이지, 막내아들 벤지 이렇게 5명. 리처드 가족은 아내 루이자와 의붓딸 멜리사 3명이다.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이 두 가족은 각각 다른 교통수단으로 별장으로 향한다. 리처드 가족은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가고, 안젤라 가족은 기차를 타고 움직인다. 이 별장을 빌린 것은 동생 리처드다. 서로 왕래도 많지 않고 가족 내부의 문제도 있는 이들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행에서 자신들 속에 잠재되어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밖으로 쏟아낸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가족이란 화목해야하고 서로 감싸주고 도와주는 것이란 이미지에 중독되어 있다. 서로 갈등하고 싸우다가도 끝은 훈훈하게 가족애로 마무리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가족의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우리를 알게 모르게 세뇌시켜왔다. 그래서 이런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을 비난하기 바쁘다. 그들이 가진 문제나 어려움은 제대로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말이다. 이때 가족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이야기를 만나게 되면 그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굳건하게 믿고 있던 가족 이데올로기가 산산조각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방식의 가족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다.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된 안젤라 부부나 재혼한 리처드 부부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각각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 자란 두 사람이 사는데 갈등이 없다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안젤라는 사산된 아기에 대한 환영에 사로잡혀 있고,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는 남편 도미니크는 불륜을 저지른다. 반면에 부유한 리처드와 재혼한 루이자의 재혼 전 삶은 굉장히 자기파괴적이었다. 리처드는 의료 사고 문제로 심리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다. 안젤라와 리처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병수발 등으로 오해와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어른들의 문제들이 하나의 축으로 흘러간다면 네 명의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문제를 안고 있다. 알렉스는 운동 중독 증상이 있으면서 섹시한 멜리사에게 끌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변한 데이지는 종교로 가족들과 갈등을 빚고 친구 문제도 가지고 있다. 벤지는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서 홀로 재밌게 놀 뿐인 아이다. 멜리사는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다른 아이들을 상처 입히는 것을 즐긴다. 이렇게 적고 보면 그냥 평범하거나 조금 나쁜 학생들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걱정 많은 청소년들이다. 이 여행은 바로 이것을 밖으로 표출하여 드러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바로 화려한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과 전개다.

 

집을 떠났다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지 않는다. 이 여행은 그 문제를 인식하는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여행은 서로 잘 몰랐던 가족 사이의 유대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안젤라 남매 사이에 오해는 이해로 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고, 딸 데이지와 엄마 사이는 소통 부재가 여전히 존재한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애정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지만 서로를 탓할 뿐이다. 이것이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낯설다. 10대들의 노골적인 성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 문화 차이를 느낀다. 그리고 영국 등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SNS의 문제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가족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어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열린 결말은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다. 작가의 의지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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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의 시간
도종환 지음, 공광규 외 엮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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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으로 나에게 그 이름을 알린 시인이다. 처음 이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단순히 사랑시를 쓰는 사람으로 착각했다. 영화로도 나왔던 그 시집은 나로 하여금 시인을 오해하기 딱 좋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 당시는 베스트셀러를 읽지만 배척하던 모순된 감정을 가졌던 시기였던 탓일 것이다, 그 후 전교조 문제 등으로 그를 알게 되고, 시집 <접시꽃 당신>을 제대로 읽으면서 이 오해는 조금 수정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RHK에서 나온 시화선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로 그의 시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이번 이 시선집은 그의 시집들에서 몇 편씩을 발췌해서 시집 발간 순으로 실었다. 읽으면서 초기작과 대박시집 사이의 차이를 다시 느끼게 되었고, 시간의 흐름 속에 시인의 변화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선집이 하나의 범주로 묶여 시풍이나 시어들의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없는 것과 비교되는 편집이다. 그의 일상과 의지와 희망과 사랑 등이 곳곳에 녹아 있는데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아지지 않은 현실에 울분을 토했다. 애절한 사랑의 시를 읽을 때면 나도 저럴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이전에 읽었지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고, 대부분 낯선 시들은 머리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시는 현실을 담고 있다.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1985년)부터 그렇다. 개인적으로 ‘흑인 혼혈아 여가수에게’의 대상이 누군지 궁금하고, ‘조센 데이신타이(조선정신대)’의 비극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묻혀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접시꽃 당신>(1986년)속 ‘어떤 연인들’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굳세어 보인다. 아내에 대한 사모곡이 지닌 애절함과 그리움을 넘어 지켜보는 따스한 시선은 아직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살아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나중에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로 이어진다. 이때는 이미 그가 재혼한 후이지만.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당한 후 그의 시들은 학교와 학생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감옥에서 만난 제자와의 단상을 ‘잘가라, 준아’로 풀어냈을 때 이 시대 수많은 학생들의 삶이 겹쳐졌다. “우리가 빼앗긴 세월을 반드시 돌려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정 선생님, 그리고 보고 싶은 여러 선생님께)의 희망은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귀가)로 이어진다. 이것은 다시 “어떤 투쟁이든 값진 것은 과정일 뿐”(쏭바)이라고 말하며 현실 속에서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그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60대가 되면서 세상을 보는 시선이 좀더 부드러워졌고, 다양해졌음을 느낀다.

 

시인이기 이전에 그는 교사였다. 이제는 정치인으로 변했지만 그의 시 대부분은 교사였을 때 쓴 시들이다.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던 그가 전교조 문제로 해직되었을 때,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그 감정을 시로 풀어내었을 때 한결같이 그의 관심은 학생들이고 교육문제다. 전교조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닭장차에 실려갔고, 어느 날은 한 가족의 가장이자 자신을 감옥에 보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때의 감정들을 시로 정제해서 풀어낼 때 그의 고뇌와 아픔과 갈등 등이 나의 가슴 한 곳으로 콕하고 와 박힌다. 그리고 ‘부드러운 직선’에서 사람들이 부드러워지라고 할 때 그것을 받치는 기둥이 직선임을 말한다. 그의 삶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시다. 상대적으로 어렵게 쓴 시들이 아니라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사놓고 묵혀둔 다른 시집들에도 손을 한 번 내밀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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