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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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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네 마음을 끈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촬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 문학동네문학상 수상작을 읽을 때도 이 상에 대한 나의 호감을 말했다. 그럼 다른 하나 특촬물인데 사실 이 소설에서 기대한 것은 예전 안정효의 <헐리우드키드의 생애>와 같은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빠진 소년과 그가 본 수많은 영화에 대한 감상과 행동 등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방향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물론 특촬물에 대한 애정 있는 시선은 그대로 담겨 있다.

 

첫 대사는 “우리, 결혼해”다. 특촬물과 결혼이라. 이상한 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대사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해준다. 암에 걸린 채연이 보험회사에 보험료를 신청하러 온다. 이때 영호와 만난다. 냉면집에서 인연이 이어지고 이 연상연하 커플은 결국 결혼한다. 물론 이 결혼은 직장에는 비밀이다. 고객과의 관계가 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다. 이 결혼까지 진행되는 과정이 간결하다. 솔직히 과연 이런 결합이 있을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거기에 그녀는 열세 살 된 아들까지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들 샘과 영호와 만나면서부터다.

 

제목에서 말하는 체인지킹은 특촬물 드라마 제목이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 영호가 이 드라마와 만나게 되는 것은 샘과 거리를 거닐다가 샘이 몰두하는 장면을 보면서부터다. 집에 있는 디지털TV에도 이 드라마를 본 흔적이 있다. 이 사실들이 나올 때만 해도 이제 본격적인 특촬물 세계로 들어가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샘이 영호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드라마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낳았다. 그런데 아니다. 또 맞다. 아닌 것은 본격적인 특촬물 세계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맞는 것은 이 드라마와 샘의 말없음이 관계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 관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채연의 아들 샘과의 관계, 다음은 샘이 열심히 보는 체인지킹 때문에 엮이게 되는 마니아 민과의 관계, 마지막은 보험심사원 안과 그가 의심을 가지는 보험수령자 윤필과의 관계다. 이 셋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샘은 민과, 영호는 안과, 윤필의 과거는 체인지킹의 소문과. 이런 관계 외에 이들은 아버지 없는 세대를 대표한다. 샘의 아버지는 마약 중독자고, 영호와는 그 어떤 대화도 없다. 영호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윤필의 아버지는 아들들 손가락 잘라 보험료를 탄 이력이 있다. 여기에 샘의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영호와 자살한 아들과 소년원을 다녀온 딸을 둔 안의 관계는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설정이 아니다.

 

제목 <체인지킹의 후예>는 민이 영호에게 한 대화 후에 나온다. “아버지도 없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도 없고, 믿고 따를 진실도 없어. 신도, 철학도 아무것도 없어. 가진 건 그저 반복 학습된 찌꺼기야. 우리는 어디선가 있었던 이야기들의 흉내일 뿐이야. 위대한 과거의 지루한 모방이야. 비참한 소재의 처참한 패러디야.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252쪽)란 대화다. 이 속에 담긴 무력함과 패배적이고 허무적인 감상은 바로 반발을 불러온다. 감상에 매몰된 사람이 흔히 내뱉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반복 학습된 찌꺼기이기 때문이다.

 

특촬물에서 기대한 가볍고 경쾌하면서 조잡할 것 같은 내용은 사실 없다. 처음부터 짜놓은 설정과 관계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듯 던져놓은 것들이 하나씩 의미를 찾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 숨겨져 있던 사연들이 하나씩 밖으로 드러날 때 그 상처는 아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상처를 남에게 내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윤필과 안의 대립과 갈등 속에 벌어진 사고는 현실적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비약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영호와 샘이 첫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왜일까? 긴장의 끈이 풀렸기 때문일까?

 

체인지킹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불가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한 법문이 떠오른다. 왜 이런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인지킹의 기본 줄거리는 고독하고 잔인하면서도 철학적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많이 나간 것인지 모르겠다. 민의 분석이 샘의 그것과 너무 다른 것과 같이. 또 민의 ‘우리는 체인지킹의 후예다’라는 외침의 답으로 영호가 내놓은 말은 유치한 말장난 같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연은 결코 유치하지 않다. 이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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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여영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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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뒷장을 가득 채운 엄청난 수상경력은 사실 그냥 지나가기 어렵다. 한때 순위와 목록에 열광했던 과거를 되새기면 더욱 그렇다. 이런 수상경력이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 때문에 더 많이 읽히지 않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소년과 그 가족의 삶이 너무나도 기독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덕분에 왜 그렇게 미국 기독교 보수들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되고 있다.

 

화려한 수상 경력도 아마 이런 종교적 성장 과정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 영화나 다른 기독교 영화에서 쉽게 다루지 않은 부분을 심층적으로 파고든 점도 있다. 아마 그 문화권에서는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나 감정이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크레이그가 경험한 왕따와 신에 대한 사랑과 연애는 읽는 내내 잔잔히 가슴으로 파고든다. 어떤 부분은 너무 사실적이라 작가와 부모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소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주인공 크레이그는 작은 키에 순한 성격이고 다른 학생에게 놀림을 받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그에게 학교와 집 모두 탈출구가 없는 공간이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 역할을 한 것은 동생과 함께 잔 침대와 그림이다. 유년기에 들은 목사의 천국에 대한 설교는 성경에 더 집착하게 만든다. 매일 밤 성경을 읽어야 잠들 수 있을 정도다. 그의 일상은 너무 단순하다. 이런 일상에 변화가 온 것은 겨울 성경학교에서 레이나를 만나고부터다. 편지가 오고가고 둘의 감정은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리고 방학 동안 크레이그가 레이나 집으로 놀러간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레이나와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조심스럽고 간절하다. 크레이그 상황보다 좋지 않은 레이나 집 사정 때문에 더 그렇다. 부모의 이혼이란 큰 문제 앞에 이 둘의 사랑은 깊어진다. 위태롭다. 두 집안 모두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십대 둘이 붙어 다니는 것을 용서하지만 육체적 쾌락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크레이그 경우 매일 밤 성경읽기를 통해 다져진 인내력에 그 사랑의 순수함마저 왜곡될 정도다.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레이나의 아버지가 이 둘이 벗고 자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의 흐름과 레이나의 얼굴 표정은 진한 여운을 준다. 이것은 그가 이혼할 예정인 아내가 집에 들어올 때 차 안에서 보던 장면과 이어진다.

 

흔히 우리가 보던 그래픽노블이 아니다. 그림체가 화려하지도 억지로 꾸미려는 장면도 없다. 간결한 선을 통해 드러나는 감정과 장면들은 짧은 대사와 더불어 흡입력을 놓인다. 인용된 성경의 문장은 크레이그의 감정을 대변하고, 어릴 때 동생과 경험한 일들은 가족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보여준다. 자신이 믿는 바를 강요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란 크레이그가 다른 삶을 경험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다양하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레이나와 사랑에 빠진 그가 레이나의 또 다른 관계를 힘들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감정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담요란 제목은 레이나가 그에게 준 선물이자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가 왜 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가 그렇게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신의 성전이 한방에 무너졌는지 알려줄 때 이 담요는 그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려주고 위안을 준다. “꿈에서 깨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을 해야 한다. 우리는 기억을 돕기 위해 의식을 행한다.”(574쪽) 이 문장은 지금까지 부정적이었던 의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적 삶이란 거대한 틀 속에서도 사랑은 살아 움직이고 열정은 불탄다. 지금 순간 백지처럼 텅 빈 듯한데 시간이 지나면 그 공간을 여운이 채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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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 나인 드림
데이비드 미첼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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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개봉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원작가 작품이다. 먼저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읽을까 하고 고민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볼 예정이라 책에는 손이 가질 않았다. 어디에 두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러다 우연히 나에게 온 이 소설은 며칠의 시간을 빼앗아 갔다. 분량이 적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고, 다른 하나는 평일에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여기에 처음 얼마간은 이 소설의 형식과 문장 등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 적응이 다 되기도 전에 끝에 도달했지만. 평소보다 조금 힘들게 읽었지만 작가의 매력을 알게 만드는 데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읽으면서 숫자 9때문인지 모르지만 김만중의 <구운몽>이 떠올랐다. 내용 상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꿈과 숫자 9밖에 없다. 아련한 기억 속에 자리한 소설이 떠오른 것은 첫 장면과 각 장마다 일어나는 사건과 환상 때문이다. 이 도입부 때문에 한동안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았다. 가독성이나 재미와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점점 진도가 나감에 따라 이야기 구성에 눈길이 갔고 주인공의 기묘한 경험에 빨려 들었다. 순간적으로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예고편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아홉 장이라고 했지만 마지막 장은 백지다. 이 백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소설 전체에 대한 호불호와 해석이 갈라질 것이다. 내 경우는 어떻게 그 백지를 채워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8장의 마지막 문장과 상황이 이것을 더 부채질했다. 하지만 그 앞장에서 보여준 열아홉을 지나 스무 살이 된 미야케 에이지의 결코 간단하지 않은 대모험을 보면 그냥 무시하기는 힘들다. 자신의 아버지를 찾기 위한 시도가 어떻게 이런 혼란 속으로 유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더불어 말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이 장면도 혹시 미야케의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솔직히 적지 않은 장면들이 그랬다.

 

소설은 미야케 에이지가 자신의 유전적 아버지를 찾는 과정을 다룬다. 그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어머니조차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변호사 이름이 전부다. 이 이름을 통해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장벽이 적지 않다. 변호사와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첫 장 첫 장면이 이 만남을 위해 액션 영화에서 빌려온 액션 등으로 가득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가 바란 것은 단순히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데도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들이 우선 눈에 들어와서 상황을 왜곡한다. 이 때문에 미야케의 도쿄 생활은 파란만장해진다.

 

이 파란만장한 삶이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을 몇 번이나 넘기게 만든다. 특히 이런 순간들은 한 편의 액션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은 준다. 밤의 지배자 야쿠자들과 엮이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결코 평범한 시골 청년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도시 청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그를 둘러싼 몇 명이 만들어내는 일상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을 순화시켜준다. 미야케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목덜미를 가진 웨이트리스 이마조 아이는 이런 변화의 한 가운데 있고, 미야케의 로맨스를 완성시키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둘의 순수한 감정 덕분에 강렬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이 소설에서 조금은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아버지 찾기에서 시작한 소설은 언제나 자신 찾기로 끝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안주라는 쌍둥이 누나가 있는데 그녀는 어릴 때 죽었다. 이 죽음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들을 비현실적인 폭력과 환상과 엮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다양한 장르를 사용한다. SF, 액션, 스릴러, 역사, 로맨스, 판타지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가끔 다양한 장르의 사용이 흐름을 방해하고 가독성을 떨어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소설은 각 장의 구분을 통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물론 잠시만 흐름을 놓치면 꿈과 현실이 잘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어쩌면 마지막 장이 백지인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읽으면서 어떻게 영국인이 이렇게 일본에 대해 잘 쓸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알고 보니 아내가 일본 사람이다. 단순히 아내 탓이라고 하기에는 그 깊이가 대단하다. 역자가 후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많이 말했는데 사실 한두 가지를 제외하면 잘 모르겠다. 너무 오래전에 읽은 책들이라 기억이 연결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라면 이 장면을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좋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만난다면 원작과 또 다른 재미를 줄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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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지혜 - 공존의 가치를 속삭이는 태초의 이야기
김선자 지음 / 어크로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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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로 ‘공존의 가치를 속삭이는 태초의 이야기’가 붙어 있다. 제목과 연결시키면 신화나 전설과 관련 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 이 책은 신화에 대한 이야기다. 지역은 동아시아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고, 대상은 그 소수민족의 신화다. 이 신화를 17장으로 나눠 보여주는데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단순히 신화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대의 영화나 현실과 연결시켜서 이해를 돕는다. 덕분에 예전에 영화를 볼 때 놓쳤던 부분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동아시아 소수민족의 신화를 다루고 있지만 그 핵심은 바로 공존이다. 사람과 자연의 공존이다. 자연에 대한 최근의 담론이 너무 철학적이거나 실용적인데 반해 여기서는 가장 낯익은 방식인 신화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신화를 다르게 해석하거나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숨겨진 의미를 찾게 만든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원령공주>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이 품고 있던 철학이나 비전이 저자의 글을 통해 하나씩 가슴으로 다가왔다. 물론 예전에 알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잊고 있던 것들도 있다. 삶은 배움의 연속이자 배우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처음 목차를 보았을 때 ‘4장 신화, 인간의 조건을 말하다’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그 조건들이 선량함, 지혜, 나눔, 성실함 등이다. 이 중에서 내가 가지고 있거나 실천하는 것이 과연 몇 개나 있을까 하고 스스로 묻는다. 한둘 정도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족의 신이 인간에게 바란 것이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이 부분이 오늘의 우리를 보여준다. 기본 조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란 것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탐욕을 말한다. 필요해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 때문에 파괴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우리를. 바로 여기서 공존을 말한다.

 

개구리 이야기에서는 인간과 개구리의 조화를 말한다. 공존은 조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4대강이 나오는데 곡선을 직선으로 만들면서 생기는 문제와 개발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파괴가 그대로 적용된다. 기술과 가치를 놓고 풀어내는 이야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삶이 피폐해졌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개구리가 우레신의 딸이란 설정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장 마음을 움직인 것은 ‘9장 돌도 옮기면 사흘을 아파한다’란 제목이다. 무심코 길을 가다 발로 차고 가벼운 마음으로 옮겨 놓은 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표석이 되고 의미가 된다는 말에선 더 신중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공존의 가치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동아시아 소수민족의 신화라고 하지만 어딘가에서 들고 본 것들도 상당하다. 신화가 지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것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런 유사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 이런 비슷한 신화가 세계 곳곳에 있을까 하고. 조금 비약된 생각인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의 문명이 파괴되고 각 지역별로 소수만 살아남게 된다면 어떨까? 그들이 책을 남긴다고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기록된 것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현재 문명은 신화로 변하지 않을까? 그럼 지금 우리가 지구 온난화나 자연 파괴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미래의 삶을 과거에서 재현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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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레드 시간을 여행하는 소녀
케르스틴 기어 지음, 문항심 옮김 / 영림카디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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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의 소설이 있다. 재간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혹시 하고 찾아보니 다른 소설이다. 부제로 시간을 여행하는 소녀가 붙어 있다. 부제를 보면서 생각난 것은 쓰쓰이 야스타카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란 소설이다. 같은 이름의 다른 책이 심리동화인 것을 생각하면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나를 압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시간여행은 언제나 나의 관심사다.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들이 실제 나의 바람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을 생각하면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이런 종류의 책은 시선을 끌고 목록에 항상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연작이다. 처음에는 몰랐다. 한편으로 완결되지만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그녀가 가진 능력과 이 능력을 이용해 하나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에 대한 기초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인지 앞부분은 사실 약간 지루한 부분도 있다. 10대 여학생의 일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웬돌린과 친구 레슬리의 대화는 그런 점이 더 강하다. 하지만 그웬돌린이 시간여행을 하고 새로운 사건이 펼쳐지면서 흡입력을 발휘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다음 편이 기대된다.

 

소설 속에서 시간여행자는 특별한 능력이고 극소수만 가진 능력이다. 사라진 두 사람 폴과 루시를 제외하면 모두 열두 명일 정도로 적다. 이들이 왜 크로노그래프를 가지고 다른 시간대로 도망갔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는데 다음 이야기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 열쇠이자 재미를 줄 것 같다. 그리고 이 도구에 열두 명의 시간여행자 피가 모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생제르맹 백작과 관련 있을 것 같다. 또 미래로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는 설정과도 연결될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하는 재미가 이 소설에는 있다.

 

많은 판타지나 sf소설에서 유명한 철학자나 과학자를 이야기 속에 끌고 와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이 소설에서는 뉴턴이다. 그가 계산한 것에 의해 열두 번째 시간여행자의 생일이 밝혀진다. 이 때문에 그웬돌린 친척들은 샬럿이 대상자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딸이 이런 능력을 가지길 바라지 않은 엄마에 의해 그웬돌린의 생일이 하루 늦춰진다.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이 능력자를 보호하고 교육했던 사람들이 가졌을 의문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능력자가 바뀌지는 않는다. 이 사실은 앞으로 펼쳐질 다른 이야기와 함께 또 다른 재미를 줄 것 같다.

 

10대 소녀가 주인공이다 보니 소녀 감성이 곳곳에 묻어난다. 역사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배우는 요즘 아이들의 삶도 그대로 녹여져 있다. 시간여행이 갑자기 오는데 그 시간대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시간을 조정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크로노그래프이다. 그리고 재미난 설정 중 하나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로 갈 수 없다는 제약이다. 시간여행을 하는 시간은 겨우 3시간이다. 3시간이 지나면 과거에 있던 곳에서 현재로 넘어온다. 시간은 바뀌어도 장소는 그대로다. 이 부분은 중요한 설정 중 하나다. 그웬돌린의 엄마가 그녀가 시간여행자가 아니길 바라면서도 그녀를 파수꾼들에게 데리고 간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른 시간대로 간 그녀가 어떤 위험에 봉착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이 걱정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크로노그래프다.

 

소설에 대한 감상을 적다보니 대부분 현재보다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더 많다. 아마 도입부란 설정 때문일 것이다. 기존의 시간여행과 다른 설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약간 도식적인 부분이 있을 것 같은 것 중 하나가 그웬돌린과 다른 멋쟁이 시간여행자 기디언과의 로맨스다. 살짝 그 낌새를 드리우고 있다. 열두 명의 시간여행자 피를 크로노그래프에 모두 담으려는 현재의 파수꾼 및 시간여행자들과 이것을 막으려고 사라진 폴과 루시의 대결은 이제 시작이다. 이야기가 흡입력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펼쳐질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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