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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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회 나오키상 수상작이다. 나오키상을 수상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전생이란 소재를 아주 잘 버무려 놓았다. 한 여자의 전생을 기본으로 놓고, 이 전생과 관련된 세 사람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낸다. 차분하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강한 열정과 집착으로 가득하다. 한 여자의 집착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한 삶이 그 속에 담겨 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구성과 전개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관심을 자연적으로 생기게 만든다. 아주 촘촘하게 잘 짠 구성이다. 시간을 이렇게 멋지게 연결시킨 작품을 오랜만에 만났다.

 

오사나이 쓰요시는 약속 시간에 맞춰 급하게 움직인다. 그곳에서 한 유명 여배우와 아이를 만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만남 속에서 회상을 통해 대부분 이루어진다. 그 중심은 두 사람이다. 한 명은 오사나이고, 다른 한 명은 소녀인 루리다. 오사나이의 회상은 과거 자동차 사고로 죽은 아내와 그 딸에게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다. 어느 날 딸이 강한 열병을 앓은 후 이상해졌다는 아내의 말과 아이의 알 수 없는 가출 등이 나온다. 그리고 이 딸이 태어나기 전 그와 아내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연애를 했는지,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아내의 놀람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어떤지 등을 통해 다음 이야기의 밑밥을 던진다. 동시에 그 죽음에 대한 의문도 살짝 생긴다.

 

루리의 전생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전생과 조금 다르다. 이 새로 태어나는 일들이 그녀에게는 달이 차서 기울고 다시 차는 것과 같다. 영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일정 나이가 된 그녀는 열병 같은 경험을 한 후 이전 생을 기억을 회복한다. 작가는 이 전생의 원인이나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참고 자료에서 이런 전생을 하는 아이들이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이 놀라운 현상에 대한 비이성적인 논리 전개 대신 이 전생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영리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전생을 하는 인물은 루리지만 이 전생에 영향을 강하게 받는 인물들은 바로 부모와 그 전생의 원인인 전 연인이다. 오사나이의 딸이 가출해서 찾아간 곳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도 바로 그 연인인 미스미 아키히코와 관계 있다. 이야기는 이제 아키히코의 과거로 넘어간다. 그 과거 속에서 마주한 루리는 성인이고 유부녀다. 대학생 아키히코의 알바 장소에서 만났고, 어느 순간 둘은 불탄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정체가 일부 드러나지만 몇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의문이 풀리는 것은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 속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하나의 의문을 풀어내는 동시에 몇 가지 의문을 깔아놓는다. 이 구성 속에서 루리와 관련된 세 남자의 각각 다른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한 여자의 강한 열망과 집착이 빚어낸 전생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꼈다. 아름답다거나 숭고하다거나 감탄을 자아내기보다는 그 전생 속에 사라진 소녀들과 그 부모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한 작은 설정을 두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 불편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독자성과 인격체 때문이다. 소설 속 부모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이 전생이 하나의 희망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마지막에 가서 특히 이 부분이 부각된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몇 가지 징후를 통해 설명한다.

 

오사나이의 존재는 이야기의 분량과 상관없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루리의 첫 전생에서 아버지였다는 사실도 있지만 그가 다시 전생한 루리와 만나게 된 이유와 전체 이야기의 독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할 때 또 하나의 밑밥 역할을 한다. 여기에 루리 전생의 모든 비밀이 알게 모르게 그와 이어져 있다. 어떤 대목은 반전 같은 역할을 한다. 딸과 아내를 사고로 잃은 후 삶이 산산조각 났지만 이름처럼 굳건히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이후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 내놓은 몇 가지 사실들이 그의 일상을 흔든다. 전생을 한 루리의 조급증은 또 다른 삶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책 속에 드러난 마지막 장면과 오사나이의 새롭게 펼쳐질 삶은 묘하게 갈등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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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아파트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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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욤 뮈소의 소설을 읽었다. 변함없이 잘 읽혔다. 술술 넘어가는 이야기와 빠른 장면 전환은 여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릴러에 도전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만족스럽지 않다. 너무 작위적이고 너무 쉽고 빠르게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 며칠 동안 행운이 깃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채우는 비약은 견고한 연결성을 결코 보여주지 못한다. 한 편의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가독성은 분명하게 있지만 장르 소설의 완성도는 낮다. 본격 스릴러라는 광고는 조금 많이 과장되어 있다.

 

소설의 도입은 한 여자가 자신을 버린 남자가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다. 쉽게 생각하면 이 여자의 처절하고 잔혹한 복수가 나올 것 같지만 뮈소는 이것을 하나의 장치로 사용한다. 그리고 두 남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여자는 전직 형사였던 매들린이고, 남자는 은둔형 극작가 가스파르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둘이 극적으로 만나는 곳은 바로 파리의 아파트다. 옛날에 자주 나왔던 우연이 이들에게 생긴 것이다. 이중 계약 말이다. 문제는 이 아파트를 둘 다 마음에 들어 했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아파트의 전 주인인 화가 숀 로렌츠가 살았다는 것을 알고, 이 천재화가의 불행했던 과거를 조사하면서 시작한다. 가스파르는 일 년에 한 번 한 곳에 머물면서 한 편의 희곡을 쓰는 작가고, 매들린은 한때 미제였던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는 형사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지만 로렌츠의 그림에 매혹되고, 그의 사연에 가슴 아파한다. 인간의 환경 파괴 등을 싫어하는 가스파르가 세상에 나오는 것은 한 편의 희곡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는데 이것이 그의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냉소적인 성격이 약간 알코올 중독의 성향과 만나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다. 그 대상은 바로 매들린이다.

 

전직 형사였던 것을 제외하면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아이다. 기증된 정자를 통해 아이를 갖고 싶어한다. 그녀가 파리로 온 것도 쉬면서 인공수정 등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그녀가 일반적으로 금지된 행동을 한다. 바로 흡연이다. 그녀는 담배를 결코 적지 않게 피운다. 과배란을 위한 활동 중에도, 숀의 사건 수사를 하는 중에도. 뮈소가 소설 속에서 구현한 매들린의 행동들은 실제 한국에서는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들이다.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파리에서 뉴욕까지 비행이나 하루 종일 운전하는 등의 일 말이다. 소설의 다른 부분들과 달리 계속해서 눈에 거슬리는 장면들인데 다른 나라의 문제라 사실 여부를 잘 모르겠다.

 

소설은 두 가지 미스터리를 다룬다. 하나는 혹시 숀 로첸츠가 마지막으로 그렸을지 모르는 그림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숀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아들 줄리안을 찾는 것이다. 그것도 겨우 육 일만에. 그리고 작가는 이 짧은 시간 속에 처음에는 서로 티격태격했던 두 남녀의 과거를 집어넣어 그들의 현재를 이해하게 만들고, 숀을 비롯한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개성을 부여한다. 분명히 이 작업은 성공적이다. 하지만 한 인물에 대해서는 너무 비약적이고, 별도의 부연 설명까지 들어가야만 했다. 이 설명이 나온 후 다시 그 인물이 평가가 바뀌는데 뭔가 개연성이 부족한 느낌이다. 이런 부분들이 본격 스릴러라고 말한 부분에 개인적 반감을 가지게 만든다.

 

한때 뮈소의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 이번에도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연속적으로 읽다가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아마 내가 잠시 뮈소의 책을 멀리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이 나오면 언제나 위시리스트에 올린다. 가독성과 재미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읽지 못하고 있는 책들도 늘어난다. 가볍게 끊어야하는데 미련이 남은 탓이다. 그러다 아주 가끔 멋진 작품이 나와 이 미련을 더 길게 만든다. 이 작품만 놓고 보면 글쎄다. 그렇지만 버리지 못한다. 다만 우선순위가 바뀔 뿐이다. 살 책이 너무 많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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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도시적인 삶 - 무지개떡 건축 탐사 프로젝트
황두진 글.사진 / 반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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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신잡>에서 무지개떡 건축이란 용어가 나온 모양이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나는 이 용어를 몰랐다. 그러다 이 책의 저자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는 것과 목차에 나오는 몇 곳의 건물들에 눈길이 갔다. 솔직히 말해 이름을 아는 건물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사진을 본 후 그 건물의 기억이 살아난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무지개떡 건축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생겼다. 단순히 아파트에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주변과 도시의 발전 등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 점도 같이 배웠다.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단독형, 단지 결합형, 시장 결합형, 해외 도시의 무지개떡 건축 등이다. 각 건물의 도입부에는 저자가 점수를 매긴 무지개떡 지수란 것이 나온다. 입지, 규모, 복합, 보행, 형태 등에 각각 20점씩 부여해 총점을 낸 것이다. 이 총점은 저자 자신의 평점이라 추후 대중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된다면 충분히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몇몇 건물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 재개발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무심코 보고 지나갔던 건물들이 과거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있어 즐거웠다.

 

무지개떡 건축이란 “도시의 기본 밀도를 충족하면서 복합 기능을 통해 거리의 활력에 기여하고, 도시의 기존 맥락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 상주인구와 유동인구의 적절한 균형을 확보할 수 있는 유형”을 말한다. 이름 때문에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요즘 말로 바꾸면 주상복합 혹은 상가아파트 등이다. 저자의 개념은 물론 이것을 포함하여 더 나아가지만 간단하게 말해 그렇다. 저자가 시원적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가아파트다. 이 책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상가아파트를 다루는 것도 이것과 관계있다.

 

예전에는 도시를 떠난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냉정하게 나의 삶을 돌아본 후 전원생활이 주는 유불리를 따지니 도시를 떠날 수가 없었다. 평생 도시에서 나고 자란 탓에 이 편리함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주변을 둘러봐도 쉽게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다. 도시의 근접성과 편리함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무지개떡 건축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저자처럼 거주지와 직장이 같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일반 직장인이 이럴 수는 없다. 하지만 도시의 개발과 개선을 감안한다면 한 번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주상복합의 대명사인 타워팰리스를 제외하면 세운상가와 낙원빌딩이 가장 낯익은 이름이다. 실제로는 이 둘이 나에게는 더 익숙하다. 세운상가에 대한 기억은 지나간 것밖에 없지만 낙원상가 건물은 비교적 최근까지 자주 간 곳이다. 대부분은 스쳐 지나가기만 한 곳이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자주 갔었다. 그때의 이미지만 떠올리며 책을 읽고 건물 이야기를 듣게 되니 사뭇 다른 모습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퇴락한 외부와 달리 아주 잘 정리된 내부의 모습과 편리한 생활환경이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이 책은 기존 이미지를 뒤집고 새로운 시각으로 건물들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직주근접이란 용어와 더불어 생각해볼 것은 그 건물이 주변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등이다. 저자가 중요하게 보는 것 중 하나는 옥상인데 이 부분도 각 건물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다. 이 기록은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저자가 발로 찾아가서 조사한 것이다. 예외 한 곳은 북한의 평양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생동감이 떨어지는 글이었다. 발로 조사한 기록은 과거의 기록과 많은 차이가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변경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과거 건축가의 이름이 없는 곳이 태반이고, 유명한 건축가의 건물조차 원래 의도와 다르게 만들어졌다. 이런 역사와 기록은 한 도시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한국에서 서울을 빼면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인의 남향선호를 자주 꼬집었는데 나도 그렇다. 남향의 좋은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최근 아파트들은 이런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용적율 등의 문제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 퇴락한 아파트는 열외로 치고, 개인적으로 살아보고 싶은 아파트도 꽤 많았다. 건축가의 말빨에 혹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읽다 보니 그냥 무심코 본 건물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조금 생겼고, 관심은 더 높아졌다. “일단 가서 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내가 살 집을 선택할 때도 같이 적용된다. 나에게도 건물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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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했던 여름이 지나고
태재 지음 / 빌리버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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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재, 이름이 낯설다. 시인의 첫 산문집이란 말에 혹했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면 그의 책이 몇 권 나오지 않는다. 이 산문집에 가장 많이 나오는 그의 시집 <우리 집에서 자요>는 검색도 되지 않는다. 구글로 검색하니 독립출판이란 단어가 보인다. 예전에 방송에도 잠시 나왔던 모양이다. 캡쳐된 시도 몇 편 보이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시와 조금 달라 보인다. 이 모든 검색은 이 산문집을 읽기 전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아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산문집을 다 읽고 그를 찾아보니 글 속에서 나왔던 몇 가지 장면이나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시인은 불행의 반대말을 다행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언어의 습성을 작가는 이렇게 깨트린다. 결코 두텁지 않은 분량이라 대부분 회사에서 틈틈이 읽었다.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언어의 온도>와 닮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을 잘 읽지 않는데 가끔 한두 쪽씩 읽으면 나름대로 재미있다. 한두 쪽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몇 십 쪽을 읽는다. 일상에서 시작한 기록과 감상 등은 나의 경험에 따라 달라진다. 공감대의 폭이 다르다. 공감하는 부분보다 요즘 청춘은 이렇게도 사는구나, 하는 감탄과 인식이 더 많이 작용한다.

 

20대에 자신의 선택을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시인의 길로 나섰다. 대단하다. 매년 책을 낸 듯해 더 대단하다. 일상을 기록하는 습관은 개인적으로 부럽다. 이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정제된 문장과 다양한 글쓰기가 실려 있다. 한 편의 글 분량은 언제나 일반적인 책의 두 쪽을 넘어가지 않는다. 가볍게 휙휙 넘기다가 마음에 드는 문구와 내용이 나오면 잠시 멈춘다. 숨을 고르고 내용을 읊조린다. 나처럼 중늙은이가 아닌 청춘들이라면 더 많이 공감할 내용들이다. 그들의 삶이 태재의 문장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잊고 있던 감성과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시인의 글은 관찰과 비유로 가득하다. 하지만 어떤 때는 간결한 직설이 더 효율적이고 시적일 때가 있다. 검색으로 읽은 시들에게 발견한 것이다. 이 산문집에도 그런 모습이 종종 보인다. 가진 것 없는 청춘의 삶은 힘들다. 이 힘겨움을 그는 조용히 견뎌낸다. 옥탑방에서든, 공장지대 옆에서든. 서점에서 일할 때 에피소드는 그 뻔뻔함이 재밌다. 자신의 책을 추천하다니.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책을 가지고 있다는 손님의 반응이다. 내가 몰랐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모르고 있다는 착각은 이래서 위험하다. 그의 사인을 받은 손님은 정말 행운이 많다.

 

스스로 천재라고 말하는 자뻑은 반전으로 더 재밌다. 글쓰기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의 답과 국어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글쓰기 시작했다는 대답은 한 시인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많은 글들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다짐과 일상이 담겨 있다. 청춘은 이렇게 성장한다. 그가 꿈꾸는 생업은 나의 가슴 한 곳에 와 닿는다. “‘천천히’가 아니라 ‘꾸준히’다.”란 문장이다.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꾸준히 하는 것이다. 이것을 평생하려면 엄청난 의지와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꾸준히’를 응원한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일상들 속에서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을 발견한다. 내가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태반이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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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 현대사 -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박찬수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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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을 말하면 PD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둘은 학생 운동과 대중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이다. 이 둘이 많은 논쟁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쪽에 별 관심이 없기에 그 차이를 잘 모른다. 학창시절 운동권이 아니었기에 특히 더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련한 옛 기억 몇 개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다. 역외자였던 나에게는 후일담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역사를 알고 싶고, 몇 년 전 통진당 사태 등으로 다시 불거진 NL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로 회귀하여 그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 여행을 했고, 잘못 알고 있던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배웠다.

 

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은 번역하면 민족 해방 민중 민주주의 혁명론이다. 이것은 둘로 나누어져 민족 해방(NL)파와 민중 민주(PD)파로 불린다. 이 책은 이중에서 NL의 탄생과 전성기와 갈등과 분열 등의 역사를 기록했다. NL의 최전성기는 전대협 시절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 시절 대학을 다녔다. 그때는 앞에서 말했듯이 NL의 의미조차 몰랐다. 관심이 없었고, 가끔 흘러나오는 주체사상에 생리적 거부감이 있었다. 주체사상이란 이름은 좋으나 그 실체가 주체적이지 않았고, 그때까지 받은 반공교육이 아직 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던 시기였다.

 

부제에 강철서신과 뉴라이트가 같이 나와 놀랐다. 강철서신이 어떤 글인지는 모르지만 NL과 뉴라이트라니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NL에서 전향한 인물들이 어떻게 뉴라이트가 되었는지 알려주는 부분은 책 마지막에 나온다. 수많은 운동권 인물들이 전향하여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속에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변명에 실소하게 된다. NL의 전향에 북한 방문이 자리하고 있는 부분은 북한 정보가 비교적 풍부해진 요즘에는 쉽게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가졌던 열정과 충성도를 생각하면 안기부 프락치설에 눈길이 간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김영환이란 이름 낯설다. 그런데 그가 쓴 강철서신은 그 시절에 운동권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북한 방송을 청취하고 주체사상을 공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간첩사건들이 완전히 조작은 아니였다는 의미다. 이런 사건들이 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있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충격이다. 모든 것이 조작일 것이란 섣부른 추측을 한 탓이다. 또 이들이 간첩과 함께 북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어릴 때라면 영웅담으로 흥미진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독자적인 운동세력으로만 알고 있던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알게 된다.

 

NL을 말하면 역시 전대협이다. 임종석으로 대표되는 전대협은 아주 강력한 단체였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도 바로 이런 NL의 성장과 함께 한다. NL은 지하써클에서 나와 학생회를 접수한 후 전국대학생들을 조직했다. 전대협의 구국의 강철대오란 이름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386세대의 주력이었던 이들이 현재 사회에 끼친 부작용 등을 생각하면 그 공과를 조금 더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때와 그 후로 나눠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반미운동과 통일운동이 같이 다루어졌다. 학교 대자보는 미국의 저강도 정책을 비판하는 것으로 가득했었다. 임수경의 방북도 이때다.

 

한총련 이후 대학 안에서 NL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시대의 변화를 학생 운동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이후 NL은 정당으로 변모했는데 NL과 PD가 손을 잡고 민노당을 만들었다. 당권 투쟁은 치열했고, 부정선거가 개입하면서 통합진보당은 다시 쪼개졌다. 개인적으로 많은 기대를 한 정당이었는데 이 사태가 많은 실망을 주었다. 이때 이석기란 인물이 나왔는데 솔직히 말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전혀 없었다. 막후 실세였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알았다. 그리고 저자의 재미난 분석 중 하나는 이정희가 대권 레이스에서 그만 둔 것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 선거 당시의 백기완을 비교한 부분이다. 이때 이정희가 싫어서 박근혜를 찍었다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NL 현대사>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이 책은 NL이 쓴 책이 아니다. 책으로 묶으려는 의도로 시작한 것도 아니다. 한겨레에 연재된 것을 덧붙여 책으로 내었다. 많은 자료와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NL과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운동권과 진보정치권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NL의 대중적 성공 중 하나로 품성론을 든 것과 강철대오의 일사분란함이 바뀐 시대에 어떤 문제점을 불러왔는지 보여줄 때 다시 과거의 달콤한 열매에 집착하는 기성세대를 만난다. 분명히 NL은 한국의 민주화에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과실도 적지 않다. NL의 장점이 시대와 맞을 때는 엄청난 성장을 하였지만 바뀐 시대를 따라가지 못할 때는 사그라들었다. 내가 살면서 지나온 시간들 속에 한 조직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그 길이 나의 길과 어떻게 걸치고 엇갈렸는지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민중운동사를 공부할 필요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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