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갈래 길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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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인 ‘La tresses’는 ‘세 갈래로 나눈 머리카락을 서로 엇걸어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 혹은 ‘세 가닥을 하나로 땋아 엮은 줄이나 끈’을 의미한다. 이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각각 다른 지역과 다른 환경과 나이를 가진 이들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연결시킬 것이란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 부분을 보면서 이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와 개인의 관계가 아주 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억지스럽지도 않고, 현실의 장벽을 자신들만의 의지와 노력으로 넘어가려는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인도, 이탈리아, 캐나다의 세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인도의 스미타는 불가촉천민으로 똥을 손으로 치운 후 다른 계급이 던져주는 음식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딸 릴리타가 학교에서 글을 배우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의지로 가득한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딸의 학습이다. 하지만 첫 등교한 딸의 등에는 상처가 나있다. 선생이 때린 것이다. 불가촉천민 달리트의 딸에게 바닥을 쓸라는 명령했는데 이를 듣지 않았다는 이유다. 엄마는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다른 희망을 품고 그 마을을 떠난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줄리아는 스무 살이다. 가업으로 가발 공방을 운영하는 아빠 밑에서 일한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고, 가발을 염색하는 집안의 비밀을 배웠다. 장차 공방을 이을 후계자다. 그런데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늘 긴 머리를 사기 위해 달렸던 길이라 이해할 수 없는 사고다. 이런 그녀에게 인도 시크교도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던 그녀였는데 이 남자는 다르다. 그녀가 먼저 다가간다.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아버지의 서랍 속에서 공방이 처한 현실을 알게 된다. 재료가 없어 빚에 시달리고 공방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

 

캐나다의 사라는 로펌의 임원이다. 세 아이의 엄마지만 자신의 일에 온갖 열정을 다 바친다. 로펌에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여자 임원이 된 것이다. 더 큰 성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만 단 하나 암만은 어쩔 수 없다. 가슴에 생긴 귤만한 암은 그녀의 육체를 파괴하고, 정신을 약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주변 사람들의 냉정한 시선과 애정 없는 몇 마디와 냉혹한 현실의 벽이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든다. 그녀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이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주변에 알리고, 점점 그녀를 무너트린다.

 

이렇게 이 세 여자는 현실이란 벽 속에서 아등바등한다. 하지만 결코 이 벽속에 매몰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줄 뿐이다. 환상을 심어주지도 않고, 과도한 희망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 속에서 꿈틀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표현할 뿐이다. 지금까지 그들을 가둔 세계 밖에도 삶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삶의 가능성을 말한다. 스미타는 딸의 공부고, 줄리아는 공방의 지속이고, 사라는 아이와 새로운 도전이다. 이들의 삶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가진 엄청난 에너지를 생각하면 아주 큰 장애가 생긴다고 해도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 같다.

 

하나 더. 이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아주 노련하다. 한 여자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다음 이야기에 호기심을 품게 하는 문장을 넣는다. 처음에는 오해도 했지만 이 긴장감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 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이들은 직접 만나지 않는다. 서로의 얼굴도, 사연도 모른다. 하지만 세 갈래의 땋은 머리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 이어짐이 드러나는 방식과 그 결과 중 하나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이고, 자신이 주인공이란 평범한 이야기가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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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미소
줄리앙 아란다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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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이 소설은 모두 며칠 동안 새벽에만 읽었다. 다른 책도 같이 보는 중이라고 하지만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새벽의 차분한 기분 탓인지 상대적으로 집중이 잘 되었다. 간결한 문장보다는 묘사와 서술이 많은 책인데 생각보다 훨씬 잘 읽혔다. 한 남자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긴 과정을 필요한 만큼 넣어 분량 조절도 잘 되었다. 프랑스 문학을 읽을 때 번역이나 긴 문장들 때문에 고생한 적이 많은데 이번은 아니었다. 그리고 폴 베르튄의 삶 속에서 내 삶의 파편들이 자주 보였다. 몇몇 장면을 볼 때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달은 그냥 달일 뿐이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폴도 이 달의 영향을 받는다. 목차에 나오는 달의 모습은 이것을 대변한다. 외판원 같은 한 남자가 찾아오는 1992년 모르비앙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 남자의 정체는 책 중반으로 넘어가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폴의 탄생으로 넘어가 한 아이가 어떤 삶의 질곡을 경험했는지 보여준다. 자신의 탄생을 원하지 않는 듯한 아버지와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존재가 겹쳐지고, 형들과의 우애도 돈독하다. 밀 농사꾼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아이는 선원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아직 어린 소년에게는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다.

 

가업을 물려받을 장남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휘두르는 권력은 아버지의 판박이 같다. 이런 성장 과정에 독일군의 점령이 끼어 있다. 밀의 징발과 레지스탕스에 대한 경계는 이 마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폴은 한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마틸드다. 첫 사랑의 열병은 그로 하여금 무모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독일군의 경계를 뚫고 마틸드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십 대 소년이 이 경계를 뚫는 것은 힘들다. 잡힌다. 죽을 뻔한 상황에서 한 독일군 장교가 그를 구해준다. 딸 카트린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와의 대화는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의 적대감이 왜 계속 이어졌는지 알려준다. 부모에 대한 복수가 그 이유 중 하나다.

 

패잔병이 된 독일군들은 마을 사람들의 살기 속에 학살당할 분위기다. 실제 한 장교가 죽는다. 그가 바로 폴을 구해준 그 장교다. 그는 폴에게 자신의 사랑을 딸에게 전달해달라고 말한다. 생명의 은인인 그의 부탁은 이제 그가 평생 껴안고 살아야 하는 일이 되었다. 이 광기와 살기 속에서 폴과 마틸드는 사랑에 빠진다. 순수한 두 영혼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병역 의무는 피할 수 없다. 이 기간이 누군가에는 헤어짐의 시간일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파리 근방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그들의 도움으로 카트린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떠난 후다.

 

이후 폴과 마틸드는 결혼하고 자신들만의 삶을 만들어간다. 폴은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가 운 좋게 찾아온 기회를 잡아 선원이 된다. 어릴 때 꿈이 현실로 변했다. 폴은 한 달이나 몇 개월씩 바다로 나가야 했고, 아내는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한다. 이들에게 이 떨어짐은 다시 만날 날에 대한 기대를 채워가는 과정일 뿐이다. 달이 점점 차오르듯이. 그러다 카트린이 이사갔다는 섬을 방문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든다. 이렇게 이 소설은 새로운 인연이 새로운 장소와 경험을 통해 이어진다. 삶은 언제나 이렇게 우연 같은 필연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진한 사랑이 깔려있다. 이 사랑은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선한 행위 하나가 다른 선행을 낳고, 이것이 또 다른 선행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보기만해도 즐겁다. 기대하지 않은 결과가 먼 훗날 나타날 때, 자신의 선행이 또 다른 선행을 불러오는 과정에 고통이 생겼다고 할 때 삶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읽으면서 여성 작가 같다는 느낌을 주는 섬세한 문장과 묘사를 보면서 나도 이런 문장에 이제 조금 적응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의 비약 속에 삶의 갖가지 모습이 요약되고, 가려지고, 잊혀졌다고 해도 폴의 삶은 자신의 바람과 상상과 의지 속에서 굳건히 뿌리내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생략된 이야기는 그가 살아왔던 과정 속에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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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차려주는 식탁 - 어른이 되어서도 너를 지켜줄 가장 따뜻하고 든든한 기억
김진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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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들이 첫손으로 꼽는 정직하고 진실한 식재료 전문가란 이름보다 딸에게 밥을 차려준다는 것에 더 눈길이 갔다. 현실에서 이런 아빠가 과연 얼마나 될까? 엄마가 없다면 고개를 쉽게 끄덕이겠지만 엄마도 있다. 뭐 밥을 엄마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친구 중에서도 자주 아이들의 밥을 차려주는 아빠 역할을 하는 경우를 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최소한 이 책의 저자처럼 늘 차려주지는 않는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저자의 딸을 위한 식탁은 대단하다. 그처럼 군 취사병이었던 후배도 집에서 밥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식품공학 전공에 군 취사병 출신의 식품 MD가 저자 김진영이다. 좋은 식재료를 발굴하고 기획하는 것이 그의 일이지만 이 부분에 대한 것은 지나가듯이 나온 것 외에는 없다. 물론 자신이 딸에게 차려주는 음식을 말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식재료에 대해 말하지만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성공한 몇 가지 식재료만 나오지 실패한 것들은 아예 말조차 하지 않는다. 실패한 게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 문맥 상 필요 없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식재료에 대한 분명한 철학은 글 속에 아주 잘 녹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잘 몰랐던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배웠다. 아마 실생활에서 몇 가지는 그대로 응용할 것 같다.

 

취사병 출신이라고 하지만 그는 전문 요리사가 아니다. 하지만 딸바보 아빠는 그 어떤 전문 요리사보다 열정적으로 요리한다. 옛 기억을 가지고 만든 식빵이 실패해도, 머랭쿠키가 엉망이 되어도, 자신이 원하는 식재료를 음식에 넣지 못해도 딸 윤희가 맛있게 먹으면 흐뭇한 아빠 미소가 생긴다. 그런데 이 딸의 미각이 아주 특별하다. 비싼 투뿔 소고기는 질기다고 하고, 돼지고기를 가장 좋아한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엄청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돼지고기도 양념돼지갈비가 최고다. 외식할 때 식비가 확 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집의 기본 식재료들이 결코 싼 것이 아니란 점이다. 유능한 식품 MD는 가장 좋은 쌀과 비싼 방사 토종닭과 자염 등으로 음식을 하면서 기본 금액을 높여놓았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딸에게 차려주는 식탁 이야기다. 네 파트로 나누고, 각 파트 속에 하나의 음식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그럼 된 거다’이다. 딸의 음식 투정이나 정성과 높은 비용이 담긴 음식에 대한 반응이 나올 때면 이 말이 꼭 나온다. 아빠의 사랑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사랑은 자신의 경험과 추억이 엮이면서 다양하게 풀려나온다. 실수도 하고, 성공도 하는 와중에 아주 멋진 요리법을 발견한다. 그 중 몇 가지는 나도 도전하고 싶을 정도다. 뭐 내가 주방에 들어간 지가 언제인가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딸바보 아빠의 사랑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윤희의 미각이다. 생김치는 먹지 않지만 김치찌개와 볶은 김치는 먹고, 시장에 파는 일반 닭과 방사 토종닭의 맛을 구분하고, 어패류는 거의 먹지 않고, 야채도 싫어한다. 버섯이나 야채를 갈아넣으면 먹지만 작은 조각이라도 씹게 되면 한 소리한다. 이런 딸의 미각을 아는 유명 셰프가 시식을 요청할 정도다. 씹히는 고기 두께와 작은 멸치의 크기 차이를 알아챈다. 이런 딸이니 얼마나 아빠의 요리에 까탈스럽겠는가. 하지만 아빠는 힘들어도 딸의 입속에 들어가는 음식에 정성을 다한다. 물론 힘들고 피곤해서 최상의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이때 귀신 같이 딸은 그 차이를 알아채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딸 바보의 사랑이 대단하고 대단했다. 딸의 시크한 반응도 보기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마지막으로 오면서 “아빠, 나 몰라.”란 단어가 나올 때 왠지 기분이 상했다. 그의 노력과 정성을 몰라준다는 것도 있지만 괜히 나의 감정이 이입된 것이다. 앞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 먹지 않은 음식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나도 하나 더 배운다. 나중에 그 맛을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란 기대는 나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아빠의 사랑 가득한 식탁을 보면서 나의 식탐이 먼저 떠올랐다. 부끄럽고 부럽지만 그는 그고 나는 나다. 저자의 표현대로 그럼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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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 재건축 열풍에서 아파트 민주주의까지, 인류학자의 아파트 탐사기
정헌목 지음 / 반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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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되었다. 운 좋게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십 년 이상 되었다. 더 운이 좋은 것은 이사를 한 번만 했다는 것이다. 운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내가 전세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동생 부부만 해도 2년이 지나면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매번 생겼다. 이 운이 나로 하여금 집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만들었다. 좋게 표현하면 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집을 사지 않게 되면서 재산 증식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집을 살 능력이 되는지 하는 것을 별도의 문제다.

 

재산 증식의 기회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2000년대 이후 급격하게 상승한 아파트의 가격을 떠올리고, 이 시기에 집값 상승으로 손쉽게 부동산 이익을 챙긴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시 아파트 가격이 상승하면서 또 한 번 이익을 본 사람들이 있다. 나 같이 부동산에 무관심하고 현재의 집값이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 하지만 이 기회에 올라탔는데도 여러 가지 외부 요인으로 가격이 올라가지 않았다면 어떨까? 주변의 아파트에 비해 우리 아파트 가격이 더 오르지 못했다면 어떨까?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몇 가지 생각들이다.

 

인류학자가 아파트 단지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그 속내를 낱낱이 들여다 본 책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착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아파트 단지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갔다는 대목이다. 나의 경우 이 부분을 읽고 그가 이 브랜드 아파트 단지에서 2년 동안 산 것으로 착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수도권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서 2년여 동안 현장연구를 한 것이다. 입주민을 만나고, 입주자대표회의와 각종 자생단체의 활동과 사건 사고 등을 관찰하고, 온라인 입주민 카페에 축적된 수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입주민들의 상호작용을 분석했다. 어떤 대목은 하나의 사건 보고서 같고, 어떤 글은 한 편의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예상한 것보다 흥미로웠다.

 

아파트에 살지만 부정적인 시각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여유가 되면 단독주택에 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전세로 살기에 자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책 제목이기도 한 가치 있는 아파트란 결국 아파트 가격의 상승을 의미한다. 재건축의 결정과 실행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는 대목은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입주 이후 조합원과 분양자들 사이의 대립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재건축을 진행하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한 것도 처음 알았다. 관심이 많지 않아 잘 몰랐던 것들을 이번 기회에 많이 알게 되었다.

 

현실에서 존재하지만 실제 자신이 현장 연구한 아파트의 이름을 저자는 가명으로 처리했다. 열심히 검색한다면 실제 아파트 이름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이 현장 연구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재건축 조합 아파트와 브랜드 아파트다.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 둘의 결합 혹은 단독 진행은 아파트의 필수적인 진행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둘의 결합을 다루면서 아파트 문제 등을 더 폭 넓고 깊이 있게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도권이란 지역의 특성까지 덧붙여지면서 다른 특성까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다섯 장으로 나눈 이야기에서 1장과 2장은 아파트 단지에 대한 일반적인 인류학자의 시각을 다룬다. 아파트 단지의 여러 현상을 보여주는데 재미난 부분은 서구와 달리 한국의 아파트가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주택으로 자리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의 과거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전철을 타고 다닐 때 왜 저런 밀집된 아파트에서 살까? 하는 의구심과 브랜드 아파트가 뭐 대단하다고 하는 판단 착오 등이 대부분이다. 합리적 판단과 이성보다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거대한 동력인지 미쳐 깨닫지 못한 나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가치 있는 아파트는 가격이 많이 오른 아파트를 말한다. 이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입주자대표회의나 부녀회 등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이미 언론을 통해 많이 나왔다. 하지만 인류학자는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든 이유와 그 이면을 엿본다. 그리고 한국만의 특징인 전세입자와 자가 거주자의 비율과 아파트 현안에 대한 입주자들의 무관심 등도 같이 보여주면서 이 대단지의 현실을 알려준다. 집단 이기가 충돌하는 현장에서도 무관심한 입주자들이 대다수란 현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안전한 단지라는 믿음이 깨어진 단지 내 어린이 사망 사건을 둘러싼 보고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자율방법대의 활동이 이타심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그 깊은 속내에는 아파트 가격 상승이란 기대가 깔려 있다는 지적은 결국 아파트에 전 재산을 올인하고 있는 한국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한 이분법이나 피상적인 관찰만으로 이 문제를 보여줄 수는 없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불거진 몇 가지 사안들은 실제 한 아파트에 오래 살면서 자주 본 것이라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부분들이 아파트 소유자들의 입장에서 쓴 것들이 대부분인데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전세자들의 입장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아쉽다. 물론 평균 거주 기간이 5년 정도에 머문 것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고, 가치 있는 아파트에 목을 매는 사람들도 소유자들이란 부분에서 공감한다. 부인할 수 없는 아파트 공화국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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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랑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11
윤이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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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만난 윤이형의 소설이다. 내가 읽었다고 기억하는 작가의 작품은 단 한 권이다. 바로 <개인적 기억>이다. 이 작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이 소설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늑대인간과 인간의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늑대인간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아니 현실 속에 늑대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이 판타지를 깨트리는 것은 이 늑대인간의 존재보다 작가가 이 가상의 존재를 통해 풀어내는 이야기가 훨씬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서른네 살의 작가 한서영. 그녀는 보름달이 뜨면 늑대인간의 꿈을 꾼다. 현실에서 그녀가 늑대인간으로 변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꿈속에서 그녀는 연인을 잡아먹는다. 이 살육이 그녀로 하여금 아주 멋진 작품을 쓰게 만든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그 사랑은 가볍게 깨어진다. 그녀가 쓴 소설은 소위 대박은 아니지만 꾸준히 발간되고 사랑을 받고 있다. 서영은 이 상황이 결코 반갑지도 즐겁지도 않다. 꿈 속 살육이 그 당사자도 몰랐던 깊이를 드러나게 한다고 하지만 헤어짐의 아픔과 살육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파벳 순서로 출간한 열두 권을 이전 연인들의 유골함이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한다는 것이 행복한 상상이자 즐거움이어야 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고 인연은 이어진다. 이때 온 한 통의 메일은 그녀를 새로운 연인으로 이끈다. 신인작가 최소운이 참여한 무크지 <흔>의 인터뷰는 그녀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 불편함의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최소운의 존재다. 소운의 소설 <하줄라프>의 팬이기도 한 서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소운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 사랑과 별도로 경계의 소설인 <하줄라프>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웠다. 실제 작품으로 나온다면 판타지 팬들의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둘은 서로의 감정을 쉽게 풀어낸다.

 

처음 두 여성이 연인이 된다고 했을 때 판타지 소설처럼 양성애자들의 세계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 서영은 양성애자로, 소운은 동성애자로 설정했다. 이 설정은 서영의 과거 연인 문제를 가볍게 넘어가게 만든다. 둘의 두 번째 만남은 서로에 대한 탐색이다. 이 부분에서 나의 관심사는 작가가 풀어놓은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평가와 선호도다. 아는 작가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낯선 이름이 몇 명 보인다. 사놓고 묵혀두고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한 감탄은 언제나 이번에는 읽어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이 과정은 둘을 더욱 밀착하게 만든다. 서영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작가는 성소수자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냄과 동시에 작가와 글쓰기 등도 같이 놓아둔다. 소운이 자신 속에서 풀려나오길 바라는 이야기를 써 소설을 만드는 것과 별개로 서영에 대한 감정이 이 모든 길을 막는다.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소운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뱉어내고, 이것을 서영이 받아들인 후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보통의 연인과 별다를 게 없다. 어릴 때 엇나간 시선으로 본 성소수자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이런 연인의 삶 속에 한 인물의 성공은 서로 공유할 시간을 뺏어간다. 그리고 소운을 잡아먹음으로써 헤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늘 같이 한다. 늑대인간의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소운과의 관계는 서영이 언제부터 이 꿈을 꾸게 되었는지,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작가는 연인을 먹은 꿈과 서영이 연인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그녀가 쓴 소설들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소운과의 관계는 꿈의 설정과 전개도 변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연인을 잡아먹어야만 쓸 수 있던 글을 자신이 싸워가면서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그녀는 연인을 잡아먹는 늑대에서 이야기를 쓰는 늑대로 변했다. 소설 제목 <설랑>이 뜻하는 바다. 로맨스가 작가의 글쓰기로 살짝 변한다. 그리고 이 소설 속 두 인물의 감정을 격렬하게 풀어낸 묘사와 소설 속 다른 소설은 아주 매혹적이다. 소설 분량과 상관없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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