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미소
줄리앙 아란다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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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이 소설은 모두 며칠 동안 새벽에만 읽었다. 다른 책도 같이 보는 중이라고 하지만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새벽의 차분한 기분 탓인지 상대적으로 집중이 잘 되었다. 간결한 문장보다는 묘사와 서술이 많은 책인데 생각보다 훨씬 잘 읽혔다. 한 남자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긴 과정을 필요한 만큼 넣어 분량 조절도 잘 되었다. 프랑스 문학을 읽을 때 번역이나 긴 문장들 때문에 고생한 적이 많은데 이번은 아니었다. 그리고 폴 베르튄의 삶 속에서 내 삶의 파편들이 자주 보였다. 몇몇 장면을 볼 때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달은 그냥 달일 뿐이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폴도 이 달의 영향을 받는다. 목차에 나오는 달의 모습은 이것을 대변한다. 외판원 같은 한 남자가 찾아오는 1992년 모르비앙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 남자의 정체는 책 중반으로 넘어가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폴의 탄생으로 넘어가 한 아이가 어떤 삶의 질곡을 경험했는지 보여준다. 자신의 탄생을 원하지 않는 듯한 아버지와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존재가 겹쳐지고, 형들과의 우애도 돈독하다. 밀 농사꾼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아이는 선원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아직 어린 소년에게는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다.

 

가업을 물려받을 장남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휘두르는 권력은 아버지의 판박이 같다. 이런 성장 과정에 독일군의 점령이 끼어 있다. 밀의 징발과 레지스탕스에 대한 경계는 이 마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폴은 한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마틸드다. 첫 사랑의 열병은 그로 하여금 무모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독일군의 경계를 뚫고 마틸드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십 대 소년이 이 경계를 뚫는 것은 힘들다. 잡힌다. 죽을 뻔한 상황에서 한 독일군 장교가 그를 구해준다. 딸 카트린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와의 대화는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의 적대감이 왜 계속 이어졌는지 알려준다. 부모에 대한 복수가 그 이유 중 하나다.

 

패잔병이 된 독일군들은 마을 사람들의 살기 속에 학살당할 분위기다. 실제 한 장교가 죽는다. 그가 바로 폴을 구해준 그 장교다. 그는 폴에게 자신의 사랑을 딸에게 전달해달라고 말한다. 생명의 은인인 그의 부탁은 이제 그가 평생 껴안고 살아야 하는 일이 되었다. 이 광기와 살기 속에서 폴과 마틸드는 사랑에 빠진다. 순수한 두 영혼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병역 의무는 피할 수 없다. 이 기간이 누군가에는 헤어짐의 시간일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파리 근방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그들의 도움으로 카트린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떠난 후다.

 

이후 폴과 마틸드는 결혼하고 자신들만의 삶을 만들어간다. 폴은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가 운 좋게 찾아온 기회를 잡아 선원이 된다. 어릴 때 꿈이 현실로 변했다. 폴은 한 달이나 몇 개월씩 바다로 나가야 했고, 아내는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한다. 이들에게 이 떨어짐은 다시 만날 날에 대한 기대를 채워가는 과정일 뿐이다. 달이 점점 차오르듯이. 그러다 카트린이 이사갔다는 섬을 방문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든다. 이렇게 이 소설은 새로운 인연이 새로운 장소와 경험을 통해 이어진다. 삶은 언제나 이렇게 우연 같은 필연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진한 사랑이 깔려있다. 이 사랑은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선한 행위 하나가 다른 선행을 낳고, 이것이 또 다른 선행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보기만해도 즐겁다. 기대하지 않은 결과가 먼 훗날 나타날 때, 자신의 선행이 또 다른 선행을 불러오는 과정에 고통이 생겼다고 할 때 삶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읽으면서 여성 작가 같다는 느낌을 주는 섬세한 문장과 묘사를 보면서 나도 이런 문장에 이제 조금 적응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의 비약 속에 삶의 갖가지 모습이 요약되고, 가려지고, 잊혀졌다고 해도 폴의 삶은 자신의 바람과 상상과 의지 속에서 굳건히 뿌리내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생략된 이야기는 그가 살아왔던 과정 속에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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