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키
D. M. 풀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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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키는 모든 대여금고를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의미한다. 만약 대여금고의 마스터키가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시스템으로 이 마스터키 사용을 억제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악용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 소설은 데드키가 존재했던 시절 이 열쇠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사람들과 이 열쇠 때문에 위험과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20년이란 시간을 두고 펼쳐지게 만들어 인간의 탐욕이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이 두 시간대의 주인공은 모두 여자들이고, 나이도 환경도 다르다.

 

1978년과 1998년이란 두 시간대 속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는 이 두 시간대를 결코 합치지 않는다. 1978년의 주인공은 겨우 열여섯 살 소녀 베아트리스고, 1998년 주인공은 건축회사 인턴인 23살의 아이리스다. 내 기준에서 본다면 둘 다 아직 사회의 이면을 잘 모를 나이다. 그리고 두 여성은 사회적으로 상대적 약자다. 이모 도리스의 도움으로 신분증을 위조하고 겨우 취직한 베아트리스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 직원에 취직된다. 멋진 미녀인 맥스란 동료도 만난다. 반면 이 은행이 문을 닫은 후 20년 만에 건물 실사를 위해 온 인물이 아이리스다.

 

베아트리스와 아이리스는 자신들도 모르게 데드키와 그 정체가 의심스러운 547 대여금고에 다가간다. 작가는 이 둘이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기 전 그들의 일상을 차분히 보여준다. 평범한 직장 여성들의 모습이다. 그녀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이 은행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주 암시한다. 베아트리스는 FBI수사 소문이 있고, 아이리스는 한 시점에서 사람만 사라진 사무실 공간이 남겨져 있다. 베아트리스의 시간은 그 은행이 문을 닫게 되는 이유와 숨겨진 비밀을 조금씩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아이리스의 시간은 박제된 공간 속에서 의문의 상황을 불러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오래 전에는 신분증 위조가 쉬웠다. 전산자료가 없다보니 대조할 자료가 없으면 그냥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전 소설에는 이런 신분증 위조 이야기가 많다. 물론 요즘도 신분증 위조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공문서 위조들도 프로그램으로 얼마나 멋지게 해내는가. 이런 시절에도 아날로그 방식의 열쇠를 이용한 대여금고는 아직 유효하다. 사실 집밖에 중요한 물건을 놓아두기에 대여금고만큼 좋은 것은 없다. 많은 소설들이 이 대여금고를 이용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 대여금고는 부패의 온상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라가 저질러진다.

 

은행이 넘어갔다면 대여금고 주인들이 나타나 모두 찾아가야 정상이다. 통지가 늦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주인이 죽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알리지 않을 수도 있다. 소설 속 한 사건은 한 여성이 자신의 대여금고 속 자산이 사라졌다고 말했고, 그 얼마 후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아주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폐쇄된 은행의 대여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절차도 복잡하다. 열쇠가 없다면 드릴로 뚫어야 한다. 20년 동안 몇 번 열린 적이 있지만 많은 수의 대여금고는 잠긴 채 있었다. 이유는 데드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열쇠를 우연히 아이리스가 발견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가치를 알지 못하면 보물이 아니다. 아이리스도 베아트리스도 대여금고의 열쇠가 지닌 가치를 잘 모른다. 사건은 언제나 이 두 사람의 주변에서 일어난다. 베아트리스는 도리스 이모의 병과 맥스의 실종으로 상황이 급변한다. 아이리스는 은행 건물을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진행되다 시체의 발견으로 급진전한다. 이 상황들 속에 밝혀지는 사실들은 부패, 비리, 탈세, 살인 등 돈을 위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일들이다. 그리고 거대한 탐욕은 결코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그 보물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모든 사건이 끝난 시점도 1998년에 머물고 있는데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있다. 과연 작가는 이 후일담으로 이 의문을 풀어낼지는 의문이다.

 

적지 않은 분량인데 가독성이 나쁘지 않다. 두 시간대를 교차하면서 비밀을 풀어내고 엮는다. 1998년보다 1978년도에 비밀이 더 많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왜 이모가 베아트리스를 데리고 사는지, 왜 은행에 힘들게 취직을 시켰는지 알려준다. 몇 가지는 예측이 가능하다. 부패한 집단에게 자신들의 비밀이 알려지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할 일이다. 돈의 가진 자들이 권력과 함께 할 때 그 힘은 더욱 거대해진다. 열여섯 소녀가 혼자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20년이 지나도 그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베아트리스의 현재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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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킬 - 이재량 장편소설
이재량 지음 / 나무옆의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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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잠수함>을 재밌게 읽은 기억 때문에 선택했다. 바퀴벌레를 모두 죽이려는 한 남자의 의지가 눈길을 끌었다. 실제 예상한 것과 전개된 이야기는 많은 차이가 있다. 내가 관심을 둔 부분은 블랙코미디였는데 읽다보니 엽기와 공포가 먼저 다가온다. 주인공 고광남의 일생은 보고 있으면 답답하다. 그의 강박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이야기는 나아가고, 다양한 변주가 일어난다. 제목인 올 킬은 고광남이 바퀴벌레를 모두 죽이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벌레를 제거하는 회사의 이름이다.

 

3부로 나누어져 이야기가 펼쳐진다. 1부는 고광남이 왜 이렇게 청결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바퀴벌레의 등장과 그 싸움과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학대 받으면서 자란 광남이 결혼까지 하게 된 사연과 시골로 내려와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바퀴벌레 한 마리가 등장하면서 바뀐다. 읍내에서 해충 구제 전문회사 ㈜올 킬의 광고를 발견하고 연락한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거구의 여성인 안희수 대리다. 그녀는 아주 멋지게 진공청소기 같은 흡입기와 강한 소독약으로 집안의 바퀴벌레를 청소한다. 며칠 동안은 평온한 잠을 잔다. 하지만 이 일상은 얼마 가지 않아 깨어진다.

 

광남의 옆집은 유명 건축가와 살림 연구가 부부가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이 부부가 이사 온 후 집의 고요함을 깨어졌다. 환경 잡지에 이 집이 실리고, 친환경 마을 조성을 위해 이 부부는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먹은 쓰레기는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산짐승들이 내려와 쓰레기 봉투를 파헤칠 정도다. 이 집에 초대를 받아 집 내부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만 그는 불편하다. 그가 바라는 삶은 청결하고 고요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은 광남의 집에 다시 바퀴벌레가 등장하게 만든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안희수 대리는 무료로 옆집 바퀴벌레를 치워주겠다고 했지만 이 부부는 거절한다. 안 대리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브이아이피 고객 가입과 프리미엄 서비스 신청을 권유한다. 바퀴벌레가 없어지길 바란 광남은 약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나름 거액으로 가입한다. 그 다음 날 바퀴벌레뿐만 아니라 옆집의 음식물 쓰레기와 옆집 사람들과 짐까지 모두 사라진다. 남겨진 것은 전축과 말러 교향곡 앨범뿐이다. 그리고 돼지를 키우는 양 씨 집에 엄청난 양의 간 고기가 택배로 배달된다. 무언가 서늘한 기분이 든다. 이 기분은 책을 덮을 때까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2부에서는 3개월 후 한일 국제결혼 부부가 이사온다. 이전 주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는 간단한 이야기가 나오고, 심장이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해 시골로 내려온 남편의 희생 등이 먼저 펼쳐진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 남편의 숨겨진 감정들이 밖으로 표출된다. 안팎이 다른 인물이란 사실이 나중에야 알려진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이 부부의 결혼생활 이면에는 욕망이 충돌하고 억압과 남들 시선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다시 바퀴벌레가 등장한다. 문제는 남편이 올 킬에 브이아이피 고객 가입과 프리미엄 서비스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이 서비스의 의미를 아는 광남은 공포에 짓눌린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고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처음 결벽증 환자의 고군분투 정도로 생각했던 이야기는 감춰진 공포와 환각으로 이어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3부에서 광남의 아들 배식이 나타날 때는 더욱 그렇다. 이렇게 작가는 반복되는 상황의 변주를 통해 바퀴벌레와의 대결을 그려낸다. 안 대리가 바퀴벌레를 두고 하는 말도 상황에 따라 바뀐다. 처음에는 한 마리만 생겨도 금방 번식하고 쉽게 죽지 않으니 철저하게 죽여야 한다는 논리였다면 나중에는 그냥 참고 살라고 한다. 하지만 바퀴벌레에 잠식된 정신은 이것을 거부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는데 어느 부분에서는 역겨울 정도다. 이 소설을 모두 읽은 지금 왠지 모르게 귓속에서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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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즌 아티스트
조너선 무어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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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처음에는 최근에 읽었던 한 작품이 머릿속을 지나갔고, 마지막에 도달할 즈음에는 오래전에 읽었던 한 작품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제목들을 말하면 그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 여기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작품들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마무리는 다르다. 주인공의 직업이나 공간적 배경도 다른데 이것이 이 작품만의 매력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왠지 모르게 몇몇 부분에서 강한 집중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내 몸 상태 때문인지, 아니면 이야기만 만들어내는 분위기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케일럽이 여자친구 브리짓과 싸운 후 술은 마시며 돌아다니는 장면과 그를 매혹시킨 한 여성의 등장은 모호하게 다가왔다. 화가인 브리짓과 케일럽이 만나 행복한 시간을 가진 듯한 이 둘이 싸우고, 상처 입힌 후 밤을 돌아다니게 된 이유가 나중에 나오지만 이 때문에 이 상황에 쉽게 빠져들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매혹적인 여성의 흔적을 뒤쫓고, 그녀가 권한 술 압생트가 등장할 때 미로 속 상황은 더 모호하게 다가왔다. 한때 예술가들이 사랑했지만 문제가 많았던 술이 아닌가.

 

케일럽의 방황 속에 친구 헨리가 찾아온다. 그는 법의학자다. 의문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이 시체가 의문의 독에 중독된 후 오랫동안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케일럽은 샌프란스시코의 UCSF 메디컬 센터에서 독성학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가 지원금을 받으려는 연구는 고통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의 연구소는 독 등에 대한 최고의 분석 기계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헨리가 그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법의학센터에서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했기에 찾아왔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체가 계속 발견된다.

 

브리짓과 싸운 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에멀린에게 매혹된다. 그녀가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고, 짧은 만남을 가진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에멀린을 손으로 그려서 그녀가 나타날 것 같은 바에 연락처와 함께 남겼기 때문이다. 에멀린에게 빠진 그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출근이 불안정하고 그에게 온 메일도 제대로 읽지 않는다. 그녀가 연락해서 요리를 해달라고 하고, 요리 재료를 손보고, 그녀에게 이끌려 집밖 어딘가로 간다. 오래된 건물 속에서 그녀에게 요리를 해준다. 행복하지만 왠지 불안하다. 이후 만남도 비현실적으로 흘러간다.

 

이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들이 그를 찾아온다. 특히 캐넌 형사는 왠지 모르게 그를 의심하고 계속 뒤좇는다. 그의 알리바이를 묻고,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의 연구소의 프로그램은 누가 만든 것인지 등도 묻는다. 그가 연구하는 주제만 놓고 보면 그의 연구소 누군가가 이런 사건을 저질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다. 광기의 과학자들은 언제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독성학 연구소의 소장이다. 그가 가진 약들이라면 이런 상황을 쉽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신비롭고 매혹적인 여성 에멀린이 있지 않은가. 그녀라면 가능하다. 작가는 이 상황을 일반적인 스릴러로 풀어내지 않는다. 내가 처음 말한 두 작품이 떠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소설에서 실종자를 찾는 전단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가는 앞부분에 한 남자를 찾는 전단지를 등장시키고, 마지막에 또 이와 비슷한 전단지를 등장시켜 두 사건을 엮는다. 처음 실종된 남자가 나중에 중독된 상태에서 고문당한 시체로 발견되는 것을 떠올리면 이 살인자가 어떻게 시체를 처리하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 케일럽의 과거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그녀의 정체를 밝히면 될 텐데 남자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지키려고 한다. 당연히 사건은 더 꼬인다. 물론 이것도 뒤로 가면 밝혀지지만 사실들이 충돌하면서 경계가 모호해진다. 예상한 반전이다. 만약 비슷한 반전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다른 재미를 누렸을 것 같은 작은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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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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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책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최근에 SF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좋은 SF작품들이 다시 번역 출간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이전에 열심히 SF 소설들을 모은 적이 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고, 인터넷을 뒤져 겨우 모은 책들이 이제 새롭게 나오고 있다. 그 당시의 노력들이 약간 허무한 감도 있지만 먼저 읽었던 책들은 새로운 번역본에 잠시 추억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의 이전 번역본인 <야생종>도 집 어딘가에 있다. 다만 살 때 옥타비아 버틀러의 가치를 잘 몰랐을 뿐이다. 뭐 이런 작가가 한두 명이 아니지만. 그녀의 전작들을 흥미롭게 읽었고, 이 소설의 소개글들이 다시 나의 관심을 끌었다.

 

불사의 존재. 많은 권력자들이 바란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바라는 바일지 모른다. 이 소설 속 두 주인공 도로와 아냥우는 불사의 존재다. 하지만 둘의 불사는 존재 방식이 다르다. 4천 년을 살아온 도로는 타인의 육체를 빼앗아 생존하는 존재고, 아냥우는 자신의 육체를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죽지 않는다. 도로의 생존 방식은 판타지에서 이혼대법으로 표현되는 것인데 이것을 아주 쉽게 해낸다. 문제는 그의 혼이 들어간 육체가 아주 오랫동안 버티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냥우의 변신은 보고 먹는 것으로 일어난다. 동물로 변신이 가능하다. 바다에서 돌고래를 본 후에는 돌고래로 변신한다.

 

도로는 자신의 불사를 이용해 인종 실험을 한다. 교배를 통해 초능력을 가진 존재들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아냥우를 만나게 된 것도 길을 가다 그녀의 존재를 깨닫고 그녀를 통해 얻게 될 새로운 후손 때문이다. 아냥우처럼 자신의 관리 아래에 있지 않은 초능력자들을 야생종이라고 부른다. 4천 년을 산 그의 후예들은 세계 어디에나 있고, 인종에 특별히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가 처음 아냥우를 만났을 때는 1690년으로 한창 노예사냥이 일어나던 시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으로 아냥우를 데리고 가는 것은 그곳에서 더 안전하게 교배하기 위해서다.

 

불사의 존재는 미신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배척과 공포의 대상이다. 아냥우의 생존은 공포와 변신으로 이어져왔다. 도로와의 만남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새로운 능력자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메리카로의 항해는 노예무역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다. 도로의 자식이 운행하는 배는 그 당시 노예선에 비해 쾌적한 편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염력을 가진 아이작이 있다. 그의 놀라운 능력은 폭풍이 몰아쳤을 때 아주 잘 드러난다. 안전한 이동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작은 아냥우에게 반한다. 도로는 아냥우를 아이작의 아내로 준다. 아냥우의 생각과 너무 다르다.

 

도로에게 아냥우는 교배용 가축과 별 차이가 없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이작에게 애정을 가지지만 자신의 뜻에 반대하면 언제나 죽일 수 있다. 아냥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녀의 능력이 원초적 충동을 억제하게 할 뿐이다. 아이작이 아냥우를 설득하는 장면은 자신과 그 후손의 안전을 위해서란 명분을 잘 보여준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의 선택이다. 이후 수많은 아이들을 낳은 아냥우는 치유사로서 활약한다. 도로의 교배 실험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능력을 각성하는 순간이 생긴다. 이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면 미치거나 죽게 된다. 이 불안정성은 결코 개선되지 않는다.

 

혼자 4천 년을 살았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그 고독은 아냥우의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도로가 아냥우의 몸을 빼앗을 경우 그 몸은 죽는다. 도로가 쉽게 죽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도로가 세운 마을에서 모성애를 발휘하던 그녀가 아이작과 자신의 아이가 죽는 것을 본 후 이 생활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녀의 선택은 돌고래다. 이후에도 정신적 상처를 받으면 돌고래로 변신해 자신을 치유한다. 재밌는 점은 그녀가 남자로 변해 아이를 낳은 적도 있다는 것이다. 도로가 백인과 여성의 몸에 들어간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도로는 후손들을 교배용으로 이용하고, 아냥우는 그들을 보호하려고 한다는 차이가 있다.

 

도로의 불사와 교배 실험은 도로를 신으로 만든다. 도로가 건설한 마을의 여자들은 모두 도로와 교배하길 바란다. 이곳에서 일반적인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로의 필요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끼리 교배를 한다. 태어난 아이의 능력은 늘 불안정하다. 하지만 도로는 자신의 불사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은 죽인다. 어떤 초능력자가 자신의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중에 나올 이야기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다. 패터니스트 시리즈 중 한 권인데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도로와 아냥우의 존재가 어떤 관계를 보여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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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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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이전 번역본과는 번역자가 다르다. 집 어딘가에 구판이 있을 텐데 언젠가 시간이 나면 몇몇 부분은 번역을 비교해 보고 싶다. 가끔 다른 번역자들의 첫 장을 비교해서 볼 때가 있는데 원문이 어떻길래 이런 번역 차이가 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단순히 단어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문장의 마침표가 다른 경우도 많이 봤기에 이런 생각을 한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황당하고 놀랍고 어느 순간까지 의문을 품고 있었던 이 소설 이야기를 해보자.

 

보니것의 소설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고, 지루했다. 그러다 그의 블랙유머를 알게 되면서 감탄했다. 이 소설도 어떤 대목에서는 지루함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한 반복 때문이다. 특히 백만 년 뒤의 인류 조상들이 어떻게 갈라파고스에 머물게 되었고, 어떤 진화를 거쳤는지 알려줄 때 더욱 그랬다. 또 누가 이 백만 년 전 1986년의 사건을 이렇게 자세하게 아는지도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중간 중간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현대인이 분명한데 그가 이런 세부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알 수 없는 화자의 정체와 그들의 표류기는 뒤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게 만들었던 그 섬이 바로 갈라파고스다. 진화론의 모태가 된 이곳을 작가는 미래 인류의 진화지로 만든다. 하지만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이 섬에 도착하기까지 과정과 그 인물들 이야기다. 이들은 갈파파고스로 가기 위한 유람선 바이아데다윈호를 타기 위해 호텔에 도착했다. 세기의 유명 인사들이 타기로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탑승을 취소했다. 동시에 에콰도르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린다. 금융도 붕괴되었다. 호텔 바깥의 풍경은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들로 가득하고, 군대가 호텔을 지키는 모습이다. 승객 중 한 명은 이 나라의 자산을 미국 달러로 헐값에 사려고 한다. 아주 낯익은 상황이다.

 

백만 년 뒤의 인류는 손도 발도 없다. 당연히 뇌도 작다. 화자인 레온은 이 3킬로그램의 뇌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해서 보여준다. 뭔가 사건이 일어나면 이 뇌를 말하면서 핑계를 댄다. 그리고 앞부분에 죽을 사람들의 이름 앞에 별표를 해놓았다. 이들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과거의 현재를 생략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을 풍성하게 만드는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소설에서 명언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기계인 만드락스는 일본의 천재 과학자가 만들었다.

 

바이아데다윈호에 탑승하려는 인물들에 대해 작가는 아주 신랄하고 풍자적으로 풀어낸다. 사기꾼이라는 간단한 정보를 준 뒤 이 인물의 삶을 깊이 들어가거나 새로운 인류의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교사의 삶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무능한 선장 탓에 원래 목적했던 곳으로 가지 못하고 갈라파고스 제도 중 한 곳인 산타로살리아섬에 정박한다. 이 선장과 호텔 지배인은 형제인데 이들의 문제를 뒤틀어서 보여준다. 처음에는 이 유람선에 다른 선원들도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후반부에 왜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지 설명해준다.

 

솔직히 과학적으로 이 소설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들이 섬에 좌초해서 머문 시기에 구출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작은 섬에 머물면서 인류가 진화를 했다는 시간과 이 시간을 알고 있는 레온의 존재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것은 솔직히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인류가 가진 부조리한 모습과 불평등과 폭력성과 탐욕 등이기 때문이다. 읽을 때는 어떤 부분에서 미로 속을 해매는 기분이지만 끝에 도달하게 되면 작가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이 진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아니 여운보다 생각할 거리들이다.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왔을지 모른다는 인류가 백만 년의 시간 뒤에 다시 바다로 퇴행한다는 설정은 진화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다시 읽어봐야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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