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기의 여행 -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송은정 지음 / 걷는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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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목에 끌렸다. 송은정이란 이름은 조금 낯설었다. 작가 소개글을 읽다가 팟캐스트에서 그녀가 방송에 출연한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관심도가 더 높아졌다. 결정적인 것은 역시 부제인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이다. 아마 더 끌린 것은 ‘대책 없이’란 단어일 것이다. 여행을 갈 때 꽉 짜인 일정을 짜서 간 적이 거의 없다. 일정에 여유를 두고 보통 움직인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그곳을 가는 편이지만 도착한 후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또 제각각이다. 이런 변수들이 싫을 때도 있지만 이것이 다녀온 후 기억에 더 많이 남는다.

 

이 에세이는 여행과 일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려한 풍경에 대한 예찬이나 놀라운 여행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가 살면서 경험한 사소한 것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일본 교토 가이드북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동네 골목길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를 채우는 여행지는 유럽과 남미를 모두 아우른다. 놀랍고 신기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도 많을 텐데 작가는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조금 심심해 보인다. 그런데 이 심심한 듯한 이야기가 가슴 속에서 작은 꽃망울을 피우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간결하게 기록한 글들일수록 더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아이슬란드 일주 기록은 부럽기만 하다.

 

잘 짠 일정에 맞춰 효율적으로 여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예상한 것과 다른 일이 생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재밌다. 물론 이 예상 밖의 일이 짜증과 불안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일수도 있다. 최대한 불편을 줄이고, 작은 변수들이 만드는 재미를 누린다면 최상의 여행이 된다. 실제 이런 여행을 계속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가끔은 불편함이, 짜증이 동반한 여행이 추억으로 더 길게 남는 경우가 있다. 이 책 속 많은 여행들이 그랬다. 길치이기에 가지는 두려움과 불편함을 조금만 견디고 주변을 돌아보면 꽉 짜인 일정 속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인다. 같은 곳을 자주 갈 때 이런 여유는 더욱 필요하다.

 

어떤 특별한 시간 순서대로 쓴 글이 아니다. 지역이 해시태그로 붙어 있지만 무시해도 별 상관이 없다. 해시태그가 붙은 나라나 지역은 이야기 속 배경일 뿐이다. 이 장소들의 시간 순서가 일정하지 않다보니 작가의 근심 걱정이나 그 순간의 삶들이 뒤죽박죽 섞여 나온다. 읽으면서 시간 순으로 정리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글들이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성되었다면 그 시간만큼의 삶이 글 속에 잘 표현되었고, 생각의 변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을 테다. 여행, 마음, 하루로 이어지는 이야기로는 조금 부족하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일까?

 

느긋하고 홀가분한 여행을 떠나본 게 얼마나 되었을까? 그 시절 여행은 큰 일정만 정해놓고 지루하게 시간을 때운 적도 많다. 차로 무작정 달리기만 한 경우도 있다. 목적지를 가다 중간에 방향을 바꾼 적은 또 몇 번이던가. 그런데 이 여행들이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다. 그 순간의 깨달음이 나의 여행 방식을 조금씩 바꾸었다. 일정을, 볼거리를, 쇼핑을 꽉 채우기보다는 좀 더 빼고 빼서 가볍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게으름은 사진 찍기보다 머릿속에 담기란 변명으로 바뀌지만 확실한 것은 사진 찍지 않은 순간들이 아직까지는 더 많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많은 에피소드 중에 엄마와 함께 일본을 여행한 이야기가 가장 큰 여운은 남긴다. 그것은 아마 그녀에게 내어준 그릇 때문일 것이다. 서투른 여행 가이드에 신경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엄마와 여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유니 사막에 대한 평가는 나의 상상을 넘었고, 안산 이야기는 우리 동네 뒷산 이야기로 생각이 이어졌다. 내가 생각만 하고 하지 못한 작은 여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문득 어릴 적 무작정 골목길을 들어가 돌아다녔던 일이 생각난다. 막히면 돌아 나오고, 힘들게 목적지를 향해 가던 그 어린 시절들. 포기란 단어를 사랑과 연결해서 풀어낸 이야기는 부부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작지만 소소하고 느긋하지만 그 속에 치열한 삶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치열함은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보이는 모습 뒤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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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가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
타카노 후미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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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잡지 <하나코>에 1988년 6월부터 1992년 2월까지 연재된 만화다. 이 만화가는 만화가들의 만화가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리보기로 본 몇 컷의 만화는 재밌을 것이란 확신을 심어줬다. 그리고 모두 읽은 지금은 이 확신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중년의 남자인 내가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마무리가 몇 편 보이지만 사랑스럽고 엉뚱발랄한 루키짱을 보면 즐거워진다. 친구인 엣짱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이전 직장의 여성 동료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연재만화란 특징 때문인지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이다. 물론 연작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전체적으로 루키짱과 엣짱이 같이 등장하는 빈도가 높고, 여성의 일상을 간결하지만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최근에 여성의 일상을 다룬 만화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원조라고 하는 부분에 공감한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그림에 색을 넣었다는 점이다. 요즘 만화에 색이 들어가는 경우가 흔치 않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작가의 유일한 올컬러 작품이라고 한다. 간결한 선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세밀한 표현이 굉장히 많다. 읽으면서 자주 감탄하게 된다. 특이 표정으로 넘어가면 더욱 그렇다.

 

삼십대 중반 두 여성이 등장하는데 루키가 근검절약하는 스타일이라면 친구 엣짱은 멋 내기를 좋아한다. 루키의 직업은 병원의 의료급여 청구서 작성 업무를 재택근무하는 것이다. 일주일 만에 일을 끝내고 남은 시간은 도서관 가거나 책을 읽고 우표를 수집한다. 목욕을 좋아하고 운동신경은 둔하지만 사과를 손으로 쪼갤 수 있다. 연예는 관심이 없는 듯하고, 패션에도 둔하다. 이 부분을 채워주는 인물이 바로 친구 엣짱이다. 그녀의 옷 중 많은 옷들이 엣짱이 준 것이다. 엣짱의 직장 송년회에 참석하는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특히 엣짱이 좋아하는 직장 후배 오가와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소소하지만 즐겁다.

 

이 만화 곳곳에 그 시대의 풍경이 담겨 있다. 유선 전화기는 대표적이다. 지금은 유선전화로 통화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이전에는 이 전화가 유일한 연락 방법이었다. 집 전화가 없다면 공중전화로 연락하고, 전화번호부는 온갖 정보와 광고가 들어있었다. 이것이 불과 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만화를 읽다 보면 여유가 넘쳐난다. 시간이 남는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스마트폰 등이 없으면서 다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와의 대화, 작은 외출, 그 외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이렇게 아주 일상의 한 장면을 작가는 간결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그림과 이야기로 나를 매혹시켰다.

 

몇몇 에피소드는 남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인지 공감하지 못한다. 빨래가 마르지 않았는데 다른 옷을 꺼내 입는 것보다 벗고 있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밖에서 그녀의 집을 볼 수 있다면 문제다. 자전거 수리점 남자가 던지는 관심에는 무감각하드니 다른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말에는 추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 보고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전기밥솥 사용 설명하는 장면은 잘 보면 멍청한 행동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이렇게 이 만화는 나에게 읽는 내내 공감과 의문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지난 시절에 대한 추억도 같이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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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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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 이름이다. 이 작가의 책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런데 작품 목록을 보니 낯익은 제목 하나가 보인다. <막스 티볼리의 고백>이란 책이다. 구해 놓고 몇 년을 묵혀두고 있는 책들 중 한 권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한 호평 때문에 샀다가 그냥 묵혀두었다. 뭐 이런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니 새롭지도 않다. 그런데 이번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나를 이 책으로 인도했다. ‘퓰리처상 100년 만의 가장 과감한 선택’이란 문구는 더욱 나를 부채질했다. 읽으면서 어느 부분은 감탄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취향을 탔다.

 

아서 레스. 그는 게이다. 50세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중년의 동성애자다. 사실 게이라는 사실을 빼면 한 남자의 진한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아직 나의 머릿속은 이 사실이 먼저 떠오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서는 전 남친 프레디의 결혼 소식에 충격을 받고 세계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난 이유는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기 위해서다. 실연의 상처는 여행을 떠났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여행 내내 이 상처들이 그의 삶을 들쑤신다. 더불어 그가 사랑했던, 그를 사랑했던 시인의 기억들도 같이 동반한다. 여행은 멕시코, 이탈리아 등을 지나 마지막으로 일본을 거치는 일정이다. 이 여행은 문학과 관련된 일도 있고, 사막에서 자신의 생일을 보내기 위한 것도 있고, 일본 가이세키 요리 기사를 쓰기 위한 것도 있다.

 

결코 짧은 여행이 아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이다. 기억과 아픔을 떨쳐내기 위한 여행은 남친과 함께 한 도시와 공간과 추억으로 뒤덮여 있다. 그를 초청한 문학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간 곳들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자신 있다고 생각한 독일어는 작은 해프닝의 연속을 불러온다. 그리고 잠깐 새로운 연인이 생기지만 이것은 작은 일탈일 뿐이다. 그는 결혼한 상태도 아니고, 누군가와 맺어져 있지도 않다. 이 작은 일탈이 가는 곳마다 생기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과 공감이 연결될 때 잠시 이루어진다.

 

그의 추억 속에는 두 사람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인 로버트고, 다른 하나는 친구의 아들인 프레디다. 이 둘의 기억이 이 소설 속에서 반복되고 뛰어나온다. 그 기억은 장소와 관계 속에서 불쑥 올라와 그를 삼킨다. 독자는 이 기억을 통해 그의 삶과 고민 등을 들여다볼 수 있다. 로버트의 격려 속에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몇 권을 책을 출간했다. 큰 방향을 일으킬 정도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를 초청하는 단체들이 있다. 멕시코도, 이탈리아도, 독일도 그래서 간 곳이다. 물론 이 초청을 승낙한 것은 프레디의 청첩장이 원인이지만 이 여행은 그가 완전히 무명은 아님을 보여준다. 무명이라면 누가 초청을 하고, 그의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겠는가.

 

솔직히 이 소설의 재미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문장의 흐름이나 유머가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피곤함도 한몫했는지 모르지만 집중력이 깨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상당히 좋은 가독성을 가졌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아서가 보여준 자신감 없는 행동과 생각들이 나를 처지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순간들이 현재가 아닌 과거 속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도 있다. 지금도 몇 가지 에피소드는 나의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된다. 나이에 관해서는 그의 고민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와 닿지 않는다. 예전에 후배들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 빠졌을 때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의 행동들이, 집착들이 가슴 한 곳에 조용히 파고든다. 시간은 사랑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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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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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다. 여자들이 산을 오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록했다. 여덟 산을 다루는데 등장인물이 겹치는 것도 있다. 서로 관계가 이어지는 사람도 있고,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여자들이고, 그들은 산을 오른다. 마운틴걸이란 용어가 있는 것을 보면 한동안 일본에서 등산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들이 산에 오르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마운틴 걸의 영향도 있고, 등산화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경우도 있다. 원래 등산을 좋아했던 사람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들이 등산이란 하나의 주제로 묶여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일본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100대 명산이 나오는데 그 중 아는 곳이 거의 없다. ‘거의’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후지산 때문이다. 만약 이 산이 빠지면 ‘거의’도 빼야할지 모른다. 일본 소설 등을 읽으면서 수많은 산을 봤지만 이 산들이 결코 낯익어지지 않는다. 한자로 이름을 외웠던 기억이 발음대로 바뀌면서 더 심해졌다. 유명한 일본 산악 소설 혹은 산악 미스터리를 적지 않게 읽은 것을 감안하면 정말 저질 기억력이다. 이런 한탄과 상관없이 이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생긴다. 한참 체력이 좋을 때도 계곡에서 논다고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은 주제에 말이다.

 

첫 이야기는 등산화에 반해 친한 동료와 함께 산에 오르게 된 리쓰코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사내 커플과 결혼할 예정이다. 친한 마이코는 아파 못 오고,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른 유미와 산에 오르게 된다. 유미가 중간에 내놓은 비싸고 맛있는 간식도 그녀는 불편하다. 조공이란 생각 때문이다. 자신의 결혼 문제도 있다. 이런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와 감정을 뒤흔든다. 긴 여정과 중간에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속내를 말하고, 자신과 서로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조공이라고 생각한 맛있는 간식도 다른 아주머니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힘든 등산을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의 심리와 엮어 잘 풀어내었다.

 

거품경제 시절 좋은 직장에 취직한 미쓰코는 거품경제의 화석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럭셔리 제품으로 몸을 휘감고 있지만 신상이 아니다. 우연히 나간 모임에서 한 남자를 만나 등산화를 선물 받고 산을 오른다. 그녀의 눈치를 보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보는 미쓰코의 모습은 처음에는 불편했다. 하지만 이렇게 변하게 만든 이유를 읽으면서 환경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알게 된다. 이후 풀려나오는 고백 등은 어느 순간 막혔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미쓰코가 가는 길에 리쓰코 일행도 같이 가고 있었다는 사실과 나중에 뉴질랜드 통가리에 이 커플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은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홀로 등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가 산을 오르면서 커플이라고 착각한 남녀와 만나 정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은 밖에서 볼 때 평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등산은 그녀와 부모님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홀로가 아닌 ‘같이’가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이것은 마이코가 남자 친구와 함께 자신이 오르길 원했던 후지산 대산 긴토키 산을 오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산을 보기 위해서는 그 산이 아닌 다른 곳에 올라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목표 설정과 달성보다 진정 원하는 바를 찾는 것이 우선이란 점도. 이 이야기 속에 리쓰코와 유미의 현재 모습이 담겨 있어 상당히 반가웠다.

 

미야자와 가의 자매가 증장하는 단편이 세 편이나 있다. 첫 이야기는 동생 유미가, 두 번째 이야기는 언니가 화자다. 동생은 아버지를 돌보면서 번역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집에 왔지만 현실은 아버지의 연금에 빌붙어 있다. 바른 생활이 몸에 박힌 언니는 동생의 이런 삶이 불만이다. 리시리 산을 올라가자고 하는데 이상하게 이 자매가 어딘가를 가면 비가 온다. 징크스다. 함께 산을 오르면서 언니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조카와 함께 겨울산을 오른다. 두 자매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산의 풍경을 보는 장면들은 나도 모르게 내가 산을 오르는 듯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 마지막 장에 유미가 홀로 산에 가고, 그곳에서 동행을 만드는 이야기가 있어 훈훈한 마무리로 이어진다.

 

유일하게 일본산이 아닌 뉴질랜드 ‘통가리로’ 편은 유즈키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풀어간다. 유즈키는 유미의 친구이자 여자들의 등산일기란 사이트에서 유명한 모자 장인이다. 이 단편은 유즈키가 모자를 만들게 된 사연과 더불어 통가리로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알려준다. 전 남친 요시다와 함께 했던 트래킹과 현재의 트래킹이 교차하고, 기억과 추억이 뒤섞이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른다. 처음에는 이 교차하는 장면들을 이해하지 못해 난해하게 다가왔지만 어느 순간 시간의 교차를 알게 되면서 재밌어졌다. 카메오처럼 등장한 미쓰코 커플의 모습은 또 다른 재미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살인 없는 가나에의 소설은 조금 낯설지만 탁월한 심리 묘사와 관계를 엮고 풀어내는 능력은 여전히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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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
윤재성 지음 / 새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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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작가의 전작인 <외로움살해자>의 평이 좋았기 때문이다. 낯선 작가를 만날 때 이런 작은 서평 하나가 좋은 길잡이가 된다. 실제로 책을 받아 읽으면서 가독성이 좋아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방화범과 그 방화범에 피해 입은 알코올중독자, 부패 정치인과 그에 기생하는 조직 폭력배, 기자와 형사와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 등이 끝까지 정신없이 달리게 만든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방화범의 능력과 행동 등이 너무 과하게 설정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부패 정치인이 보여주는 권력에 대한 욕망은 방화범과 더불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벌인다.

 

착한 청년이었던 형진은 방화범에게 큰 화상을 입는다. 여동생이 불 속에서 죽는다. 이 사건은 그를 조금씩 뒤틀리게 만든다. 방화범을 잡아야 하고, 방화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흉측한 외모 때문에 사회로부터 조금씩 격리된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술의 힘을 빌려 잠든다. 불이 나면 현장에 달려가 그때 그 방화범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대는 자책과 절망으로 뒤덮인다. 술은 유일한 탈출구다. 만약 그를 통해 특종을 얻길 바란 김정혜 기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김정혜는 한때 신문사 에이스였다. 하지만 남자에게 빠지고, 남자에게 차이면서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형진에 대한 정보는 특종의 냄새를 풍겼다. 끈기와 노력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당연히 형진은 거부한다. 그의 사연을 취재한 방송이 그의 삶을 돌려놓지도, 희망을 던져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혜는 밥 사주고, 술 마실 돈을 주는 여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방화 사건이 터지면서 이 둘은 하나로 묶인다. 형진의 방화에 대한 전문 지식이 빛을 발하고, 거의 폐인인 그를 정혜가 도와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때만 해도 이 콤비의 새로운 활약에 대한 기대와 현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무택. 서울 시장을 노렸지만 계속 낙천한 정치인이다. 서울시장을 넘어 대통령까지 넘보는 장무택은 출연 비중이 낮지만 연쇄 방화로 기존 권력을 무너트리려 한다. 권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9.11 음모론을 생각하면 불가능하지 않다. 이것을 실현하는 하수인이 철우다. 돈이라면 그 어떤 험악하고 잔인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보이지만 철우는 장무택을 한 방 먹일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돈의 힘은 철우로 하여금 계속 연쇄 방화를 일으키게 한다. 여기에 형진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진짜 방화범이 서울의 건축물에 불을 지른다. 이 혼돈과 피해 규모와 대범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과하게 나간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경찰 등이 너무 무력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한국 경찰의 무능함 혹은 부패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물론 유능하고 정직한 경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더 많을 것이다. 이 무능함을 최대한 부각시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다. 어떤 경우에는 방화범에게 한 팀이 모두 죽는 경우도 생긴다. 방화범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이에 비해 형진과 정혜가 보여주는 활약은 대단하다. 형진이 자신을 환자로 만든 방화범의 수법을 간단하게 간파하는 모습이나 모방범을 찾아내는 활약 등은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행운이 작용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에는 권력의 힘을 작용한 부분도 있다. 그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너무 나갔다.

 

극단으로 상황을 몰고 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감성을 자극하는 설정이 나타난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형진이 용의자이고, 서울이 불타면서 경찰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고 해도 이들의 등장은 지극히 감상적이다. 만약 그들이 있는 곳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방화범의 설정 자체도 판타지 같다. 이런 아쉬움 속에서도 안정된 문장과 진행은 작가의 전작과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다양한 군상을 극한으로 다루는 솜씨가 좋고,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잘 살아 있다. 문득 나의 불만이 현실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면서 가능성을 무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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