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초상 - 수난과 방랑이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함규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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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했을 때 기대한 것과 많이 다른 내용이다. 유대인에 대한 역사, 정치, 사회, 문화적 분석을 기대했는데 실제 내용은 20세기 각 분야에서 세계를 뒤흔든 21명의 유대인들의 삶과 업적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책머리에서 우리가 가진 유대인에 대한 환상이나 왜곡된 시선을 잠시 말하기에 그런 내용이 아닐까하고 너무 쉽게 판단했던 것이다. 유대인식 교육과 유대인 모두가 천재라는 신화 등이 대표적이다. 한때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수학을 잘하고, 사업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세계에서 유대인 다음으로 똑똑한 민족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런 미신과 신화 등을 산산조각 내는 글을 기대한 것인데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바로 여기서 다룬 21명의 유대인들의 삶이다. 그들이 모두 유대인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어디에서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신화를 깨트린다. 하지만 이 속에는 저자도 말했듯이 20세기는 유대인의 세기라는 표현으로 다시 유대인에 대한 경외감을 살짝 드러낸다.

 

21명의 유대인 중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몇 명 있다. 한두 번 정도 다른 책에서 봤을 테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과 업적을 읽고 있으면 왜 저자가 이 유대인을 이 목록에 넣고 설명하게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몰랐지만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칼 폴라니다. 그의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에서 신자유주의 문제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한 부분을 읽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런 시장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호위병으로 호출되었다. 이런 체제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키고, 사회를 붕괴시킨다.”(264쪽)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국가와 법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또는 하고 있는지 요즘처럼 잘 보여주는 시절에 이 문장이 강하게 마음에 와 닿은 것이다.

 

저자는 21명의 유대인을 여덟 분야로 나눠 적게는 2명, 많게는 다섯 명씩 설명하고 있다. 혁명가들, 정신분석가들, 사상가들, 과학자들, 정치학자들, 경제·경영학자들, 예술가들, 현대의 예언자들 등이다. 첫 장인 저항의 초상에 들려준 트로츠키의 삶과 철학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을 넘어선 것이자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러시아 혁명의 실체를 조금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옘마 골드만은 20세기 초 사회에서 한 유대여성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녀의 통찰력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렇게 기존에 알고 있던 위인은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전해주었고, 예전에 몰랐던 인물들은 나의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덕분에 공부할 것이 더 늘어났다.

 

한 인물을 이렇게 짧은 글 속에서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다. 상대적인 균형감을 가지고 반론도 같이 다룬다고 하지만 서술에서 한 시각이 뼈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인물의 철학과 업적을 요약하고, 그가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는 조금 달라진다. 바로 여기서 이 책의 기획 의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20세기와 유대인이라는 공통점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신화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물론 이것을 좀더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공통점을 수난과 방황이란 부분에 초점을 두고 풀어낸다. 더불어 각 분야에서 엄청난 성공을 한 유대인들을 뽑아냄으로써 20세기는 유대인의 세기라는 부분을 좀더 강하게 부각시킨다.

 

20세기는 기존의 시대와 분명히 다른 세기다.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경제체제가 실험되어지고, 과학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발전한 시대가 바로 20세기다. 이 속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이것이 분석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인물들은 유대인에 대한 강한 환상을 심어주기 충분한 업적을 쌓았다. 교묘하게 왜곡된 정보를, 혹은 생략된 정보를 통해 유대인에 대한 환상을 쌓기에 충분하다. 단순 나열과 연결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 인물을 설명할 때 그(녀)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꼭 설명하고 지나간다. 유대인의 정체성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그리고 그들의 철학과 업적을 잘 요약해서 상식을 쌓기 좋게 만든다. 더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도전과제를 던져준다. 기대와 다르지만 다른 내용으로 나를 만족시켰다.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
오다 마사쿠니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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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제목이다. 책에도 성별이 있다니 말이다. 수컷과 암컷이 있으니 당연히 새끼도 친다. 이때 태어난 책들이 바로 환서다. 혹은 그것이라 불린다. 이 소설은 바로 이 환서를 바탕으로 한 애서가의 삶을 환상적으로 그려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장이 상당히 고답적이고 파편적이라 조금 어렵다. 적응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적응하면 이 황당하고 몽상적인 이야기를 조금씩 즐기게 된다. 이야기 구조도 시간의 흐름을 따르거나 인물 위주가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엉뚱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도이 히로시가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외조부 후카이 요지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이 도입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뭐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청난 서책 수집가였다는 사실이 먼저 눈길을 끌었는데 읽다 보니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어 새끼를 친다고 했을 때 이 소설의 장르가 뭘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들게 한 것은 문장이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쉼표를 남발하고, 이름을 끊어서 표현하고, 작품 이름을 패러디하는 등의 방식을 사용하여 강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이 문턱에서 좌절하면 이 요상한 책의 재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된다.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인물은 후카이 요지로다. 그리고 그의 아내 미키와 동창생 샷쿠리다. 샷쿠리는 멈추지 않는 딸꾹질로 인해 생긴 별명이다. 본명은 가메야마 긴고지만 미키를 처음 만난 날부터 거의 백세에 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있다. 미키의 저주라고도 하지만 이 딸꾹질의 좋은 점도 발견하는데 이것도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이 소설의 장점 중 하나가 소소하지만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가끔 나오는 언어유희는 사실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재미를 잘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반면에 애서가의 모습을 보여줄 때는 나도 모르게 공감대가 형성된다. “책이란 말이지,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게 늘어나는 거야.”라고 할 때 경험적으로 고개를 자동적으로 끄덕였다.

 

요지로의 일생을 자신의 자식에게 들려주는 방식이지만 그 속에는 말하는 화자의 삶도 잠시 나온다. 하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요지로다. 그가 어떻게 아내 미키를 만났는지, 2차 대전 당시 군에 끌려갔다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들려줄 때 나의 상상력은 다른 곳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는데 개인의 환상적 체험으로 끝나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요지로가 경험한 것은 이 책의 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환서들을 비롯해 전 세계 책들이 날아가서 모이는 라디나헤라 환상 도서관과 사람이 죽은 후 한 권의 책으로 변해 날아간다는 설정은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공식 집계 22만권을 모은 요지로가 과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었다. 내 경우 쌓아두고 읽지 못한 책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단순히 읽기만 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책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런 장서가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눈길이 간다. 여기에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풀어낼 때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 있지 하고. 나의 바람과 부러움이 곁들여 생긴 부작용이다. 만약 이 소설처럼 책과 책의 방사를 통해 새로운 책이 태어난다면 현재 집에서 그 책을 보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요지로처럼 400평의 거대한 공간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있으면 가능할까? 아마도 마눌님의 눈총에......

 

후카이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은 바로 환서에 의해서다. 그는 매년 일기를 썼는데 이 기록이 단절된 적 있다. 바로 군 징집 당시다. 이때의 일기가 환서로 태어난 것이다. 환상 도서관이나 하늘을 나는 날개가 달린 다리 여섯의 코끼리가 등장하는 것도 여기다. 물론 소설 속 현실에서 미키가 죽을 때 한 번 더 이런 환상적인 일이 벌어진다.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사실 미키는 요지로 생전에는 책을 읽을 수 없었는데 뇌졸중 후 갑자기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요지로가 남긴 유서의 내용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다.

 

책을 읽으면서 먼저 연상된 작가가 있다. 모리미 도미히코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복잡한 듯한 이야기를 하나씩 읽으면서 그 재미에 빠졌듯이 이번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애서가에 대한 환상을 기상천외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책 자체가 하나의 기서다. 환서까지는 아니겠지만 기이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읽으면서 꾸준히 느낀 것이지만 이 책 번역 참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와 쉼표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 것인지 하는 것과 엄청나게 많은 주석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역자가 주석본을 쓰라면 쓸 수 있을 정도란다. 주석이 더 많았다면 아마도 훨씬 힘들게 읽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편집자와 역자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영화 이야기 딴지영진공 - 촌철살인한 영화.시사 코드와 전문 OST 분석
차양현 외 지음, 서용남 그림 / 성안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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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련 책을 보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한때는 영화가 좋아서 명작, 걸작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어떻게든 구해서 보려고 한 적도 있다. 일본 영화 수입이 되지 않을 때는 복사한 저화질의 영화를 구해서 열심히 본 적도 있다. 그러다 인터넷으로 쉽게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게 되면서 컴퓨터의 하드와 CD는 영화로 가득 찼다. 이 많은 영화들 중 실제로 본 것은 얼마 없다. 양이 너무 많아지고, 쉽게 구해지고, 다른 분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이제 영화는 아주 가끔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말에 조조영화를 홀로 보러가던 그 정성과 열정이 정말 대단했다. 백수였을 때는 하루에 극장에서 영화 2편 이상 본 적도 많았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있다. 바로 영화에 대한 관심과 기억들이다.

 

이 책의 목록을 보면서 보지 않은 영화가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예전 같으면 몇 편만 있어도 당장 구해서 봤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한 것을 주변 친구들에게 열변을 토했을 것이다. 아는 척하느라고. 그런데 이제는 그 열정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본 영화도 적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귀찮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호기심과 시간나면 봐야지 하는 정도의 열정만 살짝 생겼다. 실제 이 열정이 한두 편의 영화를 보게 만들기는 했다. 이전에 보다가 잠든 영화를 다시 봐야 하는데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2시간을 진득하게 앉아서 볼 마음의 여유가 많이 사라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도 바로 나의 조금씩 사라져가는 영화 보기에 대한 열정이다.

 

팟캐스트 내용을 책으로 낸 것이다. 한 번도 들은 적은 없는 팟캐스트다. 저자들도 낯설다. 뭐 몇 년 동안 영화관련 잡지도 책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실제 들은 적이 없는 방송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지 모르겠다. 아마 조만간 시간이 나면 이 방송을 다운 받아서 듣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에서 저자들이 보여준 시각과 이야기들이 상당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보지 않은 영화는 보고 싶어졌고, 본 영화는 아련한 기억을 되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말이다. 실제 이 책에서 보여준 분석과 해석과 지식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영화 DNA를 일깨워 줄 정도였다. 특히 영화음악에 대한 부분은 이전에 잘 생각하지 못했고, 자주 다루어진 부분이 아니라서 더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총 여덟 편으로 나누었다. 각 편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고, 그 주제에 맞는 영화들을 묶고 분류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슈퍼히어로, 거장, SF, 애니메이션, 방화, 로코, 호로, 번외 편 등이다. 이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것은 거장 편이다. 반어법을 통해 세계적인 거장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비틀고 쿡쿡 찌르는 내용이 아주 재미있었다. 언론 플레이를 통해 자금을 모으고, 애국심에 호소하여 관객을 끌어모으려는 거장들의 놀라운 마케팅 전략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오게 만들었다. 최근 거장 한 분은 아내와 소송이 붙었고, 다른 한 분은 새롭게 방송에 나와 추억 팔기를 하고 있다. 이전에 이 두 거장의 코미디를 좋아했던 한 명의 팬으로써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즐겨보는 장르는 역시 슈퍼히어로와 SF와 애니메이션 등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최근 몇 편 중 일부는 보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본 영화다. 재미있게 본 것도 있고, 뭐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의 기억이 약간 희미한 부분이 있는데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을 가해주니 갑자기 반감으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괜히 보고 싶어진다. SF의 경우는 최근에 본 영화보다 보지 않은 영화를 더 많이 다루어 옛 영화의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특히 <혹성탈출>의 그 장면은 지금도 그 충격이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예전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봤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신작을 보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살짝 놀란다. 그에 대한 저자의 변명을 읽고 그 영화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해졌다.

 

방화는 생각보다 많이 보았고, 로코는 이전 작품들은 거의 본 것 같다. 호로 쪽으로 가면 걸작 이상만 봤는데 어느 순간 재밌게 보다가 다시 그 장르에서 눈길을 뗐다. 음악과 심장이 너무 싱크를 맞춰 보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가 튀고, 잘린 팔다리와 목 등이 날아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믹서기에 갈리는 것은 더욱더. 오히려 아내와 같이 로코를 보면서 왜 프로포즈를 하지 않았나 하는 원망을 듣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 이 마음이 언제 다시 바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현실과 과거를 엮어서 풀어냈을 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영화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배우나 다른 관련된 분야나 감독 등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와 가십이 많았던 것도 역시 재미있었다. 빈말이 섞여 있지만 언젠가 이 책에 나온 분류에 따라 보지 않은 영화 몇 편을 본 후 책 내용과 비교하는 즐거움도 누려보고 싶다.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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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원작을 이 소설로 착각했던 순간이 있다. 실제 원작이 되었던 책은 다른 책이다. 그 책은 에필로그에서 잠시 나왔던 앤드류 호치스가 쓴 앨런 튜링의 전기인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이 전기가 상당한 두께인 반면 요약본 비슷하게 나온 책이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읽은 <튜링 :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이 책을 너무 어렵게 읽었다. 솔직히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튜링>에 나온 이론들이 이 소설에도 나온다. 작가가 이야기 속에 더 쉽게 풀어내었다.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딱딱한 논문보다 훨씬 쉬웠다.

 

앨런 튜링의 자살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 현장을 가장 먼저 찾아온 경찰이 있다. 바로 주인공 레오나드 코렐이다. 코렐은 현장을 둘러보고 이상한 점들을 발견한다. 수학 방정식으로 가득한 수첩과 베어 문 사과 반쪽이 옆에 놓여 있다. 때는 1954년 6월 8일 화요일이다. 이 시대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벌어지던 시기다. 영국 내부에서 스파이들이 활동했고, 미국에서 매카시 열풍이 몰아치던 시기다. 튜링이 독일의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동성애자라는 것만으로 호르몬 치료를 받는 등 엄청난 수모를 겪었다. 이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흔하게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불과 십 수 년 전만해도 이런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때는 이런 사람들이 불법이었다. 1950년대는 더 심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이나 업적에 상관없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만으로 그를 의심하고 미행하는 사람이 있던 시대다. 그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맡은 것은 가장 먼저 현장에 등장한 코렐이다. 코렐이 이 사건에 특별한 의문을 가지지 않고 한 동성애자의 자살로 처리했다면 그냥 보통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튜링의 죽음에서 이상한 낌새를 챈다. 혹시 이것을 밝히는 것이 이 소설의 재미가 아닐까 하고 기대를 하는 순간이다. 이 기대는 나만의 것이었다.

 

소설은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튜링의 과거를 쫓으면서 그의 철학과 이론과 삶을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 불만이 가득한 코렐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 흔한 스릴러처럼 긴장감을 조성하는 추격전이나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지길 기대했다면 그 기대를 접는 것이 좋다. 속도감 있는 액션이나 스파이들의 암약과 음모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스파이들을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권력자들만 있을 뿐이다. 냉전 시대의 삶 중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진행이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긴박하게 풀어내지 않고 코렐의 시점에서 풀어내다보니 상당히 더디다. 최근 스릴러의 속도감을 예상했다면 약간 지루할 수도 있다.

 

솔직히 튜링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최근이다. 에니그마를 깨트린 인물이란 것을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강한 인상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이 소설을 읽기 전 에니그마와 튜링의 역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 비록 튜링이 처음에 죽는다고 해도 그의 과거를 추적하는 코렐을 통해 2차 대전 당시의 긴박하고 스릴 넘치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튜링에 대해 그 시대 사람이 알고 있던 것은 얼마 전 내가 알고 있던 것 이상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동성애자라고 놀림을 당할 정도였다. 그가 생각하는 기계를 말할 때는 말도 되지 않는다는 황당해했다. 어떻게 보면 너무 그 시대에 충실해서 다른 음모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이 책에서 2차 대전 당시의 암호 해독을 둘러싼 스파이들의 치열한 경쟁과 음모만을 기대했다면 앞에서 말한대로 빨리 책을 덮어야 한다. 튜링의 죽음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젊은 경관 코렐의 맹활약을 기대했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에는 그런 긴장감을 조성하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강철같은 의지나 엄청난 추리력을 가진 주인공도 없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감이 조금 부족한 주인공이 있을 뿐이다. 엄청난 직관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논리의 모순을 밝혀낸 수학자가 있을 뿐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거대한 혹은 엄청난 방정식이 실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
앤 비티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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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비티가 1974년부터 2006년까지 <뉴요커>에 발표했던 작품들은 묶은 <뉴요커 단편집>에서 아홉 편을 뽑아 번역한 작품집이다. 단편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점점 현재와 다른 장면과 상황을 마주했다. 알고 보니 발랄한 개성으로 주목받았던 초기작을 주로 골라 번역했다. 당연히 그 시대의 정치, 문화, 경제 등의 상황이 나올 수밖에 없다. 후기작은 마지막 작품인 <낱말 바꾸기>(2001)이 유일하다. 개인적으로 발표 연도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제목이나 마지막에 연도를 넣어주었다 조금은 더 쉽게 이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문장이 어렵지 않아 비교적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상황 등이 낯설었다. 명확한 결론을 내려 끝문장을 읽을 때면 그렇구나!’ 하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뭐지?’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간결한 문장이지만 그 상황을 단순하게 보여주면서 하나의 결론으로 이야기를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의 상황을 이어붙였거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면 늘 곤혹스럽다. 그 상황이나 장면을 즐기기보다 의미 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난쟁이 집>에서 동생 맥도널드가 형 제임스를 찾아온다. 형은 난쟁이다. 엄마가 요청해 간 것이다. 그런데 형도 이런 방문이 반갑지 않다. 이들의 관계가 간결하게 나온다. 형이 자신보다 작은 여자와 결혼한다. 이 결혼식 풍경이 낯설다. 표제작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는 사소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앨런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똑같은 괴짜지만 한 명은 자신의 수고에 감사하고 선물을 주는 반면 다른 한 명은 그냥 누릴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순간 선입견처럼 고정된다. <도시의 저주>는 마리화나 중독자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일상이 산만하다. 뭔가를 찾으려고 하면 자꾸 다른 엇나간다. 전 아내가 내뱉은 꿈 이야기는 관계의 균열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잘 알려준다.

 

<늑대 꿈>은 세 번째 결혼을 앞둔 신시아 이야기다. 다이어트 이후 결혼을 원하는 신시아와 현재의 그녀를 사랑하는 찰리의 모습이 불안하게 보인다. 짧은 이야기 속에 신시아의 삶이 단편적으로 나오고, 현실의 그녀를 만든 삶의 장면들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세 번째 결혼에 대한 부모의 반대와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감이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이어진다. <콜로라도>는 낯설다. 낯익은 지명이지만 잘 모르는 환경이 나오고, 이곳을 가고자 하는 페넬로페의 바람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냥 이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볼 뿐이다. <먼 음악 소리> 속 샤론과 잭의 관계는 엇나가 있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추억 속에 살아 있는 뉴욕 시절이 음악으로 흘러나올 때 느끼는 감정이 따뜻하다. 쿨하다.

 

<아내가 사는 집>은 관계가 약간 복잡하다. 꼬였다기보다 서로가 보는 관점이 달라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전 남편에게 열쇠를 줬지만 그것이 일상 속으로 불쑥 들어오길 바란 것은 아니다. 이네스와 톰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당신은 나를 모른다>는 다른 사람이 몰랐던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단순하게 보는 것만으로는 듣지 못한 누군가의 삶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낱말 바꾸기>는 비교적 최근 작품이다. 다큐 속 등장인물들은 과연 이름만 바꾸면 모를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당발 엄마를 찾아온 딸의 방문은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고 보기 힘들다. 자신의 마음이 편한 곳으로 가고자 하는데 이것이 형식적인 관심으로 표출된다. 마음과 실제 행동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