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룸형제 사기단 - The Brothers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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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지만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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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달린다 - Running turtl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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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가 가정을 만든 후 가족의 구성원인 가장은 경제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가장의 가치는 경제적인 버팀목을 줄 수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지금도 그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그래서 가장의 임무를 다 하지 못했을 경우 그 때부터 가장은 가장이 아니라 그냥 가족에서 피해를 주는 가족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냥 부담만 주는 존재로 하락하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오늘도 가장은 달리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종종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것이 성공하면 가장으로서의 권위 (요새 이런 권위도 사라지고 있지만)는 물론 집에서 밥달라고 요구할 수 있지만 아니면 밥은 커녕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런 적나라한 현실 기반위에서 낭만적인 결과를 담은 영화가 ‘거북이 달린다’이다.
  충남 예산의 강력계 형사인 시골형사 조필성은 반드시 성공한다라는 그 이름과 다르게 실패의 연속이었고 우리가 아는 그저 그런 경찰이다. 뒷돈을 스스럼없이 받고 그 답례로 보답을 의해 상대 경쟁업체의 사장을 불법 혐의로 잡아 가두고 친구를 통해 함정수사를 하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찰인 셈이다. 그의 이런 형사로선 부적절한 외도의 뒷편엔 가족이 있었다. 만화가게를 운영하는 5살 연상의 아내와 두 딸로 구성된 그의 가족은 그에겐 행복을 전달해주기 보단 부담거리이자 책임진 가족이다. 이들을 위해 그는 무리수만 계속 두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조금이라도 가장의로서의 호칭들을 듣기 위해 그는 사회성을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봉이라는 경찰 생활은 그의 마음을 충족시키기엔 너무 부족했다. 그의 부패로도 메꾸기 힘들었던 가정에 대한 책임은 더욱 큰 무리수만 요구했고 급기야 아내의 돈을 훔쳐서 소싸움에 돈을 거는 행위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모습은 남자들이 짊어지는 가장의 모습이기도 하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인정 받기 힘든 가장의 굴레는 욕 먹을 바엔 차라리 모험을 걸 수밖에 없는 가장의 슬픈 자화상이 담겨 있다. 설사 성공했어도 그 다음엔 그런 굴레가 사라지지도 않을 남자의 운명. 남자란 이름이 담고 있는 그늘의 그 어떤 하나임을 슬프게 형상화했다.
  영화의 사건은 단순하다. 소싸움에서 횡재한 돈을 전국에서 유명한 탈주범이 갖고 도망갔는데 그 과정에서 조필성 형사는 탈주범이자 강도인 송기태에게 두들겨 맞고 빼앗긴 것이다. 이 정도면 형사의 자질까지 의심스런 상황으로 몰린다. 형편 없는 가장에 형편없는 강력계 형사. 이게 조필성이다. 이런 그가 ‘거북이’란 비유로 무능력이 암시된다면 ‘달린다’란 동사에서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을 상징힌다. 무능하지만 포기하면 안되는 그는 그래서 우리 사회의 가족이란 억압에 허덕여서 어쩔 수 없이 발버둥치는 가장이란 굴레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경찰이 아닌 지역 사회의 양아치들로 구성된 동료들과 함께 탈주범을 쫓는다. 그런 과정에서 어리숙한 일처리와 황당한 사건의 연속, 그런 과정에서 보이는 속물들의 특성들은 여지없이 소개된다. 그 누구 하나 똑똑하게 일처리하게 없는 탈주범을 쫓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국 사회의 거침없는 비판이 날선체 드러나 있다. 경찰이지만 자기 동료가 아닌 경우 그들은 타자보다 더 한 타자가 됐고 서로간의 공명심으로 수사 방해까지에 이르른다. 이것 역시 조필성만 집안의 가장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 역시 탈주범을 자기가 단독으로나 혹은 자기 팀에서 잡아야 가장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기에 그들 역시 탐욕스러운 행동을 하긴 마찬가지다. 이 모습에서 또 다시 가장들의 비애가 여과없이 표현되어 있다.
  영화에서 가장 현명하고 똑똑하고 멋있어 보인 탈주범은 그가 왜 그런 범죄를 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붙잡혀야 할 뿐이다. 영화에서 추측이 가능한 것처럼 그는 어리숙한 경찰에게 멋지게 잡혔고 그 공로에 대한 여과는 그는 물론 그의 가족들도 함께 누렸다. 분명 해피 엔딩이었지만 극장을 나올 때 봤던 엄청난 비처럼 씁쓸했다. 현실적으로 탈주범은 멋지게 일을 완성하고 중국으로 도피했을 것이니까. 그래서 영화는 그 결말과 다르게 슬펐다.
  가장의 위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사실 없다. 굳이 하자면 경제가 활황이어야 하는 정도? 그러나 지금은 경제 위기의 시대이다. 아버지와 남편으로 불리는 가장은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달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말못할 고민과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웃음을 위해 위험에 찬 모험을 할 것이다. 그냥 평범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가장의 모습을 ‘거북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에 대해 적절하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어떤 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식의 가정이라면 구조조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부연하자면 연기자들의 연기력은 과연이란 찬사가 나올 법 하다. 올 말 그들의 수상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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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 Breath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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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의 연관성을 숙명처럼 갖게 될 것 같다. 같은 독립영화에 빈민을 다뤘던 점에서 공통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만은 예외였다. 똥파리엔 환상과 기적이 제거됐기 때문이다. 슬럼독의 주인공이었던 자말과 살림이란 두 형제들의 이야기 중 환상과 기적의 대상이던 주인공 자말이 제거된 영화가 바로 똥파리란 영화다. 가난과 빈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매몰된 인간성. 그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게 되는 비참한 인간들의 군상들을 이 영화는 뛰어난 남녀 주인공들의 열연과 함께 거친 욕설과 상황설정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이 영화는 내가 본 기억 남는 명작 중 하나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두들겨 맞고 있는 여자를 위해 거친 남자(주인공 상훈)가 가해자인 남자를 패는 것으로. 잠시 동안 그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두들겨 맞았던 여자의 뺨을 때리기 시작한다. 왜 맞냐고 하면서. 이런 첫 장면을 통해 주인공 캐릭터는 확실하게 규정된다. 즉 그는 폭력배였다.

주인공 상훈은 거친 남자다. 그의 현직은 용역깡패였고 그는 자기만큼 어려운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벌어들인 소득은 일과성 도박으로 날리기 일쑤였다. 그는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 그냥 형편없는 인간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그의 과거와 그 과거에서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는 역순행적 구조를 갖는 영화임을 암시한다.

기이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주변은 그에겐 행복과 부담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 얼마 전 출소한 아버지는 어릴 적 상훈의 어머니와 누이를 숨지게 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구타한다. 또한 4살이 많은 친구 같은 그의 직장 상사 만식은 그에게 일을 맡기고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그가 갖도록 하는 좋은 형 같지만 어쨌든 그에게 용역깡패 짓을 시키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직장상사인 그에게 형이란 호칭도 깍듯한 예우는커녕 욕만 퍼붓는다. 그리고 배다른 핏줄인 이혼녀 누이와 그나마 그가 애정을 쏟는 조카가 있다. 누이에겐 쌀쌀맞게 대해도 조카에게만 그는 정성을 다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불현듯 찾아온 여고 3학년생인 연희는 그에겐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준다.

연희에 앵글을 들이대면 그녀 역시 불행을 타고 난 여자다. 아버지는 월남전에서의 충격으로 정신적 상흔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하던 시절, 용역깡패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영화에선 상훈이가 바로 가해자이지만 그런 인간관계가 한국드라마에선 인과성을 갖지 않게 나온다. 그리고 남동생이지만 거칠고 누나에게 욕과 구타를 서슴지 않은 현실을 도망치기만 하려는 영재가 가족 구성원으로 있다. 연희 역시 힘든 생활고에 헉헉거리는 그런 학생이다.

이런 둘의 관계는 서로간의 불행을 감싸주는 관계로 발전한다. 애인 관계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힘들 때 전화로 만나자고 이야기할 인간관계를 그들은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우정도 사회의 냉혹함 앞에선 여지없이 무너진다. 상훈의 마음이 풀리면서 어려운 가족들을 위해 최소한이나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 하고 그런 와중에 그는 가족의 가치와 소중함, 그리고 가족 속에서의 행복을 어렴풋이나마 찾아가게 된다. 아버지의 자살시도 앞에서 그는 가족에 대한 비극을 느끼며 조카의 슬픔 속에 가족에 대한 미련을 결국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반대편인 연희의 가족은 파국으로만 간다. 동생 영재는 용역깡패로의 길을 가게 되며, 그를 통해 어려운 가정의 파국처럼 그는 자기보다 더 가난한 자들을 갈취하는 또 다른 상훈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기이한 사건 전개는 결국 시작부터 암시된 비극으로 종말을 맡게 된다. 모든 일을 관두고 새 출발을 시작하려는 상훈은 그의 마지막 업무에서 자기의 조수였던 영재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안타까운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의 슬픈 단면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죽음만이 이 영화의 진정한 진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즐거운 기분을 갖고 거리를 걷다, 포장마차를 두들겨 패고 있는 동생 영재를 보게 된 연희의 알 수 없는 비극의 얼굴과 영재의 모습에서 투영된 상훈의 모습은 이 영화의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즉 가난한 자들은 서로를 학대하면서 자기들을 아픔을 상대에게 전가하면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가난한 자들의 빈곤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의 비극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서로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지만 그들의 관계는 다시 뒤바뀌기도 하는 너무 처절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악순환을 또한 그들은 벗어나기 힘들기도 하다. 아버지의 폭력을 보고 자란 아이의 또 다른 폭력으로의 전환, 그러는 과정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또 다란 가해 행위. 이런 가해에 근거인 사회적 빈곤과 그 빈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는 그들의 처지는 이 사회에 정면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우릴 놔 둘 것이냐 라고.

영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을 담고 있지 않다. 경쟁이든 탐욕이든 엄청난 다수의 희생자들을 잉태하는 현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놓지 않는다면 촬영지였던 중계본동이 계속 확산될 것이며 결국 우리 모두 파멸이란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 점에서 슬럼독이 환상과 기적을 통해 피해간 사회적 문제의식을 재현하며 동시에 슬럼독의 비겁함을 비판하고 있다.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빈곤엔 기적과 희망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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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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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트우드의 고집스런 모습은 과거의 마카로니 서부극에서의 모습관 전혀 달랐다. 여자권투선수의 체육관 관장도 그런 모습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런 그가 대했던 영화 속의 세상은 50년대 한국전쟁을 겪었던 시절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는 백인우월의 Town 중심의 세상에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미국은 과거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이민자의 범주가 백인에서 흑인, 라틴계, 그리고 아시아계로 훨씬 확장됐다. 그래서 많은 마찰이 빚었다 

  그의 이웃은 중국의 마어쩌뚱 등장 이후 중국에서 도피한 아시아 몽족이었고, 이민계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라틴계가 미국을 자신의 것인 냥 휘젓고 다녔고, 힙합과 같은 흑인문화에 취한 미국인이 있었지만 정작 흑인들은 그런 백인을 맞이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폭행만을 일삼았다. 그렇다고 일종의 아시아갱단에서 보듯 아시아계가 그리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과의 최악의 관계가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Mr. 왈러스키 역시 백인이라고 자처하지만 그 역시 폴란드 이민이었으며 백인이라도 이태리계 역시 그 옆에 존재했다. 즉 백인이라 해봐야 다 이민계였으며 미국은 그렇고 그렇게 뭉치고 사는 장소였다. 일종의 반전이 될 것이지만. 어쩌면 미국에 처음 발을 들여 논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내쫓은 경력까지 고려한다면 미국구성원들 중 이민자 아닌 사람을 없는 것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영화는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이민계 사회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사는 묘약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Mr.왈러스키에서 월트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무척 험난했고, 그런 와중에 그는 다양한 충돌을 겪어야만 했다. 자식들과의 연대는 한없이 약화되었고 손자들로부턴 그는 경원시되기까지 했다. 가족에게선 아무 필요가 없는 존재로 하락한 그지만 미국의 주인이란 자부심과 과거 한국전 용사란 자긍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 와중에 변한 미국에서의 충돌은 상당수가 인종간에 발생했고 그런 상황에서 비록 백인인 그였지만 Township이란 주민의식의 발현으로 돕게 되고 그런 사건들로 인해 이민족인 몽족 가족과의 자연스런 접촉과 포용하려는 감정을 갖게 된다. 바야흐로 미국 이민의 외연의 확대가 월트 할아버지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Mr.왈러스키라는 엄격함에서 월트 할아버지란 이웃 할아버지로 발전해 가는 과정은 새로운 이웃을 받아들이고 있는 한 인간의 변화를 결과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꼭 같은 백인들이란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차별이나 외면은 테두리를 좁힘은 물론 결국 고립과 몰이해란 비극을 잉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목적은 모두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고 모두의 행복 속에서 개인의 행복도 가능함을 이 영화는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공동체 문화는 결국 월트 할아버지의 타인을 위한 살신성인의 희생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죽음을 맞이한 시한부 인생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바꿔준 이웃을 위해 큰 선물을 해준 것이다

이런 이웃들 뒷편에는 안타까운 내용도 숨어있다. 가족의 해체가 그것이다. 핏줄로만 이어졌고 인간적 유대나 배려는 거의 볼 수가 없는 상태로까지 하락해버린 가족들과의 연대는 월트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극명하게 들어난다. 한국 막장 드라마에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소재 중 하나가 핏줄이다. 그런데 서구 영화에선 그것들이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사회상의 반영인 것 같은데 지금은 가족이란 의미 없는 핏줄에서 그 누구도 행복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이젠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전에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란 영화에서도 비슷한 가족 이야기를 봤었는데 더 이상 핏줄에 기대지 못하고 있는 현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가족의 문제를 한 번 둘러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이것은 행복을 위해 가족보다 이웃이란 이야기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행복을 줄 수 있는 더 많은 가치가 있다라고 해석된다. 이런 답변에도 가족의 변화는 솔직히 씁쓸하다.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종간의 함께 살기와 가족의 변화와 같은 환경과 관계의 변화는 앞으로의 한국에게도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아니 지금 우린 고집스런 Mr. 왈러스키 혹은 월트 할아버지가 거부했지만 결국 함께 할 것을 결심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당위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의 마음을 여는 자세와 용서, 그리고 타인을 위한 분노, 그리고 슬프지만 그의 아름다운 희생 등은 한국인에게도 예사롭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인들이 준비해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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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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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엄격한 과학을 연구하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선택의 문제를 담고 있다. 물리학자와 수학자와의 긴장관계는 매우 색달랐다. 영화에선 물리학자가 추상적 체계 속에서 엄격한 원칙을 고수하는 진정한 과학자라며 수학자는 현실 세계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겪으면서 이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물리학자는 엄격한 원칙 소유자라면 수학자는 현실에 기초한 현실적응주의자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런 그들의 사고는 현실적 문제에 대해 다른 처리 방법을 보여줬다. 범죄를 처리하는데 있어 물리학자는 엄밀한 원칙을 내세워 범죄를 규명하고 범인을 잡는 것이 그들의 세상사는 원칙이라면 수학자는 이런 엄격성보단 보다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세계 속에서의 판단을 위주로 한다. 그런 감정 속엔 사랑이란 요소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에선 한 사건에 대해 그들의 행위와 관련된 원칙의 싸움이 존재한다.
  사건이 터질 경우 수학적 원칙에 따라 모든 것을 해결하는 물리학자는 멋진 모습에 잘 나가는 대학교 교수이다. 반면 과거 수학 전공을 전공했던 이는 가정적 불행함이 함께 하면서 인기 없는 고등학교 수학선생이 된다. 그는 못생겼고 표현력에 대해서도 언제나 분명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에겐 인간적인 향기가 풍겼고 바로 이 점이 대학교수와의 차이점이며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근거였다.
  엄마와 딸만 사는 단란한 가정 옆에 이웃으로 하는 수학자는 어느 날 모녀의 살인사건을 인지한다. 그는 그 모녀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기에 이 사건을 덮기 위한 계획에 착수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다. 반면 물리학자는 경찰의 의뢰를 받고 단순한 호기심과 과거 친구였던 물리학자와의 묘한 인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사건을 추적해간다. 그들이 잠깐 만났던 때, 물리학자의 말, 사건을 만든 것이 어려운지 아님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어려운지 라는 매우 선문답을 주고 받으며 그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상대하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물리학자는 수학자의 인간적 애정과 고뇌를 보게 되며, 물리학자로선 이해하기 힘든 인간적 요소를 보게 되면서 고뇌하게 된다. 수리학자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런 살인사건을 상대에 대한 애정으로 풀어간다는 점에서 물리학자와는 반대였던 것이다.
  사실이나 진리, 그리고 법칙 등과 같은 것에 위반된 수학자의 행동을 두고 물리학자는 고민에 빠진다. 모녀의 행복을 위해 심지어 다른 이까지 살인한 수학자의 행위를 두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점에서 과연 사실 파악과 원칙에 따른 처벌이 모녀와 수학자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하는 고민을 수학자는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물리학자는 사건의 양태를 모녀에게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엄마의 비통함은 이 영화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경찰에게 자백하게 되고 범죄에 대한 정확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어느 누구도 행복해 질 수 없는 상태로 가고 만 것이다.
  이 영화는 엄격한 원칙이 과연 우리들에게 어떤 행복을 줄 수 있을지를 근본적으로 묻고 있다. 비록 인간적 정서에 따른 또 다른 피해자의 발생 역시 인간적 감성이 만든 또 하나의 비극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는 철저한 머리싸움을 다룬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수리적 원리에 기반을 둔 엄격한 법치 사회가 과연 인간들의 정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아마 이 영화는 감정에 기반을 둔 판단을 한 수학자에게 좀 더 기운 듯 보인다.
  나에게 다가온 이 영화의 문제제기는 인간을 과학의 엄격한 원칙으로 다룰 경우 인간은 과연 행복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린 이런 것들을 고려하기 전에 과연 과학은 왜 존재했고 발전했는지를 자문해봐야 한다. 바로 학문을 포함해서 인류가 만든 거의 모든 것들이 보다 많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졌단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명의 사생아인 무기나 폭탄은 물론,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제도나 법, 원칙 등이 사실은 인간을 옥죄고 있는 또 다른 위협요소란 사실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제도와 법을 지키고자 만든 CCTV는 우리들의 파수꾼보단 사생활 보호를 파괴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기본 행위 역시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 현재 각종 혜택을 적립해 준다는 각종 카드 역시 우리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만든 것이기도 하다. 함께 좋은 목적을 위해 만든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들의 은밀한 정보가 새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즉 개인 각자가 통제될 수 있는 세계로 가고 있으며 그 사회의 지지원리는 바로 엄격한 과학인 것이다.
  우린 과학으로 과연 이런 사회에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우문 하나를 낳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의 반대라 할 주관적 정서가 우릴 행복하게 해줄까? 아마 그 누구도 답하긴 어려울 것이다. 인간적 정서엔 과학이 강조하는 객관성 결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자는 특정인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은 물론 노숙자 한 명을 희생시켰으니까. 그러나 과학은 어려운 사건의 발생이 있었을 때 그 누구도 웃게 만들지 못했다. 아마도 수학자의 애처로운 희생에 연모의 대상이었던 한 여인의 울음 속에서 행복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 희생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더불어 힘들어 해줄 수 있는 사람의 발견이다. 그리고 감정과 정서,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사랑만이 최악에 빠진 인간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제공해 줄 수 있단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인간미를 고려하지 않은 과학적 엄격성이 강조될 때 영화에서의 물리학자와 엄마의 슬픈 눈물이 우리 모두의 눈물이 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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