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 Haeun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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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었고 꼭 성공했으면 하는 바램도 갖는다.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만들어진 영화라 기대반 우려반인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Hollywood 영화가 대충 어떤 수준으로 들어오는지 한국 관객이라면 거의 알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규모 면에서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적인 묘미를 잃을 수도 있단 걱정도 없진 않다. 미국의 거대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다른 나라들 역시 힘들어하긴 마찬가지라, 차라리 워낭소리 수준의 규모로 승부를 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걱정이 기우가 되도록 만들어야 할 임무가 어쩌면 ‘해운대’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한국 영화의 수준과 자금력, 그리고 미래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그만큼 위험한 도박의 느낌도 들었다.
  이런 고민을 영화는 훌륭히 넘은 것 같다. 재난 영화의 스케일과 관련해서 100%라고 할 수 없지만 CG 등의 사용을 통해 재난의 발생과 해운대를 강타하는 침해 과정은 개인적으론 무리 없이 봤다. 어설픈 흔적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극적 긴장감을 높일 수 있는 높은 파도와 해운대 주변의 건물들이 강타당하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은 압도될 정도로 훌륭했다.
  이런 스케일과 효과 면과 아울러 재난 영화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인간적 탐욕과 그 관계들에 대한 개연성 역시 높았다. 특히 과거 부부였던 사람들이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쓰나미 대책에서의 갈등은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을 축약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위험의 경고를 억지로라도 무시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은 현재 신종 인플루엔자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도 비슷하게 전개될 수 있다. 무엇보다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는 공무원들과 행사진행요원들에 대해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구소장의 입장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타까운 것은 단기적 이익에 집착한 사람만 희생당하는 것이 아닌 모든 이의 파멸로까지 간다는 점에서 극적 구성의 서글픔도 있었다.
  재난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인간미와 용서, 그리고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의 서사 역시 미국은 물론 많은 외국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느끼듯 진부하지 않다. 차라리 동화적인 내용일 수도 있는 것을 얼마나 개연성 있게 형상화시키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때 이 영화는 그런 동화가 잘 구성되어서 얼굴을 찡그릴 여건이 거의 조성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쓰나미란 위험이 주는 무거운 소재를 영화 속의 코믹한 장면들로 중화시키면서 보는 시간 동안 억눌린 채로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공포영화는 여기에선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점은 연기자들이다. 명성을 지니고 있는 이들을 한 편의 영화에 볼 수 있단 즐거움이 있었다. 사실 영화의 단독 주연에 익숙할 수 있는 이들이 한 영화에 출연하면 출연시간이 줄어들 수 있어서 무척 불만일 수 있지만 그들은 자기 역할에 철저히 충실하면서 개성 있는 모습들을 축약적으로 그리고 강하게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수준을 높여 주었다. 과연 그들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영화가 성공을 거두었으면 한다. 엄청난 자금이 들어간 것이 화제인 이 영화는 Hollywood 영화인 ‘트랜스포머’란 영화가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후자엔 즐거움이 있지만 감동도, 그리고 인간의 성찰도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해운대는 분명 뭔가 있는 영화다. 설사 그것이 진부한 주제이지만.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고 그에 대한 사색과 보다 풍부한 고민의 시간을 준다면 좀 더 발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남녀노소 모두가 볼 수 있는 즐거운 성찬은 물론 인간미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 ‘해운대’는 성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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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 마인호프 - The Baader Meinhof Comp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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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살아가는 의미와 지혜를 얻었으면 한다. 격렬한 처신의 위험도 알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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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 마인호프 - The Baader Meinhof Comp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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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충격적이었다.

적군파란 이야기를 들은 지 꽤 된 것 같다. 거의 기억에서 사라질 즈음, 무척 독특한 이름에 독특한 포스터에 이끌려 보게 된 이 영화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긴 영화였다. 거의 두 시간 반에 이르는 오래 지속되는 영화지만 영화 한 장면 한 장면은 지루함보단 놀라움과 그 격렬한 장면으로 나를 이끌고 갔다.

67년 서독은 한국의 86년이나 87년처럼 시위의 시대였다. 반전을 주장하면서 가열된 시위는 민주화든 자유를 위해서든 여느 국가나 치러야 할 홍역처럼 보여졌다. 그리고 대처방안 역시 한국의 민주화와 다르지 않은 분위기에서 서독의 젊은이들은 좀 더 격렬했다. 소위 맑스주의에 대한 열정을 지닌 서독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보다 강경하고 보다 거세게 저항했다. 한국이 6·25를 거쳐서인지 극렬하지 못했던 남한과는 달리 반전과 자유를 외치는 그들의 구호는 무장투쟁에 가까웠다.

적군파는 어느 순간 인간의 우아함이 사라져갔다. 그들은 투쟁을 위해 무기를 들고 게릴라 전투를 익히기 시작했다. 요르단에서 적군파가 군사훈련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불신의 극단을 위한 준비단계였다. 비록 그 지역과의 문화적 마찰이 생겨 적군파가 훈련 도중 쫓겨나기도 했지만 퇴출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이미 도달해 타협의 여지를 갖고 잇는 단체가 되고 있지 못했다. 몰이해든 무관심이든 그들은 타인의 행동과 문화를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지 못했다. 이런 그들은 다시 서독으로 진입,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다양한 작전들을 수행한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은행을 털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응징을 시작한 그들은 당국의 추격 속에 점차 격렬해졌고 결국 살인이나 희생들을 너무 당연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들이 만들고자 자유롭고 행복한 자유인을 만들고자 했던 염원은 현실과의 격렬한 투쟁 속에 점차 방화와 총질만이 난무하는 공간으로 점점 좁혀져 간 것이다.

어느덧 그들의 모습에서 동료애는 있고 목적의식은 있지만 인간미는 어디가 원인인지 모르지만 사라지고 있었다. 투쟁가만 있었을 뿐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친 황소처럼 살인과 납치에까지 이르렀고, 대법원장을 포함한 판사들의 살해,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총격 등은 물론 비행기 납치와 같은 극한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소개는 그들의 극단적인 설정을 비극적으로 예시하고 있었다. 최악의 비행기 납치에서 보이는 그들의 불쾌한 행태는 오늘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서독 정부로 대표되는 기존 세력은 정당하게 대처했을까? 자신의 동료를 죽인 적군파 일원을 암묵적인 비호 속에 구타하는 장면이나 이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시위대에게 폭력을 가한 사실이나 그 시위대 일원을 총으로 쏘는 경찰의 모습은 그들의 허위를 지키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하는 서글픈 공권력의 폭력이 존재했다. 당시의 이란왕국은 이후 이란 국민의 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불쾌한 정부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염원한 목적이 국익이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국제적 정글 속에서의 필연적 행동이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은 구태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마지막 영화의 장면에서의 살인은 세대간이든 집단간이든 타협의 여지를 만들지 못한 사회가 어떤 상황으로 몰릴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먼저 잘못했을까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역시도 중요하다. 성숙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왜냐 하면 사회는 언제나 문젯거리가 터지기 때문이다. 불만은 항시적이고 요구는 다양하다. 그럴 때 단호한 대처는 서로간에 악순환만 되풀이될 것이다. 사회의 진지한 성찰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격렬한 총소리와 피를 통해 반증하고 있다. 이제 적군파는 없다. 그러나 이름만 다를 뿐 어떤 분노가 현실에서 언제나 터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적군파가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같이 갔던 친구는 이전에 영화의 원작인 작품을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보자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기뻐했다. 난 그 친구가 왜 이리 기뻐하는지 몰랐지만 영화 보고 그 친구의 기쁨을 이해했다. 영화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포장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우린 그런 문제제기에 교과서적인 답변보다 좀 더 어른스럽게 답변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좀 슬프다. 과연 우린 그런 현실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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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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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에겐 언제나 믿음이 있다. 내 자식은 훌륭하다고. 그런 믿음은 구체적인 사실이 있기 전에 깨지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강한지 모른다. 그 강한 신념이 엄마를 버티게 하는 힘이니까. 그런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영화는 어머니의 주관적인 시선을 갖고 아들과 관련된 살인사건을 진행시킨다.
  영화 시작에서의 어떤 여인의 기이하고 묘한 춤은 영화의 기괴한 매력을 극대화한다. 정신적 장애인인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단 사실에 대해 어머니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아들의 구명 활동을 한다. 영화가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관객 역시 같은 인식을 갖고 영화를 보게 된다. 감독의 치밀한 계산 하에 진행된 이런 극 진행은 영화에서의 객관성을 버리고 진행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관객은 철저하게 어머니의 심정으로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며 엄마의 믿음과 확신,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공유하며 영화를 보게 된다. 즉 관객 역시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구명 활동의 여정 속에서 보이는 한국사회의 고질병들과 위선, 그리고 폐허 같은 우리들이 사는 곳은 객관적인 환경을 조성한다. 이미 한국의 경찰들은 사회적 골칫거리로 치부되고 있고 변호사 역시 악당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이미지에 반박할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서민들을 지켜주는 방패 역할을 기대하기 힘든 존재들이 되었다 가난한 자들은 액세서리 정도만 취급하고 있는 영화 속 장면들을 통해 봉감독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경고음을 울려주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기대는 아들이 죄가 있고 없고가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자식의 자유가 그 목적일 것이다. 그것을 위해 무죄를 입증하려 노력했고 무한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기에 한없는 노력과 위험한 도박을 병행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분신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한다. 자식이 무죄다라는 생각이 종교가 될 무렵, 영화는 엄마의 주관적인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상황으로 들어간다. 아마 이 부분에서의 충격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관객의 숨죽인 반응을 느꼈을 때의 공포와 허망, 그리고 극 속의 엄마의 무너지는 심정을 공유하게 됐다. 즉 주관적인 인식의 붕괴를 경험한 것이다. 감독은 너무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환경을 제시하면서 관객들에게 현실적인 잔혹함을 느끼게 해 준 것이다. 뒤이어 일어나는 또 다른 살인은 관객과 다르게 엄마의 맹신이 계속 유지되고 또 그것이 엄마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문화엔 강한 신화가 있다. 즉 한국적 엄마의 신격화가 그것이다. 과연 이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지, 그리고 혹시 우리들이 한국의 어머니들을 이상화했는지는 잘 모른다. 외국인의 인식엔 무리일 수도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도 어머니란 존재는 불가해할 정도의 가족이며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그런 신화를 믿는 사람들 중 하나이며, 한국의 여자들은 그런 신화의 한 대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보이는 어머니는 그리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자식 사랑 때문에 사회적 병리현상이 벌어질 정도로 한국의 엄마는 무척 특이한 존재다. 엄마의 열정이 어디까지 갈 지 모르지만 영화에서의 상황정리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줬다. 자식을 위해 슬픈 불법을 감행하게 됐고 인간적 고뇌에 쌓인 엄마의 얼굴은 영화의 그 어떤 면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괴이한 모습의 춤추는 엄마는 이 영화의 공포와 괴이함,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어쩌면 가장 큰 부분을 담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의 위상을 묘한 여운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김혜자란 거인의 존재감이다. 영화 한 장면 한 장면을 뛰어난 상징성과 환상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연기력은 사실 평가 내리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다. 영화가 현실을 기반으로 해도 괴이한 환상과 인간적 고뇌, 그리고 파격적인 연기는 칸에서 받은 것들의 숫자가 왜 적은지 궁금할 정도다. 올해를 결산하는 시상식에서 아무래도 최고의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기엔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연기자들 개인에겐 불행이지만 한국 영화엔 큰 행운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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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 Haeun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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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가 트랜스포머보다 형편 없단 생각을 깰 수 있는 그런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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