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샤넬 - Coco before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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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생의 편린 속에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고통과 인내, 그리고,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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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업 - Bandsla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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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따’는 장소와 국경을 안 가리나 보다. 한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왕따가 있고 그래서 학생들 중 학교생활이 힘든 경우도 있나 보다. 영화 ‘드림업’은 그런 왕따들의 활약을 다룬 영화다. 그렇다고 한국의 어느 공포물처럼 왕따 때문에 고생한 학생이 복수전을 하는 것을 소재로 다루진 않는다. 영화 ‘드림업’은 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하이틴 영화이자 음악이 흐르는 영화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그런 류의 영화는 아니다. 다행히 영화를 보는 내내 고민도 없었고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즐거운 영화로만 즐겼다. 그런데 왕따를 극복하는 장면은 좀 더 생각해 볼만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어떤 특정 목적이 있다면 그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사라질 경우, 어떤 변화가 발생하게 되며 그것이 긍정적이지 못할 경우 지금까지의 노력은 모두 무의미하게 되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나마 쌓은 인간적인 매력은 한 순간에 무너진다. 그러나 더 가슴 아픈 것은 바로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한 상대가 그 감사를 취소한다는 점이다. 그간의 노력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적인 불신이 발생한 것은 애초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일 뿐이다.
  왕따와 선의라는 두 가지의 대비되는 모습이 한 영화에 존재할 경우, 상식선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서사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다만 영화는 둘 간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것이 아닌 소통부족으로 인해 세상과 단절해 버린 왕따 아닌 격리된 여자 아이가 하나 또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간의 복잡한 애증관계가 될 삼각관계는 벌어지지 않는다. 무척 만족스런 스토리다. 무엇보다 힘든 자들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고 결과는 좋지 못하지만 그래도 뭔가 해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뻔하지만 보고 싶은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우린 힘들지만 극복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란 것도 확인했다.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랑을 이루고 아니고는 너무 흔한 소재이고 왕따가 뭔가 이루는 것 역시 뻔한 소재다. 하지만 뻔한 소재들의 그럴 듯한 재생산이란 측면을 보면 그래도 음악과 깨끗한 사랑과정과 용서 과정, 그리고 어떻든 진실한 관계 회복 등이 함께 버무려지고 있는 이 영화를 보면 무척 즐겁다. 음악 발표회에서 들을 수 있었던 다양한 음악 역시 음악광고용이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척 즐거웠다. 그들 모두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내 하이틴 시절에서 갈망했지만 할 수 없었던 그 모습들과 도전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 역시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어떻든 청소년은 좋은 시기인 것 같다. 요새 청소년들이 들으면 동의하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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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고 윈치 - Largo Winc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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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개인으로부터 나온 언어가 무려 세 가지이다. 라르고 윈치란 이름이 나온 크로아티아어 (이 언어가 아무래도 유고어 같기도 하다)와 브라질에선 포르투갈어, 그리고 기본적 언어인 영어 등 언어적 능력면에서 비범해 보이는 주인공 라르고 윈치는 그의 다양한 언어구사능력만큼 기이한 운명을 타고 났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복잡한 그의 인생을 보는 이가 집중을 하도록 만든다. 홍콩 대재벌 윈치가의 입양아로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그의 의붓아버지가 죽은 후 집안의 계승자로서 엄청난 재산을 얻게 되는 과정은 확실히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됐다. 그가 원 든 원하지 않든 그는 타인의 주목을 받아야 했으며 그를 향한 복잡한 음모에 휘말렸다.
이런 복잡한 음모에서 중요한 것은 회사 내부엔 그의 아군이 없어 보인단 것이다. 바로 그런 속에서 한 인간의 분투와 능력, 그리고 개인적 능력과 액션 등이 볼 거리이다. 이런 구도는 매우 고전적이다. 어떤 영화에선 왕과 왕자의 관계에서 벌어졌을 법한 사실일 것이고 한국 드라마에선 많이 소비된 스토리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서사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액션에 집중을 해야 할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시 또 하나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돈 때문에 변하는 것들이다.
  한 개인에 권력이 집중된 사회에서 가장 큰 변화 원인은 지도자의 변화일 것이며 이로 인해 벌어질 것들에 대해 집단 내의 모든 이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살의 노력을 다하며 종종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게 된다. 그 와중에 희생되는 자들이 발생하게 되며 영화는 바로 그런 점에 앵글을 들이댄다. 주인공이 그렇고 그를 떠다 밀려는 자들 역시 그렇다. 그 와중에 중간업자가 되어 이득을 얻으려 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자신들의 일에 충실하지만 결국 하나를 위한 도전이며 그런 모습은 엉망진창인 경우가 많다.
  그런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들은 너무 인간적인 것들이다. 대가 치곤 너무 가혹한 것들이다. 그래서 남는 것은 돈이겠지만 잃어버리는 것들은 사랑과 같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다. 라르고 윈치라는 주인공은 돈보다 인간적인 것을 위해 방황했고 집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가지 못하고 그냥 방황하듯 이리저리 휩쓸렸다. 과연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나 보다. 특히 위치가 높은 사람일수록 앗아가려는 자들이 주변에 계속 엄존하기 때문이리라. 이 점에서 라르고 윈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사나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는 궁극적으로 얻지 못할 뿐만 아니자 지가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것들조차 사라질 운명이다.
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이 영화에 가득하다. 그런 모습이 진실이든 아니든 우린 그렇게 돈에 치여서 산다. 심지어 그것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그래서 영화는 마지막 엔딩처럼 슬프다. 라르고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을까? 주인공 라르고는 갈 곳이 없는 너무 불쌍한 존재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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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 Possess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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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은 지역과 시대를 넘어 언제나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자고 있다. 다만 그것이 발현되는 형태는 시간과 공간에 기인해 만들어진 매체의 독특성으로 인해 좀 더 다르고 개성 있게 변할 뿐이다. 그런 매체에 종교가 포함된다.
  신은 언제나 나를 위한 것이다.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존재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한 것이다. 이런 자기애를 이루어 줄 수 있는 신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존경 받을 존재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해석은 나를 위한 것이고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기적 역시 자기만을 위해 제공되는 서비스여야만 한다. 무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복종교가 여기에 예외는 아니다. 이런 인식은 오늘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류 보편적인 사실이다.
  [불신지옥]은 그래서 무서운 영화다. 신들린 여자 중학생 한 명을 두고 무당이 나서고 기독교에 함몰된 어머니가 나섰다. 다들 자신의 기준에 맞는 신을 원했을 뿐, 신들려서 행복이 빼앗긴 어린 여자 아이에겐 관심도 없었다. 어린 소녀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할지언정 다른 것에 관심도 없었다. 도리어 신통력이 사라진 그녀를 닥달하거나 당장의 효과를 위해 위험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신에게 원한 것은 신에 대한 경배가 아닌 신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기 만족이었던 것이다. 나만의, 아니 나만을 위해야 하는 신의 존재, 그것이 바로 [불신지옥]의 진정한 공포다.
  영화는 어두운 곳을 배경으로 했다. 추운 겨울, 인간적 관계가 파괴된 어느 도시의 아파트,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듯한 아파트 실내, 그리고 콜록콜록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언니, 희진(남상미), 뒷목의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신들린 여중생 동생 소진(심은경), 그리고 기독교에 맹신만 하는 엄마(김보연), 이들이 사는 공간은 우울과 불안의 공간, 그곳이다. 이웃이라고 불리는 인간관계는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 싱글들로만 구성된, 따뜻한 인정이 사라진, 탐욕과 열망만 있는 전형적인 도시인의 그들. 우울한 겨울은 단순히 계절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들 주변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신들 주변에서 줄 수 없는 불행한 기적이다. 위로 받기엔 더 없이 외롭고 가련한 그들이기에, 열심히 살지만 그 어떤 행복도 마련할 수 없기에, 그들은 탐욕스런 갈망만을 잉태하고 말았을 것이다. 여기에 상대의 가치는 무의미해진다. 나 자신의 가치가 상대의 가치보다 우월하고 우월해야 한다고 느낄 때, 그것은 상대에 대한 폭력도 합리화시킨다. 그것이 영화에선 난 힘들고 외롭다는 기본적 피해의식으로 인해 더욱 파괴적으로 양산된다.
신들린 소녀는 죽는다. 아니 자신들을 위해 존재해야 할 신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는 부활한다. 분노한 채.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선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허약함과 본능은 그것들 모두를 부정한다. 그래서 영화에서의 분노한 신의 보복에 따른 비극은 솔직히 비극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동생을 찾기 위해 찾아온 언니는 주변의 참상을 보면서 더욱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그 주변을 둘러다 보는 또 다른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주변인물들의 탐욕에 눈 먼 자들을 보고 또한 공포스러워한다.
  영화는 정말 무섭다. 저주 받은 신들린 귀신이 무서워서가 아닌 그런 것들에 얽힌 탐욕과 피해, 그리고 파국이 무섭다. 이런 공포의 본질은 바로 우리 자신이 극 중의 이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솔직한 마음의 독백을 들어서이다. 인류의 보편적인 본능과 갈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다시 한 번 영화에서 독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범주에 나 역시 포함될 수밖에 없음을 솔직히 자인하도록 만든 이 영화는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고 슬프다. 영화의 밖으로 조금 벗어나면 우린 그것들을 너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차라리 신들린 여자의 심판이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너무 슬픈 영화다.
  영화는 매우 뛰어난 영화다. 남상미의 재발견은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원래 그녀는 뛰어난 배우다. 형사 태환의 류승룡, 엄마 김보연과 괴이한 공포를 자극시킨 심은경 등 역시 원래 뛰어난 배우다. 주변 이웃들 역시 뛰어난 연기파들이다. 우린 그들의 푸닥거리를 즐겁게 볼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불신지옥]이란 영화가 뛰어난 공포영화란 점이다. 무서운 모습의 피 흘리는 귀신보다 인간의 탐욕을 더욱 공포스런 소재로 발굴한, 작가이자 감독인, 이용주 감독의 발견이야말로 이 영화에서의 가장 큰 수확이다. 또한 [불신지옥]이란 영화가 아마도 한국 공포영화의 하나의 교과서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아마도 공포 영화를 만들 다음 감독들은 [불신지옥]을 넘어야 할 숙제에 직면하게 될 것만 같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음 감독들에겐 정말 공포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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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워즈 - Summer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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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썸머 워즈]엔 두 개의 세상이 공존한다. 미래의 가상공간의 모습을 담은, 아바타로 이루어진 유비쿼터스란 세계가 소개된다. 또 다른 자신이 존재하는 가상공간에서 이 영화는 다른 운영규칙들이 존재하면서도 현실과 똑 같은 가치를 지닌 채 운영되고 있다. 특히 우리들의 소비는 물론 다양한 서비스들이 제공된다는 점에서 조만간 다가올 가상공간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다. 그곳에서의 인간관계는 현실 속의 누군가를 모른 체 자신이 만든 가상공간의 나를 통해 가상공간의 타인과 접촉하고 서로 생활하며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공간과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비현실적 공간으로 느껴지는 곳이 바로 이 영화에서 표현한 현실공간이다. 그곳을 이 영화는 환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 현실 속에선 역설적으로 도시인들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도시엔 없는 것들 천국이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대가족, 의지가 되는 어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가족애. 이런 것들은 이미 도시 속에 살고 있는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없는 것들이다. 아마 도시라는 공간이 유달리 크게 성장한 국가나 사회에선 없어 보이는 그런 것들이 이 영화엔 넘친다. 이미 환타지로 치장된 배경을 갖고 있는 이 영화는 도시인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제작됐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현실이 더욱 현실적이지 못한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주인공 캐릭터는 좀 더 현실적이다. 아마 일본적 현실이 투영된 것이지만 한국 사회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에반겔리온]이란 영화에서 제시된 자신감 하나 없는 남자 아이, 이에 반해 활동적이고 열렬한 여자, 아마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모습처럼 느껴진다. 자기 주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난관을 헤쳐나가기엔 자신감 하나 없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투영된다. 언제나 억눌린 체 책임과 무능력이란 자괴감에 억눌린 남자, 그들을 볼 수 있다. 이것과 대비적으로 여자 주인공은 활동적이고 강하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자못 강하다. 이 둘의 관계는 그러나 재미있게도 고전적이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를 책임지는 것에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할머니로부터 다짐을 받는 상황까지 보인다. 그래도 과거의 그런 관계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 느껴진 것일까? 아님 이런 모습 역시 환타지의 또 다른 표현일 것처럼 보인다. 어느 여자들 역시 책임지는 남자를 원하는 것은 분명 존재하니까. 그러나 이 영화 뒤편엔 현실이 엄혹하게 존재한다. 
  20대의 모습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별 다를 것도 없다. 드센 여성이 나오는 저편엔 약하고 책임지길 싫어하는 남자가 있다. ‘초식남’의 어원이 일본인데 그것이 한국에 적용해도 문제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일본에서 인기를 끈 한류 드라마에서 나오는 남자 캐릭터가 남성적이란 것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 남자 역시 이젠 일본남자처럼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여성들이 창출한 말도 안 되는 로맨틱한 남자들 역시 이젠 없어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를 석권했던 멋진 남자 캐릭터가 이젠 사라지고 있다. 그런 전형적인 모습을 담은 일본 애니매이션은 사실 우리들의 미래일 것이다. 아니 지금 ‘88만원 세대’는 이미 일본의 그것일지 모른다. 
  영화는 멋지게 문제를 해결한다. 기이하게도 남자는 남성성을 찾고 있고 여성은 중성적인 것보다 여성성을 회복하고 있다. 나만의 독선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난 그렇게 봤다. 그러나 그런 해결책이든 각자의 성의 대한 역할을 자각하든 그것 역시 환타지적인 해결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린 중성이란 새로운 성으로 가고 있으며 그것이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일지 모른다.
  도시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살기에도 벅찬 정글임이 분명하다. ‘초식남’이든 ‘건어물녀’든 그 어휘에는 책임지느니 혼자 살겠다는 개인적이면서도 도시 속에서 살아남는 현명한 처방이 들어있다. 어쩌면 가족은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보단 불행을 만들어준 제도였는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나 있는 대가족이란 공동체는 이미 사라지고 있으며 설사 존재해도 과거만큼의 따뜻한 감정은 사라지고 있다. 가족이라고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시기가 현재는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모든 이가 갖고 싶어하는 귀여운 인형을 갖고 있다. 비록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그 곳에서 행복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다. 역설적이 시각에서 본 영화는 어쩌면 나에게 슬픈 자화상처럼 보였다. 차라리 인류 모두가 멸망하는 [에반겔리온]이 더 현실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의 경쟁과 냉혹성, 그리고 소외감과 외로움이 제거된 현실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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