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 A Milli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인간의 본능들이 꿈틀거렸다. 돈 때문에, 그리고 복수 때문에, 그리고 살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어느 이름 모를 장소에서 그들은 괴이하고 위험한 인터넷 방송을 찍고 말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반전이었다. 10억을 경품으로 하는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 그것이 시작될 때 관객 모두일 뿐만 아니라 영화 속의 참가자들 역시 일종의 낭만을 가진 ‘무한도전’이나 ‘1박 2일’과 같은 방송용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재미와 흥미 위주의 그런 방송 정도로만 여겨질 수 있는 우리들의 통념을 영화는 여지없이 깨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꿈꾸고 있는 자연 속의 낭만적인 공간이라 여겨 질만한 멋진 장소, 어느 이름 모를 외딴 섬과 같은 공간. 누구에게는 도심을 벗어난 낭만의 장소일 수도 있었지만 영화에서 설정한 공간은 결코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은 그들에겐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죄의 심판의 장소였고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장소였다. 이런 응징과 탐욕이 뒤엉킨 곳에서 여덟 명의 참가자들과 두 명의 촬영진들, 이렇게 그들은 미국의 서바이벌 경기를 하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그들 앞엔 실패와 성공이 곧 죽음과 대박이란 양극단만이 존재하는 경기인 것이 차이였다. 그래서였는지 참가자들은 생존과 승리를 위해 동료애와 불신이 상존하는 공간에 처박히게 된다. 생존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하는 기묘한 관계? 그러나 동료애 역시 어떤 점에선 유리처럼 약한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행동했다. 불신과 공포, 그러면서도 얻고자 한 10억은 인간의 가련한 탐욕과 불운을 실험한다. 결국 희생된 자들과 남는 자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남는 자라고 마음이 편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탐욕을 억제하진 않았다. 바로 이게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래, 그런 게 인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인간유형은 현대 도시문명이 만들었는지 모른다. 인간관계는 해체된 지 오래고 믿음이나 신뢰야 잘 모르던 사람들이 모인 관계로 쉽게 얻어질 리는 없다. 그나마 그 속에서 사랑이 싹텄어도 결국 쉽게 무너지는 유리성이었을 뿐이다. 이게 머나먼 호주 서해안에서만 있을 법한 사실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한복판에서도 쉽게 일어날 일들이다. 개연성으로는 무척 높은 수준이다.
  인간은 본능을 억제하며 발전했다. 그리고 본성을 이성이 억제해야 한다고 믿어왔고 그래서 교육을 받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쉽게 절제되지 않는 이 본성은 그러나 아직도 도시 속의 인간관계라는 유리성을 여지없이 파괴시킬 수 있는 힘을 언제나 갖고 있다. 어쩌면 이성이나 성숙한 관계 역시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자신을 위한 최선의 방책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성이 도구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성의 가르침을 받기 보다 그것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인간적 감성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영화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극적 효과를 강하게 어필하는 부분이 부족했고 구성에서도 유감인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영화라 느껴졌다. 무엇보다 주제의 강렬함이 느껴진 영화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도, 그리고 그렇게 볼 필요는 없었다. 영화 속엔   인간적 고뇌와 상처, 그리고 그것들을 치유하기엔 문제가 많은 도시가 그 뒤에서 보인다. 그리고 이제 다 알고 있는 인간과 도시의 문제점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연약함이 보인다. 그것들에 우린 얽혔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보인 인간에 대한 냉소적 어조가 마지막에 슬픈 어조로 바뀔 때 극의 반전보다 인간미의 회복이 있었으면 했는데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인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plicahandbag 2010-07-2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xd
 
국가대표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국사회는 버리는데 익숙하다. 경제위기 이후 88만원 세대들로 대표되는 20대가 버림받았고, 수많은 노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버림받고 폐휴지를 찾아 다니고 있다. 그렇다고 30대, 40대, 50대는 버림받지 않았을까? 세대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 자체가 버림받은 자들의 상징이 되고 있다. [국가대표]란 영화에서도 버림받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과거 버림받아 미국으로 입양된 오누이가 있고, 물의를 일으켜 받았던 메달을 박탈당하고 사회의 마이너러티로 떨어진 자들도 있고 아버지로부터 무시 받아 버림받은 자도 있었다. 그리고 올림픽 유치 상황에 따라 버려질 그들 역시 존재한다. 마치 우리처럼.
  비인기 종목 선수도 사실 버림받기 일쑤인 한국사람들일 뿐이다. 즉, 마이너러티다. 또한 대한민국 스키 점프 선수단은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스키 점프 대표팀들은 일개 실업팀 규모도 되지 않은 규모의 이들이 한국 유일의 팀이니까. 당연히 자신들끼리 하는 무슨 대회도 없고. 그냥 그들은 그렇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는 절박함은 너무 심각해 보인다. 영화에서의 모습들은 특히 그래 보였다. 또 다른 [우생순]이겠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의 감동과 상업성을 갖추고 있다.
  [국가대표]란 영화는 현재 한국 영화가 갖고 있는 속성들을 거의 갖고 있다. 같은 동료들간의 갈등 구조와 조화를 통한 순화, 그리고 미소 짓게 만드는 캐릭터, 웃음 코드, 그리고 눈물 등,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이 영화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다만 사랑 이야기는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상업영화의 그 모든 것을 갖췄다. 그렇다고 영화가 수준 이하가 아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런 상업성에도 인간적인 매력을 다양하게 갖춘 영화다. 영화는 마이너러티들의 걱정의 화염 속에서 거칠게 도전하는 그들을 보여준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잘 나가는 미국 알파인 스키 주장 자리를 때려 치고 한국에 온 미국 국적의 주장, 선수 시절의 실수로 인생 전체를 도려내야 하는 선수들, 그런 그들 중 생계를 위해 군대 갈 수 없는 자의 절박한 도전, 그리고 그냥 그런 학원의 원장이었다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작한 감독, 이들에겐 공통점은 단 하나, 몰리고 몰려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절박한 위기 속에서 도전한다. 설사 성공해도 그들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아니 조만간 버림받겠지만, 그들은 그래도 도전했다. 도전하기 벅찬 금메달이라도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처지에서 싸워야 했다. 이런 그들의 연습은 비극적이기도 했고 희극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장면이 나오든 그들에겐 성공이 엄청난 것을 보장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과가 좋다고 팬들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 잘난 경기장을 세워 줄 것 같지도 않다. 카페나 몇 개 생길까? 절박하게 한 결과치곤 너무 소소하다. 그래도 지금 그들은 아직 국가대표 선수다. 그리고 그들의 긴장과 열정들이 비록 극화를 위해 인위성이 가미됐다 하겠지만 내용 그 자체가 무척 인상 깊은 소재라 어느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분 좋음과 감동, 그리고 위기 소침해 있는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도전 의식 등을 훌륭히 느낄 수 있다. 우리도 어쩌면 마이너러티이기에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국영화가 진화하고 있다. [해운대]에서 스케일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CG가 여기서도 사용됐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CG 역시 상당히 멋진 장면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스키 점프의 역동성을 기막히게 형상화한 영상과 사운드는 오감을 훌륭히 자극하고 있다. CG 효과와 함께 시각의 역동성이 거친 청각과 더해지면서 스키로 타고 내려올 때의 강렬함, 그리고 점프했을 때 선수 뒤에서 본 앵글로 관중과 착지 장면을 찍을 때의 영상은 전에 본 적이 없는 화려한 영상의 백미다. 단순한 이미지만 보여줄 것 같았던 스포츠 영화가 강렬하게 역동적이고 거의 원시적인 힘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격조 높게 영상에 담았다는 점에서 한국 스포츠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개인적인 평가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좋은 영화엔 필수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좋은 연기자들이 열연한 영화였다. 각자의 캐릭터에 한치의 오차 없이 무난한 연기력을 보여준 연기자들 덕분에 어설플 수도 있었던 개연성이 잘 마무리됐다고 느껴졌다. 나가노 올림픽에서 무시 받으며 입국한 그들 중 Bob (한국 명 차헌태)의 눈물 어린 고뇌에 찬 연기는 이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였다. 좋은 배우가 좋은 연기하는 것이 그렇게 회자될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했다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는 장면에서 그의 연기는 마지막 엔딩을 감동적으로 마무리되도록 했다.
  [해운대]에서의 소망이 여기에서도 이루어졌으면 한다.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어조와 시선이 스포츠 영화의 특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인간의 휴머니즘과 신뢰를 근간으로 한 마이너러트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 바램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리라.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의 믿음과 시선이 옳았으면 하는 바램 역시 거기에 추가됐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 - Black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문화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난 시작부터 영화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연극적인 구성으로 영화를 구성해서인지 연기자들의 과장된 연기는 이질감이 느껴졌고, 인도적인 느낌보단 차라리 서구적인 세계로 이루어졌던 배경과 연기자들의 행동은 상습적인 인도적 성향을 생각했던 나에겐 또한 낯설었다. 그리고 배경음악 역시 과다한 감정을 전달하고 또한 거칠기에 영화로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아마 독특한 구조와 성격을 갖고 있기에 그런가 보다 생각은 했지만 영화는 내가 본 이상한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영화의 내부적 심리엔 바꿔야 한다는 열정이 숨쉬는 영화였다. 연극적 구성을 갖고 있는 영화의 구성 속에서 상징으로 가득한 오브제, 그리고 과장됐지만 뛰어난 연기력이 어우러진 예술성이 높은 영화란 생각이 든다. 또한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사회적 의미와 인간적 의미 두 가지를 통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란 점도 고려대상이 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난 이 영화가 인도 영화인지 몰랐다. 나에겐 거의 미지의 책을 읽는 상황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처음부터 시작된 역순행적 구성으로의 이야기는 조금은 당황스럽고 묘한 기운을 느끼기조차 했다. 아마 낯설기 방식이 나에겐 보다 좋은 집중력을 이끌었다.

인도라는 사회의 암담함과 그것을 지양하고 새로운 문명사회로 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는 듯이 보였다. 영화는 시초부터 단순한 서사이지만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눈과 입이 문제인 여자아이는 사회성의 부족으로 미래의 자립의 위기를 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좀 거친 선생이 찾아온다. 그의 철학은 오늘날의 언어학에서도 다루는 이야기이다. 언어를 알아야 소통을 하게 되면 그를 통해 사회성은 물론 자립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아마도 언어문화와 관련된 그의 생각은 어쩌면 계몽주의에 대한 의지로도 비쳐질 수 있다. 그의 수업 방식은 철저히 사회화를 추구하게 된다. 그의 방식은 분명 사회의 폭력성을 느낄 만큼 폭력적이었다. 어쩌면 강제적이라도 뭔가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감독이나 인도인 전체에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어를 알아야 소통한다는 의미는 거꾸로 언어를 모른다면 야만의 사회를 헤맬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인식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점이 감독이 지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야만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기에 계몽을 통해 개발의 시대로 가야 한다는 무언의 강조점이 그것일 것이다.

감독의 그런 의도가 지향하는 사회는 서구이지 동양은 아니었다. 영화의 오브제들은 거의 모두가 서구를 상징하고 있었다. 인도인의 의상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집과 거실의 오브제들은 거의 서구를 상징했다. 인도의 종교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집안에서 믿는 종교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모습에서도 오브제를 통한 인도인의 묘한 모습을 던져준다. 대학 총장과의 첫 대면이 재즈 음악이 흐르는 파티장이었다는 것은 서구적 인도 만들기의 대표적인 구성이었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에 따른 공간의 상징성은 대학에서도 느낄 수 있고 집에서도 느낄 수 있고 재즈 음악이 흐르는 파티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생 결혼식에서 볼 수 있는 모습 역시 인도적인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인도에 대한 무지가 크지만 그래도 인도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의 엔딩 장면에서 가장 분명했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스승이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촛불을 키며 주인공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밤에 향한 곳은 성당이었다. 힌두교도 불교도 아닌 성당으로 가는 많은 인도인의 모습에서 감독은 계몽적 근대화로의 강한 진출을 주장한다. 아마도 춘원 이광수의 ‘무정’을 영화로 보는 것만 같았다.

이런 사회적 맥락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 측면에서도 영화에서 흐르고 있는 보편적인 내용은 우릴 감동시킨다. 바로 인간의 신뢰와 도전, 그리고 역경을 뛰어넘는 성공이다. 이에 더하며 타인을 위한 노력 역시 이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다. 시작부터 헬런 켈러 재단과의 연계를 드러낸 진술에서 잠깐이나마 연상되긴 했지만 좋은 스토리와 인간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내용은 아무리 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인간이 패배하지 않는 모습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입과 그에 따른 신화를 계속 재생산함으로써 보다 우아하고 의욕적인 삶을 살려는 우리들의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영화의 아름다움은 무척 즐겁기도 하다. 무엇보다 12년 만에 대학을 졸업해서 지적인 인도인이 된 제자와 알츠하이머 병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게 된 스승을 위해 그를 가르치려는 제자의 마음가짐은 주고 받는 교환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도전이자 인간적 내면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다의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즐거움이다. 다양한 상상과 다양한 의미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창작자가 창조한 작품에 대해 독자들의 자의적 해석이 있기에 그 예술작품의 가치는 계속 유지된다. 이런 방식이 진부하고 과다한 의미 만들기, 더 나아가서 창작가의 의도완 다른 방향으로 갈지라도 그런 것에 구속되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효용론적 관점에서도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런 작품들이야말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아마도 ‘B.L.A.C.K’은 많은 다의성으로 인해 좋은 인상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우 - Chaw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최근 인간에 대한 문제제기가 참 많다. 그래서인지 현재 방영되는 영화나 드라마에선 과거의 동화 같은 사랑도 또 맹목적인 사랑을 갖고 있는 연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엔 그런 동화로라도 사람들의 심금을 살려 줬는데 이젠 그나마도 없어졌다. 인간에 대해 부정적이고 냉소적이 되다 보니 이젠 인간의 최소한의 착함도 예술에선 어린이 동화일 뿐이고 그런 것이 이젠 배척되고 있다. 더욱 현실적이고, 아니 차라리 동화 같은 악당들이 인물 캐릭터로 판을 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일까? 이런 영화에 [차우]는 좀 더 세다. [차우]란 단어의 뜻은 모르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매우 센 냉소적 시선이다.
  영화에 나오는 것들 중 도대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자연재해이든 인공적인 문제든 그걸 덮으려는 인간도 그렇고 괴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부에서 파견한 경찰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동네 파출소(경찰소?)의 순경들도 엉망이긴 마찬가지다. 생물학 연구를 한다는 여류 연구자도 자신의 이익이 먼저고, 사냥꾼들 역시 우리들이 동화처럼 꿈꾸는 영웅은 아니다. 다들 그렇고 그런 인물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멧돼지 사냥에 나선다. 고담 시티에 정의로운 마음으로 가득 찬 배트맨이 없는 상황이다.
  재미있는 캐릭터들은 또 있다. 영화에서 멧돼지에게 희생되는 인간들 중 건전해 보이기보단 시체의 반지에 눈이 휘둥그런 희생자가 눈에 띄고 농촌이 주최하는 주말농장에서의 출연진 역시도 그다지 착해 보이지 않는다. 위험에 빠질 것이 뻔한데도 주말농장을 개최, 투자비 회수는 물론 탐욕에 절은 동네 이장과 관련 산업의 투자자는 물론 지역 경찰서장이나 경찰관들 역시 책임감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냥 월급만 받았지 믿음직한 모습도 볼 수도 없다. 주인공인 김순경이라고 이런 범주에서 이방인이지도 않는다. 치매인 엄마가 사라져 그만 멧돼지 생포 작전에 합류했을 뿐이다.
  그리고 더 재미난, 아니 영화 제작자들이 보는 시선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부분은 도시에서 주말농장 하러 온 어느 부부의 모습이다. 과일을 담는 아름다운 모습관 달리 그 둘의 대화는 불신과 불만의 전형이다. 과일을 많이 담그는 모습을 본 아내의 표독스런 맞대응은 동화 같은 대화를 상상한 관객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과다하게 모은 과일을 소위 ‘그년’에게 줄 것이냐고 쏘아붙이는 아내의 모습에서 더 이상 끈끈한 관계의 상징인 부부 관계 역시 감독의 냉소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엉망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땐 차라리 비정상적인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치매인 어머니의 모습이 차라리 행복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주인공 김순경의 고민은 딴 사람 이야기 같지 않다. 현실의 번민이 그의 꿈의 세계에서도 공포스럽고 무서운 모습으로 투영되는 장면에서 환경의 고통이 내면의 세계까지 지배하는 현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혹한 세상으로 인해 무너지는 내면의 심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린 그렇게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믿음을 주고 받을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린 그렇게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감독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파헤치고 형상화시키고 있었다.
  멧돼지는 당연히 잡혔다. 마치 이전 영화였던 [죠스]처럼. 그러고 보면 죠스의 극적 구성과 비슷한 것도 같다. 근 30년이나 지난 영화가 다른 버전으로 나와도 감동을 주긴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우린 나쁜 것에 대한 변화가 왜 이리 더딘 건지 참 답답할 뿐이다. 아니 우린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젠 부부도 못 믿는, 아니 가족도 믿지 못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차우]눈 동화적이다. 못 믿을 인간들이 힘을 합쳐서 좋은 결과가 낳을 수 있는지 솔직히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리들의 추악한 모습을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리고 말 안 듣는 인간들에 대해 경고한다. 우리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우 - Chaw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아주 즐겁게 봤다. 괴수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켜 준 영화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