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더 마인호프 - The Baader Meinhof Complex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무척 충격적이었다.

적군파란 이야기를 들은 지 꽤 된 것 같다. 거의 기억에서 사라질 즈음, 무척 독특한 이름에 독특한 포스터에 이끌려 보게 된 이 영화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긴 영화였다. 거의 두 시간 반에 이르는 오래 지속되는 영화지만 영화 한 장면 한 장면은 지루함보단 놀라움과 그 격렬한 장면으로 나를 이끌고 갔다.

67년 서독은 한국의 86년이나 87년처럼 시위의 시대였다. 반전을 주장하면서 가열된 시위는 민주화든 자유를 위해서든 여느 국가나 치러야 할 홍역처럼 보여졌다. 그리고 대처방안 역시 한국의 민주화와 다르지 않은 분위기에서 서독의 젊은이들은 좀 더 격렬했다. 소위 맑스주의에 대한 열정을 지닌 서독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보다 강경하고 보다 거세게 저항했다. 한국이 6·25를 거쳐서인지 극렬하지 못했던 남한과는 달리 반전과 자유를 외치는 그들의 구호는 무장투쟁에 가까웠다.

적군파는 어느 순간 인간의 우아함이 사라져갔다. 그들은 투쟁을 위해 무기를 들고 게릴라 전투를 익히기 시작했다. 요르단에서 적군파가 군사훈련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불신의 극단을 위한 준비단계였다. 비록 그 지역과의 문화적 마찰이 생겨 적군파가 훈련 도중 쫓겨나기도 했지만 퇴출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이미 도달해 타협의 여지를 갖고 잇는 단체가 되고 있지 못했다. 몰이해든 무관심이든 그들은 타인의 행동과 문화를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지 못했다. 이런 그들은 다시 서독으로 진입,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다양한 작전들을 수행한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은행을 털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응징을 시작한 그들은 당국의 추격 속에 점차 격렬해졌고 결국 살인이나 희생들을 너무 당연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들이 만들고자 자유롭고 행복한 자유인을 만들고자 했던 염원은 현실과의 격렬한 투쟁 속에 점차 방화와 총질만이 난무하는 공간으로 점점 좁혀져 간 것이다.

어느덧 그들의 모습에서 동료애는 있고 목적의식은 있지만 인간미는 어디가 원인인지 모르지만 사라지고 있었다. 투쟁가만 있었을 뿐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친 황소처럼 살인과 납치에까지 이르렀고, 대법원장을 포함한 판사들의 살해,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총격 등은 물론 비행기 납치와 같은 극한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소개는 그들의 극단적인 설정을 비극적으로 예시하고 있었다. 최악의 비행기 납치에서 보이는 그들의 불쾌한 행태는 오늘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서독 정부로 대표되는 기존 세력은 정당하게 대처했을까? 자신의 동료를 죽인 적군파 일원을 암묵적인 비호 속에 구타하는 장면이나 이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시위대에게 폭력을 가한 사실이나 그 시위대 일원을 총으로 쏘는 경찰의 모습은 그들의 허위를 지키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하는 서글픈 공권력의 폭력이 존재했다. 당시의 이란왕국은 이후 이란 국민의 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불쾌한 정부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염원한 목적이 국익이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국제적 정글 속에서의 필연적 행동이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은 구태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마지막 영화의 장면에서의 살인은 세대간이든 집단간이든 타협의 여지를 만들지 못한 사회가 어떤 상황으로 몰릴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먼저 잘못했을까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역시도 중요하다. 성숙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왜냐 하면 사회는 언제나 문젯거리가 터지기 때문이다. 불만은 항시적이고 요구는 다양하다. 그럴 때 단호한 대처는 서로간에 악순환만 되풀이될 것이다. 사회의 진지한 성찰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격렬한 총소리와 피를 통해 반증하고 있다. 이제 적군파는 없다. 그러나 이름만 다를 뿐 어떤 분노가 현실에서 언제나 터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적군파가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같이 갔던 친구는 이전에 영화의 원작인 작품을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보자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기뻐했다. 난 그 친구가 왜 이리 기뻐하는지 몰랐지만 영화 보고 그 친구의 기쁨을 이해했다. 영화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포장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우린 그런 문제제기에 교과서적인 답변보다 좀 더 어른스럽게 답변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좀 슬프다. 과연 우린 그런 현실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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